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2013.3월 답산 간산지.

장안봉(微山) 2013. 4. 11. 08:24

2013.3.17일 답산.간산일정 및 주요 내용

 

1.문극겸선생 묘.-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산 32-1

(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은 공유의 아들로 문무를 겸전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근검 충직한 현상으로 유명하다. 1170년(의종24)정중부의 난 때에는 많은 문신들이 피살되었으나 그는 앞서 직언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를 면했고, 의종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벼슬은 권판상서이부사에 이르렀으며,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두 아들 문후식(文候軾)은 동북면 병마사를, 문유필(文惟弼)은 판예부사를 지냈다.

도로변에서 약 300m-고간원지.혈은 바로 제절아래라는데?(참)간좌곤향에 정파

 

2.오룡쟁주형 파평윤씨-공주시 유구읍 동해동내(지창룡선생 소점이라는데?)

3.윤석금회장 생가터-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작은 골 1길 59.(정혈이라는데?(참)

4.윤석금회장 부모묘-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180(정혈이라는데?(참).생가 아래쪽 맥 끝지점?

5.윤석금회장 조부모묘--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산 41-29.(혈심에 근접했다는데(수)

6.윤석금회장 증조부모묘- -공주시 유구읍 백교리 산 95-1(정혈이라는데(참.수)

가계도-윤상박-윤두병(배-창령성씨)-윤낙중-윤석금(직게 장자로 내려 옴)

윤석금사주-1945.12.20일인시로추정(을유.무자.계해.갑인.또는 을묘시로추정.4대운)

웅진씽크빅이 모태이며 웅진홀딩스를 지주회사로 하여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명칭은 공주시의 옛 이름인 웅진에서 따왔으나 본사는 충청남도 공주시가 아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173(충무로 3가 60-1)극동빌딩에 있다.

 

연혁

1980년 3월 도서출판 헤임인터내셔널 설립(웅진씽크빅의 전신)

1984년 6월 헤임인터내셔널을 웅진출판로 사명 변경.1988년 코리아나화장품 설립

1990.1월 웅진코웨이개발 설립.5월 웅진코웨이 설립.1996년 1월 북센(출판) 설립

2000년 2월 웅진코웨이 태국 렌탈사업 진출.2003년 10월 웅진에스티(산업용 PDA제조,판매) 설립 .2006년 11월 웅진에너지 설립.12월 웅진패스원(교육) 설립

2007.5월 웅진홀딩스 설립.8월 극동건설 인수.2008년 1월 웅진케미칼(새한) 인수

2012년6월 극동건설, 웅진홀딩스 매각 신청.2012년 11월 웅진코웨이 매각 완료(사명 변경)

2013년 2월 웅진홀딩스,극동건설 회생계획 인가.

 

7.마곡사-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567(천하대혈의 군왕지지가 있다는데..?)

 

8.배석곤 선생 묘-공주시 사곡면 신영3리 동천포 마을 배과수원안에 있음(강물이 그림처럼 환포하고 나감)연화부수형의 대명사로서 풍수학계에선 전설적인 자리로 생지일때 00억을 준다해도 부모님 모신다하여 안팔고 부친이 돌아 가시자 유명하다는 지관을 불러 장사했는데 장사후 일년만에 장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한다.(지세로는 축좌미향이 좋은데 건좌 손향으로 용사했단다.건해입수로 우선으로 작국되었다고 함.현재 자식이 묘와 배농장 과수원과 휴게소를 관리하고 있다.

이 묘는 약 13년전에 신장으로 용사했다 함.-명혈인데 장자가 죽었다?

 

9.오정원.오시수선생묘-공주시 우성면 단지리 산 37-1

가계도-오세현-오백령-오단-오정원-오시수

오시수 신도비, 묘비 -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18호

오시수(1632∼1681)는 본관이 동복, 자는 덕이, 호가 수촌이다. 1656년(효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4년(현종 5) 사복사정, 평안도 암행어사를 역임했고 1674년에는 도승지가 되었다. 숙종대에 우의정을 지냈으나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에 연루되어 남인들과 함께 귀양갔다가 앞서 청나라 조제사가 왔을 때 허위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서인의 탄핵을 받아 사사되었다. 그후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복관되었으나 1694(숙종 20) 갑술옥사에 연루되어 다시 관직이 추탈되었으며 1784년(정조 8)에 신원, 복관되었다. 저서로는《수촌집》이 있다.

신도비는 나란히 2기가 있는데 우측의 비는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높이 243㎝, 폭 124㎝, 두께 54㎝, 자경은 2.5 ㎝정도이다. 좌측의 비는 1810년(순조 10)에 세워진 것으로 비신 높이 149㎝, 폭 55㎝, 두께 39.5㎝이다. 이 비들은 모두 비대와 옥개형의 배개를 갖춘 동일 양식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10.이목 이세장선생 묘-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503(142)

이목(李穆)과 그의 아들 이세장(李世璋)에 관련된 유적은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 남아 있다. 현재 내산리에는 이세장의 모친인 예안김씨의 묘소, 이세장의 묘소와 괴석, 그리고 1963년에 공주유림의 건의로 건립한 <한재유적비>(성구용 찬)가 있다. 이세장의 묘소에는 1564년 건립된 묘표와 1666년에 건립된 묘갈이 있는데, 묘갈문은 백헌 이경석(삼전도 대청황제공덕비 비문을 작성한 비운의 영의정)이 짓고 글씨는 이양환이 썼다.

한편 이곳에는 이세장과 관련된 유물로 마을 입구에 괴석이 있다. 방형의 화강석 위에 93㎝의 높이로 우측에는 이 괴석의 유래를 알려주는 비문이 있다. <괴석명병소서>라 적힌 이 비석에 의하면 이 돌은 이세장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할 당시 정원에 놓고 아끼던 것이었다고 한다. 공은 매우 청렴하여 임금이 그에게 '청백(淸白)'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뇌물을 받지 않기로 소문나 있었다. 어느날 부채 하나가 선물로 들어오자 이것도 옳지 못한 것이라 하여 강에 버렸을 정도였다. 강원도 사람들이 공의 선정에 보답하고자 많은 선물을 바쳤으나 공이 모두 거절하자 주민들은 1554년 평소에 공이 아끼던 이 괴석을 기념으로 공의 집에 옮겨주었다고 한다. 비문은 효종때 김상헌(삼학사와 심양에 끓려가 대청황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청태종이 감복하여 조선에 이런 충신이 있음을 탄식하고 윤집, 오달제는 죽였으나 김상헌은 칭찬과 함께 살려 돌려보냈다.)이 썼다.

 

이목(李穆)과 그의 아들 이세장(李世璋)에 관련된 유적은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에 남아 있다. 현재 내산리에는 이세장의 모친인 예안김씨의 묘소, 이세장의 묘소와 괴석, 그리고 1963년에 공주유림의 건의로 건립한 <한재유적비>(성구용 찬)가 있다. 이세장의 묘소에는 1564년 건립된 묘표와 1666년에 건립된 묘갈이 있는데, 묘갈문은 백헌 이경석(삼전도 대청황제공덕비 비문을 작성한 비운의 영의정)이 짓고 글씨는 이양환이 썼다.

이목(李穆, 1471∼1498)은 반포 충현서원에도 제향된 인물로 조선 전기 호서의 사림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옹(仲雍), 호는 한재(寒齋),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9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1495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사사했으며, 성종 말 연산군 초기에는 훈구파의 공격에 과격성을 보이다 공주로 유배되었고 그 유배시절의 이목과 아들 이세장에 과련된 유적이 공주 내장리에 있는 충남기념물 제21호이고, 그들의 묘 寒齋祠는 김포읍 하성리 애기봉 입구 왼쪽 구능에 있다.

 

11.여주이씨 시조묘--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12.문국현 조상 묘--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안양사 뒷산내.

시간이 되는대로 위에 언급한 지역을 답산 간산하고 의문점이나 궁금증을 해소하는 자리가 되고 머리속에 속속 숙지되고 즐거운 답산 간산이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족보의 의의

족보(族譜)는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始祖) 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우리 나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수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이에 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번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후의 서양화와 지금의 핵가족 제도가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이 없는 사람' 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 이다.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족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야 할 것이다.

 

족보의 역사

우리 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 해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성씨 관계의 가장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는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개인의 족보를 갖게 된것은 한(漢) 나라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만들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그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 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보계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 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중화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경신대 대출척사건-1680년(숙종 6)에 남인세력이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

숙종 초기에는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1659년에 벌어진 첫번째 예송에서는 서인이 승리하여 남인이 실각하였으나, 1674년의 2번째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숙종 초년에는 이들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은 서인에 속하는 모후인 명성왕후의 족질 김석주에게 군권(軍權)을 맡겨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군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의해 앞으로의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군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세력간에 각축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김석주 등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윤휴는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설치를 주장하여 도체찰사부가 설치되고, 남인 허적이 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팔도의 모든 군사력이 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총융사와 수어사도 경기도의 군사력으로 간주되어 도체찰사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도체찰사가 된 허적은 훈련도감과 어영청마저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하나로 합치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김석주 등이 강력히 반발하여 도체찰사부는 일시 혁파되었으나, 1678년 영의정 허적의 건의로 복설되었다. 군권을 비롯한 권력이 남인, 그 가운데서도 탁남(濁南)에 편중되자 숙종은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인들을 유배에서 방면해주었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에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이 조부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에 궁중의 천막을 가져다 쓴 사건이 발생하였다. 숙종은 이날 비가 내리자 허적에게 궁정의 기름먹인 천막을 가져다 쓰라고 명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는 전격 조치를 취하였다. 훈련대장을 남인계인 유혁연에서 총융사 김만기로 바꾸고 김만기의 후임에는 신여철을, 수어사에는 김익훈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인들이었다. 한달 뒤에 재등장한 서인들로 구성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남인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종실 복창군·복선군·복평군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는 계를 올렸다. 거기다가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이들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있었다. 이 역모사건으로 허견이 능지처사(凌遲處死)되고 복선군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역모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판명된 허적·오정창·윤휴·이원정·민희·유혁연 등 남인의 실권자들은 관직에서 쫓겨나 유배를 당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인이 중앙 정계에서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재등장하였다.

출처 : 천기호흡수련원/cafe.daum.net/kang119
글쓴이 : 주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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