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인물열전 원나라의 동녀 징발을 폐지토록 한 경학의 대가 이곡
원나라의 동녀 징발을 폐지토록 한 경학의 대가 이곡(李穀)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寧海都護府 流寓條]
이 웅 재
이곡(李穀:1298∼1351)의 자는 중보(仲父), 초명(初名)은 운백(芸白), 호는 가정(稼亭)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지금의 충남 서천)이지만, 영해도호부(지금의 영덕군) 유우(流寓: 방랑하다가 타향에서 머물러 삶) 조(條)에 “급제하기 전 여기에 와서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경북의 인물로 치부할 만한 근거를 남겼다.
그는 한산 이씨의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으로,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범상하지 않았고 꾸준히 공부에 정진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받들어 모셨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 과거의 예비시험)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으며,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그곳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는데, 문장을 지음에 있어 붓을 잡으면 곧 이루어졌으며, 글의 뜻이 매우 엄정하고도 간결하여 그곳의 문사들도 그를 감히 외국 사람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대접을 받음으로써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성 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省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때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의 동녀(童女) 징발을 자주 하였으므로 어사대(御史臺)에 말하여 이를 폐지할 것을 청하는 한편 소(疏)를 지었다.
“…옛날에 우리 세조황제[忽必烈]께서는 천하에 민심을 얻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더욱이 멀리 떨어져 있고 풍속이 다른 곳에는 그 풍습에 따라 순리로 다스렸습니다.…고려는 본래 해외에 있어 따로 일국을 이루어 적어도 중국에 성인이 있지 않으면 아득히 서로 더불어 통하지 않았으니 당 태종의 위덕(威德)으로도 두 번이나 침공하였으나 소득이 없이 돌아갔습니다. 귀국의 건국 초기에는 맨 먼저 솔선하여 귀순하여 귀국 왕실에 큰 공훈을 세웠으므로 세조황제께서는 공주를 우리나라에 출가시키는 동시에 조서로써 명시하시기를 ‘의복과 예의 제도는 조상의 풍습을 없애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그런데 부시(婦寺: 궁중에서 일을 보던 여자와 환관)의 무리들이…임금의 이름을 팔아 다투어 역마를 달려 해마다 처녀[童女]를 강탈하여 수레에 싣고 가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대저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장차 그 반포(反哺)함을 바라기 때문입니다.…고려의 풍속은 남자가 차라리 본가로부터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진(秦) 나라의 데릴사위와 같아서 무릇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여자의 임무로 되어 있습니다.…듣건대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이를 숨기고 오직 드러날까 걱정하여 비록 이웃이라도 보지 못하게 하고…이윽고 군대와 관리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수색하고 만일 숨기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을 구속하여 매질을 하고 곤욕을 주어서 처녀가 나타난 뒤라야 그치니, 한번 사신을 만나면 나라 안이 소연(騷然)하여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 없게 됩니다.… 여자 하나를 뽑는 데 수백 집을 뒤지며…그 수가 많으면 사오십 인에 달합니다. 이미 선발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한 곳에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국경 밖으로 보내게 되면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었습니다. …옛적에 동해에 원부(寃婦)가 있으매 삼 년 동안 하늘이 가물었는데 이제 고려에는 원망을 품은 여자가 그 얼마이겠습니까? 근년에 나라에 수재와 한재가 서로 잇달아 백성의 굶어 죽는 자가 심히 많은 것은 이러한 원한이 모여서 생기는 괴변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덕음(德音)을 내리시어…법으로써 엄금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 없게 하기를 바랍니다.…”
황제가 이를 가납(嘉納)하였고, 고려에서는 그에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의 벼슬을 내렸다. 그 뒤 본국에서 밀직부사,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 충선, 충숙 3조(三朝)의 을 편수하였으며, 한때는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과거시험을 관장하였는데, 학력이 없는 세가(世家) 자제들을 많이 선발하였다고 하여 헌사(憲司)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 원나라에서 불러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 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얼마 안 되어 귀국하였으나, 충정왕이 즉위하자(1349) 일찍이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던 연유로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이듬해 원나라로부터 다시 벼슬을 받았으나 그 다음해에 죽었다. 그는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비교적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정몽주(鄭夢周), 백이정(白頥正), 우탁(禹倬)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동문선(東文選)』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시와 가전체(假傳體) 작품「죽부인전(竹夫人傳)」이 수록되어 있으며,『가정집(稼亭集)』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었고, 묘소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곡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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