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란 불교에서 생멸변화(生滅變化)를 초월하는 절대의 진실로, 열반(涅槃)의 다른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선종(禪宗)에서 사용되는 무위(無爲)의 의미는 아무런 행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체(一切)의 행위에 있어 물고기가 물 속을 가듯이, 새가 창공을 날듯이 걸림이 없는 행동을 말한다. 인위적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무위(無爲)'의 절 이름처럼, 무위사는 월출산 남동쪽 기슭에서 한 점의 허세(虛勢)나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찾는 이를 맞아준다.
바쁘게 움직이는 도회적 삶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곳 무위사(無爲寺)에 당도하는 순간, 세상에는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더욱이 그 소박함이 가난의 미(美)가 아니라 단아(端雅)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무위(無爲)란 불교의 최고선(最高善)인 무소유(無所有)와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세속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부정한 불타(佛陀)의 가르침이 없어도, 극락보전이 자리한 무위사(無爲寺)는 영원한 진리 세계를 추구하는데 충분히 한적하고 단아한 절이다. 꼭 필요한 부재만 사용하여 검박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인 극락보전, 우리나라 불교 벽화(壁畵) 가운데 가장앞선 시기의 작품들로 토벽(土壁)에 그려진 수십점의 벽화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거북이 비신(碑身)을 받친 채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선각대사 탑비 등은 무위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이다.
무위사 창건연혁
이곳 무위사(無爲寺)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고 이름지었다는 기록이 '무위사사적(無爲寺事蹟)'에 전하고 있으나, 이는 원효(元曉)의 생몰연대인 617년~686년과 일치하지 않아 믿을 것은 못되고 있다. 이후의 연혁은 삼국통일 후 87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 갈옥사 (葛屋寺) '로 창건하 것이 첫번 째 중창이라고 전한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에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 계통의 선각국사 (先覺國師) 형미(逈微 ..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펼쳐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선각국사에 관한 기록은 무위사 경내에 있는 '선각국사 탑비'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로 미루어 무위사는 '선각국사 (先覺國師)'가 주석하였던 10세기 초 이전에 ' 무위갑사 (無爲岬寺) '라는 이름으로 이미 창건되어 있었고, 선각국사가 중창하면서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위사는 활기를 갖게 되는데, 1407년(태종 7) 12월, 조정에서 각처의 명찰(名刹)을 여러 고을의 자복사(資福寺)로 삼게 하였을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개 사찰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선종사찰(禪宗寺刹)로 시작한 무위사가 그동안의 변화에 따라 천태종(天台宗)으로 그 사격(寺格)이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 (木造阿彌陀三尊佛)'도 이때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476년(성종 7)에 극락보전 후불벽화가 조성되었다.
무위사는 아름답기 이전에 우리나라 수천 년의 역사동안 외침(外侵)과 내환(內患), 뜻하지 않은 재난 등으로 비명에 숨져간 영혼들을 위한 포근한 안식처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억울하고 비통에 가득 찬 가족이나 친지들이 망자(亡者)들의 극락왕생을 빌거나 염원하는 ' 해원(解寃) '의 장소로서 이 절은 위안과 해탈의 길로 인도하여 주는 장소인 것이다.
나라의 재난을 없애고 복(福)을 기원하는, 오랜 전란(戰亂)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그래서 사찰의 이름도 무위사(無爲寺)이고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도 극락왕생을 비는 '극락보전'이라고 하였다. 이를 고증하듯 '신즈옹국여지승람' 권37 '강진현불우조'에는 '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重修)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寺)라고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전의 거립, 아미타삼존도, 아미타여래도 등의 벽화조성 시기 및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륙사 水陸寺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7 '강진현 불우조'에는 '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였던 무위사를 이제금 중수하고, 이로 인하여 수륙사(水陸寺)로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을 건립하고 아미타삼존도, 아미타여래도 등의 벽화를 조성한 것은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의 측면에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륙사(水陸寺)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齋)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육지와 물 위를 떠도는 영혼을 부처의 법력(法力)으로 천도(薦度)하는 의식으로서,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전과 아미타불 벽화 등 극락정토와 관련된 불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신앙구조 속에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천도(薦度)란 불교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좋은 세계로 보내는 종교의식이다. 불교에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법회, 독경(讀經), 시식(施食), 불공(佛供) 등을 베풀어 죽은 영혼들로 하여금 극락정토에 태어나도록 기원한다. 이 천도 의식은 사람이 죽은 지 1주일마다 한 번씩 7.7재를 가지게 되며, 7주째에 행하는 천도 의식을 49齋라고 한다. 즉, 사람이 죽은 지 7일마다 한 번씩 일곱 번을 하는 경우도 있고, 여섯 번은 생략하고 49일齋만 행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천도(薦度)라 하면 일곱 번 행하는 49齋를 가리킨다. 49재가 지난뒤에도 사람이 죽은 지 100일 만에 백재(百齋)로 행하는 천도의식과 1주년과 2주년에 지내는 소상과 대상재가 있다. 이렇게 천도의식은 사람이 죽은 이후 10번을 행하게 된다. 이 열 번의 근거는 사람이 죽으면 명부시왕(冥府十王)으로부터 각각 한번 씩 심판을 받게 되는데, 심판을 받을 때마다 齋를 행하게 된다는 '명부시왕신앙'에 의거한다.
열 번의 천도 의식 중에서도 '49재'가 가장 대표적인 천도의식으로 알려져 있음은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중에서도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대표적인 명부의 왕으로 신앙되고 있으며, 이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49일째가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정기적으로 행하는 천도의식이고, 이와같은 날 수와는 관계없이 非定期的으로 죽은사람을 위하여 행하는 천도 의식도 있다. 수륙재(水陸齋)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수륙재는 주인 없는 고혼(孤魂)들을 위하여 많은 신도들이 공동으로 일정한 날을 택하여 행하는 천도의식이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에 태감(太甘)스님이 네 번째 중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앞에 말한듯이 '무위사 (無爲寺)'란 이름은 이미 1407년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역시 잘못된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법당과 요사가 점차 쇠락하여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으며, 1678년(숙종 4)에 극락보전 앞마당에 괘불지주를 세워다. 그리고 1739년(영조 15)에 해초(海超)의 공덕으로 미타전, 천불전, 시왕전을 보수하고, 당시 주지(住持)이던 극잠(克岑)스님이 중심이 되어 '무위사사적'을 작성하였다.
무위(無爲)란 불교의 최고선(最高善)인 무소유와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세속(世俗)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부정 '한 불타(佛陀)의 가르침이 없어도 극락보전이 자리한 이곳 무위사는 영원한 진리(眞理)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충분히 넉넉하고 단아한 절이다. 무위사에 처음 들어서면 사천왕문이 나오는데, 네 명의 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다.
너른 평야를 내달리다 마지막으로 용트림하듯 불끈 솟아오른 산이 월출산(月出山)이다. 여느 산과 달리 산 뿌리를 드러내 더욱 힘이 느껴진다. 누가 보아도 예사스러운 산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산에 명찰(名刹)이 없을 리 없다. 월출산 동남쪽 산자락에 예쁜 무위사(無爲寺)가 자리하고 있고, 그 서쪽 편에 호젓한 도갑사(道岬寺)가 앉아 있다.
사치스럽고 복잡하고 화려한 절하고는 정반대의 절집 무위사. 무더운 한여름에 찾아가기에는 어쩐지 분위기가 맞지 않는 듯하다. 비가 촉촉히 내리든가,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그런 날이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처음 반기는 것은 ' 월출산무위사 ' 현판을 내걸고 있는 천왕문(天王門)이다. 지은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도 화려하지 않아 아주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고 아담하여 위압적이지 않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절 마당까지 소박한 길이 나 있다.
월출산(月출山)은 전라남도 영암군의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811m의 산이다. 소백산계의 무등산 줄기에 속하며 목포(木浦) 앞바다로 뻗어가다 평지(平地)에 돌출된 잔구(殘丘 .. 준평원 위에 외따로 남아 있는 언덕)형태이다.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고 하여 월라산(月奈山)이라 하고,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부르다가,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이라 불러왔다. 신라말기에는 99개의 사찰이이썼다고 하며, 북쪽의 용추폭포, 동쪽의 구절폭포, 남쪽의 금릉경폭포대 등이 절경을 이룬다. 1978년에 천황봉으로 오르는 산 중턱에 길이 51m, 너비 0.6m의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절벽 높이가 무려 120m가 된다.
월출산 月出山
산 전체가 수석(水石)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암봉(巖峰)과 단애(斷崖)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졌으며,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린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남쪽에 무위사(無爲寺), 서쪽에 도갑사(道岬寺)가 있다. 삼국사기에 월나군(月奈郡)의 월내악(月奈岳)으로 처음 수록되어 있다. 이후 '고려사지리지'에 ' 영암에 월출산이 있다. 신라는 월내악(月奈岳)이라고 부르고 소사(小祀)에 올랐으며, 고려 초에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하여 산 이름의 변화와 통일신라시대부터 산에서 나라의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출산은 지역의 '영암(靈巖)'이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대부분의 지리지에도 등장한다.
예로부터 월출산 산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외감을 가져왔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암에 관한 것이다. 월출산에는 움직이는 바위라는 뜻의 동석(動石) 3개가 있었는데, 중국 사람이 이 바위들을 산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영암(靈岩)인데, 이 동석(動石)때문에 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여 고을 이름도 영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무위사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 월출산무위사 (月出山無爲寺) ' 현판을 내걸고 있는 천왕문(天王門)이다. 지은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도 화려하지 않아 아주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고 아담하여 위압적이지 않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절 마당까지 소박한 길이 나있다. 이 길만 보아도 무위사(無爲寺)가 어떤 절인지 짐작이 간다. 가파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높아진 계단 위로 극락보전이 살짝 보이고, 키 작은 나무와 꽃들이 부담을 주지 않고 서있다. 덥지만 코 앞에 있는 그늘에 빨리 가지 않고 느긋하게 걷고 싶은 길이다.
우리나라 국보(國寶) 중에는 국보(國寶) 답지 못한 국보가 적지 않지만, 이곳 무위사의 극락보전 (極樂寶殿)은 '국보 제13호'의 영예를 유감 없이 보답하고 있다. 이 극락보전의 단아한 아름다움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우리에게 '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 보렴 '하고 조용히 충언을 들려주고 있는 것 같다 (유흥준 교수).
무위사 극락보전에는 2개의 국보(國寶)와 3개의 보물(寶物)이 지정되어 있다. 국보는 극락보전 건물과 아미타여래삼존불벽화이다. 3개의 보물은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과 백의관음도 그리고 극락보전 내벽의 사면벽화(四面壁畵)이다. 이들은 2001년 그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운데 내면 사면벽화는 극락보전이 해체 수리된 1979년에 ' 불화보존각 (佛畵保存閣) '으로 옮겨 보존, 전시하고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다듬돌과 거친돌을 바른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柱礎)를 놓고 배흘림을 한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3출목의 공포를 포작하고 대들보을 얹었으며, 양 쪽에 파련대공을 놓아 중종보를 받치고 있다. 가구 구조는 2고주 7중량으로 되어 있고, 어미기둥은 없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이며, 공포는 주심포 형식이다.
극락보전의 측면은 맞배지붕 특유의 속성인 건물의 구조가 그대로 노촐되어 있어 벽체의 면가 가구(架構)의 선(線)이 이루는 아름다운 조화를 만끽할 수 있다. 이 건물의 구조 형식은 앞선 시기에 건립된 수덕사(修德寺) 대웅전의 형식과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수덕사의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우미량(牛眉樑) 같은 장식부재는 없으나 '人'자 대공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게 짠 구조와 보아지를 화려하게 조각하여 사용한 것 등으로 인해 직선(直線)과 곡선(曲線)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맛과 멋이 다른 목조건물과 차별화되어 기능성(機能性)과 화려한 장식성(裝飾性)이 조화를 이루어 각각의 특징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목조건물이다.
직선과 곡선 直線과 曲線
직선과 곡선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맛과 멋이 다른 목조건물과 차별화되어 기능성(機能性)과 화려한 장식성(裝飾性)이 조화를 이루어 각각의 특징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극락보전 건물의 측면이다. 기능에 충실한 직선(直線)과 장식성에 충실한 곡선(曲線)이 만나 조화를 이루며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목조건물의 특징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측면뿐 아니라 건물의 상부를 받치는 네 곳의 귓기둥과 귓기둥 사이에 있는 평주(平柱)들의 조화, 둥근 기둥과 각진 도리, 들보들과 보아지의 곡선의 조화, 연등천장과 반자천장의 조화, 네모난 소란반자와 그 안에 그려진 둥근 연꽃의 조화, 직선의 소로와 첨차에 조각된 소로받침이 만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작은 원형들의 수많은 공간등 등 직선(直線)과 곡선(曲線)의 만남, 충직한 기능성(機能性)과 충실한 장식성(裝飾性)이 만나 조화(調和)를 이루며 만들어 내는 조화의 아름다움이 무위사 극락보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배례석 拜禮石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배례석(拜禮石 .. 위 사진)은 법회에 참석한 사람이 많아 극락보전에 다 들어갈 수 없을 때 마당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을 그린 야외용 '괘불(掛佛 ..걸개 그림)'을 양쪽 석주(石柱)에 지지하고 배례하던 곳으로 괘불석주와 배례석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이다. 현재 남아 있는 괘불석주로 추정해 볼 때 상당히 큰 괘불(掛佛)을 걸었을 것으로 보여 수륙재를 지낼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배례석은 직사각형의 대석(臺石)으로 극락보전 앞에 놓여 있다. 길이 130cm, 너비 98cm, 높이 9cm의 크기이다. 배례석은 불전(佛殿)이나 탑 앞에 배치하여 그 위에 향로나 제기(祭器)를 올리도록 한 장치이다. 배례석 윗면에는 커다란 단판8엽(單瓣八葉)의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의 원좌(圓座)에는 8개의 씨방이 표현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연화문 배례석이 있다는 것은 왕이 그 절을 방문하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911년 왕건(王建)이 선각대사(先覺大師)를 만나기 위하여 이곳 무위갑사(無爲岬寺 .. 당시 이름)를 방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왕건은 고려를 개국한 918년, 선각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각대사 (先覺大師)'라는 시호(諡號)와 ' 편광영탑 (遍光靈塔) '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왕건(王建)은 고려를 개국하기 전인 911년에 나주(羅州) 지역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이에 따라 선각대사는 왕건과 함께 개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선각대사는 공(空)과 선(禪) 사상을 설파하게 되었고, 왕건은 ' 자취가 없는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말이 필요없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聞絶跡之譚猶認無言之理 '라고 하였다.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 木造 阿彌陀三尊佛坐像
극락보전 불단 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은 현재 보물 제13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에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측(向右)에는 왼다리를 내려 반가(半跏)자세를 취한 채 보병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을, 우측(向左)에는 석장(石杖)을 짚고 오른다리를 내려 반가자세를 취하고 있는 지장보살상을 배치하였다. 모두 개금(改金)처리와 개채(改彩)가 되어 있는데, 다소 미숙한 개금(改金)처리로 인하여 표면이 거칠어졌을 뿐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고려 후기 불상양식의 계승과 함께 조선 초기 불상 양식의 정립이라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으며, 조성연대는 1934년 보수 당시 발견된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3층석탑 (국보 제44호), 석탑지(石塔誌)의 기록 중에 ' 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 無爲寺造主佛 ' 이라는 기록과 관련하여 살펴 볼 때 1478년 쯤 조성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 '삼존불'은 고려 후기를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佛像)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始原的)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또한 150cm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木造佛)임에도 불구하고 보존상태가 극히 양호한 편으로 우리나라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하고 한다. 각각의 크기를 보면 본존불은 전체 높이 122cm, 관세음보살은 전체 높이가 146cm, 지장보살상은 전체 높이 140cm의 크기이다.
본존불, 아미타불상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이 있는 신체 비례를 지니고 있는 이 불상은 연화대좌와 불신(佛身)이 하나이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에 손은 하품중생인(下品衆生印)의 수인(手印)을 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고려 후반기의 단아한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미소가 사라져 근엄해 보이기까지 하는 둥글넙적한 얼굴에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와 처진 가슴, 간략화하고 정형화된 옷주름, 가슴 아래로 가로지르는 승각기의 평행 띠주름, 금구 장식의 소멸 등 조선 초기 불상들에게서 새롭게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을 함께 갖추고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인이시며, 중생들의 가장 가까이에서 고통을 함께 하거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여래이며, 서방정토인 극락(極樂)은 고통과 번뇌가 없는 곳으로 행복한 마음과 웃음이 있고, 하루종일 꽃비가 내리며, 아름다운 음악들이 들리며,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천인(天人)들이 살며,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곳이라고 한다. 여래(如來)로 화생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고통이라도 더 덜어주고자 보살게에 남은 대표격인 관세음보살과 지혜의 화신 세지보살을 좌우 협시보살로 두고 있다.
좌협시(左脇侍)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금속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양 어깨 위로 굽실거리는 보발(寶髮)이 흘러내리고 있다. 선정인(禪定印)과도 같은 손가짐을 취하고 있는 두 손에 보병(寶甁)을 받쳐 들고 있으며, 대좌와는 별도로 조성되었다. 앞쪽의 옷자락 또한 몸으로 흘러 내리지 않고, 대좌와 함께 조성됨으로써 몸체와 분리되는 특색이 엿보이고 있다.
선정인(禪定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겹치어 놓되, 두 엄지 손가락을 마주 대고있는 형식을 말한다. 손의 위치가 바뀌는 경우도 있으나, 오른손이 위로 가는 것이 좋다. 이러한 '선정인'은 결가부좌할 때 또는 좌선할 때 취하기도 하는데, 마음을 평등히 지니고 사념과 망상을 버리며,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한곳에 모아지게 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 금강보좌 위에 앉아 명상에 잠길 때 취한 수인(手印)이다.
본존불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칭하여 자리하고 잇으며, 오른손으로는 6개의 금속제 고리가 매달려 있는 석장(石杖)을 짚고 있다. 세 불상 가운데 비교적 갸름한 형태의 얼굴을 하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가슴에는 간단한 가슴장식이 되어 있다. 걸터 앉은 듯 오른다리를 내려 반가(半跏)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 불상에서 역시 관음보살상과 마찬가지로 앞쪽 옷자락을 몸체와 분리하여 대좌와 함께 조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자고대와 법고 獅子鼓臺와 法鼓
극락보전 안에는 사자(獅子)의 등 위에 올려놓은 독특한 법고(法鼓)가 놓여 있다. 고개를 약간 쳐든 채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해태보다는 사자(獅子)인 듯하며, 둔중한 신체에 막대형 다리로 표현되어 있다. 간주나 북을 받치는 받침 없이 사자의 등 위에 북을 올려 놓고 천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북과 사자는 모두 채색되어 있고, 원통형의 북 몸체에는 운문(雲紋)이, 가죽 부분에는 삼태극(三太極)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사자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아미타 후불벽화 阿彌陀 後佛壁畵
무위사 극락보전 안에는 1476년(조선 성종 7)에 그림을 끝맺었다는 화기(畵記)가 적혀 있는 '아미타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가 원화(原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두루마리 탱화가 아닌 토벽(土壁)의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後佛壁畵)로 화려하고 섬세하였던 고려 불화의 전통을 유감없이 이어 받은 ' 名作 중의 名作 '이라고 한다. 무위사 벽화 이후로 고려 불화의 전통은 그 맥을 잃게 되었고, 우리가 대부분 절집에서 볼 수 있는 후불탱화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 18,9세기의 것들이니 그 기법(技法)과 분위기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라고 한다.
1476년에 그린 보물 제 1313호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봉안된 ' 아미타삼존벽화 '로서,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해 별도로 세운 흙벽에 채색(彩色)그림으로 그렸다. 가운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과 지장보살이 시립(侍立)하고 있는 아미타삼존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벽화는 고려 불화의 영향과 조선 초기의 새로운 수법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걸작으로 화려하기 그지 없다.
이 벽화의 좌우 하단에는 화기(畵記)가 적혀 있는데, 이 가운데 오른쪽 내용에 ' ㅁㅁ十二年丙申三月初 吉畵成無量壽如來觀世音地藏菩薩 .. 畵員 大禪師海連 ' 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년도(年度) 부분이 퇴락하여 조성연대를 알 수 없는데,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3층석탑 북탑지(北塔誌)의 내용 중 ' 成化十四年戊戌四月十七日 ... 重修造 ... 無爲寺造主佛說大會安居 ' 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성화(成化) 12년인 1476년 화원대선사 해련(海連)이 조성한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이 아미타후불벽화(阿彌陀後佛壁畵)는 지금까지 발견된 불교의 벽화 가운데 가장 앞선 것으로, 고려 양식을 지닌 조선 초기의 불화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화면의 크기는 가로 210cm, 세로 270cm의 크기이다. 이 아미타삼존불 벽화는 고려 불화의 전통을 유감 없이 이어받은 작품이지만, 역시 조선시대의 불화답게 고려불화의 엄격한 상하 2단 구도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원형(圓形)의 구도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의 불화라면 협시보살(脇侍菩薩)로 설정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아미타여래 무릎 아래로 그려 위계질서(位階秩序)를 강조하면서 부처의 권위를 극대화시켰겠지만, 이곳 무위사 벽화에서는 협시보살이 양 옆에 서고 그 위로는 6인의 나한상(羅漢像)이 구름 속에 싸여 있으면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행복한 친화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렇게 같은 불화(佛畵)라도 상하 2단의 구도와 원형 구도는 신앙 형태상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이 그 시대를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그 내용만이 아니라 이처럼 형식에서도 구현되는 것이다.
본존불 아미타여래 (本尊佛 阿彌陀如來)
본존불 아미타여래의 광배(光背)는 정상부가 뾰족한 두광(頭光)이 신광(身光)과 연결되어 있는 기형광배(箕形光背 .. 키 모양의 광배)로서 15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둥글고 단정한 모습이며, 머리의 둥근 육계 위에는 정상계주(부처 머리 위의 구슬장식)가 붉게 표현되어 있다.
본존불의 왼쪽에는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관음보살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왼손에 석장(石杖)을 잡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이다. 구름을 배경으로 한 화면의 상단 좌우로는 6인의 나한상(羅漢像)을 배치하였는데, 가슴 윗부분만 드러내고 채색을 부드럽게 하여, 중앙 삼존으로 향하는 시선이 분산되지 않도록 처리하였다. 다시 그 위에는 서광이 펼쳐진 가운데 좌우로 소형의 좌불(坐佛)이 각 두 불(佛)씩 그려져 있다.
본존불 대좌 괴수 (本尊佛 臺座 怪獸)
좌협시 관음보살 (左脇侍 觀音菩薩)
삼산형(三山形)의 머리 윤곽과 신체의 부피감, 괄호 모양의 이마 처리, 법의(法衣)의 금선 문양 표현, 두건을 쓰고 있는 지장보살, 관음보살의 투명한 겉옷과 치마 끝단의 구불구불한 옷주름, 온화한 색채 등은 고려적(高麗的)인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요소이며, 반면 큼직한 육계와 정상계주, 발 위로 길게 내려트린 왼손, 간결한 문양, 사각대좌의 키 모양의 광배, 발목의 레이스 모양의 옷자락 표현, 본존불과 대등한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은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협시 지장보살 (右脇侍 地藏菩薩)
무위사에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조선 명종(明宗) 10년인 1555년 4창(創)할 때 건립된것인데, 이 극락전만큼은 1956년 보수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뒷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인 연기문(緣起文)을 통항 조선 성종(成宗) 7년인 1476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임이 밝혀졌다. 이 극락전은 엇맞추어 쌓은석단(石壇)에 갑석(甲石)만을 둘러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아 세웠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을 한 단층 겹처마집이다.
기단(基壇)은 앞쪽만을 높게 쌓고 두 옆면과 뒷면은 지세(地勢)를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다. 주좌(柱坐)를 새기지 앟은 주춧돌 위에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머리와 주심포작(柱心包作)을 짜올려서 가구를 결구시켰다. 건물의 앞면은 격자모양빗살모양을 섞어 만든 4분합(四分閤) 문을 달았고, 옆면에는 앞쪽에 출입살문을, 뒷면에는 칸맏 모두 판자문과 창(窓)을 달았다.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벽이 삼각형(三角形)으로 이루어진 맞배지붕의 미학(美學)이 넘쳐 난다. 또 맞배지붕은 측면 구조가 노출되므로 그 미관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전문가들은 ' 조화로운 면(面) 분할로 단정한 맛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평가한다.
내벽 사면벽화 內壁 四面壁畵
1974년에 극락보전을 다시 해체 수리를 할 당시, 내벽에 있던 벽화 가운데 아미타후불벽화와 백의관음벽화를 제외한 28점의 벽화를 떼어내어 '보존각(保存閣)'에 보존, 전시하고 있다. 이들 벽화는 극락보전 동측 내벽 중앙의 삼존불화와 서측 내벽(西側 內壁) 중앙의 아미타내영도, 연화당초향로도, 관음, 대세지보살도, 주악비천도 등으로 일괄 보물 제13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러 전쟁에서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水陸齋 ...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의식)을 지내기 위하여 조선세종대왕 때 건립한 극락보전은 건물 자체로도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지만, 극럭보전 안에있는 후불벽화와 후불벽화 뒷면에 있는 백의관음도 그리고 극락보전 내 사면(四面)에 그려져 있었던 벽화는 조선초기 불화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극락보전 안 사면벽(四面壁)에 그려져 있었던 ' 아미타내영도 (阿彌陀來迎圖) ' 그리고 '설법도(說法圖)'와 '오불도(五佛圖)' 등 극락세계를 표현한 벽화는 현재 떼어내어 앞 성보박물관(위 사진)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극락전 내벽(內壁) 사면벽화(四面壁畵)는 보물 제 1315호로 지정되어 있다.이 벽화들은 조선 성종(成宗) 7년인 1476년에 조성된 그림으로, 원래는 국보 제 1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무위사 극락전에 있던 것을 1974년 극락전을 보수하면서 벽면(壁面)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어 '벽화보존각'으로 옮겼다. 아미타내영도, 석가여래 설법도, 보살도, 오불도(五佛圖), 비천선인도(飛天仙人圖) 등 총 29점이 유리장 안에 진열되어 있다.
벽화에 얽힌 전설
이곳 무위사 극락보전 벽화에는 독특한 전설(傳說)이 전하고 있다. 무위사(無爲寺)에 극락보전을 짓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을 즈음, 한 노인(老人)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 안을 들여다 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 이를 허락한 주지(主知)스님은 약속대로 기다렸으나, 도대체 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마지막 49일 째 되는 날, 주지(住持)스님은 설마 작은 구멍으로 살짝 보는 것은 괜찮겠지 .. 라고 생각하면서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 보고 말았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있어야 할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화들짝 놀란 주지스님이 법당(法堂)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지막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리서 지금도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아미타내영도 阿彌陀來迎圖
조선 초기의 벽화로 1476년에 그린 그림으로 흙벽에 채색으로 그렸다. 원래는 극락보전의 서측 벽면에 봉안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떼어내서 세로 세운 '보호각' 안에 보존, 전시하고 있다. 이 벽화는 염불을 잘 행한 사람은 죽을 때나 수행이 성숙해지면 아미타불이 마중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는 내용을 도상화(圖像畵)한 그림이다.
이 벽화는 염불(念佛)을 잘 행한 사람은 죽을 때나 수행이 성숙해지면 아미타불이 마중을 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 간다는 내용을 도상화(圖像化)한 '아미타내영도'이다. 아미타불과 8보살, 8비구(比丘)가 늘어선 독특한 배치 구도를 보이고 있다.
옆으로 긴 화면의 아래위에 묘사된 구름을 배경으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삼존불이 부각되어 있다. 그 옆에는 좌우에 각각 3보살과 그 위로 비구들이 그려져있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오른쪽으로 몸을 향하여 나아가려는 자세로,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뻗고 왼손은 들어서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마치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 모양은 둥근 육계에 중앙계주만 표현되고 있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초리가 올라간 긴 눈, 구불구불한 옷자락이 표현 등은 고려 후기, 특히 14세기 불화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법의 자락 앞에 대칭으로 늘어진 점은 조선 초기에 나타난 특징으로 보인다. 보관(寶冠)에 화불(化佛)과 보병(寶甁)을 뚜렷이 나타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각각 정병(淨甁)과 경함(經函)을 들고 있다. 치레 장식이 억제된 관음보살과는 달리 대세지보살은 무릎 부근을 구슬로 장식하는 등 화려한 모습이다. 드러나 있는 가슴부근을 특징적인 띠로 둘러 가리고 있다.
이밖의 보살들은 각기 특징적인 지물(持物)을 지니고 있다. 특히 지장보살은 고려시대 크게 유행하던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벽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게 묘사되고 있다. 보살들 위로 상체만 그려져 있는 8비구(比丘)는 다양한 얼굴 표정과 자세 등으로 이 그림에 활기를 찾아주고 있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 경변상도(經變相圖)의 필선(筆線)과 닮은 활달하고 구불구불한 필선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과감할 정도로 밝고 엷은 적색과 녹색 등 고려 불화의 양식이 짙게 나타나 있다. 반면에 화면에 나한(羅漢)이 등장하는 등 세부 묘사에서 조선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예가 드문 조선 초기의 불화 가운데 하나로, 작가의 뛰어난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의관음도 白衣觀音圖
이곳 무위사 극락보전 안에는 별도로 세워진 토벽(土壁) 위에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1476년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화면을가득 채우고 있는 둥그스럼한 광배(光背)를 지니고 바다 위에 떠 있는 관세음보살이 자신을 찬양하는 노비구(老比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다. 화면의 크기는 가로 280cm, 세로 320cm의 크기로 보물 제13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관세음보살은 떠가는 듯 넘실대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서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살짝 쥐고, 왼손에는 정병(淨甁 .. 깨끗한 물이나 감로수를 담는 병)을 쥐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천의(天衣) 자락은 간략하지만, 강약의 표현에 변화가 있어 화면을 가득 채운 파도(波濤)의 곡선과 함께 매우 율동적이며 생동감이 충만하고 있다.
넓적한 얼굴, 굵은 목, 넓은 어깨, 커다란 발 등 체구가 당당하고, 팔찌와 가슴장식의 표현이 화려하면서도 절제의 미(美)가 있으며, 필치가 활달하고 유려하며 긴장감이 넘쳐 흐른다. 관음보살이 내려다 보고 있는 늙은 비구(比丘)는 무릎을 꿇은 채 합장을 하고 있는데, 그 표정은 관음보살을 예배하며 구원을 바라는 염원이 매우 절실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늙은 비구(比丘)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 보고있는 새 한마리(靑鳥)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고 표현되어 있다.
해안고절처 海岸孤絶處
중유낙가봉 中有洛迦峰
대성주불주 大聖住不住
보문봉불봉 普門逢不逢
명주비아욕 明珠非我欲
청조시인수 靑鳥是人遂
단원창파상 但願蒼波上
친첨만월용 親添滿月龍
바닷가 외딴 곳 한 가운데 낙가봉이 있더라 / 석가모니불 계시든 아니 계시든 아미타불 만나든 못 만나든 / 빛나는 구슬 내 바라는 바 아니고 / 우리가 찾는 것은 파랑새 뿐 / 단지 바라는 것은 푸른 물결 위 보름달 같은 얼굴 보기를...
백의관음. 수월관음 白衣觀音. 水月觀音
머리로부터 발 끝까지 온통 백의(白衣)를 걸치고 있는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어린 아이의 순조로운 출산과 그 어린 아이의 생명을 구하고 보살피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보살이다. 청정(淸淨)을 의미하는 흰 연꽃 위에 앉아 있으므로 백처존(白處尊)이라 하였다는 그의 별명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대백의관음 또는 백의관자재모(白衣觀自在母)라고도 불리운다.
일반 관음보살의 경우 대부분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비하여, 백의관음은 흰 두건(頭巾)을 쓸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흰옷을 걸치고 있다. 백의관음의 형상은 백옥색(白玉色)으로 왼손을 펴서 젖가슴에 대고, 오른손에는 연꽃을 쥐고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였으며,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백의관음은 인도(印度)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중국풍의 수월관음(水月觀音) 이전부터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당나라 말기 수월관음도에 백의(白衣)가 응용되기 시작하면서 수월관음상에 백의관음상이 융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벽화가 일어난 배경에는 수묵화(水墨畵)의 발달과 선종의 융성으로 수묵관음도(水墨觀音島)가 나타나면서 표현상 관세음보살이 자연스럽게 백의(白衣)를 걸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수월관음(水月觀音)이란 하늘에 뜬 달이 물 속에 비친 달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에서 발생한 고난을 구제하여 달관(達觀)하게 하는 사색적인 보살로 33관음 중의 하나이다. 이 수월관음(水月觀音)을 주제로 한 그림은 주로 암인도의 바다에 면하고 있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의 바위 위에 반가좌(半跏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모습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환상이, 꿈 또는 물에 비친 달이 덧없음과 같다는 것을 깨우침으로써 고난(苦難)을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맷돌
무위사 종무소 건물 옆에는 커다란 고목(古木)과 함께 그 연륜과 크기를 자랑하는 대형의 맷돌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상층부는 없어지고 하층부만 남아 있는 이 맷돌은 지름이 180cm나 되는 대형의 맷돌로 길쭉한 바가지 모양을 하고 있다. 중앙의 넓게 파진 홈에 곡식을 넣고 분쇄한 후 그대로 그릇을 대고 받을 수 있도록 한 쪽이 길게 돌출되어 있는 채 트여 있다. 중앙에 놓인 둥근 돌에는 10cm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 7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바로 앞에 있다. 조성연대는 탑비(塔碑)와 같은 시대인 고려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전형적인 2층 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되고 균제된 석탑이다.
지대석(地臺石)은 수매의 장대석(長大石)으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 기단의 중석이 연결되어 있다. 각구를 2구로 나누어 중앙에는 탱주(撑柱) 1주와 양면에는 모서리 기둥을 모각하였다. 모서리 기둥과 탱주 사이에는 안상(眼象)이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하대 갑석은 3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어 있다. 하면에 엷은 1단의 부연(附椽)을 각축(刻出)하고, 상면도 역시 1단 각형 괴임대를 조각하여 탑신부를 받고 있다. 상층 기단 중석은 4매 판석으로 각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정연하다. 동서면에 벽판석이 있고, 남북면에는 2매 판석으로 결구하였다. 각면에 새겨진 면상은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옥개석(屋蓋石)은 상면의 낙수면(落水面)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볍게 반전되었다. 처마의 하면은 수평이며, 층급받침은 각층 4단이다. 지붕돌 상면의 중앙에서는 1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상층의 몸체를 받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보주(寶住)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隅柱)가 모각되었고, 2~3층에서는 높이를 줄여 체감되었다. 3층 지붕돌과 1층 지붕돌 일부에서 약간의 파손을 입었을 뿐이다. 그 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 양식을 충실히 고수하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기는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이 탑비는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년)에 세운 것이다.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태조 왕건(王建)이 ' 선각(先覺)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탑 이름을 ' 편광탑(遍光塔) '이라 하였다. 이 비는 선각대사(先覺大師)가 입적한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약 2.35m, 너비 1.12m의 규모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서쪽 약 30m에 위치하는데, 돌로 쌓은 담장 안에 남향으로 서 있다. 귀부(龜趺), 비좌(碑座), 비신(碑身), 이수 등을 다 갖추고있는 전통적인 양식의 비(碑)다.
귀부(龜趺)의 두부(頭部)는 양 뿔을 뚜렷이 조각한 용머리이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은 투조(透彫)로 되어 있다. 거북의 등에는 6각갑(六角甲) 무늬를 양각(陽刻)하고, 비좌(碑座)의 앞뒤 2면에는 보운(寶雲) 무늬, 양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각각 양각(陽刻), 음각(陰刻)으로 새겼다. 이수에는 3단의 층급형(層級形) 받침을 새겨 겹송이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비제(碑題)는 '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명 정서 (高麗國故無爲岬寺先覺大師遍光靈塔碑銘 井序) '라고 시작하여 지은이 최언휘(崔彦煇)와 쓴 이 유훈율(柳勳律)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각부의 조각 기법은 당대의 다른 비석에 비하여 사실(寫實)의 경향을 띠어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주고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2cm이고 해서체(楷書體)이다.
비문(碑文)에 따르면, 선각대사는 무주(武州 .. 지금의 광주) 출신으로 법휘(法諱)는 형미(逈微)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882년(신라 헌강왕 8)인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조선사(普照禪師)를 찾아가 선법(禪法)을 배웠다. 그리고 27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도응(雲居道應)의 심인(心印)을 받고 905년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가 선각대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라고 한다.
구족계 具足戒
출가한 비구(比丘), 비구니(比丘니)가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다. 종파에 따라 계(戒)의 수는 다르지만 보통 비구(比丘)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계(戒)를 구족계(具足戒)라고 하는 것은 그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 '계(戒)'의 숫자는 단지 긴요한 것만을 열거한 것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일체의 행위에 청정(淸淨)을 약속하는 것이므로 구족(具足)이라고 한다. 이 계(戒)를 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계작법(受戒作法)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통하여 불교 교단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미륵전 彌勒殿
이곳 미륵전(彌勒殿) 안에는 무위사와 잘 어울리는 석불(石佛)이 봉안되어 있다.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토속적인 불상이 있기 마련인데, 이 석불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석불이 아닌가 싶다. 인근 수암마을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 석불을 보고 있으면 이 지방의 아주머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눈두덩과 입술이 두툼하고 전체적인 얼굴이 어지간한 시련쯤은 얼마든디 견디어 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상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본인은 배우지 못하면서도 갖은 고초를 다 겪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굳센 남도(南道)의 어머니를 보는 것 같다. 이런 분들은 배우지 못하였어도 사리가 분명하고, 자기 주관 또한 또렷하여 외모만 보고 박대하였다가는 크게 무안을 당할만한 대찬 여인이다.
이 석불은 자연석에 부조(浮彫)로 새겨 모셨다. 이마 위에 육계와 머리 형태가 마치 여인의 몰림머리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불상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신(佛身) 주변에 화염문(火焰紋) 광배(光背)를 선각(線刻)한 점이나, 목의 삼도(三道)와 수인(手印) 등에서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 부숭부숭한 눈두덩에 입술이 두텁고, 인중이 짧으며, 왼쪽 어깨는 움츠린 듯 좁게 표현하였다. 현재의 하단부가 마루바닥 밑으로 들어가 있어,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마루까지의 높이는 218cm이다.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이 천불전(千佛殿)이다. 삼신불(三神佛)과 삼세불(三世佛), 천불, 삼천불 등 다불(多佛)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는데, 본래 천불(千佛)에는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이 있다.
'여행이야기(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백팔대참회문(百八大懺悔文) (불교TV) (0) | 2013.02.20 |
|---|---|
| [스크랩] 영인스님 정근 모음 (0) | 2013.02.20 |
| 2013년 2월 16일 오전 12:01 (0) | 2013.02.16 |
| [스크랩] 동영상 염불.독경 모음.필요 하신분...... (정리:2008-47.27) (0) | 2013.02.15 |
| [스크랩] § 관세음보살사십이수진언 § (0) | 2013.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