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기도 파주] ?윤원형[尹元衡]?과 정난정의 묘

장안봉(微山) 2012. 12. 11. 07:48

윤원형[尹元衡]

 

?∼1565(명종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 형조판서 계겸(繼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욱(頊)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 지임(之任)이며, 어머니는 이덕숭(李德崇)의 딸이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3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537년 권신인 김안로(金安老)에 의해 파직, 유배되었다가 이 해 김안로가 사사되자 풀려나왔다. 그 뒤 수찬·교리·지평·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세자(世子 : 뒤에 인종)를 폐위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 환(慶原大君峘)을 세자에 책봉하려는 모의를 진행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알력이 생겼다. 이에 1543년에는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하여 외척간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이 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좌부승지·좌승지·공조참판이 되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윤의 송인수(宋麟壽)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고, 11세의 어린 나이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이를 계기로 득세해 예조참의에 복직되었다.

대윤 일파를 숙청하기 위해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안으로는 난정(蘭貞)이라는 자기의 첩을 궁중에 들여보내 대비와 임금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다.

일찍이 이기는 병조판서가 되려 할 때 유관(柳灌)이 이를 방해했고, 임백령은 기생첩 때문에 윤임과 다툰 일로 원한을 품었으며, 정순붕은 평소부터 사림들을 미워해 언제든지 한번 분풀이를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이들과 결탁해 윤임을 제거하는 동시에 유관·유인숙(柳仁淑) 등에게까지 화가 미치도록 음모를 꾸몄다. 음모의 내용은 “임금(인종)의 병환이 위중할 때에 윤임이 장차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임금의 아우(명종) 대신 계림군 유(桂林君留)를 세우려고 하였다. 여기에 유관과 유인숙도 협력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예조참의로 있던 그에게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처치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그러나 처벌을 반대하는 공론이 일기도 하였다.

즉 승정원을 거치지 않아 세인의 의혹을 피할 길이 없고, 또 신하의 의리는 자기가 섬기는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인데 이제 와서 그 당시 대행왕(大行王)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심한 죄를 주는 것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그리고 왕실 외척간의 문제로 왕의 덕에 누가 된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결국 8월 29일 궁중에서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하였다.

(을사사화).

권력을 장악한 그는 4, 5명의 악한 무리를 심복으로 삼아 평소에 원한 있는 이들을 유배 또는 삭직해 적대 세력을 도태하였다. 을사사화 후 그 공으로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이 되고 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으로 개봉(改封)되어 서원군(瑞原君)에 봉해졌다.

위력과 권세가 높아지자 뇌물이 폭주해, 성안에 집이 열 여섯 채요,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살리고 죽이고 주고 빼앗는 것이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또, 아내를 내쫓고 기생첩 난정을 정경부인에 봉하니, 권력을 탐하는 조신들은 그 첩의 자녀와 혼인을 하였다.

생살(生殺)의 권한을 잡은 지 20년에 사람이 원한을 품고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1546년(명종 1) 형인 원로와 권력을 다투었으나 원로가 유배되자 더욱 세력을 굳히고, 1547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을 계기로 대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 벽서의 내용은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는 격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봉성군 완(鳳成君玩)과 참판 송인수 및 이조좌랑 이약해(李若海)는 사형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滋)·이염(李爓)·임형수(林亨秀)·노수신(盧守愼)·정황(丁熿)·유희춘(柳希春) 등 잔존 인물을 숙청하였다.

한편, 동지춘추관사로서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548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551년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1557년 영중추부사, 이듬해 다시 우의정, 1560년 서원부원군(瑞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63년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리다가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실각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리(田里)로 방귀되었으며,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정난정[鄭蘭貞]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관비(官婢)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1545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명종(明宗)을 대신하여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小尹)의 우두머리였던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尹任)이 그의 조카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획책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반목으로 빚어진 권력다툼으로,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과 영의정 유관(柳灌),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이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死賜)됨으로써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1551년(명종 6)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몰아내고 적처(嫡妻)가 되었다.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한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1553년(명종 8) 직첩(職帖)을 받아 마침내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또한 윤원형이 상소하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로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으며 신분제도 때문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승려 보우(普雨)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禪宗判事)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선·교(禪敎)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度牒制度)가 다시 실시되는 등 한때나마 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반대도 극심하였고 정난정의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가 사망하고 정난정은 사림의 탄핵을 받아 본래 신분인 천인(賤人)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의 계속적인 탄핵으로 남편 윤원형과 함께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으나 윤원형의 적처였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사건으로 점차 사대부의 공격이 심해지자 몸에 지니고 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 이후 조선의 사대부는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였다. 
[출처] 정난정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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