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남 간산,답산(2013.4.13-14)

장안봉(微山) 2013. 4. 11. 08:22

2013.4.13-14 경남 답산,간산.

1.벌명당-신인도(거창신씨) 묘-경남 함양군 안의면 초동리 287(재실에서 약 150m뒤쪽)

함양군 안의면은 조선시대때는  함양과 똑같이 현감(縣監)이 다스리던 안음현(安陰縣)이었으나 1767년(영조 43)에 인근 산음현(山陰縣)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자 영조는 그쪽 고을이 음기(陰氣)가 강해서 그렇다며 산음을 산청(山淸)으로 개명하면서, 안음현도 안의(安義)란 고을명이 사용되었다. 
벌명당이란 여인의 허리처럼 윗 몸통에서 내려와 실처럼 가늘어 진 허리를 지나서, 다시 불룩해진 아랫 몸통에다 혈을 맺는다. 본래 벌의 허리는 끊어질 듯 잘록하지만 막상 잡아당기면 몸체가 찢어질지언정 허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끊어질 듯 잘록하게 속기(束氣)된 허리부분을 통하여 부플 듯이 축기(蓄氣)된 윗 쪽의 생기가 아랫 몸통으로 공급된다. 
풍수에서는 산본정(山本靜) 묘재동처(妙在動處), 수본동(水本動) 기재정처(奇在靜處)라 하여 혈을 찾는 방법으로 산(용)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정지한 음(陰)에 해당하므로, 역(逆)을 취하여 변화가 활발한 곳을 살피라는 뜻이고, 수(水)는 양(陽)으로, 움직이는 동(動)에 해당하기 때문에 반대로 조용히 머무는 곳을 찾으라는 뜻이다.

 

2.조식선생 묘-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47--1.선생이 직접 본인 유택을 정했다함.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하였는데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德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되었다. 덕천서원은 강우유맥 남명학파의 본산이 되었으며 인조반정 등으로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고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오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에는 조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3.하륜 선생 묘-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469.

동구릉을  정하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을 소점하고 계룡산하 신도안이 아니고

한양이 수도로 적격이라고 주장한 하륜의 묘는 왕릉처럼 장대한데 과연 적중했을까?

하륜(河崙)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으로 자는 대림(待臨)이요. 호는 호정(浩亭)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본관은 진주이며 부사 하윤린(河允麟)의 아들로서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다.
고려말 초은(憔隱) 이인복(李仁復)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자로 공민왕 9년 국자감시에 합격했고 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당시 시험관이던 이인복이 하륜의 사람됨이 큰 것을 보고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시켰다.
공민왕 17년 감찰규정에 시보(試補) 됐으며, 이듬해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신돈(辛旽)에 의해 파직됐다가 공민왕 20년 신돈이 사형 당하자 복직돼 영주수(榮州守)가 됐으며, 이때에 김주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해 보고했다. 최영의 요동 공격 정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지금의 양양군)에 귀양을 갔다. 
첨서중추원사로 있을 때 당시 명나라 태조가 표사(表辭)의 불근(不謹) 문제로 그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하륜은 정도전을 대신해 명나라에 들어가 명태조의 오해를 풀었다 한다.

4.남군보(의령남씨 시조)-경남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400.

 始祖 및 本貫의 由來  

  시조(始祖) 남 민(南 敏)의 본명(本名)은 김 충(金 忠)이며 그는 원래 당(唐)나라 사람이었는데 당현종(唐玄宗)때 안염사(按廉使)가 되어 일본(日本)에 가서 돌아 오던 중 태풍(颱風)을 만나 지금의 경북 영덕군(慶北盈德郡)에 표착(漂着)하여 신라(新羅)에 귀화(歸化)하여 신라왕(新羅王)은 그에게 남쪽에서 왔다는 뜻에서 남씨성(南氏性)을 하사(下賜)하였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셨으며 그의 7대손(代孫) 남진용(南鎭勇) 대장군(大將軍)이 세아들을 두었는데 첫째아들 남홍보(南洪甫)는 영양남씨(英陽南氏)가 되고 둘째 남군보(南君甫)는 의령남씨(宜寧南氏)라 하게 되었고 막내아들 남광보(南匡甫)는 고성남씨(固城南氏)가 되어 그 후손들이 그들을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모셨는데 그중에도 의령남씨(宜寧南氏)가 가장 번창해서 명벌(名閥)의 좌열(左列)에 올랐으며 특히 이씨조선조(李氏朝鮮朝)에서는 개국(開國)에서부터 중앙정계(中央政界)의 중추(中樞)를 이루었으며 깊숙이 간여한것도 의령남씨(宜寧南氏)였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를 배출한 의령 계통은 군보의 증손 을번(乙蕃), 을진(乙珍), 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고려조에서 밀직부사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재(在)는 초명이 겸(謙)이었으나 공신으로 봉해지는 것을 사면하려고 지방으로 피신하자 태조가 그를 찾으려고 애쓴 끝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 이름을 재(在)로 사명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字)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아우 을진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며 일생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5.노무현전대통령 생가지 및 묘소-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94-1(봉하마을)

6.노무현전대통령 부모 묘-봉하마을 입구(도로변에 있음).시간이 되면 부엉이 바위도 등정 예정.

 

7.전주환전대통령 조부(전영수) 묘-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전영수(1867-1936)-처사 송파 완산전공지묘.

  전두환은 전인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전인의 형님후손으로 약 400년전에 파가 갈렸다.

8.근처에 있는 해복혈(게의 눈처럼 생겼다 해서)로 알려진 전인(1504-종사랑)-명당발음으로 자손 크게 번성(합천군 일대 1500여호).

  전영수묘와 전인묘가 한  주산아래에서 못재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어느묘가 정혈일까?

  못재-백두산 천지와 흡사해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함.

 묘도 볼것.전석주옹(명당이라는데?)

 

9.박소(朴紹) (반남박씨 중흥시조) 묘-경남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산 53-4.

이묘 발음으로 반남박씨가 조선 중기에 크게 번성(문과급제자-127.당상관-35.종2품-35.정이품-18.대제학-2)

당상관(정1.2.3품.종1.2품).

묘산면사무소에서  합천해인사 방향으로 8km 좌측에 있다. 

1493년12월24일(성종24)--1534(중종29)    

본관 반남(潘南). 자 언주(彦胄). 호 야천(冶川). 시호 문강(文康). 이조정랑 조년(兆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자선(尹孜善)의 딸이다.
1518년(중종 13=26세) 향공(鄕貢)3과에 모두 장원하고 그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1519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였다. 이어 강석(講席)에 나아가서는 행동이 조용하고 응대가 상세하여 모두 옥당정자(玉堂正字)를 얻었다고 치하하였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용모를 보니 남의 아래에 설 사람이 아니라. 어찌 정자로만 기대하겠는가. 대과에 장원할 것이다. 라고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였다.

 

10.이개9합천이씨 시조)묘- 경남 합천군 용주면 월평2리 망월산 토끼슬 9부능선에 있다.

합천이씨 유래

합천(陜川)은 경상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군으로 본래 신라의 대량주인데, 경덕 왕이 강양으로 고치고, 조선 태종때 합천으로 고쳤다.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시조 이개(李開)는 신라 좌명공신이며 서라벌 6부촌장인 이알평(李謁平) 표암공(경주이씨의 시조)의 39세 후손으로 고려개국초에 가수 호장을 지냈고 강양(합천)으로 분관(分貫), 강양군(江陽君)이라 부르며 합천이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후 가세가 번창하여 전객령공파(典客令公派)등 크게 11파로 갈라져서 많은 인재를 배출, 국가와 민족인륜 도덕을 위해 크게 공헌하여온 명족으로 오늘에 이르러 수십만명이 훨씬 넘는 대씨족으로 발전하여왔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합천이씨는 남한에 총 36,411가구, 115,4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1.변정실(초게변씨 시조) 묘-경남 합천군 율곡면 갑산리(토보촌) 5249관리인의 집) 재실 뒷쪽에 있다.

변씨(卞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ㆍ?~기원전 11세기경)의 여섯째 아들 숙진탁(叔振鐸)이 처음 조(曺)나라로 봉(封)해졌다가 후에 노(魯)나라 변읍(卞邑)에 봉군(封君)되어 지명을 따서 변씨(卞氏)라 한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변씨(卞氏)의 근원은 ‘변씨족보(卞氏族譜)’에 의하면 천보연간(天寶年間ㆍ742∼755년)에 숙진탁(叔振鐸)의 후손인 변원(卞源)이 당(唐)나라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신라 경덕왕 2년(743년) 팔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효경(孝經)’ 한 질(秩)을 가지고 신라(新羅)에 건너와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풍수한 관련하여 전래되는 벌 명당의 유래이다.

【반남 박씨(朴氏) 벌 명당 이야기】
나주(羅州)지방에 알려진 반남 박씨의 벌 명당은 조선의 8대 명당 가운데 하나인 호장공의 묘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은 이렇다,
호장공이 죽자 급제공(宜)은 선산이 있었으나 좋은 명당 자리를 잡으려는 마음으로 한 마을에 살던 유명한 지관에게 부탁하였다. 지관은 한참동안을 생각하더니 버드나무 바로 옆에다 묘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러나 급제공이 생각할 때에 지관의 태도가 매우 이상하고 무엇인가 숨기고 있는 듯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지관과 그의 부인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박 호장님 댁 묘 자리는 잘 잡아 주셨어요"
"잡아주기는 했는데 사실 버드나무 옆보다는 그 아래가 더 좋아"
"그럼 그 자리를 잡아 주시지 그랬어요 ?"
"그 자리를 잡아 주면 나에게 큰 화를 미치는 일이 생기게 되지."
그 말을 들은 급제공(宜)은 다음날 버드나무 아래에다 호장공을 모시려고 묘 자리를 파기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관이 놀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서 빌면서 말했다.

"기왕 거짓말이 밝혀진 이상 할말은 없습니다만 제발 제가 저의 집안으로 들어 갈 때까지 잠시 묘 자리 파는 것을 기다려 주십시요" 하면서 급히 돌아갔다. 그런데 급제공이 생각할 때에 지관에게 속은 생각을 하니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참고 기다리다가, 지관이 자기 집에 도착했다고 생각되자 묘 자리 파는 일을 계속 하였다.

그러자 땅속에서 큰 벌 한 마리가 나와, 그때까지 자기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고개를 막 지나던 지관의 머리 위로 날아가 머리를 쏘아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사람들은 호장공의 묘를 `벌 명당` 이라 하고 지관이 숨진 고개를 `벌 고개` 라 부르고, 지관이 죽은 그 자리에 {봉현 蜂峴} 이란 표식을 해놓았다고 한다.
이후 반남 박씨는 `벌 명당에다 선조의 묘를 쓰고는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가장 세도를 누렸던 박씨가 바로 `반남 박씨` 이다.

【천안(天安) 벌 명당 이야기】
옛날 어떤 사람이 천안 안서골 뒷산의 무너미 고개 위에다 아버지 무덤을 쓰려고 묘혈(墓穴)을 파고 광중(壙中)을 지으려고 하자 수천 마리의 벌이 땅속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는데, 벌이 날아간 자리에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룬 뒤 그 후손들이 모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였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그 전설에 따라 벌 명당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오능 벌 명당 이야기】
조선조 19대 숙종(肅宗) 임금이 승하하자 임금의 능 자리를 서오능에 잡았는데, 묘 자리를 점지한 지관이 말하기를 "장지가 천하의 명당임에는 틀림없으나 내가 벼리고개를 넘어간 후에 묘를 파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말을 믿지 않고, 지관이 그 고개(은평구 갈현동과 고양시 용두리 경계에 있던 고개)를 막 넘기 전에 묘를 파기시작 하였는데, 벌떼가 산더미처럼 몰려와 지관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완주 벌 명당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 완주군 이서면 이문리 산정부락 명당리라는 마을에 효성이 지극하고 마음씨 착한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산에 밭을 일구어 근근히 끼니를 이어가는 어려운 살림 중에서도 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단란하게 살아갔습니다
다만 슬하에 자녀가 없는 것이 한 가닥 아쉬움이었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뜨자 효심이 지극한 이들 부부는 돌아가신 부모를 좋은 묘소에 모시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뒤뜰에 단을 모셔놓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서 명당 자리를 찾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도승이 해는 저물고 갈 곳이 없다며 하룻밤 묵어 가기를 청했습니다. 부부는 이를 쾌히 승낙하고 정성을 다해 도승을 대접했습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도승은 산에 올라 산세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몇 날 며칠이 되어도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산에 올라 산세만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부부는 조금도 싫은 낯을 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에서나마 지성을 다해 도승을 모셨습니다.
하루는 도승이 주인을 불러 말했습니다.
"당신들의 정성에 정말 감탄했오. 당신들의 그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에 대한 보답으로 묘 자리를 하나 구해주겠오."
도승은 너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주인을 데리고 산으로 가더니 묘자리를 하나를 일러주었습니다.
"이곳에 묘를 쓰시오. 이곳은 벌 명당이라는 혈이오.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멍덕봉이고 바로 앞의 날줄기가 꽃 날봉이요. 그 밑은 젖샘이고 옆에 있는 날 줄기는 연모당이요" 이렇게 산세를 하나하나 설명한 도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곳에 묘를 쓴 뒤에는 멍덕봉의 명덕이 나오도록 허물어 주십시오. 멍덕이 흙으로 덮여서 벌이 나오지를 못하니 흙을 헐어야 벌이 나와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요, 그러면 벌들이 꿀을 모아다 멍덕에 저장하고 새끼를 많이 치게 될 것인즉 이곳에 묘를 쓴 사람도 자손이 번창하고 재물도 왕성할 것이요"
이어서 도승은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가서 살도록 하라고 일러준 뒤 어떤 일이 있어도 도승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멍덕봉을 헐어야 한다고 몇번이고 당부했습니다.
도승이 떠나자 이 부부는 너무나 기쁘고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벌 명당에 부모의 묘를 쓰고 멍덕봉의 봉우리를 헐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곳으로부터 수많은 벌떼가 나와 북쪽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히 여겨 벌떼를 따라가 보니 십리도 채 못간 곳에 도승이 벌에 쏘여 죽어있었습니다. 부부는 도승의 당부를 어겼기 때문에 도승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을 뒤늦게 깨닫고 아무리 땅을 치며 통곡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부부는 도승의 시체를 부모의 묘와 나란히 모시고 도승이 일러준 대로 북쪽 30리 밖인 익산군 금마면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도승이 말한 것처럼 지금껏 없던 자녀를 얻고 대대로 일가가 번창해서 가족을 이루게 되니 이들이 지금의 발산 소씨요, 벌 명당의 유래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들 부부가 살던 산정부락은 지금 산림이 울창하고 60여 호의 부자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꽃 날봉과 젖샘에서는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고 샘솟고 있으며 한 여름에도 손이 시릴 정도로 차고 맑은 물이 흘러 명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처 : 천기호흡수련원/cafe.daum.net/kang119
글쓴이 : 주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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