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영천이씨 이공 려(麗)의 묘소/풍수지리

장안봉(微山) 2013. 3. 5. 22:47

 

 

[과학풍수] 영천이씨 이공 려(麗)묘-조금 위에 있었더라면…

      조선 명풍수 성지대사가 점지…당시 폭설로 못 올라갔다는 說 있어

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라 하면 당연히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년)다. 그는 신라 흥덕왕 2년 전남 영암군의 김씨 성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옥룡자다. 도선국사는 15세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은 신라뿐만 아니라 조선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 명풍수가 많이 탄생했다. 무학대사, 일지대사, 일이대사, 일견대사, 학조대사, 성지대사, 박상의, 남사고, 이의신, 박문수, 이지함 등 이름만 들어도 역사적 인물로 기록된 이들을 여럿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보아 알겠지만 초창기 우리나라 풍수는 처음 승(僧)에서 승(僧)으로 전수되었다.


조선시대의 많은 명풍수 가운데 경북 군위군에서 출생해 월영사에 입산한 성지대사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성지대사 역시 15세에 입산했다. 성지(聖智 또는 性智)는 본관이 남양이며, 용궁현감을 지낸 홍석귀와 고씨 성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서얼(庶孼)로 태어났다. 15세에 월영사에 입산해 선사의 대경을 공부하고 구계(九戒:불교의식)를 받았다.


▲ 성지대사가 출가한 월령곡 월령사 옛 터에서 본 국세.

설화에 의하면 성지대사가 15세 때 입산한 월영사는 소보면 봉소리 연방산 월령곡에 있는 옛 사찰이지만 지금은 없다. 현장을 답사해 살펴보니 옛 선사들이 사찰터를 선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입지 조건을 알 수 있었다. 위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소보면 하소리 마을을 통과해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골이 바로 월령곡이다. 좁은 농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우측으로 넓은 국세가 눈에 들어왔다. 우거진 잡초를 헤치며 자취를 찾아 월령사가 있었던 곳에 도착하니 풍수적 국세가 다소 좁긴했지만 그야말로 와혈형의 국세가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 월령사를 위해 온갖 풍파를 이겨낸 기왓장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잡초가 많이 우거져 있어 월령사가 있었던 정확한 지점은 확인이 어려웠지만 월령사 당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옆에 어느 분의 선조가 모셔진 묘소가 3기 자리하고 있었다.


성지대사는 서얼이다 보니 괄대를 많이 받아 어머니 고씨와 부황리 골짜기에 들어가 살았다. 여기에서 산을 넘어 월령사로 수학을 위해 다녔다. 월령곡과 부황리 골짜기는 연방산(290.3m) 아래에 있는 골이며 서로 반대편에 있는 계곡이다.


성지골이라는 곳은 현재 연방골로 통하고 있으며,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안락정사의 사찰이 자라잡고 있다. 성지대사는 풍수술법에 능통했다. 그의 풍수법은 바로 도선국사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장지법을 숙독해 적용한 것이었다.


▲ 월령곡 월령사 옛터와 영천 이씨 묘역.

경북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 나은 이려(羅隱 李麗·1384~1455년)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는 바로 성지대사가 점혈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월령사는 와혈형 명당이나 흔적뿐


이려는 고려가 망한 이후 군위로 낙향해 이름마저 려(麗)로 바꾸었다. 이곳에 경북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돼 있는 광석재(廣石齋)는 이려의 애국충절과 그의 증손인 우암 이세헌(牛巖 李世憲·1476~1555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 만옹 이정기(漫翁 李廷機·1613~1699년)가 건립한 재사가 있다.


재사 옆을 휘감고 내려오는 산줄기 끝자락 부근에 영천 이씨 묘역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 묘역 제일 상단에 이려의 묘소가 놓여 있으며, 그 아래로 후손들의 묘소가 여러 기 조성돼 있다.


현장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연 정확한 혈자리에 재혈돼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당시의 현장 상태가 많이 변질돼 지금의 상태와는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다.


도선국사의 지리법을 통달해 도안(道眼)을 가진 유명한 성지대사가 점혈했으니 올바른 자리가 잡혔을 것이라 믿고 싶을 뿐이다. 이유는 필자가 풍수지리학을 현장에 적용하는 방법이 바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술법이기 때문이다.


▲ 영천 이씨 이공 려의 묘소 전경.

현재의 지형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지금의 묘소보다 조금만 올려진 곳에 보면 혈증이 약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주변을 훼손시켰기 때문에 가증(假證)일 수는 있다.


이곳에 대한 설화에 의하면 성지대사가 묘소를 점지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도저히 더 올라갈 수가 없어 이곳을 점지했다고 한다.


또 이려를 시조격으로 하는 영천 이씨 묘역을 살펴보면 주산의 역량에 넘칠 정도로 많은 묘소가 한 묘역에 만들어져 있어 안타까움이 있다. 이런 것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것으로 성지대사와 같은 유명하신 분이 풍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산천정기를 못 받아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해서 영원히 지배할 목적으로 처음 시도한 것이 바로 일제강점기 공동묘지제도였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풍수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봄이 되면 과실나무에 많은 꽃이 피고 이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열매들을 모두 수확하기 위해 그냥 두면 상품가치가 높은 열매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자연을 아는 농부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한 가지에 몇 개의 열매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제거해 버린다. 나무의 역량에 한계가 있고 또한 한 가지가 열매를 키우기 위한 역량도 한정돼 있으며 과일들이 서로 너무 가까이 있으면 영양부족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다.

[과학풍수] 영천 이씨 시조묘 조금 위에 있었더라면…
조선 명풍수 성지대사가 점지…당시 폭설로 못 올라갔다는 說 있어

대혈지 보면 자연의 신비에 감탄


풍수지리학을 적용하는 산도 역시 마찬가지다. 산천의 정기는 무한정이 아니므로 주산의 역량에도 한계가 있다. 때문에 옛 명문가 집안은 조상의 유골을 이 산줄기, 저 산줄기에 흩어 모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 대한 풍수지리를 아는 일본인들이 고을마다 어느 한 산줄기를 정해두고 그곳에만 묘소를 쓰게 했다. 비록 자기의 선산이 있어도 임의적으로 길지를 찾아 조상의 묘소를 모시는 것을 금지하면서 생겨난 것이 바로 공동묘지다. 그러므로 풍수적으로 볼 때 하나의 산줄기에 많은 묘소가 들어서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특히 조상 묘 바로 옆에 많은 묘소를 놓는 것은 더욱 좋지 않다.


이려 묘소에 대한 용맥을 살펴보기 위해 묘소 위를 밞아 올라가니 풍수지리에서 소위 중요한 것을 감추어 놓았다는 의미로 ‘천장지비(天藏之秘)’라고 하는 길지가 필자의 눈앞에 들어왔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이런 대혈지를 볼 때면 자연의 원리와 신비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영천 이씨 이공 려의 묘소와 지나치게 많은 후손들의 묘소.

만군을 거느리고 낙동정맥을 따라 행룡하던 용이 팔공산에서 크게 한 번 기봉한 후 북진으로 몇 차례의 과협을 거치면서 행룡하다가 끝 부근에 가서 적라산(352.1m)과 물부리산(353.9m)을 기봉한 후 다시 서북향으로 행진해 기봉한 산이 연방산이다.


멀리 연방산에서 기복굴곡해 행룡하다가 병오로 기봉했다. 다시 묘을로 박환낙맥해 진손(辰巽), 손사(巽巳)로 위이(      ) 기복(起伏)으로 행룡하다가 횡작혈을 만들어 놓은 곳이 현재 천장지비돼 있는 곳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은 용은 다시 혼합용이 되어 진손으로 행진하다 을진(乙辰)으로 위이하면서 용기를 묶은 깨끗한 결인을 거쳐 아름답고 수줍은 모습으로 또 하나의 혈장이 갖춰져 있었다.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혈장을 보고 미래의 주인이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 뒤에서 본 이공 려의 묘소와 그 후손들의 묘소 전경.

그러나 이 산이 만약 영천 이씨 문중산이라면 어쩌면 영원히 비워져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풍수의 원리를 단순히 미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산줄기를 중심으로 조상의 묘소 위 어느 자리에 후손의 묘소를 만드는 것은 역장(逆葬)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힘차게 행진하던 용이 이곳에서 또 멈추지 않고 진손으로 입수해 용진하다가 기운을 묶는 결인처가 현재 상태로 보아 조금은 핍산(逼山) 형태지만 마지막에 살짝 묶은 후 결작되는 곳에 이려의 묘소가 놓여 있으며 그 앞으로 많은 후손의 묘소가 도열돼 있다.


▲ 이려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이 건립한 광석재. 경북문화재 제 214호로 지정돼 있다.

오늘도 천장지비의 혈자리에 앉아 풍수지리학에서 강조하고 있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미래에 적선을 많이 하는 누군가에게 하늘이 이 자리를 허락해 조상을 모시면 훌륭한 후손이 태어날 것이며 그 후손 또한 국가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이처럼 풍수지리학자는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적으로 큰 발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재 육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 윤태중 풍수지리학 박사

 

출처 : 영천이씨대종여로
글쓴이 : [溪巖]환암공파[영양군25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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