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향교,서원)

[스크랩] 朝鮮 性理學의 발자취를 따라 : 屛山書院 (병산서원)

장안봉(微山) 2018. 5. 1. 21:25

 

 

들어가는 말

조선의 유학은 송나라 때 주자가 이루어놓은 유학체계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흔히 性理學이라고 일컬어진다. 공자가 『주역』 계사상전 제5장에서 “ 一陰一陽之謂 道니 繼之者 善也요 成之者 性也라”고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주자는 “性은 곧 理(性卽理)”라고 해석하면서 성리학의 체계가 이루어졌다. 주자는 유학의 四書三經를 세우고, 주석을 달면서 정치체계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런 주자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조선의 유학이므로 주자를 떠나서 조선 유학을 해석하기는 어렵다.

 

특히 오늘의 답사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고려 말 학자인 晦軒 安珦을 모신 紹修書院과 조선의 성리학을 꽃피운 退溪 李滉을 모신 陶山書院과 성리학적 품성과 학문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시기 큰 공을 세운 西厓 柳成龍을 모신 屛山書院을 둘러볼 예정이다. 그간 교실에서 공부한 유학 원론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 유학, 곧 성리학의 실제를 이들 서원 답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들여다보자.

 

 

儒敎의 교육관

예로부터 황하문명권에서는 교육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미 삼황오제 시기부터 司徒와 典樂의 관직을 두어 사람들의 人性을 잘 갈고 닦도록 하였다. 사람이 갖고 있는 본연의 성품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그대로 眞實無妄하나 기질과 인욕에 의해 흔들리고 가려져서 天賦之性의 순수함을 잃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라면 반드시 교육기관을 두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朱子는 大學章句序에서 이러한 교육의 유래와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三代之隆에 其法이 寖備然後에 王宮國都로 以及閭巷히 莫不有學하야 人生八世어든 則自王公以下로 至於庶人之子弟히 皆入小學하여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과 禮樂射御書數之文하고 及其十有五年이어든 則自天子之元子衆子로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와 與凡民之俊秀히 皆入大學하여 而敎之以窮理正心脩己治人之道하니 此又學校之敎 大小之節이 所以分也라

삼대가 융성할 때에 그 법이 점점 갖추어진 연후에 왕궁과 국도와 마을과 고을에 미치기까지 학교가 있지 않음이 없어서 사람이 나서 여덟 살이 되면 곧 왕공부터 아래로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다 소학에 들어가서 물 뿌리고 쓸고 응하고 대답하고 나아감과 물러남의 절도(灑掃應對進退之節)와 예절과 음악, 활쏘기와 말 타기, 글과 셈의 문(禮樂射御書數之文)으로써 가르침을 받았고, 15세에 이르면 천자의 맏아들과 여러 아들로부터 공과 경과 대부와 원사의 맏아들과 뭇 백성들의 준수한 이에 이르기까지 다 태학에 들어가서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로써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 또한 학교의 가르침에 크고 작은 절차가 나뉜 까닭이라.

 

 

곧 옛날 성인의 政事와 가르침이 융성하였던 하 ․ 은 ․ 주 삼대에는 소학과 태학으로써 교육기관과 교육단계를 나누어, 소학에서는 灑掃應對進退의 절도와 禮樂射御書數의 문채를 배우고, 태학에서는 窮理正心의 학문과 修己治人의 도를 닦게 하였다. 즉, 여덟 살이 되면 소학에 들어가 6節과 6文을 공부하는데,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어릴 적에 절도 있고 올바른 습관을 익히지 않으면 나중에 고치기 힘들므로 먼저 자잘한 기본 행동부터 익히는 것이다. 또 배움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지 않으면 심원광대한 공부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기초학문부터 쌓는 것이다.

 

 

그리고 소학 과정을 마친 뒤에 열다섯 살부터는 태학에 들어가서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의 도리를 닦게 된다. 사물의 궁극적인 이치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窮理이고 사물의 이치를 터득함으로써 마음가짐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正心인데, 궁리로 인해 정심이 이루어지므로 궁리는 體가 되고 정심은 用이 된다. 궁리정심은 수기치인의 선결요체로서 『대학』의 八條目 가운데 내적인 格物 致知 誠意 正心에 해당하고, 수기치인은 자신의 몸을 닦아 타인의 사표가 되어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 팔조목 가운데 외적인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에 해당한다.

 

 

소학과 태학에서 쌓는 학문의 높고 낮음을 『주역』의 괘로써 견주면 소축(風天小畜 )과 대축(山天大畜 )이라 할 수 있다. 小畜괘 大象傳을 보면 “風行天上이 小畜이니 君子 以하여 懿文德하나니라(바람이 하늘위에 부는 것이 소축이니, 군자는 이로써 문덕을 아름답게 하나니라)” 하였고, 大畜괘 대상전을 보면 “天在山中이 大畜이니 君子 以하여 多識前言往行하야 以畜其德하니니라(하늘이 산 속에 있는 것이 대축이니, 군자는 이로써 전대성현의 말씀과 지난 옛 성인들의 행실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쌓느니라)” 하였다.

 

곧 유교문화권에서 쌓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文德이며, 그것은 앞서간 성인의 언행을 익혀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에서는 공부에 앞서 반드시 성현에게 제를 먼저 올리는 것을 기본 예로 삼았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인문교육기관 : 유교의 경전을 가르쳐 유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물형을 만드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는 공자를 모신 문묘에 제를 지냈으며, 지방의 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에서는 선현의 사당을 두고 제를 지냈다. 학생들은 군역이 면제되었고, 농번기에 방학을 주어 농사일을 돕도록 하였으며, 농한기에는 기숙사인 재(齋)에 거처하며 공부하였다.

 

 

대학

소학

국공립

성균관

4부학당(서울, 문묘없음), 향교(지방)

서당

사립

서원

 

 

 

 

 

기술교육기관 : 의학 역학 산학 율학 천문학 지리학 등으로 나누어 전의감, 사역원, 호조, 이조, 관상감 등 해당 관청에서 중인들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賜額書院(사액서원)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서원의 현판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려주고, 서원 소속의 토지 및 노비에 대해 세금과 노역, 군역을 면제해준 지방사립대학을 말한다. 1543년(조선 중종38) 경상도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건의에 따라 명종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과 서적을 하사한 데서 비롯되었다.

 

처음에 주세붕은 향교를 꺼리는 양반들을 위한 과거준비 기구로 서원을 생각하고 양반 자제들을 모집했으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서원을 도학(道學)하는 곳으로 생각한 이황이 군수로 부임하여 국가의 공인을 받자, 지역 사족들이 서원 운영에 적극 참여하면서 활기를 띄어 갔다. 이때 이황은 서원의 학규와 교과내용, 운영 등을 지역 사림의 자율에 맡기고, 관에서는 경제적 지원만을 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국가는 관학과 같은 역할을 기대하며 허용했다.

 

이에 힘입어 이황은 10여 곳의 서원 건립에 관여하여 조선 서원의 전형을 만들어갔는데 이후 서원은 학문, 교육이라는 보호막으로 관청의 견제를 피하면서 유교의 향촌 질서를 확립하고 사림(관직에 나가지 않은 선비) 세력을 결집하는 기능을 확보해 갔다.

 

선조 때 사림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각지에서 사림을 중심으로 한 사족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붕당정치(뜻이 같이 사람들끼리 모인 당)가 사림에 의해서 주도되자, 자연스레 학파와 연결되면서 크게는 이황 계열인 영남 남인계 서원과 이이 계열인 서인계 서원으로 나뉜다. 두 세력이 점차 재야 세력과 집권세력으로 나뉘고 정권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조선사회의 변동을 가져왔다.

  

 

   

屛山書院 (병산서원, 安東市 豊川面 屛山里)

 

병산서원은 본래 풍악서당으로, 공민왕이 피난 시절 이곳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토지 8백 두락을 주기도 한 곳이다. 1572년 서애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2년(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尊德祠를 짓고 享祀하면서 서원이 되었는데, 철종 14년에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설립 시기가 서원이라는 사립교육제도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때 세워진 만큼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 모습을 보여준다.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을 일직선상에 놓고 강당 앞쪽으로는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놓았으며, 강당 뒤쪽에는 진사청과 장판각을 두었다. 외곽으로는 낮은 돌담을 둘러 감싸고 사당 공간에는 특별히 담을 더 둘러 출입을 통제했다. 앞쪽 병산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河圖數 二七火의 원리를 이용해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지은 만대루에 올라 앉아 좌우 앞쪽 삼면을 둘러보면 시야가 시원하게 툭 트임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만대루의 구성이야말로 주역의 원리를 통찰하여 지형의 불리를 극복하고 풍광의 멋스러움을 즐긴 선인들의 지혜로움에 해당한다.

配享인물 / 正位 : 西厓 柳成龍(1542~1607) 從祀位 : 修巖 柳袗(西厓의 三男)

常享祝文 : 學博而要 見徹而實 莊敬之功 表裏如一

 

[참조]

안동의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때 향사한 서원으로 앞산이 屛山이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이보다 앞서 남송의 朱子가 武夷三先生(주자의 장인인 劉聘君 白水 劉勉之와 籍溪 胡憲, 屛山 劉子翬)을 崇安 紫陽땅에서 만나 스승으로 삼았던 곳이 屛山書院이다.

 

 

 

屛山書院 주요 현판 읽기

復禮門

“顔淵 問仁한대 子曰克己復禮 爲仁이니 一日克己復禮 天下 歸仁焉하나니 爲仁 由己 而由人乎哉 顔淵 曰請問其目하노이다 子曰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 顔淵 曰回雖不敏이나 請事斯語矣로리이다(『논어』안연편 제1장)

晩對樓

“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杜甫, 白帝城樓)

立敎堂

“澤上有地 臨이니 君子 以하여 敎思无窮하고 容保民无疆하니라(『주역』臨괘 대상전)

“聖人 以神道設敎而天下服矣니라(『주역』觀괘, 단전)

“風行地上이니 先王以省方觀民하여 設敎하니라(『주역』觀괘, 대상전)

“水洊至 習坎이니 君子 以하여 常德行하며 習敎事하나니라(『주역』坎卦 대상전)

“帝曰契 百姓 不親하며 五品不遜일새 汝作司徒 敬敷五敎하되 在寬하라(『서경』 虞書 舜典편)

“帝曰夔 命汝하야 典樂하노니 敎冑子호대 直而溫하며 寬而栗하며 剛而無虐하며 簡而無傲케하리니 言志永言이오 依永이오 和聲하나니 八音 克諧하여 無相奪倫이라사 神人以和하리라(『서경』虞書 舜典편)

“子以四敎하시니 文行忠信이니라(『논어』술이편 제24장)

明誠齋

“自誠明 謂之性이오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니라

(『중용』제21장)

敬義齋

“直 其正也 其義也 君子 敬以直內하고 義以方外하야 敬義立而德不孤하나니 直方大不習无不利 則不疑其所行也(『주역』坤괘 문언전 제2절)

動直齋

“六二之動 直以方也 不習无不利 地道光也(『주역』坤괘 육이효 소상전)

 

출처 : 家苑 이윤숙의 한자와 유학경전 강의(경연학당)
글쓴이 : 法故創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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