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순옹주(惠順翁主)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과 그의 후궁 경빈박씨(敬嬪朴氏)의 소생으로 김헌윤의 아들 김인경(金仁慶)에게 출가하였다. 남편인 김인경은 1522년(중종 17)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졌다.
1527년 김안로(金安老)의 주동으로 날조한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경빈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福城君) 미(嵋)가 서인이 되어 쫓겨나자 김인경도 연좌되어 장배(杖配)되었고, 1533년에는 혜순옹주도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었다. [출처] 혜순옹주| 두산백과
광천위 김인경(光川尉 金仁慶)
1514(중종 9)∼1583(선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유(景裕). 아버지는 호조참의 헌윤(憲胤)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동지중추부사 안세(安世)의 딸이다.
중종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결혼하여 1522년(중종 17)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졌다.
1527년 기묘사화 때 피해자인 사림파의 김안로(金安老)가 기묘사화의 주동자였던 심정(沈貞)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며 중종의 맏사위인 희(禧)를 사주하여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처음 누구의 처사인지 모르다가, 결국 무격을 좋아하였던 그의 장모 혜빈 박씨(惠嬪朴氏)가 용의자로 지목을 받아 아들 복성군 미(福城君嵋)와 함께 서인이 되어 쫓겨났다.
이때 그도 연좌되어 상주로 장배(杖配)되었고, 1533년에는 부인 혜순옹주마저 서인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앞과 똑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 경빈 박씨가 사사(賜死)된 뒤 서인으로 폐출된 부인과 함께 서천으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공주로 양이(量移)되었다.
그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횡포가 아주 심하였던 김안로가 중종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사사된 뒤 혐의가 풀려 1537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 뒤 원종공신에 봉해졌고, 종실과 부마들만이 모여 벌인 백일장에서 장원, 통헌대부(通憲大夫)에 가자되었다.
공은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을해년(乙亥年, 1515년 중종 10년) 4월 갑오일(甲午日)에 태어났는데, 휘는 인경(仁慶)이고, 자(字)는 경유(景裕)이다. 7세에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딸 혜순 옹주(惠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순의 대부(順義大夫) 광천위(光川尉)에 제수되었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정해년(丁亥年, 1527년 중종 22년)에 옹주의 어머니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작서지화1)(灼鼠之禍)를 당하자 상주(尙州)로 유배를 갔다.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년)에 김안로(金安老)가 그 옥장(獄杖)을 일으켜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를 죽이고, 다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를 죽였다. 공 또한 서천(舒川)으로 귀양을 갔다가, 갑오년(甲午年, 1534년 중종 29년)에 공주(公州)로 양이(量移, 먼 곳에 귀양간 사람을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 겨울에 김안로(金安老)가 사형을 당하자 공은 바로 풀려났으며, 오래지 않아 관작도 회복되었다.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명종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고 자의 대부(資義大夫)에 올랐다.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년)에 임금께서 종실의 부마(駙馬)를 모아서 제술(製述)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지은 바가 수석을 차지하여 품계가 통헌 대부(通憲大夫)에 올랐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11월 무술일(戊戌日)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은 크게 슬퍼하고 철조(輟朝)하였으며, 부의를 후하게 내리어 상장(喪葬)에 관한 일을 관(官)에서 돕도록 하였다. 12월 임자일(壬子日)에 옹주 역시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 3월 갑신일(甲申日)로 날을 잡아 양근군(楊根郡)의 치소(治所) 뒤 북평리(北坪里) 술좌 진향(戌坐辰向)의 언덕에 묻었다. 선조(先兆)를 따라서 동당 이실(同堂異室)로 삼은 것은 명(命)을 따른 것이다. 옹주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공은 아우 김원경(金遠慶)의 아들 김호수(金虎秀)로 후사를 삼았는데, 김호수는 전(前) 금천 현감(衿川縣監)으로 종실 의천군(義泉君) 이인(李仁)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공은 측실(側室)한테서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 김건곤(金乾坤), 김건수(金乾壽)는 모두 관상감 정(觀象監正)을 지냈고, 김곤수(金坤壽)는 관상감 주부(觀象監主簿)를 지냈으며, 김건장(金乾長)은 관상감 부정(觀象監副正)을 지냈다. 큰딸은 한인경(韓仁慶)한테 시집을 갔고, 둘째 딸은 이숭(李崇)한테 시집을 갔으며, 셋째 딸은 이정생(李丁生)한테 시집을 갔다. 안팎의 손자는 모두 약간 명이었다.[宋寅이 지은 김유경의 묘지명에서]
옹주의 성품은 유순하여 60년 동안 공을 섬김에 조금도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 없었으며, 공의 여러 첩실(妾室)들을 대우함에 있어 조금도 투기하지 않았다. 정덕(正德) 임신년(壬申年, 1512년 중종 7년) 정월 신미일(辛未日)에 탄생하여 향년이 72세였으니, 그 죽음이 공의 죽음과 거리가 겨우 보름 차이로서 한 날에 묻힌다는 것은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날을 잡아 김호수(金虎秀)가 지문(誌文)을 나 송인(宋寅)에게 부탁하며 이르기를, “선친을 아는 이는 당신만한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하므로, 사양하지 못하여 묘지명을 다음처럼 쓴다.
[.[宋寅이 지은 김유경의 묘지명에서]
김인경/혜순옹주 묘 전경
통헌대부광천위김공지묘/혜순옹주부좌
김인경의 부모 김헌윤/구성이씨(용인이씨 이안세의 딸) 묘 전경-김인경/혜순옹주 묘뒤에 위치한다
증이조판서행통정대부이조참의지제교김공지묘/정부인구성이씨(용인이씨)지묘
김인경의 동생 김원경 묘-뒤쪽의 봉분은 부모 김헌윤/구성이씨 묘이다
선무랑김공원경지묘/의인전주이씨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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