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기도)

[스크랩] [경기도 안성] ??충정공 양곡 오두인(忠貞公 陽谷 吳斗寅) 묘역-해주오씨

장안봉(微山) 2012. 12. 11. 06:35

추충정공 양곡 오두인(忠貞公 陽谷 吳斗寅)

1624(인조 2)∼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정방(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겸(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翔)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효길(孝吉)의 딸이다. 숙부 숙(淑)에게 입양되었다.

 

1648년(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650년(효종 1) 지평(持平)을 거쳐 1656년 장령(掌令), 1661년(현종 2) 헌납(獻納)ㆍ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副校理)ㆍ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에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해 사직(司直)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李世華)ㆍ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도중 파주에서 죽었으며,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德峰書院), 의성(義城)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오두인 신도비와 묘역 전경

 

오두인(좌)과 오숙(우) 신도비

오두인신도비-김창협(金昌協)이 찬하였다

오숙 신도비- 최석정(崔錫鼎)이 찬하였다

 

묘역 전경-오두인 묘(상), 오경운 묘(중),오숙묘(하)

오두인 묘소 전경

 

 

 

 

 

 

 

 

 

 

 

 

 

 

묘 후경

사온서직장오경운(吳慶雲) 묘

 

 

 

 

 

 

 

묘 후경

 

 

 

오숙 [ 吳肅+羽 ]

1592(선조 25)∼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숙우(肅羽), 호는 천파(天坡). 수억(壽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정방(定邦)이고, 아버지는 전부(典簿) 사겸(士謙)이며, 어머니는 한성서윤 이집중(李執中)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약관에 과거로서 이름을 날리었다. 곧 승문원의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어 당시 문장가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정구(李廷龜) 등이 모인 자리에서 명나라에 보낼 진주문(陳奏文)을 초안했는데, 문장이 뛰어나 이덕형의 천거를 받아 다음날 설서(說書)에 승진하였다.

그 뒤 예조좌랑을 지내다가 조정의 어진 정치를 볼 수 없어 벼슬을 버리고, 장유(張維)·이명한(李明漢) 등과 교유하며 삼각산에서 독서하였다. 1619년에 병조좌랑이 되었고, 이 때 강홍립(姜弘立)이 후금군에 항복을 알리는 부경진주사(赴京陳奏使)의 서장관으로 갔다왔으며, 다음 해에 괴산군수가 되어 많은 기민(飢民)을 구하였다. 그 해 가을에 순검사종사관으로 삼남을 순찰하였다.

1621년에는 종사관으로 원수 한준겸(韓俊謙)을 따라 관서(關西)의 군무(軍務)를 돌아보고 돌아와 삼각산에서 독서로 소일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 문하의 8학사의 한 사람이라 해 지탄을 받았으나 친교가 있던 심기원(沈器遠)의 주선으로 정언(正言)이 되었다.

곧 지평(持平)으로 옮겨서 풍기를 바로잡는 데 공을 세우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수찬(修撰)·교리(校理)·헌납(獻納)이 되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하으로 뽑혀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지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 겸 주청부사가 되어 바닷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6년 청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동부승지로서 정묘호란을 당해 왕을 강도에 호송했으며, 우승지·사옹원제조·상의원제조·형조참의·여주목사·예조참의·경상도관찰사, 좌승지 겸 승문원부제조를 역임하였다.

1633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마침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假島)에 유진(留鎭 : 진을 치고 주둔함.)해 일어난 대청 관계를 원만히 해결해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의 접반사로 가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송도에서 죽었다.

문장이 간결 명료했고, 특히 기유시(紀遊詩)에 뛰어났다.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천파집≫ 4권이 있다.

경상도관찰사 오숙(吳肅+羽) 묘 전경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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