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조선후기의 유학자(儒學者). 이유태(李惟泰)는 인조-숙종 년간의 이름난 유학자(儒學者)로, 특히 시무(時務)에 밝았던 정치사상가였다. 그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지(泰之), 호는 초려(草廬),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그는 선조40년(1607)에 아버지 이서(李曙)와 어머니 청풍김씨(淸風金氏) 사이의 5형제중 셋째 아들로 금산 노동(錦山藏洞)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선조는 서울에서 세거(世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직후 그의 아버지가 충청도 금산으로 이사하였다.
이유태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고, 청년기에는 공부를 위해서 진잠(鎭岑)과 연산(連山)에서 상당기간을 지냈다. 그리고 장년기에는 금산(錦山)과 진산(珍山) , 그리고 공주(公州)의 초외(草外 :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에 이사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그가 대전지역과 연관이 되는것은 청년기에 진잠에서 공부한 3년(15세∼17세)과 장년기에 초외에서 거주한 12년간(45세∼57세의 기간)이다. 공은 이미 8세에 율시(律詩)를 즉석에서 지을 수 있을 만큼 조숙하고 총민하였다. 10세가 되던 해에 이유태는 부친을 여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슬퍼하고 곡함이 성인과 같았고, 파와 마늘을 3년 동안 입에 대지 않았으며, 여막에서 슬피 울며 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지었는데, 민재문이 문상을 왔다가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15세 때에 그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진잠의 처사(處士) 민재문(閔在汶)에게 나아가 배웠다. 민재문은 고청(孤靑) 서기(徐己)의 문인인데, 서기는 이지함, 서경덕 등에게서 공부하여 특히 서경덕(徐敬德)의 기철학(氣哲學)의 맥을 이은 인물이다. 당시에 민재문, 박희성 등 서기의 제자들은 이곳(지금의 대전광역시 서구 도안동)에 모여 살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하며 선비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전한다. (후일 이곳에서는 이들의 사당인 돈파사(遯坡祠)가 세워졌고,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66년 충주박씨 후손들에 의해 다시 건립되어 현전하고 있다) 이유태는 이러한 민재문의 문하에서 공부한 후, 그의 추천을 받아 율곡 이이(李珥)의 적전(嫡傳)인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김장생은 계축화옥(癸丑禍獄 : 광해군 5년, 박응서 등 이름 있는 가문의 서자 7인이 역모를 꾀하고, 김제남과 영창대군이 이에 관련되었다하여 이들 모두가 주살되고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된 사건)으로 철원부사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연산(連山)에 돌아와 독서와 제자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이후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으로 다시 출사(出仕)하기는 하였으나. 관직에 오래 머물지는 않고 여전히 향리에서 강학(講學)을 계속하였다.
이 때의 반정에는 그의 문하인 김류, 신경진, 최명길, 구굉, 구인후, 이시백, 장유, 이후원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또한 후대의 정계, 학계에서 크게 활약하게 되는 인재들이 운집하였으니 김집(金集)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등이 윤선지(尹宣擧), 유계(兪棨) 등 이른바 충청오현(忠淸五賢)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때 이유태는 특히 송시열, 송준길 등과 각별한 관계를 이루었다. 이들 3인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사귀고, 성현(聖賢)에 이르기를 기약하였으며, 서로 맹약하기를 "만일 3인 중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마땅히 법적인 처벌을 모두 함께 받기로 하자"라 하고 허물을 서로 규찰하고, 착함을 서로 권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아서는 뜻을 같이 하고, 죽어서는 후세에 전해짐을 같이 할 것(生同志 死同傳)"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한다.
이유태가 20세가 되던 해에 그의 첫 스승인 민재문이 작고하였다. 이 때 이유태는 선생의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좇아 행하고, 손수 스스로 습렴(襲殮)을 하였으며, 심상(心喪) 3년에 병을 얻을 정도였다.
이유태는 24세에 별과(別科)에 합격하였으나, 마침 이 때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였으므로, 간호를 위해서 전시(殿試)를 포기하였다.
이듬해 스승 김장생이 작고하였다. 그는 또한 심상 3년을 하고자 하였으나, 모부인이 지난번 민재문의 상(喪)에 득병한 것을 들어 극구 만류함으로 부득이 기년(朞年)으로 지내고, 스승의 적전(嫡傳)인 김집을 대신 스승으로 모시고,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등과 함께 그 문하에서 또한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을 배웠다. 인조12년(1634), 이유태는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출사하였으나 학문을 계속하기 위해서 곧 귀향하였고, 다시 건원릉의 참봉이 되었으나, 병자호란으로 6개월도 채 봉직하지를 못하였다. 이후 그는 병자호란 직후까지 대군사부(大郡師傅 : 3차), 내시교관(內侍敎官),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의 벼슬을 연이어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병자호란 이후에는 "선비가 가히 출사할 의리가 없어졌다는 것(士無可仕之義)"을 내세워 일체의 벼슬을 거절하였다. 이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인조가 오랑캐인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상황을 두고 한 말로써, 곧 그의 춘추대의적 의리정신(春秋大義的 義理精神)과 선비로서의 그의 출처관(出處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그는 무주의 덕유산 산미촌에 들어가서 오로지 학문과 후진의 교육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초에 대신들이 "김상헌(金尙憲)을 원로로서 우대하고, 또 독서지인(讀書之人)인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 등의 오현(五賢)을 예우로써 징소하라"는 건의를 올리자, 곧바로 이들에게 글을 보내 모두 입조(入朝)토록 조처하였다. 효종의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독서인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자(賢者)를 극진히 우대함으로써, 즉위 초에 널리 인심을 안정시키고, 또한 산림세력(山林勢力)을 끌어들여 조정의 친청세력(親淸勢力)을 누르고 북벌(北伐)을 실현해 보려는 자신의 북벌의지(北伐意志)와 유관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출사하지 않을 것을 고집하던 이유태는, 이 때 효종의 북벌의지에 명분(名分)과 기대를 걸고, 마침내 다른 4현(四賢)과 함께 재출사를 단행하였다. 그의 나이 43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산림(山林 : 山谷林下에 머물러 있으나 학덕으로 중망(衆望)이 있는 선비로서, 왕으로부터 고위직으로 징소를 받은 이름 있는 선비)의 대거진출은 당시의 집권세력의 적극적인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들은 산림의 영수인 김상헌을 배척하였고, 이에 대해 김집과 송시열 등은 김상헌을 적극 옹호하였으나 사태는 산림이 모두 퇴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이유태는 소(疏)를 올려 반대파의 비리를 강력하게 논척하였고, 또한 대사간 김경여(金慶餘) 집의 송준길 등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마침내 이조판서 심락, 대사헌 이지항 등의 반대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때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효종이 산림을 등용하여 북벌을 시도한다"고 하고, 또 장릉(長陵 : 인조의 능)의 묘지문(墓誌文)에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은 것을 밀고함에 따라 청의 군사가 변경에 파견되었고, 또 사은표문(謝恩表文)이 잘못되었다는 트집 등으로 잇따른 청의 사문(査問)이 있게되었다. 이로써 산림은 크게 위축되고 위기에 몰리게 되었으나, 효종이 이를 적극적으로 주선하여 영의정이 경석과 예조판서 조경을 백마산성으로 유배하는 선에서 이 문제는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이렇게 복잡한 결과를 초래케 되자, 전의 이유태의 상소는 효종에 의해 광소(狂疏)로 평해졌고, 이로 인해서 그는 과거의 응시자격이 정지되는 정거(停擧)에 처해졌다가 7년만에야 풀려나게 되었다. 1656년(효종7년) 그는 다시 공조정랑(工曹正郎)에 제수되었으나, 모친의 병환과 자신의 부덕(不德)을 내세워 출사하지 아니했다.
이유태는 이 정거의 기간 중에 향촌에 머물러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그가 이곳 대전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기간 중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6월, 공주의 초외에 자리를 잡아 건축하다. 동춘(송준길)과 우암(송시열)이 더불어 함께 거할것을 요청하기로 드디어 이곳에다 옮겨 지으니, 후세인들이 그 터를 가리켜서 '삼현대(三賢臺)라하였다
(六月, 卜築于公州草外 同春尤菴要與同居 故遂移築于此 後人指点其墟 謂之 三賢臺)
- <草廬年譜> 45세때의 기사 -
이들 3인이 처음에 한 곳에 모여 살 것을 언약한 것은 이미 20여년 전의 일이니, 즉 스승 김장생의 장례일에 이들이 올린 '연명제문(聯名祭文)'에
한 언덕을 정하여서 세개의 초막을 짓고 서로 살펴서 서로 유익케 하여 한결같이 선생의 가르침을 좇아 살자
라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초외(草外)는 연보의 다른 곳에서는 간혹 초오(草塢)라고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 지역은 현재 대전직할시 유성구 도룡동의 이른바 '새우' (연구단지 지역 중 국립중앙과학관 부근 일대)라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 '새우'는 초오(草塢)의 차음(借音)으로 보이며, 이유태의 호(號)가 '초려(草廬)'인 것도 바로 여기서 연원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지역이 현대에 와서 모두 재개발된 곳이라 당시의 삼현대(三賢臺)의 자리를 찾기는 불가하나, 서구 방현동의 적오산성(赤烏山城)에도 이들 3인이 놀던 곳이라고 청해지는 삼현대가 전해지고 있어 당시의 이들 삼현(三賢)의 돈독한 관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하겠다.
1659년(효종10년), 이유태가 53세 되던 해에 그는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유계(兪棨), 허적(許積) 등과 함께 다시 2차 밀지오신(密旨五臣)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아갔다. 정거령(停擧令)이 풀린 후에도 계속 불출사(不出仕)를 고집하던 그가 돌연히 조정의 부름에 응했던 것을 보면, 이 때 그는 효종의 밀지에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상경한지 몇일 만에 출사를 포기하고 다시 환향(還鄕)하고 말았다. 그리고서는 곧 바로 2만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해봉사(己亥封事)>를 작성하였는데, 이는 봉사를 자신의 진퇴지계(進退之計)로 삼고자 한 때문이었다.
이유태의 <기해봉사>는 당시의 국정전반에 걸친 정치개혁안을 담고 있는 매우 주목되는 봉사로서, 효종의 북벌의지의 실현을 위한 만전지책(萬全之策)으로서 작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이 봉사를 옮겨 쓰고 있을 때에 효종이 갑자기 서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봉사는 다음 왕인 현종(顯宗)원년에 이르러서야, 송준길 등의 제안에 따라 조정에 제출될 수 있었다.
이 후 그의 봉사에 대한 조정의 채택논쟁은 지리하게 수년간 계속되어졌으나, 끝내는 조정에서 배척를 당하게 되자, 이유태는 곧 귀향하고 말았다. 이후 그에게는 이조참판(吏曺參判), 대사헌(大司憲) 등이 제수되었으나 계속 출사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책이 불합리하게 배척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출사해야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한 편, 이 때쯤 해서 이유태는 17세기 후반의 정치계를 풍미하였던 예송(禮訟)에 불가피하게 깊이 관여케 되었다. 이른 바 1차 예송은 효종이 죽은 후 조대비(慈懿大犯 : 인조의 계비)가 입을 상복(喪服)의 문제가 논란의 초점이었다. 즉 예법(禮法)으로는 부모가 장자(長子)를 위해 3년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효종은 장자가 아니라 차적(次嫡)이고, 더구나 조대비는 이미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위해 3년복을 입었으므로 그 복제는 기년복(朞年服)으로 해야 한다는 서인계(西人系)의 주장과, 효종이 비록 장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단 왕위를 계승한 이상 당연히 적통장자(嫡統長子)로 인정되어야 하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계(南人系)의 주장이 팽팽히 대립되었던 것이다.
이 때 이유태는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기년설(朞年說 : 상복을 입는 기간을 1년으로 하자는 주장)의 예론을 전개하여, 남인과의 첫번째 예송에서 일단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 근원적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철저한 명분론적 가치관(名分論的 價置觀)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상 당시의 서인집권을 가능케 한 것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었다. 그리고 반정의 명분(名分)은 대북파 정권의 패륜(悖倫)과 대명외교(對明外交)에서의 대의(大義)의 상실을 바로잡겠다는 것, 즉, '윤리(倫理)와 의리(義理)의 광정(匡正)' 그것이었다. 그러나 인조조에 있어서의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과 강빈옥사(姜嬪獄事), 그리고 세손(世孫)이 3명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자(次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한 점 등은 분명히 유교주의적 명분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이후 예논쟁(禮論爭)과 정치논쟁(政治論爭)의 불씨로 작용할 만한 충분한 소지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의 이러한 시도는 '반정(反正)후의 취약한 왕권(王權)을 견고히 하고,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국제정세에 급격한 변화와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강한 왕권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때의 예송(禮訟)은 단순한 학술적 논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정치명분상의 논쟁이라는 정치 사상적 측면과,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이라는 정치역학적인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산림(山林)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던 이유태가 이 예송에 깊숙이 관여케 된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674년(현종15년)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죽자 제2차 예송이 일어났다. 이 때 이유태는 1차예송 때와 같은 논거로 복제설(服制說)을 지어 자신의 예설을 밝혔다. 즉, 조대비는 이미 효종을 차자(次子)로 인정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었으니 효종비를 위해서는 당연히 9개월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에 대해 남인(南人)은 역시 1차 예송 때의 논거로써 기년복을 주장하여 극적으로 대립되었다.
그 해에 현종이 죽고 숙종(肅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남인(南人)이 집권을 하자 자연히 서인(西人)의 예론에 대한 논척이 비등해졌다. 이로 인하여 서인계는 모두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이유태도 영변(寧邊)에 유배되었다가 5년 반이 지난 73세 때에야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유배기간중 이유태와 송시열 사이에는 예논쟁(禮論爭)에 연관된 보이지 않는 알력이 발생하여 마침내 그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계와도 소원(疎遠)해지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유태는 산림으로 출사하여 한 시대를 광정(匡正)하고자 했던 그 의기와 정열과 노력을 조용히 접은 채, 공주 중호(公州 中湖)로 돌아와 이곳에서 독서로 여생(餘生)을 보내다가 1684년(숙종10년)에 78세를 일기(一期)로 생애를 마쳤다.
이제 끝으로 그의 《기해봉사》의 분석을 통해 이유태의 정치사상(政治思想)의 성격(性格)과 그 의의(意義)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이유태가 <기해봉사>를 작성하게 된 개인적 동기는 그것을 자기자신의 진퇴지계(進退之計)로 삼으려는 것이었고, 동시에 효종의 북벌사업에 기초가 될 만전지책(萬全之策)을 제시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기해봉사>는 전체가 하나로 연관된 종합적인 체계를 이루고 있어서 그 구성의 치밀성과 체계성이 돋보이며, 그 내용은 고전인 《주례(周禮)》와 역대의 조종성헌(祖宗成憲), 그리고 우리나라 선유(先儒)의 경륜 중에서 현실성이 있는 것을 시무(時務)와 시의(時宜)에 따라 발췌한 것이어서 높은 타당성을 지니고있다. 따라서 그는 왕에게 "전하께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행치 않으려면 그치시되, 만일 그것을 행하시려 한다면 바라건대 읽어보시고 이 것을 채택 시행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봉사에 대해서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봉사>의 전체내용을 인과관계(因果關係)로써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그 개혁안의 시행도 부분적 시행이 아닌 전체적인 시행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부분적 시행이 자칫 그 본지(本旨)를 깨뜨려서 오히려 백성을 속박하는 요소가 될 것을 경계한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정치사상의 주목되는 한 측면이다.
이유태의 정치사상의 요체는 '실질에 힘써야 한다'는 무실사상(務實思想)이다. 이것은 그가 당시의 시대적인 폐단(時弊)을 무실7폐(無實七弊)로 설명한 데서 알 수 있다. 그의 무실사상은 조종성헌(祖宗成憲)과 선유(先儒)의 고법(古法)을 힘써 준행하려는 실천적 의지와 또한 그것을 준행하여 참됨(實)을 이루고자 하는 가치추구의 의지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이는 그가
비록 폐정(弊政)을 다 혁파하고 선왕(先王)의 좋은 제도를 모두 회복시킨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상하(上下)에 궁행준봉(窮行遵奉)하는 실(實)이 없으면 또한 단지 법문(法文)을 갖춘 것(속은 비고 겉만 꾸밈)에 불과할 따름이다
라 한 것이나, 또 그가 민심(民心)이 군왕(君王)에게 모아지고 화기(和氣)가 하늘에 감응될 수 있는 정치를 '구치지실(求治之實)이 있는 정치'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무실(務實)과 시의(時宜)를 중시하는 정치사상은 이이(李珥)의 '만언소(萬言疏)'의 사상과 유사한 바, 그의 무실사상(務實思想)은 다름 아닌 율곡 이이에서 연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정치사상으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변통개혁사상(變通改革思想)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고례(古禮)와 고법(古法)을 회복하려는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경향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이 곧 현실부정적(現實否定的)이거나 과거지향일색(過去指向一色)의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오히려 현실중시의 시의(時宜)정신과 이로써 치(治)의 실(實)을 이루고자 하는 무실정신(務實精神)이 그 주조를 이루고있었다.
그가 "조선의 입법(立法)이 비록 극히 상세하다 하더라도, 이미 3백년이 경과하였으니, 때가 변하고 사세(事勢)가 바뀌어 폐단이 없을 수가 없는 즉 오히려 변통(變通)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혼조(昏朝: 연산군조)의 그릇된 법규이겠습니까……신(臣)이 변통(變通)하고자 하는 바는 단지 근일의 오규(誤規)를 철저히 제거하여,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회복코자 할 뿐입니다." 라 한데서는 그의 복고주의를 발견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성왕(聖王)의 법도 때를 따라 마땅한 것으로 제정해야 한다(時制宜)"라고 강조하고 있는 데서 그의 강한 현실인식을 발견케 된다.
또한 그가 신분적 차등주의(差等主義)를 완화하고 능력·능률주의(能力·能率主義)를 장려하는 진보적인 정치개혁안들을 제시하고 있음에서 그의 현실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일면을 발견케 된다. 예컨대, 무재(武才)가 뛰어난 공사천(公私賤)은 면천(免賤)하여 오위(五衛)에 입속시키고, 양인이상의 자제로서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모두 오위(五衛)에 입속시키며, 모든 면세전(免稅田)을 혁파하여 균등과세를 이루고, 대동법(大同法)을 전면적으로 실시하며, 왕실·관청의 수요품을 시장의 수요 공금의 법칙에 따라 사서 쓰게 하자는 이른 바 시상무용제(市上貿用制)의 제안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유태의 변통개혁사상은 고례(古禮)와 고법(古法)의 회복을 희구하되 어디까지나 시의(時宜)에 맞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며, 정치의 실(實)을 이루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변통이 아니라, 능력주의 능률주의가 존중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태의 변통개혁사상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변통개혁의 핵심을 철저한 사회통제와 경제개혁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오가통제(五家統制 : 5家=統, 25家=小統, 100家=中統, 200家=大統)에 의해 전체국민을 조직화하고, 이름을 호적에 실리지 않은 자와 허가 없이 불법으로 이사한 자에 대해 전체주민의 사회적 경제적 제재를 가하도록 유도하고, 또 허접(許接 : 관청의 눈을 피해 도피중인 사람을 자기 집에 붙이어 숨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연대책임을 물어 주민전체에 대해 벌포(罰布)를 과하는 등 철저한 사회통제정책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정책수립의 목적은 물론 호구(戶口) 파악을 효과적으로 하여 수세(收稅)와 부역(賦役)의 기초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었을 것이나, 동시에 그것은 국가가 기타 여러 가지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얻고자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의 변통개혁론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혁구폐론(革救弊論)'이고 혁구폐론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경제개혁안(經濟改革案)이다. 그리고 이 개혁안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통일적인 경제시책이다. 즉, 대동법(大同法)의 균등실시, 양전(量田 :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와 세공(稅貢)의 1/10 통작(通作), 인역세(人役稅)의 통일에 의한 인대동(人大同)의 성취와 열읍의 사회운영의 통일안 등은 모두 그의 통일적인 경제정책을 잘 나타내주는 것들이다. 이것은 그가 통일적이고 통제적인 사회정책을 구가한 것과도 상통되는 것으로서 주목되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가 '경제사(經濟司 : 이이가 이미 주장했던 바로서, 이전 신하들의 상소나 건의 및 근래 신하들의 왕명에 의한 상소나 진언들을 모두 모아서 이것들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기관)'와 '형지안(形止案 :중앙에서 전국의 행정 실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6조의 각사 관원과 지방의 감사이하 찰방에 이르기까지의 보든 관원이 올리는 행정실태보고 및 대책안)'제도의 설치를 제안한 것과 함께 정치의 실(實)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그의 무실적 정치사상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요컨대, 공의 <기해봉사>는 효종의 북벌계획을 의식하고 제시된 서인계 산림(西人系 山林)의 시무책(時務策)으로서, 북벌에 선행되어야 할 '내수(內修)'를 위한 만전지책(萬全之策)이었으며,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였던 '북벌'에 대한 산림의 하나의 정책구상이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즉, 이것은 당시의 당인(黨人)들이 아무런 정책·대안(代案)도 없이 단지 당리당략(黨利黨略)의 차원에서 북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하나의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이유태의 <기해봉사>는 실로 오늘날에 있어서도 경청할 만한 내용이 적지 않은 높은 경륜의 개혁안이다. 현종임금도 이유태를 불러서 친히 반나절 동안이나 <기해봉사>를 경청하였고, 그 결과 "가히 행하지 못할 일이 없다(無非可爲之事)"는 등 칭찬을 아끼지 않고, 이 안을 내각에 내려서 대신들이 토론케 하였다.
그러나 전후 약 5∼6년간에 걸쳐 그의 봉사에 대한 조정의 채택논쟁(採擇論爭)이 있었으나, 결국은 뚜렷한 반대의 이유도 없이 이 안건은 유야무야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왕과 대신들의 개혁의지(改革意志)가 박약하였고, 또한 예송적(禮訟的) 분위기에서의 당파적 갈등과 때마침 계속되었던 흉년 등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그 요인이 되어 국책(國策)으로 수용되지는 못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변통론과 무실적 개혁사상은 장기간의 채택논쟁을 거치면서, 많은 신료(臣僚)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뒷날의 개혁안의 검토과정들에서도 곧잘 이유태의 개혁안들이 다시 거론되곤 한 것으로 보아, 그의 <기해봉사>는 당시의 조정에 개혁의 새 기운을 진작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유태의 저술을 집대성한 것으로는 《초려전집(草廬全集》두 권이 있는데, 여기에는 앞의 <기해봉사>를 포함한 정치사상 및 정치관계기사와, 성리학관계의 기록, 예학관계의 기록 그리고 후손에게 주는 정훈(庭訓)등 총 35권과 후손에 의해서 편집된 이유태 시대의 정치관계기사인 <문산문답(文山問答)> 등이 들어 있다.
공주의 중호(中湖)에는 그가 살던 고택(古宅)이 잘 복원되어 있고, 또 그가 생전에 강학하던 용문서재를 재건한 용문서원(龍文書院)이 복원되어 후학들의 강학처(講學處)가 되고 있으며, 그의 위업과 정신을 추모하는 향사(享祀)의 터전이 되고 있다. 묘소는 연기군 남면 종촌리(舊 공주 도리산)에 있다.
《자료 : 草廬全集 上·下,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韓基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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