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선조 )

[스크랩] (정신택주 권씨선조님) 묘지명으로 보는 고려시대 여성의 삶

장안봉(微山) 2013. 1. 10. 07:07

 

묘지명으로 보는 고려시대 여성의 삶

-이색 처 정신택주 권씨를 중심으로

<요 약>

1. 성장과 혼인

1331년(충혜왕1) 명문 안동 권씨 가문의 2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남.

② 조부 권한공은 충선왕과 충숙왕 때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수상까지 지냈으며, 아버지도 재상을 지냄.

③ 1341년 11세의 나이에 명성이 자자한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과 혼인

양측적 친속(兩側的親屬) 구조 속에서 능력 있는 인재를 사위로 삼아 가문의 성세를 더하려 했던 배경

 

2. 처가살이 전통

처가에서 시작된 신접살림

고려의 혼인 풍속 : 서류부가(婿留婦家) 혹은 남귀여가(男歸女家)

‘남자가 차라리 본가로부터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게 되어 있다’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시집살이가 의무가 아니었다는 점이 특징

㉡ 처가에 머무는 기간은 양가의 경제력이나 자녀구성, 관직 등에 따라 차이

무남독녀는 평생 처가에 머물기도 하고, 외아들의 경우는 빨리 시집으로 갔고, 지방관으로 부임할 시 분가할 수도 있음.

㉢ 택주의 경우, 이색이 원의 국자감에 유학하고 회시와 전시에 합격한 후 원과 고려를 오가며 벼슬생활을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친정에, 뒤에는 분가해 살았을 것임.

② 처가나 외가의 관계

처가의 제사, 혼인식, 장례식에 참석, 수시로 매부나 동서들과 교류(이색의 시)

㉡「장인인 화원군(花原君)의 내외손들의 경조사 모임을 사촌회(四寸會)라 이름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함. 연말에 모임을 소집하여 내년 유사에게 넘겨주는 것을 가법(家法)이라 했다.

③ 여성의 삶

㉠ 혼인 뒤 친정 부모를 모실 수도 있었으니 ‘출가외인(出嫁外人)’ 관념이 적었을 것.

㉡ 시집에 들어가 살 때에 비해 남편과의 관계도 덜 일방적이었을 것

㉢ 아들 못지않은 소임을 딸도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녀차별이 심하지 않았을 것. → 출생 순으로 호적 기재. 장성한 아들 있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기도 함.

 

3. 여성의 가정 내 역할

1) 효도

① 전근대 효도 : 생시 봉양을 잘하고, 돌아가시면 제사를 정성껏 지내는 것.

② 고려시대 제사풍속

㉠ 절에서 재(齋)의 형태로 치렀으며, 시부모만이 아니라 친정부모나 외조부모도 포함. 부계집단 위주의 수직적 형태라기보다 수평적인 형태.

㉡ ‘단오날 성묘 전물을 딸 집에서 준비하고, 아들과 사위가 함께 성묘에 참여’

‘처조부 예천부원군 권한공의 기재에 참석, 사위인 염 시중이 재 주관’(이색의 시)

③ 제사 비용

㉠ 자녀들이 공동으로 기일보(忌日寶)를 만들어 제사기금 마련하거나, 자녀들이 돌아가며 제사 비용을 대거나 제사를 모시는 윤행(輪行) 형태 제사의 권리와 의무가 남녀동등

㉡ 부계조상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남녀에게 동등한 몫을 상속하는 데서 비롯됨.

2) 내조

남편이 바깥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집안일을 잘 처리하는 것.

② 공직자 아내로서 남편이 청렴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

③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남편이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곁에서 지키고 함께 하는 것. “공이 병에 걸려 고통을 겪을 때와 참소를 입어 귀양 갈 때에 역시 초조한 마음으로 적극 힘써 구하여 마침내 환란을 면하게 되었다.”(묘지명 택주의 글)

3) 자녀교육

세 아들 모두 급제. 장남 종덕 장원급제. 차남 종학은 14세에 성균시, 2년 뒤 문과급제. 삼남 종선 역시 급제하고 관직생활. 장남과 차남은 재상의 지위까지 오름.

② “자손을 가르침에는 자애롭고 법도가 있게 하며, 행동은 예법을 따르므로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묘지명 택주의 글)

 

4. 주부로서의 경제활동

가족, 노비, 일가친척, 남편 및 자식 지인들의 수시 방문에 쪼들리는 살림살이, 이를 위해 여성들에게 검소함, 근면함 요구됨.

② 일부여성들은 경제적 이득을 추구, 고리대로 재산증식, 상업과 무역에 손을 대기도 함.

→ 잣과 인삼을 중국으로 수출해 이익을 얻은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사례

③ 택주의 경우 “공은 학문에 전심하고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으며, 부인 역시 권면하여 일찍이 일로써 공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아니하므로...비록 공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나 부인의 도움 역시 많았다.”(묘비명)에 비추어볼 때 주부로서 가정경영의 주체.

5. 죽음

1394년 8월 1일 병으로 사망(향년 64세).

② 1389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고 남편 이색은 장단에 유배.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 피살로 금주(衿州)로 추방. 아들 셋 역시 모두 유 배되었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첫째와 둘째아들 살해됨.

③ 아들들의 죽음으로 깊은 병이 든 택주는 결국 죽음에 이르러 한산 가지원(加智原) 선영에 묻혔고, 남편 이색도 2년 뒤 사망하여 그녀 뒤를 따름.

 

<주요 용어 해설>

묘지명(墓誌銘)

묘비에 새긴 글을 말한다. 고인(故人)에 대한 경력이나 그 일생을 상징하는 말 따위를 새기기도 하고, 그를 기념하는 명문(銘文)이나 시문(詩文)을 적기도 한다. 이러한 묘비명은 당대의 삶을 후대에 전해주기도 하고 훌륭한 문학 작품으로 손색이 없어 문학 장르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양측적 친속(兩側的親屬)

친족의 범위가 조선시대에 부계(父系)만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모계(母系)도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측적 친속 사회였던 고려시대에는 친속 내에서 외가나 처가의 영향력이 컸다. 가족구성은 비부계적이었으며 처계나 모계친과도 매우 가까웠다. 부양가족도 부계만이 아니라 처계나 모계 등이 포함되었고 외조부모나 장인 장모의 상복이 1년으로 친조부모와 같았다. 사위나 외손자는 아들이나 친손자와 마찬가지로 장인이나 외조부를 통해 음서나 공음전 특혜를 받을 수 있었고, 사위가 국가에 공을 세우면 사위의 부모와 함께 장인 장모도 상을 받았고 사위가 죄를 지으면 장인 역시 연좌되었다.

 

처가살이

고려의 혼인 풍속은 서류부가혼(婿留婦家婚) 혹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 하는 처가살이 혼인으로, 여성들이 혼인을 하고도 친정에서 계속 살다가 나중에 시집으로 가는 제도이다. 서류부가혼의 기원은 고구려 서옥제(壻屋制)에서 찾아지며 고대 이래 우리 민족의 고유한 혼인 풍속이었다. 처가에 머무는 기간은 양가의 경제력이나 자녀구성, 관직 등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무남독녀의 경우는 평생 처가에 머물기도 하고, 외아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빨리 시집으로 갔을 것이며, 또 지방관으로 부임한다거나 하면 분가할 수도 있는 선택적인 것이었다.

 

제사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효는 부모가 죽은 뒤 명복을 비는 것을 중시했으며, 고려시대에 부모 기일에 절에서 재를 지냈다. 제사의 대상은 부모와 조부모까지였다. 공양왕 때는 가묘설치 및 증조부모 기일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부모와 조부모는 물론 처부모와 외조부모의 기일에도 휴가를 주었다. 고려의 제사는 부계집단 위주의 수직적 형태라기보다 수평적이었던 것이다. 절에서의 재는 행사주관은 승려가 하고 가족들은 비용만 내면 됐기 때문에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재를 베푸는 윤회봉사가 가능했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시대 들어 집집마다 사당을 설치하고 부계친족끼리 모여 지내는 것으로 변모했다. 또한 적장자 우위관념에 따라 장자가 제사지내는 것으로 변모하면서 아들의 중요성이 더해졌다.

 

<생각해 볼 문제>

1. 정신택주와 이색의 혼인은 두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고려시대에는 친족구조가 ‘양측적 친속(兩側的親屬)’으로서 친가뿐 아니라 처가와 외가도 상당히 중시되었다. 음서와 공음전시 혜택이 사위와 외손주에게도 주어졌으며, 사위나 외손주의 공으로 장인이나 외할아버지가 상을 받기도 했다. 즉 사위의 출세는 아들의 출세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영광’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집안이 변변치 못한 젊은이가 과거에 합격한 뒤 명문가의 사위가 되어 최고계층에 진입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귀족들은 능력 있는 인재를 사위로 삼아 가문의 성세를 더하려 했고, 가난한 천재들은 처가의 배경이 자신과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택주와 이색의 혼인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수상까지 지낸 할아버지와 재상까지 지낸 아버지가 있었던 당대의 명문세가 출신이었던 정신택주와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이색과의 혼인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바탕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2. 처가살이 전통 하에서 여성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 시집살이 전통과 어떻게 달랐는가?

처가살이 전통 하에서 여성은 혼인 뒤 꼭 시집에 갈 필요가 없고 친정 부모를 모실 수도 있었으니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관념이 적었다. 또한 남편과의 관계도 시집에 들어가 살 때에 비해서는 덜 일방적이었다. 이에 삼봉 정도전은 여자들이 친정에서 혼인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 부모 세력을 믿고 남편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군다며 혼인 풍속을 중국처럼 시집살이 형태로 바꾸자고 주장할 정도였다. 딸도 아들 못지않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녀 차별도 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식을 호적에 기재할 때도 아들 먼저 쓰고 딸을 나중에 기재하는 것이 아니라 출생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또한 장성한 아들이 있어도 어머니가 호주가 되기도 하였다.

3. 고려시대 제사 풍속의 비 부계적 특징은 무엇인가?

고려시대에는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외손자가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부모와 조부모는 물론 처부모와 외조부모의 기일에도 휴가를 주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아들을 선호했던 이유는 결국 제사지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에서는 적장자에게 제사가 계승되지 않았으며, 주로 절에서 제사를 지냈으므로 형제 자매들이 돌아가면서 돈을 내어 불사를 주관하였다. 이를 윤회봉사라 하며 남녀 균분 상속이었던 고려사회의 특성과 잘 부합한다. 이러한 제사풍속 아래서는 아들이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딸과 외손자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출처:한국방송대학 충북지역 문화교양학과 글쓴이:신순애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매일하우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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