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양촌 권근(文忠公 陽村 權 近)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때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보(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희(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 성균관직강 · 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 ·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다.1389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 · 흥해(興海) · 익주(益州)등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 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 바쳤다.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 · 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 중추원사 등을 지냈고,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 · 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고, 하륜 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하여 유생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하였고,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 · 김구용(金九容) · 박상충(朴尙衷) · 이숭인(李崇仁) · 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연구에 정진하여 고려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뒷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子)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하였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으며, 《상대별곡》이 악장가사에 실려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경공 지재 권제(文景公 止齋 權 踶)
1387(우왕 13)∼1445(세종 27).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도(蹈), 자는 중의(仲義)ㆍ중안(仲安), 호는 지재(止齋). 검교시중(檢校侍中) 고(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이고, 아버지는 찬성 근(近)이며, 어머니는 우정언 이존오(李存吾)의 딸이다. 부인은 판사(判事) 이휴(李携)의 딸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경승부주부(敬承府注簿)에 기용되었으나 감찰 때 대사헌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었다. 1414년(태종 14) 친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우헌납(右獻納)이 된 뒤 병조정랑과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거쳐, 1416년 사예(司藝), 1418년에 사인(舍人)을 지냈다.
1419년(세종 1)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사은사 경녕군 비(敬寧君裶 : 태종의 제1서자)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과 좌대언(左代言)을 차례로 지냈다.
1423년 집현전부제학이 된 뒤 예조판서ㆍ대사헌ㆍ함길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 해에는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30년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 경기도관찰사, 이듬 해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1435년 이조판서, 143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계품사(計稟使) 혜령군(惠寧君)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그 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39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1442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인 신개(申槩)와 함께 『고려사』를 찬진(撰進)하였다.
1443년 좌참찬으로 전라도도관찰사가 되었고,1444년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 이듬 해에는 우찬성이 되어 정인지(鄭麟趾)ㆍ안지(安止)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오랜 동안 문형(文衡 : 대제학의 다른 이름)을 역임했으며, 작품으로 「세년가(世年歌)」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익평공 소한당 권 람(翼平公 所閑堂 權 覽)
1416(태종 16)∼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검교정승 희(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근(近), 아버지는 우찬성 제(踶), 어머니는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준(李儁)의 딸이다.
부인 고성이씨는 문정공(文貞公) 이암(李嵓)의 손녀이며,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의 딸이다.
1495년 81세로 졸하였으며, 영원군부인(寧原郡夫人)으로 봉해졌고, 2남 8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크고 기책(奇策)이 많았다. 책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 고적을 찾아다니면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한명회와 서로 약속하기를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고 했다. 한명회와의 교우는 관포(管鮑)와 같았다.
35세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있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에 향시와 회시(會試)에서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고, 전시(殿試)에서 4등이 되었다. 그러나 장원인 김의정(金義精)의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장원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 歷代兵要≫의 음주(音註)를 편찬하는데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그와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 대신들의 손에 들어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이 대신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워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수양대군이 동지를 규합하고 있을 때,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게 접근해 집권을 모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양정(楊汀)·홍달손(洪達孫)·유수(柳洙)·유하(柳河) 등 무사들을 규합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김종서·황보 인 등 대신들을 제거하고, 세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4년 2월에 우부승지, 8월에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세조가 즉위하자 6월에 이조참판에 발탁되고, 이어 9월에는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456년(세조 2) 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3월에 역신(逆臣)들이 가졌던 연안·전주·충주·양주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해 7월에 집현전대제학·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1457년 2월 난신(亂臣)들의 노비를 하사받았고, 3월에는 김문기(金文起)·장귀남(張貴南)·성승(成勝) 등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8월에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었다. 1458년 5월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하고, 그해 12월 의정부우찬성에 승진했다.
1459년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 5월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3년 9월 ≪동국통감≫ 편찬의 감수책임을 맡았다. 1464년 신병으로 감악산신(紺岳山神) 설인귀(薛仁貴)에 치성을 드릴 때, 비바람이 몰아치자 “당신(설인귀)과 나는 세력이 서로 같은데 어찌해 이와 같이 몰아치는가.” 하고 호통했다고 한다.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명신(名神)을 숭배해 사람들의 의아심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활을 잘 쏘고 문장에 뛰어났으나,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고적을 떠돌아다녔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첩에 혹해 정처를 소박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고 한다. 세조를 도와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덕으로 만년에는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남산 아래에 화려한 집을 소유하기도 했다.
시문집으로 ≪소한당집 所閑堂集≫이 있고, 할아버지가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 應製詩註≫는 그의 역사의식을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조 때 ≪동국통감≫의 편찬방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세조묘(世祖廟)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양촌권근 삼대묘역
(제일 윗쪽이 양촌 권근의 묘소이고 중간이 지제 권제의 묘소이며 제일 앞쪽이 소한당 권람의 묘소이다)
양촌 권근 묘소
양촌 권근 묘비-조선국좌명공신의정부찬성사시문충공양촌권선생지묘(朝鮮國佐命功臣議政府贊成 事諡文忠公陽村權先生之墓)', 후면에는 '유명정통구년갑자삼월초십일(有明正統九年甲子三月初十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양촌 권근부인 경주이씨묘표-전면에는 '양촌선생권문충공부인 숙경택주경주이씨지묘(陽村先生權文忠公夫人 淑敬宅主慶州李氏之墓)', 후면에는 '유명정통구년갑자삼월초십일(有明正統九年甲子三月初十日)'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제 권제 묘비-묘비의 앞면 위쪽에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5행으로, '정통을축사월십육일졸 증영의정부사길창부원군행우찬성문경공지제선생권공제지묘 구월초삼일장(正統乙丑四月十六日卒 贈領議政府事吉昌府院君行右贊成文景公止齋先生權公踶之墓 九月初三日葬)'이라 쓰여 있다. 뒷면에는 모두 6행으로 “공은 안동권씨인데 어릴 적 이름은 권도(權蹈)로 양촌 문충공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갑오년의 친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였다. 아들 권지(權摯)는 우부승지이고 권람(權擥)은 길창군판서이고 권반(權攀)은 판사이고 권미(權靡)는 의절장군이고 권설(權挈)은 고사이고 권경(權擎)은 부정이다. 딸 셋은 각각 목사 박대손(朴大孫)·현감 김모(金模)·증참판 한명진(韓明溍)에게 출가하였다. 1457년(세조 3) 3월 4일에 비석을 세운다(公安東人古諱蹈陽村先生文忠公近之子 甲午親試苐一名 男摯右副承旨 擥判書吉昌君 攀判事 靡宣節將軍 挈庫使 擎副正 女牧使朴大孫 縣監金模 贈參判韓明溍 天順丁丑三月初四日立石)”라고 기록하였다.
소한당 권람 묘비-묘비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7행으로 종서를 하였다. 그 내용은 '成化乙酉二月初六日卒 輸忠衛社恊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 吉昌府院君諡翼平公所閑堂權先生擥正卿之墓 四月二十一日葬'이다. 뒷면에는 “공은 본관이 안동인데 문경공 지재 권제(權踶)의 아들이다. 경오년에 문과 1등으로 합격하였고 정난좌익공신에도 모두가 1등에 봉하여졌다. 아들 권걸(權傑)은 보공장군 행호군이고 권건(權健)은 어리다. 큰딸은 정난공신 가선대부 청원군 한서구(韓瑞龜)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절충장군겸도사 박사화(朴士華)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승의랑 감찰 신억년(申億年)에게 시집갔으며 넷째 딸은 절충장군 부사인 남이(南怡)에게 시집갔으며 다섯째 딸은 진용교위겸록사인 김수형(金壽亨)에게 시집갔는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1465년(성화 1) 5월 5일에 비석을 세운다(公安東人止齋先生文景公踶之子 庚午文科第一名 靖難左翼皆居一等 男傑保功行護軍 健幼 女適韓瑞龜靖難功臣嘉善淸原君 次朴士華折衝兼都事 次申億年承議監察 次南怡折衝兼副使 次金壽亨進勇校尉兼錄事 餘皆幼 成化元年五月初五日立石)”라고 새겨져 있다
소한당 권람부인 고성이씨 묘비-비면의 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4행으로 '홍치을묘십월십팔일졸 좌의정길창부원군권익평공영원군부인이씨지묘 병진정월초삼일장입석(弘治乙卯十月十八日卒 左議政吉昌府院君權翼平公寧原郡夫人李氏之墓 丙辰正月初三日葬立石)’이라 쓰여 있다. 뒷면에는 “부인은 좌의정 철성부원군 이원의 딸인데 81세의 수를 누리었다. 큰아들 권걸(權傑)은 길창군이고 둘째 권건(權健)은 병신년에 문과에 급제한 병조참판이다. 딸은 모두가 여섯인데 맏이는 청원군 한서구(韓瑞龜)에게 다음은 군자감부정 박사화(朴士華)에게 다음은 종묘서령 신억년(申億年)에게 다음은 장례원사의 김수형(金壽亨)에게 다음은 좌부승지 신수근(愼守勤)에게 다음은 사헌부감찰 신말평(申末平)에게 다음은 정유년 문과에 합격한 선공감정 민사건(閔師騫)에게 시집을 갔다. 내외손증손남녀가 모두 69명이다(夫人左議政鐵城府院君原之女 享年八十一 男長傑吉昌君 次健丙申文科兵曹參判 女適韓瑞龜淸原君 次朴士華軍資監副正 次申億年宗廟署令 次金壽亨掌隸院司議 次愼守勤左副承旨 次司憲府監察 次閔師騫丁酉文科繕工監正 內外孫曾孫男女共六十九人)”라고 기록하였다
신도비각 전경
문충공 양촌 권근 신도비각
문경공 지제 권제 신도비각
익평공 소한당 권람 신도비각
도통사
양촌권근 부인 경주이씨의 묘표(구)-양촌 권근의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에서 1444년(세종 26) 3월 묘지만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로 이장하였다. 성남에 있는 원래의 묘표석은 500여 년이 지난 1965년에 권근의 묘소 왼쪽 언덕에 있는 문충공사우(文忠公祠宇)로 옮겨 놓았고, 방축리 양촌 권근 부부의 묘소 앞에는 1444년 이장 시 새로 만든 묘표석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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