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현공)

[스크랩] 일부사적(一夫事蹟)

장안봉(微山) 2013. 1. 31. 22:47

一夫事蹟

                                               -일부(恒)의 평생 이룩한 공로의 업적

 

 

 

三千年 積德之家 通天地 第一福祿云者 神告也시니라.

 

 -삼천년 적덕한 집에서 천지를 통하여 제일가는 복록을 이룬 것은 신(천지신명)께서 예고함이시니라.

 

*, 德積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주역

 

 

60년 率性之工 秉義理 大著春秋者 上敎也시니라.

 

 -60년 솔성의 공부와 의리를 붇들고 크게 춘추에 나타낸 것은 위에서 가르침이시니라.

 

 *, 秉-잡을 병, 붙들병,  著-나타낼 저,  者-놈, 것, 사람

 

*, 솔성지공 : 性대로 따르는 공부, 인간의 도를 率性之謂라고 한다.

 

 

一夫敬書 庶幾逃罪乎인저.

 

 -일부가 삼가 쓰노니 천리에 어긋나는 죄를 거의(庶幾~할 수 있을런지) 도피할 수 있을런지.

 

 

辛巳六月二十二日에 一夫.

 

 -신사년 6월 22일에 일부.

 

 

 

@,  김일부 선생의 탄강지

                   ----충남 논산시 양촌면(인내)

 

  

 

 

@,  김일부가 '후천개벽' 깨달음을 얻은 계룡산 향적산방
 
▲ 바위로 둘러싸인 향적산방 기도도량.

 

<계룡산 국사봉은 전국서 최고 대접받아>


 김일부가 이곳 국사봉 자락에서 공부해 ‘정역’을 완성한 것도 범상치 않은 인연이다. 후천개벽의 새 도수(度數)를 짜는 국사가 나온 것 아닌가. 김일부가 공부한 향적산방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우선 향적산방 터 앞의 안산(案山) 모양이다. 안산은 그 터 앞에 책상처럼 놓여 있는 산을 가리킨다. 터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안산이 어떻게 생겼느냐에 따라 발복(發福)의 유형과 장단이 다르다. 제일 좋은 안산의 모양은 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한다. 한 일(一)자로 생긴 모습의 산을 말한다. 평평한 테이블처럼 생긴 모습이다. 이를 보통 토체(土體)라고도 부른다. 이런 모양의 안산이 있으면 군왕이 나온다고 본다. 그 집 앞에 토체 안산이 있으면 ‘여기는 군왕이 나올 곳이구나’하고 옛날 지관들은 짐작했다. 터만 보고도 그 집 주인의 격(格)을 아는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녀 보면 이처럼 토체로 평평한 안산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토체는 왜 군왕의 모양인가. 우선 점잖기 때문이다. 사주팔자에 토(土)가 있어야만 신심이 있다. 토가 없으면 신심이 약하다고 본다. 신심은 상대를 믿는 마음이다. 따라서 팔자에 토가 많은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경향이 있다. 토가 없으면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될 수 있다. 신뢰는 토에서 나온다. 군왕은 신뢰를 주는 사람이다. 여러 사람에게 신뢰를 주고 믿음을 주어야 덕이 있는 것이고, 덕이 있다는 것은 신뢰를 준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군왕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의 모양도 토체로 되면 그런 터에서는 자연히 신뢰가 있는 인물이 배출된다고 여겼다. 물아일체(物我一體)요 산인쌍수(山人雙修)이기 때문이다. 산과 사람은 같이 팔자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 동양의 세계관이다. 향적산방 앞에는 교과서적인 토체 안산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 100만 달러짜리 안산이다.


 또 하나는 청룡 백호가 짜임새가 있다는 점이다. 청룡과 백호는 형제간과 같다.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는 형제간이 도와주는 수가 있다. 청룡과 백호는 부도났을 때 가족 생활비 도와주는 형제간의 역할과 같다. 향적산방의 좌청룡과 우백호는 바위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내청룡과 내백호에 해당한다. 이 바위맥이 양쪽에서 터를 감싸고 있는 점이 아주 아름답다.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우백호 쪽의 바위는 그 모습이 용의 대가리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동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용바위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향적산방에는 바위가 많다. 산방 올라가는 초입에 길을 가리키는 안내간판이 있는데, 거북바위, 용마바위, 호랑바위가 있다고 써 있다. 세 가지의 바위가 있는 것이다. 거북바위는 산방 바로 옆에 있다. 넓적하면서 둥그런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아래에는 서너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기도하기에는 안성맞춤의 바위이다. 구전에 의하면 일부 선생이 이 거북바위에서 도통(道通)했다고 한다. 향적산방이 있게 된 계기도 바로 이 거북바위였던 셈이다.


 일부 선생의 도통 내용은 무엇일까.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 아니었을까. 이게 무슨 말인가. 일부의 스승이 있다.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奎)라고 알려져 있다. 이운규가 일부의 비범함을 보고 앞일을 예언한 시를 하나 주었는데, 그 구절이 바로 ‘영동천심월’이다. ‘그림자가 하늘의 달을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이 구절을 받은 36세의 김일부는 밤이나 낮이나 그 의미를 궁구했고, 관촉사의 미륵불 앞에 나아가 항상 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사봉 아래로 옮긴 것이다. 그러니까 ‘영동천심월’의 의미는 김일부에 의해서 개벽사상으로 정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영동천심월의 구체적 내용은 ‘정역’에 있다. 정역은 주역의 64괘와, 10간 12지, 60갑자, 그리고 한자문화권에서 전래되어 오던 고천문학(古天文學), 사서삼경, 풍수도참등이 용해되어 있는 데다가, 그것들이 종횡으로 씨줄 날줄로 정교하게 엮여 있어서 공부하기가 매우 어렵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고, 특히 동양고전과 역학에 어두운 현대인들로서는 무슨 암호나 난수표같이 막막한 느낌을 준다.


 이운규의 스승도 있다. 조선 정조 때 규장각 사검서로도 활약했던 이서구(李書九)이다. 이서구는 유학자이기도 했지만 도가 쪽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은밀하게 도가 쪽 인물들과도 교류했으며, 이쪽 사이드에서 이서구에 대해 전승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도력을 지니고 있던 상당한 급수의 도사였다. 이서구의 사상적 스승을 소급해 올라가면 토정 이지함 선생이다. 토정의 맥은 결국 화담 서경덕까지 소급되는 것이다. 서화담에서 시작된 조선의 도맥이 토정, 이서구, 이운규를 거쳐 김일부에게까지 내려왔고, 구한말 국사봉 아래에서 ‘정역’으로 그 열매를 맺었다고 봐야 한다. 


 김일부는 서화담·토정·이서구 등의 맥 이어, 일부 선생 당대에는 향적산방이라는 건물은 없었을 것이고, 이 이름은 경성제대 조선어학과를 나와 6·25전쟁 이후에 충남대에서 교수생활을 했고 후일 총장까지 지냈던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1913~2004) 선생이 이곳에 거처를 지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쟁 이후의 어수선하고 배고픈 상황에서도 학산은 여기에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1950년대 중반부터이다. 대략 40~50명의 제자들이 여기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필자가 ‘정역’을 배운 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1928~ ) 선생도 당시에 향적산방에서 이정호 선생을 모시고 정역 공부를 했었다.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냈던 고(故) 류승국 선생도 이때 학산 선생 밑에서 공부하던 멤버였다.


▲ 계룡산 입구에서 향적산방으로 올라가는 이정표가 커다랗게 안내하고 있다.

 

 구한말 김일부의 맥이 동학과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지하에서 이어져 오다가 6·25전쟁 이후 비로소 이정호를 통해 지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당시 20~30대의 팔팔하고 영민한 젊은이들을 모아서 밥도 해먹이고, 고전도 가르치는 독특한 아카데미가 국사봉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필자가 권영원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시기에 향적산방에서 천문(天文)을 보는 법도 공부했다고 한다.


“어떻게 천문을 봅니까?”


 “우선 잠이 없어야 해. 밤에 별을 보려면 새벽 3~4시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밤잠이 적어야지. 두 번째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 유리했지. 별은 겨울에 잘 보여. 추운 겨울에 산방 바깥에 나와서 별을 봐야 하는데, 여차하면 감기 걸렸지. 그때야 뭐 오리털 파카도 없던 때니까. 세 번째는 시력이 좋아야지. 밤하늘의 희미한 별을 보려면 눈이 좋아야 보지.”


 대략 1980년대 후반까지는 이정호 선생이 향적산방에 자주 머물렀기 때문에 배우는 제자들의 출입이 있었으나, 19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는 정역을 배우겠다는 학인들이 사라지면서 한산해졌다. 지금 세상에 누가 정역 배우겠다고 세간사를 때려치우고 산으로 들어가겠는가. 요즘은 산신기도 드리는 기도객들만 한두 명씩 찾아오는 형편이다. 건물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불교사찰이라면 돈을 들여서 단장을 했겠지만, 불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교서원도 아닌 향적산방은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춥고 배고픈 것이 도가(道家)의 노선이란 말인가? 후천개벽의 사상체계를 완성한 성지이건만 이제는 초라한 판잣집 신세가 된 것이다. 필자가 갔을 때는 판잣집 처마에 무시래기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풍경이 가슴을 저몄다. 후천개벽이 왔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 개벽의 중심 성지는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 없이 초라하게 숨어 있었다. / 글·사진 | 조용헌 동양학박사·칼럼니스트

 

 

@,  계룡산파 인물과의 교류

 
이북 출신들은 과거공부를 해보았자 미관말직이나 전전할 뿐, 출세를 못하니 실생활에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풍수·사주·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방면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남에 비해 이북이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녔던 성싶다. 그러니 이제마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나올 수 있었고, 한동석·이석영과 같은 한의학과 사주의 대가들이 배출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이남보다 이북에서 훨씬 급속하게 퍼진 사회적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나라든 외래종교나 신흥종교는 소외 받는 지역에서 먼저 수용되게 마련이다
.

 한동석의 사상적 뿌리 가운데 또 하나는 계룡산파다. 그는 사색을 하고 도인을 만나고 싶을 때는 수시로 계룡산으로 내려가고는 하였다. 그에게 계룡산은 영감의 원천이자 정신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휴식처이자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할 무렵에도 수시로 계룡산에 가서 동학사 근방에 한 두 달씩 여관을 잡아놓고 장기체류하고는 하였다
.

 그가 계룡산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장소는 계룡산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香積山房)이었다. 향적산방은 충남대 총장을 지낸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 선생이 정역(正易)공부를 하기 위해 1950년대 후반에 지어놓은 토굴이자 일종의 아카데미였다. 향적산방 바로 옆에는 19세기 후반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토굴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사가 배출된다는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은 좌우로 청룡·백호가 바위 맥으로 내려와 야무지게 감싸고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案山)은 두부처럼 평평한 토체(土體) 안산이다
.

 토체 안산에서 제왕 나온다는 것 아닌가. 여기는 당대 우리나라에서 주역이나 풍수 또는 사주를 연구하는 마니아들의 아지트였다. 자기가 공부한 바를 서로 주고받고 때로는 밤새워 논쟁하기도 하였고, 국사봉 정상에 올라가 국운 융창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김일부 선생 이후 근세 계룡산파를 형성하던 일급 멤버들이 득실거리던 장소이기도 하다. 천학비재한 필자를 정역의 광대한 세계로 이끌어준 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 선생도 이 시절 향적산방에 장기체류하면서 학산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

 한동석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계룡산파의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골간을 이루는 내용이 지구의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음에 주목하는 정역사상(正易思想)이고, 정역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 본업이 한의사인 그가 전공을 벗어나 정권교체가 어떤 방식으로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는 사실은 계룡산파의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종합하면 인체라는 미시세계와 정역이나 주역이 갖는 거시세계 양쪽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의와 주역을 연결해 주는 공통 고리는 음양오행이지만, 이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근취저신(近取諸身) 원취저물(遠取諸物)’ 사상이다.

 가깝게는 자신의 몸에서 진리를 구하고, 멀게는 사물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사상이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주역의 사상이다. 따라서 거시적 우주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인체라는 소우주를 연구하면 굳이 멀리 우주까지 가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는 논리다. ‘우주변화의 원리’에는 ‘근취저신 원취저물’의 명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근취저신과 원취저물을 연결하는 고리가 음양오행인 셈이다. 이는 곧 ‘하늘의 이치는 땅에 나타난다. 고로 땅을 보면 하늘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역추적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동석은 동생인 한박사가 주역 공부의 비결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

 “천기(天氣)보는 방법을 배워라. 하늘을 쳐다보면 천기를 보는 거냐? 아니야. 땅을 봐라. 땅에 이렇게 보면 풀이 있고 돌멩이가 있고 이렇게 흔들리지? 지렁이·털벌레·딱정벌레 요거로 천기를 보는 거야. 딱정벌레가 많이 있는 거는 이 지상에 금기가 많이 왔다는 거야. 이제 발이 많은 돈지네가 많이 끓을 때가 있다면 화기가 왔다는 거야. 땅에 지렁이가 많으면 토기가 많다는 것이고. 이렇게 천기를 보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이른 봄인데 금기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대답하였다.(권경인, 28
)


‘황제내경’一萬讀한 한동석


 딱정벌레는 등껍질이 단단하니 금기로 본다. 지렁이는 땅속에 사니 토기로 본다. 이처럼 지상에 어떤 기운을 많이 받은 생물이 나타나면 그 해에 거기에 해당하는 하늘의 기운이 우세한 것으로 추론하였던 것이다. 천기를 보는 것은 일상사 사물에 대해 세심한 관찰을 요한다. 도사의 자질은 세심한 관찰력이 필수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은 관찰력 외에 한동석이 전념한 수도(修道)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이다. 방법은 독경(讀經)이었다. 그는 ‘황제내경’(黃帝內經) ‘운기편’(運氣篇)을 일만독(一萬讀) 가까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불교 수행자들이 ‘천수경’(千手經)을 수만독(數萬讀)하듯 그도 운기편을 1만번이나 외웠다. 이는 놀라운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

 그는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로 소문나 있다. 1960년대 중반 그의 한의원이 있던 인사동 주변 골목에서는 길을 걸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한동석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이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앉으나 서나 중얼중얼 운기편을 외웠다
. 처음에는 3,000독을 목표로 하였으나, 3,000독을 해도 신통찮다고 여기고 다시 6,000 9,000독에 이르렀다고 한다. 9,000독에 가니 약간 보이더라고 술회하였다. 마지막 1만독을 채우면서 활연 관통했던 것 같다. 한동석이 필생의 연구 대상으로 삼은 소의경전(所衣經典)은 황제내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면 이해가 되는데, 황제내경만큼은 쉽게 이해되지 않으니 무식하게 막고 품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사실 무식한 방법이 정공법이다.

 무조건 외우는 방법이 막고 품는 방법이다. 변화구나 체인지업 말고 무조건 강속구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꿈에서도 경전을 외울 정도면 도통한다고 한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사지사지 귀신통지’(思之思之鬼神通之)라는 말이다. ‘밤낮으로 생각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활연(豁然)하게 깨닫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몽중일여(夢中一如:꿈에서도 낮에 생각한 마음과 같음)가 바로 이 경지다
.

 조선 후기의 유가의 도인이었던 이서구(李書九)가 ‘서경’(書經) 서문(序文) 9,000독 해서 이름을 ‘서구’(書九)라고 지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황진이 묘를 지나면서 “잔 잡아 권할 사람 없으니 이를 슬퍼 하노라”고 절창을 읊었던 임백호(林白湖)가 속리산 정상의 암자에서 ‘중용’을 5,000독 하고 나서 한 경지 보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한동석이 보여주었던 파워의 진원지는 ‘황제내경’ 1만독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주 공부에서도 마찬가지 방법이 적용된다. 막고 품어야 한다. 명리학에 관계되는 고전들을 수백번씩 읽다 보면 영대(靈臺)가 열린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술회다. 필자가 명리학에 관한 고전들을 공부하면서 모르는 대목이 나오면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등명(登明) 서정길(徐正吉·50) 씨다
. 등명은 ‘궁통보감’(窮通寶鑑)에 조예가 깊다. 명리학의 고전을 보면 ‘연해자평’ ‘명리정종’ ‘적천수’ ‘궁통보감’ 등을 꼽는데, 이 가운데 ‘궁통보감’은 명리학의 가장 진화된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 진화되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복잡하다는 뜻도 된다. 컴퓨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연해자평’이 386이고, ‘명리정종’은 486, ‘적천수’가 586, 그리고 ‘궁통보감’은 686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궁통보감’의 특징은 사주의 격국을 기존의 이론에 비하여 몇 배로 세밀하게 나누는 데 있다. 그런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등명은 10여 년에 걸쳐 ‘궁통보감’을 달달 외우다시피 탐독하였다. 그동안 어느 정도 읽었느냐고 물어보니 지금까지 약 400독을 하였다고 한다. 가지고 다니는 책갈피를 보니 손때가 시커멓게 묻었다. 어떤 때는 꿈에서도 ‘궁통보감’의 내용들이 나타나는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는 고백이다
. 100독을 넘어서자 그 어렵던 격국론이 대강 정리되었다고 한다. 그는 1,000독을 목표로 요즘도 시간만 나면 열심히 읽는다. 책장이 너덜너덜하게 될 때까지. 이것을 보면 사주 공부에도 왕도는 없다. 자나깨나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다. 도사 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趙龍憲(윗글)

1961
년생. 원광대 철학박사 불교민속학 전공. 지난 15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암자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奇人)·달사(達士)들을 만나 교류를 가짐. 그동안 음지에 갇혀 있던 천문·지리·인사에  관한 담론을 양지로 끌어올려 ‘학문적 시민권’을 얻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음. 저서로 ‘나는 산으로 간다’(푸른숲)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 등이 있다.


출처 : 동양역학인연합회
글쓴이 : 고운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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