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논산]파평윤씨재실과 묘역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56

[尹烇 (1575~1636)]

초명은 찬(燦).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회숙(晦叔), 호는 후촌(後村). 병사(兵使) 선지(先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돈(暾)이고, 아버지는 증참판 창세(昌世)이며, 어머니는 청주 경씨(淸州慶氏)로 부제학(副提學) 혼(渾)의 딸이다. 황(煌)의 아우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저작이 되었다.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폐모소를 올렸을 때, 한림 엄성(嚴惺)ㆍ권확(權?)과 함께 이위경의 상소를 정지시키려다가 도리어 파면되었다.

그 뒤 박사로 다시 임용되어 전적ㆍ감찰을 거쳐, 1615년 호조좌랑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시 이위경 등에게 몰려 파면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경기도도사로 복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곧 인조가 있는 공주로 가서 공조정랑이 되었으며, 환도 후 1626년(인조 4) 지평이 되었다.

이 때 대사헌 박동선(朴東善)과 함께 관가와 사대부가의 연료 독점에 대한 백성의 원성을 대변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시종(侍從)하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강화로 들어가 분병조정랑ㆍ공조정랑ㆍ사예ㆍ예빈시정(禮賓寺正)을 역임하고, 익산군수를 지냈다.

1633년 종묘서령(宗廟署令)ㆍ직강ㆍ장령 등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필선으로 빈궁(嬪宮)을 배종(陪從)해 강화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성이 함락되자 식음을 폐하고, 송시영(宋時榮)ㆍ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하기로 결의, 두 번이나 목을 매었으나 구출되자 다시 패도(佩刀)로 자인(自刃)하려다가 미처 절명하기 전에 적병을 크게 꾸짖고 피살되었다.

사람됨이 돈후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들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윤전신도비-증이조판서시충헌후촌윤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諡忠憲後村尹公神道碑銘)-비문은 이시수(李時秀)가 짓고 비문과 전액의 글씨는 신작(申綽)이 썼다

 

[윤창세]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흥백(興伯). 고려 태사 윤신달(尹莘達)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대사성 윤탁(尹倬)이고, 아버지는 윤돈(尹暾)이다. 윤창세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는 윤수(尹燧)로 설봉공파를 이루었고, 둘째는 윤황(尹煌)으로 문정공파, 셋째는 윤전(尹烇)으로 충헌공파, 넷째는 윤흡으로 서윤공파, 다섯째는 윤희(尹熺)로 전부공파를 이루었다. 5형제 가운데 윤수윤황, 윤전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5형제의 슬하에서 손자 21명, 증손자 51명을 두는 등 크게 번창하여 윤창세의 5형제 계파를 ‘오방파’라고 부른다.
윤창세는 효성이 지극하여 처가와 외가의 대소사는 물론 흉재나 환란을 당한 마을 사람들에게도 온정을 베풀어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성품이 순후하고 언행이 방정하며 효행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났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자 때가 아닌데도 열심히 수박을 구하다가 끝내 얻지 못하였으므로 죽을 때까지 수박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 병환에 거북이 고기가 좋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한겨울에 들에 나가 지성으로 구하였더니 홀연히 거북이가 얼음 위로 나타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후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으나 이윽고 죽자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이에 그의 지극한 효성과 이웃을 보살핀 마음씨와 행적으로 인하여 자손들은 그를 효렴공(孝廉公)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성으로 급히 귀향하여 팔자기를 세우고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므로, 팔자군(八字軍)으로 알려졌다. 진중에서 유행병에 걸린 동료를 구하다가 전염되어 악화되어, 1593년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윤창세묘비-김류(金瑬)가 찬(撰)하고, 윤순거(尹舜擧)가 서(書)하였으며, 김광현(金光炫)이 전(篆)하였다. 앞면에만 음서되어 있는데, 전액은 ‘증이조참판윤공묘비명(贈吏曹參判尹公墓碑銘)’이라 새겨져 있고, 그의 가계에서부터 생전의 행적, 평소 성품 등 윤창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있다.


 

윤순거 [尹舜擧, 1596~1668] 

 

본관 파평(). 자 노직(). 호 동토(). 우계() 성혼()의 외손으로 성문준()에게서 학문, 강항()에게서 시(), 김장생()에게서 예()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실패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아버지 황()은 척화죄로 유배되고 숙부 윤전(?)이 강화()에서 순절()하자 고향에 내려가 학문()을 닦았다.
1645년 대군사부()가 되고 영월군수 등을 거쳐서 군자감정(상의원정()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찬선()이 추증, 연산() 구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동토집》, 저서에 《노릉지()》, 글씨에 〈심원사취운당대사비()〉()가 있다. 

 

윤순거신도비-장령증리조참판동사윤선생신도비명() -비문은 조카인 윤증이 찬하고, 윤무교(尹懋敎)가 쓰고, 전액(篆額)했다.

 

 

 

 윤전묘소-필선 증이조판서시충헌공후촌윤선생묘

 

윤진(尹搢)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경(子敬), 호는 덕포(德浦). 아버지는 장령 순거(舜擧)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관찰사 춘원(春元)의 딸이다.

1652년(효종 3)에 생원시에 합격, 그뒤 10년이 지나 빙고별제(氷庫別提)와 종부직장(宗簿直長)·인의(引儀)·상의주부(尙衣主簿) 등을 지냈다.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정언·지평·수찬·헌납 등을 지냈다.

1673년 부교리에 승진되었고, 다음해 능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79년(숙종 5) 사간에 임명되고 다음해 순창군수에 부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1681년 박태손(朴泰遜)과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예조참의에 발탁되었다.

1689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어전에서 “윤진은 학문과 인격이 훌륭하니 특별히 정성과 예로써 대우하여야 됩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 그의 덕망을 짐작할 수 있다. 1696년 경기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대신들의 진정으로 체대를 허락하여 전직에 유임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붕당을 타파시킬 것, 언로를 열 것, 구황·휼민에 힘쓸 것 등 여러가지 시의적절한 정책건의를 많이 하였다.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덕포유고≫가 있다.

윤진(尹搢)묘

 부제학 증좌찬성덕포윤공휘진묘/숙인 증정경부인경주이씨부우/정부인 증정경부인전주이씨부좌

 

 진위장군한공효성지묘/배영인충주박씨부하우/배영인전주이씨부하좌

 

윤창세묘- 증가선대부이조참판효렴윤공지묘/정부인청주경씨부

 

 통훈대부행죽산도호부사윤공지묘/숙인 성주이씨부

 

 

 윤순거묘-장령 증이조참판동토윤선생묘/숙인 증정부인함평이씨부

 윤진신도비-행부제학증좌찬성덕포윤공신도비명(行副提學贈左贊成德浦尹公神道碑銘)-영의정 최규서가 비문을 짓고 손자 윤동도가 비문을 서사하고 외손 심성진이 전액을 썼다.

 묘역에서 바라본 파평윤씨 재실과, 저수지 건너 멀리 종학당이 위치한다

 

 병사

 

 덕포선생고택

 

 충헌공 윤전 재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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