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장씨(牙山蔣氏)
아산(牙山)은 충청남도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음봉현(陰峰縣: 陰岑縣)으로 개칭하였고, 탕정군(湯井郡: 溫陽)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인주(仁州)로 고치고,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에 천안에 소속되었다가, 후에 아주(牙州)로 고치고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아산현으로 개칭하였고, 1459년(세조 5)에 이르러 아산현을 온양군·신창군·평택현 등에 분속하였다가, 1464년 아산현으로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홍주부 아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에 충청남도 아산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온양·아산·신창의 3개 군을 통합하여 아산군이라고 칭하고 12개 면을 두었다. 1941년 온양면이 온양읍으로 승격하고, 1986년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하여 군에서 분리되었다. 1987년 배방면 공수리 일부가 온양시로 편입하였고, 탕정면 구령리가 배방면에 편입하였다. 1989년 신동 일부가 온양시에 편입, 염치면 석정리 일부가 온양시로 편입하였다. 1990년 염치면을 염치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1월 온양시와 아산군이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의 아산시가 되었다.
아산장씨(牙山蔣氏)의 시조 장서(蔣壻)는 중국 송나라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다.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그는 상서(尙書) 이강(李綱)과 함께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를 타고 망명하여 우라나라의 아산(牙山)에 표착하였다. 《기미보(己未譜)》에 의하면, “장서가 아산에 표착한 사실을 좌복야(左僕射) 박인량(朴寅亮)과 재보(宰輔) 위계정(魏繼廷)으로부터 전해 들은 고려 예종이 그에게 아산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그를 아산군(牙山君)에 봉하였다.”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아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은 문헌에 아산, 청송(靑松), 김포(金浦) 등 여러 본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모두가 아산장씨의 동원분파이므로 오늘날에는 아산단본으로 되어 있다.
중은공파(仲殷公派), 연공파(延公派), 문도공파(聞道公派), 방도공파(方道公派), 숙강공파(叔岡公派)가 있다.
재실 도동재
재실에서 바라본 시조묘와 장영실 묘
시조 묘소 전경
과학자 장영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소주, 항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蔣壻)의 9대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고려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기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영실의 신분은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였다. 그의 과학적 재능으로 태종 때 이미 발탁되어 궁중기술자 업무에 종사하였다.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 세종의 명으로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1423년(세종 5) 왕의 특명으로 면천(免賤)되어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관노(官奴)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행사직(行司直)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李狀)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세종 15) 정4품 호군(護軍)에 오르고 혼천의(渾天儀)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銅活字)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採訪)별감이 되어 구리[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하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上護軍)에 특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종이 신병치료차 이천으로 온천욕을 떠나는 길에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수레가 부서져 그 책임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당하였다. 세종은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주었을뿐이었다. 그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남아있지 않다.
과학장 장영실 추모비와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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