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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남 예산]대구서씨 시조 서한(徐?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31

대구서씨(大丘徐氏)

 

시조는 고려 때 조봉대부() 군기소윤()을 지낸 서한(閈)이다. 고려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지내고 달성군()에 봉해진 서진()을 시조로 하는 달성서씨와 근원이 같지만 분파된 시기는 확실히 고증할 수 없다. 후에 서울에 올라와 벼슬을 한 서한의 후손들과 고향에 남아 세거한 서진의 후손들이 각각 경파()와 향파()로 갈라져 대구서씨와 달성서씨로 분파하였다고도 한다. 근원이 같고 달성이 대구의 옛 이름이기도 하여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본관이 다르고 대동보()도 따로 만들고 있다.

시조 이후 2~6세의 세계()는 실전되었다. 7세 익진()은 고려 때 전객사()를 지냈고, 8세 의()는 호조전서()를 지내다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은거하였다. 9세 미성()이 새 왕조에 출사하여 안주목사(使)를 지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상신 9명, 대제학 6명, 왕비 1명을 비롯하여 많은 명신과 학자를 배출한 명문 거족으로 번성하였다. 후손들은 만사공파·전첨공파·첨추공파·도위공파·봉사공파·사가공파·서흥파·춘헌공파·승사랑공파·장원공파·훈련봉사공파·배산파 등 12개 파로 나뉘어 있다.

대표적 인물은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 왕조에서 6조()의 판서와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학자로도 유명한 거정()이다. 그의 종현손인 약봉() 성(渻)은 선조 때 5도의 관찰사와 호조·형조·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인(西)이 주동한 인조반정()을 고비로 약봉의 일가는 전성기를 맞았다.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霦)·경주(霌) 가운데 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4형제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성하여 경수의 현손 종제()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용보()가 영의정에 올랐으며, 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특히 종태()·명균()·지수()의 3대 상신()과 유신()·영보()·기순()의 3대 대제학()이 유명하고, 또 명응(:)·호수(:)·유구(榘:)의 3대는 다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처럼 이른바 '약봉가()'이라 부르는 서성의 가계는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간 정계에서 주요 역할을 하였다.
이밖에 한말의 개화파인 광범()과 재필() 등을 배출하였다. 

[출처] 대구서씨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 癡叔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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