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화서면상현리377-1-태실
연산군 년(1501) 7월 2일 입석(홍치14년7월2일)비석 전면의글, 뒷면에글씨는 일본인이 마모시켜버렸고, 태실을열고 내용물은꺼내가고 태실은 열린체 나뒹굴고있었다.
연산군은 성종대왕의 맏아들로 성종대왕14년(1483)세자에 책봉되어 성종대왕25년(1494) 즉의 하였다. 빈민구제에 힘쓰고 국방에 주력하는 등 초기에는 치적이 많았으나 생모 폐비윤씨에 관한 일을 할고 부터 점차 포악해져 국고를 탕진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 중종 반정이 일어나자 연산군으로 강봉, 강화교동의 초옥에 유배되었다가 두달만에 심화병으로 별세했다.
직첩 기록상 1황후와 3후궁을 거느리고 4남 2녀를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명부 직첩의 기록상이다. 정비는 거창신씨이고 2남 1녀 폐세자(황) 2남 창녕대군(인), 후궁 폐숙의 윤씨는 2남 1녀 3남 양평군(성) 4남(돈수), 후궁 폐숙의 최씨, 후궁 폐숙용 장녹수 이다.
이곳 태실은 제 1왕자 폐세자 (황)의 태실이며 연산군 8년(1502)9월15일 세자책봉되었으나 연산군이 폐위되어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됨.
제2왕자 창녕대군(인) 황해도 수안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됨.
제 3왕자 양평군(성) 일찍사망, 제4왕자(돈수) 일찍사망.
폐세자와 창녕대군이1506년 9월에 각각 10세, 7세의 나이로 사사된것은 새왕을 옹립하여 세자와 왕자를 그대로 둘 수 없는 반정의 성격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인정되어 태아가 출산된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고 처리 방법은 신분의 귀천이나 계급의 고하에 따라 달랐다.
태실은 왕자나 공주, 옹주가 태어나면 부여하는것이고 채석,벌목,개간,방목등 일체의 행위를 금하게 하는 표석으로 신분에 따라 범위의 차이가 있어 왕은 사방 300보(540m), 대군은 사방 200보(360m), 기타 군 또는 공주, 옹주는 사방 100보(180m)로 정하였다.
관할구역의 관원은 춘추로 태실을 순행하여 이상유무를 확인한뒤 보고하도록 되어 있고, 태실을 고의로 췌손하였거나 벌목,채석,개간,방옥등을 하였을때에는 국법에 의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 중에서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의하면 태실을 봉하는 제도 처음 태를 봉안할때는 호화롭지 않으나 왕이 즉위하는 해에 태봉으로 가봉되면 태실의 내부와 주위에 석물을 추가로 시설한다.
일제에 의해 파헤쳐지고 훼손된채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 1995년 8월 사단법인 전주리씨대동종약원 상주시 분원장 리일재씨가 사비로 중장비를 동원 원래대로 복원 하였다.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태봉산
중종태왕의 태를 봉하였는 곳으로 1932년 일제때 일본인들이 도굴하고 쇠말뚝을 박아 훼손하였다. 현재 태함과 비석만 남아있고 비석은 함창공원에 옮겼다. 산정상에 작은 우물만 남아있어 전문가로 하여금 하루빨리 현지조사 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여야 한다.
*덕통태봉; 태봉리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덕통리와 인접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여 덕통태봉이라 불렀다.
*작은태봉; 태봉 본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이므로 작은태봉이라 불렀다. 1934년 6월 대홍수와 그뒤 홍수로 주민들은 지금의 태봉리로 이주하였는데 구관 태봉으로 불리는것은 덕통이 억촌일때 억말을 매어 놓던 곳으로 관리들이 지나는 길목이었기에 불려진 이름이라 한다.
상주기 공검면 오태리 790번지-청은재
효령대군 청효공 신위를 임진왜란때 대군의 9대 종손이신 천전공께서 영남으로 내려 오신뒤 어려웠던 시기에 외손인 경상도 관찰사 이규령이 사당을 세워 제향 봉향을 도와주었으며, 숙종대왕 36년(1710)과 영조대왕 1년(1725) 두차려 증수가 있었고 신위를 1973면까지 봉안하다가 청권사로 이안하시고 영정만을 모셔 왔으면 건물이 너무나 퇴락되어서 1983년 9월 사단법인 청권사에서 보수 하였다. 1995면 11월에 새건물을 직소 준공하였다.
효령대군은 태종대왕 5년(1396) 태종대왕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었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조숙하시었고, 성품이 온화하시면서 인자하시고, 문명까지 원만하게 갖추시어 30세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이 성인에 가까워졌으며 시예와 기예에도 월등한 재능을 보이셨다고 한다. 이때 예문관 대제학 변계략이 쓴 대군의 (자설)을 참고, 일찍이 태종대황께서 셋째 아드님 충녕대군께서 영특한 재능이 있는것을 보고 내심 보위를 물려 주었으면 하는 뜻을 살핀 양녕대군꼐서 세자 책봉을 받고도 거짓 광태를 부리면서 왕위를 사양할 때에 효령대군꼐서는 불타에 귀의 했다고 하여 왕위를 사양함으로써 옛날 중국의 태백과 우중의 성지를 무색케한 인격와 처세는 만세의 사표가 되었다.
이와같이 부왕의 뜻에 순종하여 효행을 다하고 형제간 조금도 뜻을 거슬리는 일이 없고 서로 받들며 존경하는 지극한 우애, 민중의 윗자리에서 호의호식할수있고 마음대로 학문하고 권귀를 누릴수 있는 왕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양녕대군과 같은 어진 형님이 계셔서 왕위를 마다 하시고 90노령에 이르도록 신민의 입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였으며 역사상 왕위를 사양할수 있는 지성의 인격에 초세적지락의 철학으로 인류애를 한몸에 실현하는 인격을 가졌던것이다. 살아서는 국왕(세종대왕)의 형 죽어서는 불자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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