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9일 (토)
수덕사 입구입니다.
절간 앞이 왜 이리 번잡한지 유원지 같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사찰에서 여백같은 삶을 찾는 다는건 이젠 옛 이야기가 되여 버렸다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차고 넘치는 물질앞에
무너지지 않는 곳이 없는듯 하네요.
덕숭산 수덕사란 현판이 있는 일주문입니다.
매표소 앞에도 일주문이 있었으니 여긴 두번째 일주문이라고 해야 할것 같습니다.
일주문 좌측에 있는 해탈교입니다. 이곳에 선미술관이 있습니다. 수덕여관도 있는 곳이지요.
일주문 안쪽에는 동방제일선원이란 현판도 붙어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좌측에 비석이 보입니다. 덕숭산 수덕사 사적비입니다.
금강문을 또 지나야 합니다.
사천왕문도 지나야 하죠.
사천왕문 안엔 샘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가지가 없는걸 보니 먹을수는 없는 물 같네요. 그래도 쳐다만 봐도 시원 합니다.
계단은 아직 계속됩니다. 황하정루(성보박물관) 아래로 통과 해서
황하정루(성보박물관)
또 한차례 계단을 올라야
대웅전 앞마당에 설수 있답니다.
시원 합니다.
대웅전입니다(국보 49호).
고려 충렬왕 34년 (1308)에 세워졌다는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여난 건축물로
현존하는 건물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 건물로 매우 중요한 건물이라는군요.
대웅전 우측에 있는 명부전입니다.
명부전 가는 길엔 아름다운 꽃들이 피여 있었습니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 ~ 597)때 창건 됐다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사찰입니다.
수덕사에서 대웅전 만큼 고색창연한 건물은 또 없습니다.
대웅전의 기둥들을 살펴 봤습니다.
눈으로 세월을 느낄수 있겠죠.
얼마나 많은 세월이 대웅전 기둥들을 보듬고 갔길래
터지고 갈라진 틈새 깊숙한 곳까지 반질반질 해 졌을까요.
인력으론 도저히 해 낼수 없는 일입니다.
대웅전을 봤으니 이제 내려 간데도 아쉬움은 없습니다.
백련당 뒤 관음바위 앞에 있는 관세음보살입니다. 소원성취 하려면 이곳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수덕사에서 그나마 옛 정취를 느낄수 있는 곳. 심우당 입니다.
수덕사는 지금 공사판 같기도 하고 시장판 같기도 하며 유원지 같기도 합니다.
덕지 덕지 욕심껏 그린 그림처럼 여백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크고 좋은 건물이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걸 모를까요?
욕심이 없어야할 곳에 들어 앉은 욕심은
눈멀고 귀멀게 하는군요.
대웅전에서 내려 오며 숲길을 걸었습니다.
불과 몇십미터 옆인데도 이길엔 인적이 없더군요.
수덕여관입니다.
김일엽스님(본명:김원주)과 나혜석 그리고 이응로 화백이 스쳐 지나간 곳 이지요.
그옛날엔 펑펑 물이 솟았을 우물이 지금은 매말라 버렸습니다.
여관 앞마당 바위에 새겨 놓은 암각화입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이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후 잠시 머물던 시절인 1969년에
두 덩어리의 바위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는 그림이라고 새겨 놓은 거예요.
이응로 화백은 젊은 시절 이집에서 신여성으로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나혜석(1896~1948)
을 만나 8살의 차이밖에 안 났지만 사제로 인연을 맺습니다. 이 인연은 후에 이응로화백이
프랑스 유학의 길로 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나혜석이 이곳을 떠난후인 1944년 이응로
화백은 이집을 구입합니다. 그리고 부인 박귀희 여사와 여관을 하며 작품 활동을 하다 21세
연하인 제자와 함께 프랑스로 유학이란 명분으로 도망갑니다. 본부인을 버린 것이죠.
그후 동백림 간첩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석 했던 시절 이화백은 잡혀와 옥고를 치룹니다.
조강지처인 박귀희 여사의 지극한 옥바라지를 받으며 말이죠. 이화백은 출소후 이곳에서
잠시 머물며 저 바위돌에 암각화를 새겼어요. 그리곤 또 옛날처럼 조강지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후 두분은 죽을때 까지 서로 만나지 못 했습니다. 슬픈 인연은 여기까집니다
김일엽 스님은 목사의 딸로 태여나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까지 유학을 했던 신여성
문인이였습니다. 두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은 그는 이곳에 와 머물다 1928년 33세가 되던
해에 출가해 5년후인 38세에 만공스님으로 부터 계를 받고 적극적으로 수도 생활을 하죠
김일엽스님이 출가 하기전 쓴 청춘을 불사르고의 서문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무었이 되었삽기에 ?
당신은 나에게 무었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 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보고 듣고 생각는 온갖 좋은 건
모두 다 드려야만 하게 되옵니까?
내 것 네 것 가려질 길 없사옵고요
조건이나 대가가 따져질 새 어딨겠어요
혼마저 합쳐진 한 몸이건만......
그래도 그래도
그지없이 아쉬움
그저 남아요 .....
당신은 나에게 무었이 되었삽기에
또 한분 수덕여관과 인연이 있는분 신여성 화가인 나혜석입니다.
그도 이혼의 아픔을 달래려 수덕사에서 수행 주이던 친구 일엽스님을 찾아 와 출가
하려 했으나 일엽스님과는 달리 만공선사가 너는 중이 될수 없다며 받아 주지를 않아 수덕여관에서
수년을 보내며 이응로 화백을 제자로 두기도 하고 당시 일본에 있던 일엽스님의 아들이 어머니
를 찾아 왔으나 박절하게 나를 어미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고 하는 일엽을
대신에 보듬어 주기도 했으나 세상을 떠돌다 외로히 홀로 돌아가신 분이죠.
일엽스님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김태신)도 결국은 중이 되였습니다
67세의 늦은 나이에 불가에 귀의하여 노스님이 되신 일당스님이 털어 놓은 그리운 나의 어머니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였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분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 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 였습니다.
"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며
기쁨 보단 슬픔이 더 서린 수덕여관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다 가고 없지만
난 여기서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잠시의 인연으로 어찌 그날의 일들을 안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가슴속 깊은 곳으로 부터 울어 나오는 슬픔에 전율합니다.
그때의 사랑이나 슬픔이 지금의 사랑보다 더 무겁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때의 사랑에 더 무게가 가는건 지금은 좋은게 너무 많은 탓이리라 여겨 집니다.
수덕사의 깊은 슬픔에 비해 수덕여관의 슬픔쯤은 포크레인 앞의 삽 같은 존재지만
우리 다 그렇찮아요.
클래식 음악엔 하품을 해대다가도 대중가요를 들으면 눈물 펑펑 쏟습니다.
수덕여관의 글씨들은 이응로 화백이 썼답니다.
이곳 땅은 지금은 수덕사 소유가 됐습니다.
선미술관도 세우고 수덕여관도 복원 했습니다.
미술관 안의 모습입니다.
수덕사의 여승으로 끝을 맺습니다.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길 없어 법단에 촛불켜고 흐느껴 울적에 아 ~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끝.
녹용 빛갈 참 좋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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