여행이야기(향교,서원)

[스크랩] 한국의 서원 발생과 발전(요약본)

장안봉(微山) 2013. 4. 11. 23:05

서원(書院)

 

1) 서원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서원이 처음 건립된 것은 1543(중종 38)이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말 학자 안향(安珣)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것이 효시이다. 그는 영남감사(嶺南監司)의 물질적 지원과 지방유지의 도움으로 서적과 학전(學田)을 구입하고, 노비 빚 원속(院屬)올 확충하는 등 재정적 기반을마련하였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祠廟)가 위주였다.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다.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이황(李滉)에 의해서이다. 이황은 풍기군수에 임명됨을 기회로, 서원을 공인화하고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그 뒤 고향인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보급에 주력하였다. 초창기인 명종 연간에 건립된 서원수가 18개소인 사실을 감안하면, 서원 보급에 미친 그의 영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외면적인 확대와 아울러 내용 면에서의 충실에도 유의하였다. 유생의 장수처로서의 강당과 존현처(尊贄處)로서의 사묘를 구비한 서원 쳬제를 정식화하고, 원규(院規)를 지어 서원에서의 학습활동과 운영방안을 규정하였다.

 

2) 서원의 전개

조선조 서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의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의 남설기, 그리고 영조 17년 이후의 서원철폐 및 쇠퇴기 등의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초창기

초창기에 건립된 서원운 19개소이다. 초창기임에도불구하고 사액된 곳이 4개 처나 되는 것은 서원이 이 시기에 이미 관설에 준하는 교학기구로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황 및 그 문인들에 의한 서원 보급운동이 거둔 하나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척신세력으로서도 관학의 쇠퇴를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그 대체기구로서 서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도 있었다. 그리고, 제향인물인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최충(崔沖)최유길(崔惟吉) 등이 사림 이전의 고려시대 인물이었던 관계로 척신세력의 반발을 받지 않았던 것도 서원의 설립이 활발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시기는 서원의 내용 면에 있어서도 발전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서원의 건전한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규정으로서, 이황의 이산서원원규(伊山寶院院規)를 기본으로 서원별로 원규가 작성되었으며, 이에 의한 강학 활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지원이래 향촌유지를 중심으로 하여 재정기반 구축과 원속(院屬) 노비 등의 확보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서원전(書院田)어물(魚物)소금 등 현물 조달체제의 영속화를 도모하려 했다. 명종말선조초 사림의 활발한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재정을 밑바탕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2) 발전기

서원은 선조대에 들어와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선조 당대에 세워진 것만 60여 개 소를 넘었으며,22개소에 사액이 내려졌다. 그 뒤 현종 때까지는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여 전국적으로 193개소가 설립되었다.

서원의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사림의 향촌활동이 보다 자유로워졌으며, 적극적인 서원 보급운등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요인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전개에 있었다. 시림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붕당은 정쟁(政爭)의 방식이 학문에 바탕을 둔 명분론과 의리(義理)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당파형성에 학연(學緣)이 작용하는 바는 절대적이었다. 그러한 학연의 매개체인 서원이 조직과 세력의 확장에 중추적인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각 당파에서는 당세 확장의 방법으로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지역 사림과 유대를 맺고, 이를 자파(自派)의 우익으로 확보하려 하였다. 반면, 향촌의 사림으로서는 서원을 통하여 중앙관료와의 유대를 맺음으로써 의사전달과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처럼 서원 건립을 놓고 양자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서원의 발전은 양적인 증가에서뿐만 아니라, 기능의 확대라는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서원은 단순한 사림의 교학기구에만 그치지 않고, 강학 활동을 매개로 하여 향촌사림간의 지면을 익히고 교제를 넓히는 취회소(聚會所)로서의 구실과, 특히 향촌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운영기구로서의 기능을 더하였다. 실례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향촌방어를 목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고, 또 그것을 일으키기 위한 사림의 발의와 조직의 편성에 서원이 그 거점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심지어 향풍(鄕風)올 문란하게 한 자에 대하여 훼가출향(毁家黜鄕)이라는 향촌사림의 사적인 제재조처까지 단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3) 남설기

서원은 숙종대에 들어와 166개 소(사액서원 105개 소)가 건립되는 급격한 증설현상을 보였다. 남설이 문제되던 이 시기는 서원 명칭으로의 건립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금령을 피하여 대신 사우를 건립하는 사례가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경우 서원사우의 구별은 실제적으로 무의미하였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우의 격증은 서원 남설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서원 남설은 외면적인 숫자의 격증만이 아닌, 내용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전국에 44개 소(사우 포함)나 되었다. 당시 10개 소 이상에 제0향된 인물이 10여 명에 이르는 데서 보이듯, 동일한 인물에 대한 중첩된 서원건립이 성행하였다. 제향인물에 있어서도 뛰어난 유학자이어야 한다는 본래의 원칙을 벗어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인물이나, 높은 관직을 지낸 관리, 선치수령(善治守令), 행의(行誼)있는 유생, 심지어는 단지 자손이 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써 추향되는 시려가 있을 만큼 남향(襤享)과 외향(猥享)이 자행되었다.

서원은 이제 학연(學緣)의 확대를 기한다는 면에서보다는 정쟁(政爭)에 희생된 자파 인물에 대한 신원(伸寃)의 뜻을 보다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또 외면적인 당파의 양적 확대에만 급급하여 경쟁적으로 향촌사림을 포섭하려 하자 자연히 서원조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서원의 남설과 사액의 남발을 부재질하였던 것이다.

서원의 남설이 당쟁 문제로만 초래된 것은 아니다. 후손에 의한 조상 제향처(祭享處)내지 족적(族籍) 기반 중심지로서의 서원 건립이 자행되었던 것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이는 17세기 후반 이후 현저해진 현상의 하나로, 사족(士族) 사이에 동족(同族) 내지 가문의식이 강화된 결과이다.

강력한 서원금지령이 내려진 1703(숙종 29)이후 서원대신 사우가 격증하였으며, 사우의 명칭을 쓴 서원의 남설은 필연적으로 질적인 저하를 수반하고 사회적인 폐단을 야기하였다. 그것은 제향 자격에 의심이 가는 인물이 봉사 대상으로 선정되는 사실과 함께, 점차 제향 일변도의 경사가 마침내 사우와의 혼동을 초래하였다. 이에 반하여 강학 활동은 위축되었다.당시 사림의 기강이나 능력으로 보더라도 서원이 학문기구로 활용되기 어려웠다. 서원은 날로 증가하지만, 사문은 더욱 침체하고 의리 또한 어두워질 뿐이라는 서원무용론까지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서원은 건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지방관에게서 각출하는 구청(求請)의 폐단을 초래하였고, 양정(良丁)을 불법적으로 모점(冒占)하여 피영시킴으로써 양정의 부족현상을 야기하였는가 하면, 교화를 구실로 한 대민착취기구로 전락되는 등 여러 면에서 사회적 폐단을 일으켰다. 이것이 뒷날 서원 철폐의 명분이 되었다.

 

4) 훼철기

서원의 폐단은 1644(인조 22) 영남감사 임담(林潭)외 서원 남향(濫享)에 대한 상소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그 뒤 효종현종 연간에 간헐적으로 서원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가 조정에서 논의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서원 건립이 허가제로 결정되고, 첩설 금령이 발포되었다. 때로는 집권파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당파의 인물을 제향한 서원이 사우로 강호(降號)되거나 훼철되었다. 서원에 대한 통제가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1703(숙종 29)에 이르러서이다. 전라감사 민진원(閔鎭遠)은 조정에 알리지 않고 서원을 세우는 경우 지방관을 논죄하고 수창유생(首倡儒生)을 정거(停擧)시킬 것을 상소하였으며, 숙종은 이에 적극 찬동함으로써 서원 금령이 강제성을 지니게 되었다. 서원 금령은 그 뒤에도 수시로 신칙(新則)되었다. 1713년 팔에는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요청으로 이후부터는 첩설을 엄금하고, 사액을 금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1717년에는 8도의 관찰사에게 1703(숙종 29) 금령 후 창건된 서원에 대한 조사를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1719(숙종 45)부터 왕이 직접 서원의 존폐를 결정하였고, 경상도의 경우에는 훼철을 단행하기까지 하였다. 숙종 말년부터 단행된 서원 통제책은 계속된 정권교체로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서원 폐단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서원 통제론이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1741(영조 17) 서원 철폐는 여기서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가 서원철폐를 단행하게 된 계기는 탕평책 실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서원에 대해서도 노소론, 남인 사이의 분쟁을 유발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건립에 따른 시비를 근원적으로 봉쇄하고자 탕평파의 협조를 얻어, 1714(숙종 40) 이후 건립된 서원은 물론, 사우영당(影堂) 등도 일체 훼철하였다. 이 당시 지방관의 책임하에 19개소의 서원을 포함하여, 모두 173개 소의 사원(祠院)이 훼철되었다. 그 뒤 서원 첩설 및 남설의 경향은 둔화되어 거의 정지 상태였다. 실로 서원 훼철과 같은 강경 조처로 지방관의 서원에 대한 물질적 보조가 거의 단절되었다. 그 결과 서원의 재정은 약화되고, 재정담당을 기화로 한 후손의 관여를 더욱 조장하였다. 19세기 이후는 전국의 서원이 대부분 후손에 의하여 운영되고 또 건립되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서원건립이 중단된 것과 반비례하여 서원의 부패로 인한 민폐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화양동 서원의 작폐는 19세기 이후의 서원이 사회에 끼친 폐단믈 극적으로 말해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의 권위를 높이며 강력한 중앙집권 하에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하고자 서원의 일대 정리에 착수하였다. 대원군은 1864(고종 1)에 이미 민폐 문제를 구실로 사원에 대한 조사와 존폐여부의 처리를 묘당에 맡겼으며, 1868년과 l870년에 미사액서원과 사액서원으로서 제향자의 후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다. 이어 1871년에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1(一人一院) 이외외 모든 첩설 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였다. 이때 존치된 47개소는 서원명칭을 가진 것이 27개 소, ()20개 소이다.

 

서원명

주향인

건립

사액

소재

坡山書院

崧陽書院

牛渚書院

深谷書院

龍淵書院

鷺江書院

德峰書院

四忠書院

忠烈祠

賢節祠

江漢祠

紀功祠

遯巖書院

彰烈祠

表忠祠

魯岡書院

忠烈祠

武城書院

筆巖書院

襃忠祠

西岳書院

紹修書院

三忠祠

金烏書院

성혼

정몽주

조헌

조광조

이덕형

박태보

오두인

김창집

김상용

김상헌

송시열

권율

김장생

윤집

이봉상

윤황

임경업

최치원

김인후

고경명

설총

안향

제갈량

길재

1568

1573

1648

1650

1691

1695

1695

1725

1642

1688

1785

1841

1643

1717

1731

1675

1697

1615

1590

1601

1561

1543

1603

1570

1650

1575

1675

1650

1692

1697

1700

1726

1658

1693

1785

1841

1660

1721

1736

1682

1727

1696

1662

1603

1623

1550

1668

1575

파주

개성

김포

용인

포천

의정부

양성

과천

강화

광주

여주

고양

연산

홍산

청주

노성

충주

태인

장성

광주

경주

순흥

영유

선산

<도표>

서원명

주향인

건립

사액

소재

武烈祠

道東書院

忠愍祠

灆溪書院

玉山書院

陶山書院

興巖書院

玉洞書院

忠烈祠

屛山書院

彰烈祠

忠烈祠

襃忠祠

彰節書院

忠烈書院

襃忠祠

淸聖祠

太師祠

文會書院

鳳陽書院

老德書院

表節祠

酬忠祠

석성

김굉필

남이흥

정여창

이언적

이황

송준길

황희

송상현

유성룡

김천일

이순신

이술원

박팽년

홍명구

김응하

백이

신숭겸

이이

박세채

이항복

정기

휴정

1593

1605

1681

1552

1573

1574

1702

1714

1605

1613

선조

1614

1738

1685

1650

1650

1691

고려

 

1695

1627

순조

1593

1607

1682

1556

1574

1575

1705

1789

1624

1863

1607

1723

1738

1699

1652

1652

1701

1796

 

1696

1687

 

1784

평양

현풍

안주

함양

경주

예안

상주

상주

동래

안동

진주

고성

거창

영월

김화

철원

해주

평산

배천

장연

북청

정주

영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시 존치된 47개 서원사우

 

3) 서원의 구성과 배치

서원의 건축은 고려 때부터 성행한 음양오행과 풍수도참사상에 따라 수세(水勢)산세(山勢)야세(野勢)를 보아 합당한 위치를 택하여 지었다.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중히 여긴다. 이는 심성의 도야를 위하여 자연의 원리를 객관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탐구하여 체득하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講堂), 원생(院生)진사(進士) 등이 숙식하는 재실(齋室) 등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교육시설은 앞쪽에, 제향시설은 뒤쪽에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재실은 일반적으로 동재 (東齋)와 서재 (西齋)를 대칭으로 두었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 제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준비를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담소하는 누각(樓閣) 등이 있다.

건물의 배치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여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배치하며,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사당 등을 이 축선에 맞추어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음, 그 앞에 삼문(三門)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 부근에 제사를 위한 제기고가 놓이고, 강당의 앞쪽 좌우에 동서재를 두었으며, 강당 근처에는 서고와 장판각 등을 배치하였다. 고사는 강학(講學) 구역 밖에 한 옆으로 배치한 것이 일반적이다.

서원의 건물은 검소한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익공(翼工)이나 도리집 등의 간소한 양식으로 화려하지 않게 꾸민 것이 보통이다. 단청 또한 사당에만 긋기얼모로 등을 사용하였다. 또한 지형에 따라 사당과 강당 부속건물 등의 지반(地盤)에 차이를 두어 주된 것과 부속된 것의 공간구성을 적절히 계획(界劃)하였다. 담장으로 외부 공간과의구획을 지어 분별하게 하였지만, 담장의 높이는 높지 않게 하거나 그 일부를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깨지 않고 적응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내부에서 밖을 바라볼 때 자연의 산수를 접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서원 건축의 특징이다. 경내의 조경 또한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낙엽수를 심어 계절에 따른 풍치를 감상하도록 하였다. 경외에는 송()() 등의 나무를 심어 푸른 산의 정기와 선비의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나무들은 대체로 산수유느티나무은행작약살구모과진달래개나리난초모란매화단풍 등율 심었다.

서원의 건축 양식은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며, 건물의 규모도 크지 않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서원의 기능이 달라졌고, 이에 따라 서원의 구성에도 변화가 따랐다. 곧 처음에는 교육시설이 중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는 제향 시설이 중시되어 이를 중심으로 건물이 조영되고 있다. 19세기에 와서는 대체로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가 주로 눈에 뛴다.

 

4) 서원의 재정과 운영

서원의 교육활동을 위한 중요한 재원의 하나는 서원전(書院田)이었다. 속대전(統大典 에 의하면 사액서원에는 각각 3결을 지급하였다. 그밖에 서원은 유지들이 기증하는 원입전(願入錢), 면역을 위하여 납상하는 면역전(免役田), 자체에서 사들이는 매득전(賚得田), 관찰사 또는 지방관에 의한 공전(公典)의 급속 등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하여 광대한 농장을 소유,

학전(學田)으로 이용하였다. 현물 경제로는 관찰사 또는 지방관에 의하여 어물식염 등이 막대하게 지급되어 교육활동을 위한 필요잡비를 충당하였다.

그리고, 서원의 교육은 자체적으로 제정한 원규(院規)를 바탕으로 원장(院長)강장(講長)훈장(訓長) 등의 원임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원규에는 서원의 입학 자격과 원임(院任)의 선출 절차, 교육목표 및 벌칙조항이 수록되어 있다. 원장은 산장(山長), 혹은 동주(洞主)로 지칭되며, 서원의 정신적인 지주이면서 유림의 사표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서원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었으나, 원장은 퇴관한 관료이거나 당대의 명유석학(名儒碩學)이 맡는 것이 관례이었다. 강장은 경학과 예절에 대한 강문을 담당하고, 훈장은 학문 근면과 훈도를 책임졌다. 그밖에 서원 관리를 위하여 재장(齋長)집강(執綱)도유사(者侑司)부유사(副有司)직월(直月)직일(直日)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의 직책을 두었다. 이러한 재임(齋任)의 선출은 추천 제도에 의하여 선출하였으며, 때로는 관부(官府)의 인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임기는 2,3년이 통례이나, 원장은 일기(一期)의 향사, 혹은 종신직이었다.

서원의 입학 자격은 시대별지역별, 혹은 서원별로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입원자격은 별로 까다롭지 않았고, 생원진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일반적이다. 백운동서원이산서원(伊山書院)서악서원(西岳書院)의 원규에는 대체로 생원진사를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초시 입격자를 입학시켰으며, 초시 미입격자라도 향학심과 조행이 있는 자로서 입재를 원하면 유사가 유림들에게 승인을 받아 허락하도록 하였다. 무릉서원(武陂書院)의 경우에는 장유와 귀천을 막론하고 지학자(志學者)는 모두 입학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소수서원과 서악서원 같은 곳에서는 고을 수령의 자제는 서원에 체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관귄개입을 금하였다.

원생의 정원은 처음에는 별다른 규제가 없었으나, 서원 남설이 문제화된 1710(숙종 36)에 원생수를 확정하였다. 원생은 사액서원에 20, 문묘종사유현서원(文廟宗徒儒賢書院)30, 미사액서원에 15인으로 정액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규칙도 신분제가 문란하고 서원이 남설 되자 동시에 와해되었다. 1683에는 이미 서원에서도 향교를 모방하여 서재생(西齋生)을 모집하고 예납(禮納)이라 하여 미포(米布)를 징수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서원의 증가와 더불어 모집원생은 늘고, 드디어는 서원이 양정(良丁)의 도피처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중에는 상민들도 다수 액외원생(額外院生)으로 처신하였다.

 

5) 서원의 기능

<교육시설로서의 서원>

서원의 설립 목적은 선현봉사와 학문연마에 있다. 서원에서 선현을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도 선현의 큰 뜻을 배우고 따르고자 힘에 있었다고 할 때, 결국 서원 설립의 기본 의도는 배웅의 장을 마련함에 있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은 지금의 서원은 예전에 없었다. 각 고을의 향교가 교육이 잘못되어 괴거에만 집착하고, 명예와 이익만을 다투게 되자 뜻 있는 선비들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정사(精舍)를 세워 배움을 익히고, 후진을 교육한데서 서원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는 서원의 본래 설립 동기가 교학적(敎學的) 의미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서원이 교육의 장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6세기의 사화(士禍) 이후이다. 향촌에서 나름대로 공부하던 선비들이 중앙 정계에 진술하여 정치참여를 시도했으나,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과 충돌했고, 되풀이되는 사화 속에서 심한 타격을 입었다. 많은 선비들이 잡혀 죽거나 변방으로 귀양갔다. 이에 선비들은 정치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뜻이 맞는 동료들과는 빈번히 교류하며 후진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성혼(成渾)이이(李珥) 등은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들은 향촌의 유생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배움을 청하게 되었다. 이에 명망이 높은 학자가 머문 곳은 자연스럽게 교육의 장으로 주목되었다. 서원은 점차 선비들 스스로 학문을 익히기 위한 곳에서 향촌의 유생들을 가르치는 체계적인 교육시설로 자리잡혔다. 아울러 운영방법도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서원의 교육내용온 도학적인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관학에서의 교육이 과거와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것과 비교할 때, 서원 교육은 사학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이 존중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이황이 이산원규(伊山院規)에서 제시한 교재의 범위와 학습의 순서가 정형이 되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본원을 삼고, 소학(小學)』 『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는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청계서원(淸奚書院)외 원규에는 독서의 순서를, 소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춘추의 차례로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서원의 일반적인 교육과정이라고 하겠다. 위의 사서오경 외에도, 여러 가지 경사자집(經史子集) 속에서 서원의 성격에 따라 선별하여 교육하였다. 그리고 도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과거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사장학(詞章學)도 교육과정 속에 포함시키는 서원도 있었다.

원생에 대한 교육은 원규에 의한 규제와 원생 자신의 자율적인 실천과학습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규에서는 수학규칙(受學規則)거재규칙(居齋規則)교수실천요강독서법 등 유자로서 지켜야 할 준칙이 실려있다. 예컨대, 독서는 다독(多讀)과 기송(記誦)만을 일삼지 말고, 정독과 사색에 힘쓸 것과 지()와 행()이 반드시 일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원생 각자에게 선악양적(善惡兩籍)과 같은 일종의 생활기록부를 만들어, 경우에 따라서 출재(黜齋)를 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원생 스스로 입지(立志)검신(檢身)존심(存心)을 위한 존양궁리(存養窮理)를 증요시하였다.

서원의 전통적인 교수방법으로는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강()이 있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망강(望講)월강(月講)등으로 나뉜다. 또한 방법에 따라 암송낭독(暗誦朗讀)인 배강(背講)과 임문낭독(臨文朗讀)인 면강(面講)으로 분류된다. 낭독 뒤에 행하는 질의 응답은 단순한 암송위주의 학습법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강을 받는 데는 강의(講義)라고 하는 일정한 절차를 두어, 학습에 대한 진지성과 예의를 갖추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도기제도(到記制度)틀 도입하여 원생의 출석여부를 확인하고, 학령의 준칙에 따라 고과평정(考課評定)과 독서지침을 제시하였다. 강의평가는 대통(大通)()약통(略通)조통(粗通)()5단계, 또는 통()()불의 4단계 평가 척도로 하였다. 이 때 대통(大通)은 구두(句讀)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어서 책의 취지를 두루 알 수 있는 가장 높은 학습수준을 갖춘 자에게 부여하였다. 가장 낮은 단계인 불()은 낙제를 의미하였다.

서원 시설 중에서 교육활동을 보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장서제도(藏書制度)이다. 책의 보급과 열람이 어려웠던 시대에 있어서 장서의 기능은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서원에서 서책을 간행하려고 할 때는 당회(堂會)를 거쳐 의정(議定)하고, 곧 간역소(刊役所)를 열었다. 간역소에 딸린 전답에서 여러 해 적립한 간비(刊費)와 향촌내 각 문중의 출연으로 경비를 충당하였다. 그밖에 사액서원에 대해서는 국왕이 서적을 하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국기에서 서적을 간행, 반포할 경우라든가 국가의 장서에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별도로 서적의 하사가 있었다. 이와 함께 관찰사지방관의 조처에 의하여 서적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제향(祭享) 시설로서의 기능>

서원의 건립 초기부터 문중이나 향촌 사림의 결속을 위하여 서원에서의 선현봉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것은 선현의 덕망과 학문을 계승한다는 교육적 목표 하에서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결코 선현봉사가 교육의 기능과 분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서원의 교육 기능보다 선현봉사의 기능이 더 강조되었다. 특히 17세기 이후의 서원은 제향 위주외 성향이 현저해졌다. 이에 따라 사우와 그 기능이 동일시되었다. 서원이 공적으로는 교육의 장소로서, 또는 선현봉사의 신성한 공간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한편, 개별적으로는 서원에 배향된 특정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후손이나 문중에서 다투어 사원(祠院)을 건립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특정 문중에 의해서 사원이 건립되고,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제향되면서, 학덕으로 명망이 있는 인물보다는 충절로 이름 높은 인물들이 배향의 대상이 되었다. 학문 연마나 교육보다는 선현봉사에 치중하여 서원을 운영하였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 사원(祠院)은 단순한 사당[사우]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서원에서의 제향은 크게 향례(享禮)와 묘사(墓祀)로 나뉜다. 향례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일에 지낸다. 묘사는 음력 310일과 102일에 행한다. 지금도 때가 되면 전국에서 유림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서원에 모여 향사를 지낸다.

서원의 배향인물은 주로 학덕이 뛰어나거나, 국가에 공적이 크던지, 아니면 충절과 의리로써 모범이 될 만한 경우에 한정되었다. 초기에는 붕당을 초월하여 거국적으로 명망 있는 인물을 모시는 서원이 주로 건립되었다. 소수서원수양서원임고서원 등 비교적 초창기의 서원에서 각기 안향최충정몽주김굉필 등을 배향하고 있음이 그 증빙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붕당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자연 붕당의 대표적인 인물이 배향되었다. 서인 계열에서는 이이성혼김상헌김장생송시열윤선거윤증권상하 등을 배향하였다. 반면, 남인계열에서는 이황조식정구정경세유성룡김성일 등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인물도 서원에 배향된 경우가 많았다. 조헌김천일고경명곽재우송상헌윤집오달제홍익한 등이 그들이었다. 세조의 집정에 반대하다 순절한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도 배향 인물로 주목된다. 과천의 민절서원, 충주외 노은서원, 연산의 충고서원, 대구의 낙빈서원에서는 사육신을 배향하고 있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빈도수를 살펴보면 이황송시열이이주자조광조이언적 등이 여러 서원에서 배향되고 있다. 특히 이황송시열이이주자는 20여 서원에서 배향되고 있다. 향촌 교화와 후진교육을 위해서 명망 있는 유학자가 서원에 배향된다 하여도 실제 서원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은 문중, 또는 종손이었다. 후손이 서원에 배향된 선현을 향사한다는 것은 조선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문중에서는 서원 건립에 적극적이었고, 서원의 격을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서원에는 문중의 선조가 주로 배향되었다. 파산서원은 창영성씨 문중에서, 고산서원은 행주기씨 문중에서, 구암서원은 달성성씨 문중에서 주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상들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이 배향되고 있다. 두 세 가문이 힘을 합하여 서원을 건립하고, 덕망 있는 선조를 배향하는 곳도 있다.

한편, 배향인물이 그 지역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도 있다. 중국의 성현인 주자정자 등을 모신 서원이 곳곳에 있다. 이들 서원은 향촌에서 나름대로 세력을 펴고 있던 토반들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향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세운 것이다.

 

출처 : 한국서원이야기
글쓴이 : 박성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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