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공 환재 박규수(文翼公 瓛齋 朴珪壽)
1807(순조 7)∼1877(고종 14). 조선 말기의 문신. 실학자·개화론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환경(瓛卿), 호는 환재(瓛齋)·환재거사(瓛齋居士)이다. 1807년 서울 계동에서 태어났으며,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다. 15세 무렵 학문적 성장을 거쳐 20세 무렵 효명세자와 교유하면서 문명을 떨쳤다.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은 어머니·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하여 20년간 칩거하면서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눈을 뜬 뒤 윤종의(尹宗儀)·남병철(南秉哲) 등 당대의 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실학적 학문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1848년(헌종 14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에 나선 뒤 병조정랑·용감현령·부안현감(1850)·사헌부장령(1851)·동부승지(1854)·곡산부사(1858) 등을 두루 거쳤다. 1861년(철종 12년) 연행사절(燕行使節)의 부사(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접하였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 조선 후기 이래 봉건적 모순의 실상과 그 아래서 신음하는 농민의 처지를 체험하였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 도승지에 이어 사헌부대사헌·홍문관제학·이조참판·한성부판윤·예조판서·대사간을 두루 거쳤다. 1866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재임중 그해 7월에 셔먼호사건을 겪었다. 이어 다시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뒤 대제학 시절인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 다시 중국을 다녀오면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개혁을 추진하던 청국의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조선의 개국과 개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귀국 후 형조판서·우의정을 거치면서 당시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74년 사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그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하고 중국에서의 견문과 국제정세를 가르치며 개화파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해오자 그는 최익현 등의 강력한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하여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그의 문호개방 주장은 개항을 위한 내부적 준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선 일본의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법의 하나였다. 그뒤 한직인 수원유수로 있다가 1876년(고종 13) 12월 27일(음력) 사망하였다. 문집에 《환재집》, 《환재수계》가 있고, 편저로는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있다. [출처] 박규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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