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충남 예산]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30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본관 경주(). 자 찬겸(). 호 면암().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김기현(이항로() 등의 문인().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 철폐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로 된 격렬한 척사소()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의정부 찬정(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임락()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를 구술(), 임병찬에게 초()하여 올리게 하였다.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합 48권)이 있다. 

[출처] 최익현 [崔益鉉 ] |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