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의 사직단(社稷壇) 입니다.
백두대간 상 남산소맥이 개운재로 내려앉기 전, 북으로 뻗어 시가지의 서쪽을 막아주는 주산(蛛山)자락 아담한 마을에 잊혀진 옛 사직단의 터(址)가 소재하는바 낙양2동 사직단마을이다. 상주시의회청사에서 서쪽 보은 방향으로 교량건너편 왼쪽에 이 터를 알리는 사직단비가 서 있다. 이곳에서 제방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오른쪽 산 아래로 마을이 보이는데, 이 마을 중앙에 기운차게 불룩 솟은 곳이 바로 옛 사직단이 있던 곳이다.
이 단(壇)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땅과 곡식은 나라와 백성의 근본이므로 사직(社稷)은 토지신(神)인 사신(社神)과 곡물신(神)인 직신(稷神), 두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고 봉사(奉祀)하므로 사직단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사직단(社稷壇)의 역사는 『삼국사기』와 『문헌비고(文獻備考)』에 고구려는 391년(고국양왕 9)에 국사(國社)를 세웠고, 신라는 783년(선덕왕 4)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는 『고려사』를 통하여 991년(성종 10) 처음으로 도성인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만들었고, 그 후 사직단을 수축하거나 사직단에서 행한 제례를 정비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다가 사직단의 제사는 통감부가 1908년 칙령으로 향사에 관한 시설을 대부분 철폐시킴에 따라 폐지되었다.
향지인 상산지에는 壇壝는『人非土不生非穀不食社稷之設所以求福報功也其崇奉之禮極其誠敬然後庶幾旱澇無災人物阜安不遠於祭祀之本意考古社稷之制其飾則不屋其表則樹其所宜木謂之社自唐以後用石主今以木主代之木主不可以暴露則築室以奉安之祭之日出主於壇以祭之求之事理有不可己自窃以列邑社稷無祠宇以藏位版常時奉安於官舍不潔之地臨祭用架子昇至壇所其不敬之甚者置諸空薦中縛以藁索韓文公曰牲酒瘠酸神不顧享況此無禮之甚非止於不享而己耶如是欲望其年穀豊登災殃不作不可得也社者必受霜露風雨以達天地之氣壇壝則固不可屋獨不可庇其位版歟』이라 하고 社稷壇은『在州城三里許牧使鄭崑壽建宇奉安位版兵後廢』라 적고 있다.
신증(新增)에는 주서(州西)5리에 있으니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목사가 창설한 후 300여년을 주(州)의 목민(牧民)하는 자(者)가 건성(虔誠) 행사하여 폐지한 일 없고, 1910년 이후는 향교 향사비용 중에서 주과(酒果)를 약설(略設) 행사(行祀)하여 왔다. 옛말에 정성이 없으면 신(神)도 없다 하였으니, 과연 얼마 안 되어 폐지되었다. 이제 와서 흙이 아니면 살 수 없고 곡식이 아니면 먹지 못한다 함이 무슨 말이 되겠는가? 라고 쓰고 있네요. 배고픈 시절에는 먹는 문제가 최우선 이었지만 그간 산업사회에 떠밀려 토지와 곡식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다시한번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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