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문충공 김선생 유허비」입니다.
“역사는 의(義)로운 사람이 흘린 피를 먹고 산다” 는 말이 있다. 상주 땅에도 의로운 피를 뿌린 충장(忠壯)의 얼이 있으니, 고려정당문학(高麗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가 바로 그 분이다. 상주시 낙양동 103-7, 경상대로변에 「고려정당문학문충공난계김선생유허비(高麗政堂文學文忠公蘭溪金先生遺墟碑)」가 비각(碑閣)과 함께 구비(舊碑), 신비(新碑)가 함께 서 있다. 난계 김득배 선생(1312~1362)은 고려말 문신으로 공민왕 8년에 4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어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등과 함께 서경과 함종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고려사직을 구하였다. 이후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10만 대군으로 재침하자 도병마사가 되어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쳐 개경을 탈환하였으나, 안동으로 남천(南遷)해 있던 공민왕을 모시고 있었던 평장사(平章使) 김용(金鏞)이 여러 장수의 전공을 시기하여, 왕명을 사칭해 선생을 비롯하여 안우와 이방실등 세 주전원수(主戰元帥)들을 참살(慘殺)하는 비극을 당하는 바람에 우리는 상주의 큰 인물을 잃었다. 상주동쪽 병풍산 밑을 군명교(軍鳴郊)라 부르는데 이는 김용의 밀명에 따라 산양에서 배편으로 낙동강을 경유, 상주행궁으로 압송길에 배가 병성에 닿자마자 정지상등이 떼로 달려들어 선생을 기습 참살 하였다. 선생을 따르던 군사들이 수상한 낌새를 차리고 곧 뒤를 쫒았으나 병성 현장에 이르러 주장(主將)의 참변 소식을 듣고 모두 땅을 치고 통곡하던 곳이라 전한다. 이때 선생의 제자 포은(圃隱) 정몽주선생은 공민왕에게 대의(大義)를 논리정연하게 간청, 상주 남쪽 십리허(十里許)에 장사 지내고 제문을 지어 선생을 조상 하였다고 하는데, 난계선생과 포은선생의 관계에 대하여는 영천시에 소재하는 임고서원에도 사제지간으로 잘 나타나 있으며, 선생의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호는 난계(蘭溪)이시며, 본관은 상산(商山) 이시다. 여주 신륵사에 안치된 나옹선사의 진영 뒤 배경은 나옹의 제자들로 왼쪽은 지공이고 오른쪽은 무학대사이다. 선생의 부인 서흥김씨는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나옹선사의 진영 앞에 합장하고 말없이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부인은 말없이 살려고 머리를 깍아 청산에 안겼고 티 없이 창공을 벗 삼으려고 각관 스님과 부인이 윤필암(문경시 산북면)을 창건 하였다고 한다(이색의 윤필암기). 경기도 연천의 고려숭의전(高麗崇義殿)과 외남면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정포은이 과거시험을 볼 때에 선생은 지공거(知貢擧)였었다고 한다. 본 유허비의 자리는 선생의 집터였었다고 전 하는데 후손들의 정성에 의하여1811년에 세워졌고,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선생이 글을 짓고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선생의 묘소는 찾을 길이 없어 김천시 어모면 구례리(여남마을)에 단소로 모셔져 있다. 정당문학은 고려시대 중서문하성내에 설치된 2품의 벼슬이다. 당시 포은선생이 피 눈물로 제문을 짓고 스승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니 아무도 그의 제문에서 흠을 잡아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그 제문은 祭 金元帥 得培 文 嗚呼皇天 此何人哉 蓋開福善禍淫者天也 賞善罰惡者人也 天人雖殊 其理則一 古人有言曰 天定勝人 人衆勝天 亦何理也 往者紅寇闌入 乘輿播越 國家之命 危如懸綫 惟公首倡大義 遠近響應 身出萬死之計 克復三韓之業 凡今之人 食於斯寢於斯 伊誰之功歟 雖有其罪 以功掩之可也 罪重於功 心使歸服其罪 然後討之可也 奈何汗馬未乾 凱歌未罷 遂使泰山之功 轉爲鋒刀之血歟 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 吾知其忠魂壯魄 千秋萬歲 必飮血於九泉之下. 嗚呼命也. 如之何. 如之何. (오호라. 황천이시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대개 복선화음(福善禍淫)하는 것은 하늘이요. 상선벌악(賞善罰惡) 하는 것은 사람이라 들었으니.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나 그 이치는 한 가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하늘이 뜻을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이 이긴다 하였으니 이 역시 어떤 이치인가? 지난번 홍건적이 침입 하였을 때 임금이 피난하고 나라의 운명이 위태하기가 실 끝에 달린 것 같았는데. 오직 공이 대의를 수창(首倡)함에 원근에서 호응 하였으며. 몸소 만 번 죽을 각오로 계책을 세워 능히 삼한의 대업을 회복 하였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편안히 먹고 자는 것이 누구의 공인가? 비록 죄가 있을지라도 공으로 덮어주는 것이 옳으며, 죄가 공보다 무겁다면 반드시 돌아와 그 죄를 자복시킨 뒤에 토죄함이 옳거늘, 어찌 말 머리의 땀이 마르기도 전에 개선가가 끝나기도 전에 태산 같은 공로가 있는 사람의 피로 칼날을 적시게 하였는가? 이것이 내가 피눈물로 하늘에 묻는 바이다. 내가 아는 그 충혼장백이 천추만세를 반드시 구천지하에서 피눈물을 마실 것이니. 오호 운명이로다. 어찌 하리오 어찌하리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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