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

[스크랩] 6. 육도수로 보는 인류 역사의 변천과정

장안봉(微山) 2013. 3. 13. 05:23

 

도수(度數)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계에 다다르면 다음 단계로 변화되도록 짜여져 있는 일종의 흐름도를 말한다. 일찍이 중국 송대(宋代)의 현자(賢者) 소강절(邵康節)은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도수를 발견하고 인류 역사의 변천 과정을 6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이것을 육도수(六度數)라 한다.
육도수에서는 인류에게 주어졌던 도(道)가 역사 변천을 통해서 형성되고 발전하였다가 결국은 타락하고 소멸되어 무도(無道)한 금수세상(禽獸世上)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밝혀놓고 있다.
어쩌면 인류 역사는 도(道)가 지극히 바르게 세워졌던 황시대(皇時代)로부터 태평성대의 제시대(帝時代)를 거치면서 이후로는 점차 타락되어 금수와 다를 바 없는 말세의 무도(無道)한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도록 짜여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강절은 이러한 도수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의 저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인류역사의 변천 과정을 6단계로 밝혀 놓았는데, 이것이 육도수(六度數)이다.

所謂皇帝王覇者 非 謂三皇五帝三王五覇而巳
소위황제왕패자 비착위삼황오제삼왕오패이사
但用無爲則皇也 用恩信則帝也 用公正則王也
단용무위즉황야 용은신즉제야 용공정즉왕야
用智力則覇也 覇以下則夷狄 夷狄以下 是禽獸也
용지력즉패야 패이하즉이적 이적이하 시금수야

소위 황(皇) • 제(帝) • 왕(王) • 패(覇)라는 것은 삼황(三皇) • 오제(五帝) • 삼왕(三王) • 오패(五覇)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위(無爲)를 쓰면 황(皇)이고, 은혜와 신뢰를 쓰면 제(帝)이고, 공정(公正)함을 쓰면 왕(王)이다.
지혜(智慧)와 용력(勇力)을 쓰면 패(覇)요, 패 아래는 이적(夷狄)이요, 이적 아래는 금수(禽獸)이다.


소강절의 육도수는 이와 같이 여섯 단계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간성이 타락되어 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인류의 역사는 그 동안 황(皇) • 제(帝) • 왕(王) • 패(覇) 시대를 거쳐 왔고, 이적(夷狄) 시대를 지나 더욱 타락하여 도덕성이 없는 인두겁의 금수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육도수에 나타나는 인류 역사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인류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세(人世)에 도(道)가 어떻게 세워졌고 변해왔는지 진단해 봄으로써 절대 절명의 위기인 말대(末代)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도가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소강절의 육도수를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1. 황시대(皇時代 : B.C 3528~B.C 2592); 배천입극왈황(配天立極曰皇)
삼황(三皇) 시대로서 하늘과 더불어 지극히 바르게 세워진 시대를 말한다.
삼황이란, 천황(天皇) 태호 풍복희(太昊 風伏羲) • 지황(地皇) 염제 강신농(炎帝 姜神農) • 인황(人皇) 황제 희헌원(皇帝 姬軒轅)을 말한다.
태고(太古)에 삼황(三皇)이 오기 전 인류는 풀잎이나 짐승가죽으로 몸을 가리고 산짐승을 잡아 혈식(血食)하고, 나무 열매나 풀뿌리로 연명하였으며 땅을 파고 굴속에 거처하고 들판에 풀을 덮어 웅크리고 살았으니 생활의 도리가 구비되지 못하였고, 임금이 없이 모여 살아 서로 싸우고 빼앗으며 약자는 죽고 강자는 차지하니 인도(人道)가 구비되지 못하여 마치 금수(禽獸)와 같았다.
천도(天道)가 창창(蒼蒼)하였으나 도(道)를 알 길이 없어 그 이로움[德]을 취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삼황(三皇)이 내려 하늘의 때[天時]를 알고, 땅의 이치[地理]를 밝혀 백성을 기르는 기구를 만드니 의복과 음식과 집과 각종 용기(用器)가 갖추어져 백성들이 필수품을 얻어 생을 즐기면서 생업(生業)에 편안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안일하게 지내면서 가르치지 아니하면 금수에 가까워짐을 근심하여 인심을 따르고 천리(天理)를 근본으로 하여 교화(敎化)기구를 만들어 가르치니 백성이 지혜로워지고 천리에 순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인(萬人)이 삼황(三皇)을 우러러 의문이 있으면 가르쳐 주기를 구하고, 다툼이 있으면 해결해 주기를 구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이끌어주기를 구하니 백성들의 군사(君師)의 직책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백성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는데 민심의 향하는 바가 바로 천명(天命)의 돌아오는 바라, 만백성의 임금이 되어 다스리니 천도의 이로움[德]을 백성들이 입게 되었다.

복희(伏羲 : B.C 3528~B.C 3413)는 지금으로부터 약 5,500년 전 사람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 「신시기(神市紀)」에는 배달국(倍達國) 제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桓雄)의 열두 아들 중 막내로서 신시(神市)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일을 맡았으며 풍산(風山)에서 살았으므로 성(性)을 풍(風)이라 하였다 한다.
이 풍(風) 성은 뒤에 마침내 갈라져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 이(理), 사(), 팽(彭)의 여덟 가지 성이 되고 풍(風)씨는 없어져 지금은 단지 풍채(風), 풍골(風骨), 풍신(風身) 등 몸의 칭호로만 전해진다.


                                                                          


복희(伏羲 : 재위 B.C 3528~B.C 3413)


태호(太昊) 복희씨는 황하(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등의 무늬를 보고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정하였는데, 이 팔괘의 형상에 따라 신(神)을 하늘에 봉(封)하여 신명(神明)의 덕(德)을 통하고 만물의 정(精)을 분류하여 음양(陰陽)의 다스림을 밝혔다.

신명의 덕(德)이란
건(乾)은 굳세고[健],
리(離)는 곱고[麗],
손(巽)은 들어오고[入也],
간(艮)은 멈추고[止],

 
태(兌)는 기쁨이 되고[說],
진(震)은 움직이고[動],
감(坎)은 빠지고[陷],
곤(坤)은 따르는[順] 것이다.

만물의 정(精)이란
건(乾)은 하늘이 되고[天],
리(離)는 불이 되고[火],
손(巽)은 바람이 되며[風],
간(艮)은 산이 되고[山],

 
 
태(兌)는 못이 되고[澤],
진(震)은 우뢰가 되고[雷],
감(坎)은 물이 되고[水],
곤(坤)은 땅이 된[地] 것이다.

 

그러므로 복희는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신(神)의 움직임에 있음을 알아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대들보를 올리고 지붕을 이고, 방을 만들고 집짓는 법을 가르쳐서 비바람을 피하도록 하여 주거를 편히 해주었고, 여피(儷皮)*를 납폐의 예물로 삼아 시집가고 장가드는 제도를 만들어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

* 한 쌍의 가죽인데 혼례의 납폐(納幣)로 쓰임.

그물을 만들어서 사냥하고 고기 잡는 것을 가르쳐서 백성의 배를 부르게 하였고, 짐승을 길러서 이것을 희생하여(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포주*(廚)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를 포희(犧)라 하였다. 결승(結繩) 문자(文字)를 만들어 정치를 하니 백성들은 질서가 잡혀 편안하였다.

* 희생물을 잡아 요리하는 요리장.

복희가 가자 신농(神農, B.C 3218~B.C 3078)이 일어났다. 신농씨는 강수(姜水)에서 살았으므로 성을 강(姜)씨라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므로 인류의 성씨의 시초가 된다. 중국의 역사서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참조하면 “염제(炎帝)인 신농씨의 성은 강(姜)인데, 처음으로 밭가는 것을 가르치고, 여러 가지 풀을 맛보아 처음으로 의약을 만들었으며, 또 낮에 시장을 만들어 물건을 서로 교환하여 가도록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되어 있다. 염제(炎帝) 때 이르러 백성들이 물고기나 짐승을 잡아 먹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쟁기와 보습(쟁기의 날)을 만들어 천하 사람들에게 밭가는 것을 가르쳤고, 씨 뿌리는 것을 가르쳤고, 김매는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그를 신농(神農)이라 불렀다.


                                                                     

 


신농(神農 : 재위 B.C 3218~B.C 3078)


신농씨는 돌 속에서 금속을 녹여내어 농기구를 만드는 주조법(鑄造法)을 가르쳤고, 또 약속과 장소를 정하여 사람을 모이게 하고 시장을 만들어 물건을 서로 교환하여 가게 하니 백성들의 삶이 즐겁고 풍요로워졌다.
그리고 온갖 풀을 맛보아 그 약성을 시험하여 의약을 가르쳤으니 이것을 적은 책이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다. 이로써 백성들은 병으로부터 구제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염제 신농씨로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뿌리가 되며 의약의 시초가 되는 셈이다.

신농씨가 가자 황제 헌원(黃帝 軒轅, B.C 2692~B.C 2592)이 일어났다.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이며 이름은 헌원이다. 희수(姬水)에서 오래 살았으므로 성을 희(姬)라고 고쳤다.


                                                                          

 
                                                황제헌원(黃帝軒轅 : 재위B.C 2693~B.C 2592)


복희씨와 신농씨 때에는 백성들의 생업이 안정되어 편안하였고 의식주는 비록 족하였으나 인문(人文)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가 일월(日月) 성신(星辰)의 형상을 보고 비로소 천문(天文)의 관직을 두었고,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북두(北斗)의 가리키는 것을 관찰하여 갑자(甲子)*를 만들게 하였고, 용성(容成)에게 명하여 책력(冊曆)**을 만들게 하였다.

*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
** 일월(日月)의 움직임과 절기를 기록한 책

그리고 예수(隸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를 만들게 하였고,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오음(五音)과 육려(六呂)와 육율(六律)의 음율(音律)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관(史官)이었던 창힐[蒼爲]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文字)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가 모두 황제로부터 가르침이 시작되었고, 모든 법과 모든 글의 근원이 된다. 하늘의 도(道)가 비로소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또 황제가 나무를 쪼개어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 통하지 못하던 곳을 건너게 하고, 소와 말을 사용하여 무거운 것을 끌고 멀리 이르게 해서 백성을 이롭게 하였다.
절구와 절구공이를 만들어 만민을 구제하였고, 나무를 휘어 활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천하를 위압하였다. 치우(蚩尤)가 창과 방패를 만들어 란(亂)을 짓고 안개를 일으켜 분간치 못하게 하므로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평정하였다. 이것을 ‘탁록전투(鹿戰鬪)’라고 한다.
나라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8가지 법을 만들어 다스리니 천하에 질서가 구비되고 백성은 평안을 찾게 되었다.

2. 제시대(帝時代 : B.C 2598~B.C 2208);덕합사해왈제(德合四海曰帝)
오제(五帝) 시대(時代)로써 삼황(三皇) 이후 대대로 성인(聖人)이 이어져 덕(德)이 사해(四海)에 넘쳐흐르는 태평시대(太平時代)였다.
성인이 천도(天道)로 본받아 그 이치(理致)로써 다스려 백성들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였으며 신통(神通)한 것으로 교화(敎化)하여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편히 하니 백성들은 각자 자기 본분을 다하여 옷을 늘어뜨리고 있어도 천하가 다스려졌다.
황제 이후 소호(少昊), 전욱(頊), 제곡(帝), 제요(帝堯), 제순(帝舜)에 이르기까지 오제(五帝)가 대를 이어 성스러운 임금이었다.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는 황제의 아들이다. 제(帝) 위에 오르자 봉황(鳳凰)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한다. 황제를 이어 천문(天門)과 지리(地理), 인사(人事)를 널리 권장하고 구주(九州)에 법을 세워가니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전욱( 頊) 고양씨(高陽氏)의 묘비(墓碑)


전욱(頊) 고양씨(高陽氏)는 창의(昌意)의 아들이며 헌원의 손자(孫子)이다. 소호씨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소호의 정치가 쇠퇴하여지고 여씨(黎氏)의 아홉 제후도 덕을 잃어 도가 어지럽혀지자 백성과 신(神)이 뒤섞여 살아서 구별 하기 힘들었다. 이런 난세(亂世)에 뒤를 이어받아 남정(南正)의 관직에 있던 중(重)이라는 사람에게 하늘에 관한 일을 맡게 하여 종교행사를 맡겼으며, 화정(火正)의 관직에 있는 여(黎)에게 지상(地上)의 일을 관리시켜 민정(民政)을 맡겼다. 그래서 화평(和平)해졌다. 또 역서(曆書)를 만들어 맹춘(孟春)으로써 원(元)을 삼았다.
전욱(頊) 고양씨(高陽氏)는 매우 침착하고 지략이 풍부하고 사리에 밝았으며 농작물을 가꾸고 가축을 기르며 황무지를 일구었다. 계절과 기상의 변화를 고려하여 일을 처리하며 자연에 순응했다. 아울러 귀신을 신봉(信奉)하는 것을 예(禮)로 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교화(敎化)하여 기질을 도약케 했으며, 목욕재계하고 신실(信實)한 마음을 다하여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제사지냈다. 지경(地境)이 북(北)으로는 유릉(幽陵), 남(南)으로는 교지(交), 서(西)로는 유사(流沙), 동(東)으로는 반목(蟠木)에 이르렀다. 각종 동식물, 산천(山川)의 크고 작은 신(神)들에 이르기까지 무릇 태양이 비치는 곳은 그에게 복속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제곡(帝) 고신씨(高辛氏)는 소호 금천씨의 손자이며 황제 헌원의 증손이다. 전욱의 뒤를 이어 즉위했고 박()에 도읍했다. 나면서 신성(神性)을 갖춘 신동(神童)이었으며, 자기 이름을 스스로 말할 수 있었다.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은덕을 베풀었다.
관찰력이 뛰어나 사물의 오묘하고 신기한 이치를 탐색하였다. 백성의 요구를 들어 주었으며 자애롭고 위엄 있고 관대하고 신의가 두터웠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청렴결백하여 천하가 귀의(歸依)하였다. 생산물을 절약하였으며 백성들을 위무와 교화로써 세(勢)를 흐름에 따라 유리하게 이끌었다. 해와 달의 운행에 대한 역법(易法)을 제정하고 계절의 변화를 추정하였고 귀신에 대하여 조사하여 정중히 섬기었다. 그의 태도는 정중하고, 고상한 덕행을 지니고 있었다. 행동은 시의(時意)에 적절했고 검소한 차림을 하였으며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했다. 은덕을 베풀고 화평하여 모두 그에게 귀의(歸依)하였다.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의 초상(肖像)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의 성은 이기(伊祁)이고 이름은 방훈(放勳)이다. 제곡의 아들이고 황제(皇帝)의 현손이다.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그의 어진 것은 하늘과 같고 그의 지혜로운 것은 신(神)과 같아서 백성들이 해[日]를 따르듯 하고 백성들이 구름을 바라듯 하였다”고 했다. 평양부(平陽府:산아저)에 도읍을 하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근신절도(謹身節度)하여 몸으로써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궁전의 지붕을 띠로 덮었고, 그 끝은 가지런히 자르지도 않았다. 궁전의 층계는 흙으로 만들었는데 3층이었다. (당시 임금 궁전의 섬돌은 나무 또는 돌로 만들어 9층으로 하였음.)

뜰에 명협(蓂莢)이라는 풀이 있어 보름까지는 날마다 잎이 하나씩 나고 보름 후부터 하나씩 떨어지는데 작은 달(29일의 달)에는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말라 버렸다. 이것을 보고 순(旬:열흘), 삭(朔:초하루)을 알아 달력을 제작하여 가르치니 백성들은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었다. 천도(天道)의 위대한 것은 무위이화(無爲而化: 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요(堯)는 이것을 본받아 천하를 다스린 까닭에 백성에게는 임금이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였다. 요임금이 평복을 하고 거리에 나가 동요를 들으니 아이들이 노래하길 “우리 만민이 나아감은 임의 지극하심 아님이 없어 아는 듯 모르는 듯 임의 길을 따르네” 하였고 또 한 늙은이가 배를 두드리고 땅을 굴러 박자를 맞추며 노래하길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잠자네. 우물 파물 마시고 논밭 갈아 밥 먹는데 임금의 힘 무슨 소용 있으리” 하였다. 요임금의 치세(治世)는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그런데 요(堯)는 아들 단주(丹朱)에게 제위를 물려주지 않고, 단지 바둑을 가르치며 마음을 닦을 것을 말하고,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제위를 물려주었다.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의 능(陵)


제순(帝舜) 유우씨(有虞氏)의 성은 요(姚)씨이고, 이름은 중화(重華)이다. 고수()의 아들이요, 전욱(頊)의 6대손이다.
『사략(史略)』을 참조하면 “그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가니 백성들이 다 서로 밭둑을 양보하고 그가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으니 백성들이 다 고기 잡는 자리를 양보하며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구우니 그릇이 하나도 추하거나 비뚤어진 것이 없고, 그가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1년이면 촌락을 이루었고 2년이면 읍(邑)을 이루었으며 3년이면 도회(都會)를 이루었다” 하였다.

요(堯)임금은 자신의 제위를 물려줄 자를 찾던 중 이와 같은 순(舜)의 훌륭한 덕망을 듣고 그를 견무(畝)에서 뽑아 올려 크게 쓰고 자기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순에게 시집보내 그를 시험하였다.


 


                                                                    

 

제순(帝舜) 유우씨(有虞氏)의 초상(肖像)


그는 요(堯)를 도와 섭정하면서 환두(驩兜)*를 추방하고, 공공(共工)**을 유배하였으며, 곤(鯤:우임금의 아버지)을 죽이고, 삼묘(三苗: 요순시대 나라 이름)를 내리쳤으며, 지혜와 재능이 뛰어난 팔원(八元)과 팔개(八凱)***를 기용하였다. 아홉 관리를 두어 농경, 치수, 제사, 음악 등을 관장케 하였으며 12목(牧:고을장관)을 자문기관으로 삼아 서로 의논하니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백성은 모두 기뻐하였다. 이에 요(堯)가 순(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 요임금 때 악인
** 백공(百工)의 일을 보던 관리
*** 팔월(八元) :여덟의 선량한 자, 팔개(八凱) :여덟의 화합한 인물

요는 순에게 제위(帝位)를 물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 순(舜)아, 하늘의 역수(曆數)가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적중함[中]을 잡아 정사(政事)를 보살필 것이다. 사해(四海)가 곤궁해지면 하늘에서 내린 복록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

요의 뒤를 이은 순은 몸소 일하지 않았으나 천하는 잘 다스려졌다. 그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많은 직책을 위임한 까닭에 몸소 일한 자취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단지 그는 임금의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적중함[中]을 잡아 정사를 보살핀 것이다.
순이 요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는 태평하였고 만민은 그를 우러러 칭송하였다.
그런데 순 역시도 아들 상균(商均)이 있었으나 제위를 물리지 않고 우(禹)가 치수(治水)를 잘하여 천하에 덕(德)을 끼쳤으므로 우(禹)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삼황(三皇)에 의해 지극히 세워졌던 도(道)는 요순(堯舜)에 이르러 널리 이루어져 덕(德)이 사해(四海)에 넘쳤다.
천도(天道)를 근본으로 하여 인도(人道)를 바로잡으니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의 도리가 확립되고 제도를 마련하되 과한 것을 억제하고 미치지 못한 것은 끌어올려 법에 합당케 하였고, 착한 이는 일으키고 악한 자는 징계하니 천하는 태평하였다.
바른 것을 교화(敎化)하여 게으른 자를 없게 하고 천시(天時)에 순응하고 지리(地理)를 응용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장려하니 물산이 풍부하여 백성들은 생을 즐기며 업(業)을 편안히 하여 민심이 절로 돌아왔다.

3. 왕시대(王時代 : B.C 2205~B.C 770);계천우세왈왕(繼天于世曰王)
왕(王)이 하늘의 뜻을 계승하여 세상을 다스려 나가던 시대이다.
우(禹)가 석주(石柱)로 9년 홍수를 막아내는 것을 보고 순(舜)은 천하를 우(禹)에게 물려주었다.
우왕(禹王)의 이름은 문명(文明)이며, 요임금 시대에 치수를 맡았던 곤(鯤)의 아들이고 전욱(頊)의 후손이다.
요임금 때 대홍수가 나서 산봉우리까지 물바다를 이루게 되자 요임금은 물을 다스릴 사람을 찾게 되었다. 사악(四岳:요임금 당시 관직명)이 곤(鯤)을 추천하여 치수를 담당케 하였으나 도리어 막히어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때 요임금은 자신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릴 순(舜)을 찾아 왕권을 이양하였다.
그런데 왕권(王權)을 이어받은 순(舜)은 곤(鯤)을 익산(翊山)으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였다. 그러자 우(禹)는 부친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치수를 맡고자 하므로 순(舜)은 우를 기용하여 치수를 맡게 하니 그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외지에 거처하며 치수 기간 8년 동안 3번이나 그 집 앞을 지났으나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9주(州)에 9개의 수로를 내었으며 9도(道)를 통하게 하였다.

또한 아홉 개의 큰 호수에 제방을 쌓았으며 큰 산 9개를 뚫었다. 이것을 순에게 고하자 순은 그의 사업을 칭찬하며 말하길 “땅이 평(平)*하고 하늘이 이루어지니 육부(六府)**와 삼사(三事)***가 진실로 잘 다스려져서 만세토록 길이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대의 공이라” 하며 천하를 그에게 넘겼다.

* 평(平):수(水), 토(土)를 다스림. 수토(水土)가 다스려져 만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말함.
** 육부(六府):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인데 여기서 재물이 나온다 하여 부(府)라고 함.
*** 삼사(三事):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 세 가지.

우왕(禹王)은 하(夏)나라를 세우고 왕위(王位)를 아들 ‘계’에게 물려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아들 ‘계’는 하왕조(夏王朝, B.C 2183~B.C 1752)를 세습 왕조체제로 바꾸었다. 이후 하왕조는 계속 이어지다가 걸(桀)왕에 이르러 폭정을 폈기에 탕(湯)이 하왕조(夏王朝)를 멸하였다.


                                                               

 



우(禹)에게 계승된 천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욕심은 늘어가고 도덕은 줄어들어 하왕조(夏王朝) 17대 걸왕(桀王)에 이르러 매희라는 절세미녀에게 빠져 폭정을 일삼으니 탕왕(湯王)이 명재상(名宰相) 이윤(伊尹)의 도움으로 걸왕(桀王)을 멸하고 무너진 왕도(王道)를 다시 세웠다.
『사략(史略)』에 따르면 “은왕(殷王) 성탕(成湯)의 성은 자(子)씨이고 이름은 이(履)이다. 그 선조는 설()이라는 사람인데, 제곡(帝)의 아들이다. 탕은 처음에 박(: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이라는 땅에 도읍을 정하고 사람을 보내어 이윤(伊尹)을 신(莘)의 땅에서 초빙하여 폐백을 가지고 그를 걸(桀)에게 다섯 번이나 나아가게 하였으나 한 번도 기용(起用)하지 않았다. 걸은 탐욕하고 포악하여 나라가 크게 붕괴되었으므로 이윤은 탕의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와 걸을 토벌하여 남소(南巢)에서 추방하니 제후들이 탕을 높여 왕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탕왕(湯王)이 무너진 도를 다시 세웠으나 이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인간의 욕심에 편승하고 도리를 잃어가더니 은왕조 30대 주왕에 이르자 주왕은 절세미인 달기에게 빠져 연못을 파고 술을 부어놓고 배를 띄워 노닐며 마셨으며 나무숲에 고기를 걸어놓고 먹었다 한다.[주지육림(酒池肉林)]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과중하게 하니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온 나라에 가득 찼다 한다.
이에 충신이 나아가 간언하면 불에 달구어진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여 숯불 위에 떨어져 죽게 하는 포락지형(烙之刑)을 행하니 제후들이 모두 반기를 들었다.
그러자 무왕이 목야의 싸움에서 은나라 주왕을 멸망시키고 주 왕조를 세우고 아버지를 문왕(文王)으로 추존(追尊)하였다. 문왕(文王)은 주(周)왕조의 기초를 닦은 성군(聖君)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이다. 문왕(文王)은 성덕(聖德)이 있어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복하니 천하의 3분의 2에 달하는 땅을 차지하였다.
문왕은 강태공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을 다하였으며 주역(周易)을 내어 영대(靈臺)를 짓고, 신명(神明)을 땅에 봉(封)하고 지존시대(地尊時代)를 열었다.



                                                                   

 


문왕(文王)의 초상(肖像)


탕왕(湯王, B.C 1783~B.C 1754)이 걸왕(桀王)을 멸하고 은왕조(殷王朝)를 세워 무너졌던 왕도(王道)를 다시 세웠을 때가 우왕(禹王)으로부터 422년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또 탕(湯)에 의해 세워졌던 은왕조는 주왕(紂王)에 이르러 폭정을 일삼아 백성이 피폐하고 민심이 떠났기에 주(周)나라 문왕(文王, B.C 1099~B.C 1050)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우니 탕왕으로부터 684년 이후의 일이다.
우왕(禹王)으로부터 탕왕(湯王)에 이르기까지가 1회기(513년)에 해당하며, 탕왕(湯王)으로부터 문왕(文王)에 이르기까지가 1회기(513년)에 해당하므로 1회기마다 성인(聖人)이 내려 무너졌던 도(道)를 다시 세웠던 것이다.

이때는 요 • 순 • 우왕 시대에 널리 펼쳐졌던 도덕정치는 점차 무너지고, 인간의 욕망과 타락의 양상이 점점 드러났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도(道)는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4. 패시대(覇時代 : B.C 770~AD 280) ;선세후의왈패(先勢後義曰覇)
먼저 세력을 다투고 승리 후에 정의를 내세우던 패자시대(覇者時代)이다. 도덕정치보다는 힘의 정치가 행하여지는 시기이다. 영웅들이 등장하여 패권을 다투는 시대였으며 모사(謀士)들의 권모술수가 난무하며 각종 병법이 나왔던 시기이다.
주(周)왕조가 성립된 후 13대에 와서 평왕(平王)은 견융족(絹戎族)의 침입을 피해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동주시대(東周時代, B.C 770~B.C 221)가 열리게 된다.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나뉜다.
춘추시대에 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왕으로서의 위력이 없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諸侯)들이 각처에서 서로 패권(覇權)을 다투게 된다.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이 오패(五覇)는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키는데, 한편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나 오나라 왕 부차(夫差)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B.C 453년 경 오패 중 가장 강력했던 진(晉)이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졌다.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힘이 약한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는 관념이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접어들자 이러한 관념은 사라지고 오직 힘과 힘이 대결하는 약육강식의 양상이 펼쳐졌다.

그 결과 천하는 다시 칠웅(七雄)으로 할거하였는데, 전국시대 칠웅은 한(韓), 위(魏), 조(趙)와 초(楚), 진(秦), 연(燕), 제(齊) 등 일곱 국가였다. 이 중에 진(秦)나라를 제외하고는 근 2백 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어 여섯 나라는 국력이 쇠약해졌다. 이를 진나라가 차례로 멸망시키고, B.C 221년에 제나라의 마지막 항복을 받아내어 진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웠다.
이 시기에 공자(孔子, B.C 552~B.C 479)가 나서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文) 시대의 왕도정치를 구현코자 철환천하(轍環天下)를 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자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의 교육에 힘써 유교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공자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유가(儒家)를 비롯해 한비자의 법가(法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등 여러 문파(門派)가 나와 사상적 논쟁과 혼란이 가중되었으므로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오던 많은 문헌과 전통은 모두 불살라져 버리고 묻혀져 왕도(王道)의 맥은 끊어져 버렸다.

*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구덩이에) 파묻다는 뜻으로, 진시황이 주 왕조 때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승상 '이사'의 입안으로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사상을 통일하고자 '옛 책을 통해 배운 사람들 중에는 옛 책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중앙 집권적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 비난하니 반드시 필요한 의학, 점, 농업, 진나라 역사에 관한 책을 제외하고 모두 불태우라는 승상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많은 희귀한 책들이 불태워졌다.(분서)
다음해 진시황의 이러한 행동들을 비난하는 많은 유가들이 있자 그들을 모두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갱유)

통일 대업을 이룬 진시황은 스스로 황제(黃帝)라 칭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아방궁과 여산릉의 공사 등을 벌여 과중한 노력 동원을 하였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그 결과 시황제가 죽은 다음해인 B.C 209년에 마침내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켜 이 반란을 신호로 세상은 또다시 패권 다툼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종국(終局)에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초한전(楚漢戰)이 일어났으나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한나라 14대 평제(平帝) 때에 이르러 환관과 황후를 비롯한 황제의 외척들의 권력투쟁은 극에 달하여 평제가 외척인 왕망(王莽)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외척 왕망은 한나라의 왕권을 찬탈하여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제도개혁에 실패하고 15년 만에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 의하여 후한(後漢, 25∼220)이 세워졌다.
광무제는 이십팔장(二十八將)을 비롯한 어진 신하가 많아 정치는 안정되어갔고 백성은 일시 평안을 찾았으나 후한의 후기에 들어서면서 또다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로 정치는 문란하고 세상은 어지러워졌다.
그러자 전국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후한의 왕조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가기 시작하였고, 군웅이 할거하여 천하는 삼분되어 위(魏, 220~265), 촉(蜀, 221~263), 오(吳, 222~280) 삼국(三國)이 정립되었다.
이후 삼국은 치열한 패권 다툼 끝에 사마염(司馬炎)이 280년에 오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먹고 먹히는 오랜 패권다툼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5. 이적시대(夷狄時代 : 280~1911) ; 왕지부도왈이적(王知不倒曰夷狄)
각국 왕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크게 다투던 시대로 서로 다른 나라를 오랑캐로 간주하던 시대이다. 중국은 주변 민족을 크게 넷으로 나누어 동이(東夷) • 서융(西戎) • 남만(南蠻) • 북적(北狄)이라 불렀다. 하지만 오랑캐라 불리던 민족도 세력을 얻으면 역시 다른 민족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280년에 건립된 서진(西晉)이 망하고, 317년 사마예가 중원과 지방 토착호족의 추대를 받아 동진(東晉)을 세웠다. 이 동진 왕조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 북부에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乫), 저(楮), 강(羌) 등 다섯 이민족이 약 130년 간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웠는데 이를 5호16국이라 한다. 이들 중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탁발씨(拓跋氏)가 439년에 북부(北部)를 통일하고 남부는 송(宋)의 유유(劉裕)가 통일함으로써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열렸다.
이후 수나라(隋) 문제(文帝)가 북쪽의 호족들을 물리치고 남쪽으로 내려와 5호16국 중 남조(南朝) 최후의 진(陳) 왕조를 멸망시켜 통일천하를 이루었다. 그러나 수(隋)나라는 겨우 3대 39년 만에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립되었다.
당나라는 618년에 이연(李淵)이 수나라를 멸하고 세운 나라로써 이연의 아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24장(將)의 도움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당은 건국한 지 20대 290년 되는 907년에 후양(後梁)에게 멸망하였다.
당이 망하자 중국 대륙은 또다시 분열되어 5대10국 시대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다가 이후 송(宋)나라 태조(太祖) 조광윤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 후 12세기 초엽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는 요(遼)나라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북부 중국으로 쳐들어와 1127년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송나라 고종(高宗)이 강남으로 피난하여 임안[臨安:지금의 항주(杭州)]에 도읍을 정하고 남송(南宋)이라 하였다. 그러나 북부 몽고에서 일어난 칭기즈 칸이 금나라 등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남송을 침입하여 결국 송은 망하고 몽고족에 의한 원(元)나라가 서게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불과 90년 만에 망하고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 명(明)나라를 세워 남경(南京)에 도읍을 정했다. 이후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면서부터 동북쪽의 여진족 누루하치가 그 세력을 확장하더니 명나라는 17대 숭정제(崇禎帝)에 이르러 끝내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는 17대 227년 만에 멸망했다. 그리고 여진족에 의해 청(淸)나라가 세워졌다.
청나라도 말기에 이르러 국내적으로는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고, 국외적으로는 아편전쟁과 1856년 에로우 호 사건을 거치면서 서구 열강의 공격을 받아 수도 북경이 함락되어 청나라는 스스로 침몰하였다.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최후의 황제 부의(溥儀)를 마지막으로 멸망하였다.

6. 금수시대(禽獸時代 : 1911~현재) ; 부지강상왈금수(不知綱常曰禽獸)
인간의 근본(根本)을 잃고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일상의 도리[常道]를 알지 못하는 금수(禽獸)들의 인두겁 시대.
중국의 중원은 삼국통일 이래로 오랜 세월 동안 외부의 오랑캐라 불리는 세력들에 의해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쳐 왔다. 이러한 와중에 인간성의 타락은 극도에 이르고 결국 모든 전통과 문명조차도 상실되어 오직 본능적 욕심과 야욕으로만 일관하는 금수와 같은 마음으로 타락되어갔다.
이것은 소강절이 중국을 배경으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였지만 결국 이러한 양상은 전세계 어디를 보더라도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물질문명이 앞선 서양세력들은 힘의 우위를 내세워 전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인간으로서는 차마 행할 수 없는 인신매매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또한 동양이라고 예외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권력을 쥔 위정자 계급들은 힘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야말로 인륜도덕이 사라진 금수세상으로 변하여 전 인류는 진멸지경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반적 상황들에 대하여 소강절은 미리보기라도 한 듯이 이미 오래 전에 육도수(六度數)로써 밝혀놓았던 것이다.

『채지가』 ‘춘삼노인 이야기’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천황지황 개벽후에 인황시대 언제련고
반고인이 지낸후에 삼황시대 이때로다.
삼황시대 지나가고 오제건곤 어느땐고
오제건곤 지나가고 왕패시대 되었구나.
왕패시대 지나가고 이적금수 운수로다.
이적시대 지나가고 금수운이 이때로다.
개벽이후 몇만년후 금수시대 당했구나.

이제 금수시대를 당한 세상은 누군가가 잡지 않으면 진멸할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출처 : ●― 고도인의 해인으로 가는 블러그
글쓴이 : 고도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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