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충북 청주]?동래부사 충렬공 천곡 송상현(忠烈公 泉谷 宋象賢)묘소

장안봉(微山) 2012. 12. 14. 22:13

충렬공 천곡 송상현(忠烈公 泉谷 宋象賢)

1551(명종 6)∼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부사맹(副司猛) 승은(承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전(琠)이고, 아버지는 현감 복흥(復興)이다.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10세에 경사(經史)에 두루 통했으며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1576년(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著作)·박사(博士)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들어와 예조·호조·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집의·사간과 사재감(司宰監)·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 때 부사인 그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뒤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 : 관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히라요시(平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뒤에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 충렬사·개성 숭절사(崇節祠)·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고부 정충사(旌忠祠)·청원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재실 여천재(礪泉齋) 전경

송상현 신도비-우측 계단을 오르면 묘소가 있다

 

송상현신도비-宋時烈이 撰하고 宋浚吉이 썼으며 전서는 李正英의 글씨이다

 

 

 

송상현 묘소 전경

송상현 묘소(중앙), 열녀이소사양녀(烈女李召史良女)단소-前左),열녀한소사금섬지묘(烈女韓召史金蟾지묘-前右)의 봉분이 함께 꾸며져 있다

 

 

 

묘소에서 내려다본 여천재

 

 

 

 

 

 

 

 

 

 

 

 

 

이소사 양녀(李召史 良女)

 

조선 중기의 열녀.

 

동래부사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첩이다.
동래부사였던 송상현을 따라가 부산에 있으면서 1592년 왜적 침입의 소문이 일자 송상현한양으로 피신을

시켰다. 그 후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통곡하면서 송상현을 따라 죽겠다며 동래로 돌아왔다
만개(萬介)·금춘(今春)과 더불어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으로 보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앞에 수청들라고 바쳐졌다. 이양녀(李良女)는 죽음으로 항거하니 적장도 절의에 감탄하여 풀어주었다.
전(前) 관백(關白)의 딸이었던 원씨(源氏)로 수절하고 있던 일본 여자와 별원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절개를 굳게 지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 다시 송상현 을 위해 3년상을 마쳤다.

열녀 이소사 양녀 지단(烈女 李召史 良女 之壇)

 

한소사 김섬(韓召史 金蟾)

 

조선 중기의 열녀.

 

본관은 함흥(咸興)이며, 임진왜란 때 순절한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1551~1592]의 첩으로, 함흥한씨(咸興韓氏) 통천군수 한언성(韓彦聖)의 서녀(庶女)이다.

한금섬(韓金蟾)송상현의 첩으로 재주와 미모가 뛰어났는데, 13세가 되던 1591년(선조 24)에 송상현이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부임되자 그를 따라 동래에 갔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동래성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송상현이 조복(朝服)을 입자 의롭게 죽으려는 것을 알고서 즉시 계집종 금춘(今春)과 함께 관아의 담을 넘어 송상현을 찾아갔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송상현을 죽인 뒤였다.
이에 한금섬도 왜적에게 잡혔으나, 삼일을 적을 꾸짖다가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것을 안 적장 평의지(平義智)현소(玄蘇) 등이 송상현과 그 첩의 죽음을 애석히 여기고 시체를 찾아 동문(東門) 밖에서 장사지내고 나무를 세워 표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
1594년 겨울 경상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진중에서 적장 가등청정을 만나 그 사정을 듣고는 조정에 아뢰자 특명으로 송상현을 증직하고 명정되면서 한금섬의 열행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704년 흥덕구 수의동 강촌마을송상현한금섬, 송상현의 또 다른 첩인 이소사(李召史)의 정려가 건립되었다.영의정 현헌(玄軒) 신흠(申欽)이 지은 한금섬 전기(傳記)가 있다.

흥덕구 수의동 강촌마을의 뒷산인 묵방산 중턱 송상현의 묘 옆에 있다. 원래 동래에 있던 것을 여산송씨(礪山宋氏) 집안사람들의 건의로 1595년에 왕명으로 송상현과 함께 이장된 것이다.

열녀 한소사 김섬(烈女 韓召史 金蟾)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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