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경북 경주]진평왕릉

장안봉(微山) 2013. 1. 21. 00:48

진평왕(眞平王)

 

?∼632(진평왕 54). 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다.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했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했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즉위하였다.

진흥왕대를 이어서 왕권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이것은 관제(官制)의 정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해 일체의 국정을 맡겼다.

580년(진평왕 2)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해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81년에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었다.

같은 해에 또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다.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여기서 진평왕대 초기인 580년대에 위화부·조부·예부와 같이 중앙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관부가 설치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이 시기는 신라의 관제 발달사상 발전기로서 새로운 행정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수를 규정함으로써 조직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대의 정복국가체제에서 관부정치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진평왕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金龍春)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 상사서(賞賜署)와 대도서(大道署)에 대정(大正)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584년에 건복(建福)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였다. 한편,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진평왕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求法行)과 귀국행(歸國行)이 빈번하게 있었다.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뤄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진평왕 7년(585)에 남조(南朝)의 진(陳)나라로 구법을 위해 떠났던 고승 지명(智明)은 602년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上軍)과 함께 귀국하여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大德)이 되었다.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圓光)은 600년에 조빙사(朝聘使)인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大舍) 횡천(橫川)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曇育)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入朝使) 혜문(惠文)과 함께 귀국하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고승들은 종교적인 불사(佛事)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국가사(國家事)에도 참여함으로써 이 시기의 불교는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진평왕대에는 진흥왕대의 고구려·백제지역에 대한 영역확장 결과, 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양국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 : 지금의 전라북도 雲峰)으로 공격해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침입해왔다. 이에 진평왕은 양국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원광(圓光)에게 <걸사표 乞師表>를 짓게 하여,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煬帝)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이 후에도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椵岑城)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 : 지금의 전라북도 운봉)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624년 백제의 속함성(速含城 : 지금의 경상남도 咸陽)을 비롯한 5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신라는 수나라를 이어서 618년에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는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인해 당나라에 대한 외교통로가 막히게 되었음을 호소하였다.

이에 당나라 고조는 우선 626년에 사신 주자사(朱子奢)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

한편, 628년에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629년에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金舒玄)·김유신(金庾信) 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을 공격하게 하여 항복받기도 하였다.

재위 54년만에 죽었다.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국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

 

 

 

 

 

출처 : 癡叔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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