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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남 공주] 덕천군(德泉君 李厚生) 사우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20

덕천군(德泉君)

 

1397년(태조 6)∼1465년(세조 11). 이름은 이후생(李厚生).
정종(定宗)의 10남으로 어머니는 성빈지씨(誠嬪池氏)이며, 배위는 고택군부인(高澤郡夫人) 장수이씨(長水李氏)이다.
1444년(세종 26) 명선대부 덕원정(德原正)으로, 이후 덕천정(德川正)으로, 1460년에 덕천군(德泉君)으로 봉해졌다.

 덕천군은 경서(經書)의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는 걸로 보아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슬하에 4남 6녀를 두었으니 장남이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 차남이 부윤도정(富潤都正) 이효숙(李孝叔), 3남이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 4남이 송림군(松林君) 이효창(李孝昌)이다. 장녀는 창녕성씨 성찬(成瓚)에게 출가하니, 그의 차남 성희안(成希顔)이 중종반정의 주역이 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될 때 외숙인 운수군과 외사촌인 안현군(安賢君)을 반정에 참여케 하여 다같이 공신이 되었다.

덕천군은 왕자의 신분임에도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였고, 가난한 이웃을 지성으로 도왔다. 어느 해 여름에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그가 구제하였는데, 덕을 쌓은 어른이라 하여 적덕공(積德公)이라고도 불렀다

 

 

 

 

 

 

 

 

 

 

 

 

 

 

 

 

 

 

 

 

 

 

이경석(李景奭)

 이경석의 본관은 전주(全州)요, 자(字)는 상보(尙輔), 초호(初號)는 쌍계(雙磎), 만호(晩號)는 백헌(白軒)이다. 정종(定宗)의 열 번 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6대손이요, 5대조는 신종군(新宗君) 효백(孝伯)이요, 고조는 완성군(莞城君) 귀정(貴丁)이요, 증조는 함풍군(咸豊君) 계수(繼壽)요, 할아버지는 찬성공(贊成公) 수광(秀光)( 일찍 죽음)이요,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유간(惟侃)(1550-1634)이다.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정국공신(靖國功臣) 개성군(開城君) 종겸(宗謙)의 증손녀요, 대호군(大護軍) 한량(漢良)의 딸이다. 맏형은 호조판서(戶曹判書)와 도승지(都承旨)를 지낸 경직(景稷)(호는 石門)이요, 둘 째 형은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지낸 경설(景卨)이요 백헌은 셋 째이다.

어려서부터 형 이경직()에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 1617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고,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에 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주화파() 대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아 국왕을 섬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여 전쟁이 끝나자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승전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삼전도비()의 비문을 썼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이경직은 이일로 글을 배운것을 한탄하였다.
1637년
예문관홍문관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1641년 이사()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1644년(인조 22)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0년(효종 1) 김자점의 밀고로 조선의 반청정책(북벌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모든 일은 영의정의 책임이라고 자임하고 나섰다. 효종이 청나라 조사관에게 간청하여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53년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668년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을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노론의 영수
송시열() 등 존명사대의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난국을 극복한 탁월한 재상이었으며 일생동안 검소하고 소박한 청백리의 삶을 살았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문집에 《백헌집》이 있으며 글씨에 능하였다. 남원의 방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덕천군 사우 유물전시관 내에 있는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의 정려문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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