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1328년 5월 신미일, 아버님이신 가정공(稼亭公)께서 문과급제하시고 8년이 지난 31세의 나이가 되실 때, 외가인 경북 영덕군 영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와 8세에 숭정산 독서당에 입문, 학문을 시작한 후 1382년 고려 충혜왕 복위 2년, 겨우 14세의 나이에 진사 성균시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16세의 나이에 별장(정7품)의 벼슬을 받게 된다. 26세 때인 공민왕 2년(1353)에 고려 문과에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하고 다음해 3월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급제, 황제가 친림하는 전시에 2등으로 합격한다. 이 후 원과 고려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온갖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치다가 결국 공민왕 20년(1371), 44세 때 정당문학의 재상반열에 오르고 우왕 8년(1382) 11월, 55세에 판삼사사(종1품)가 되며 우왕 11년(1385) 58세에 검교 문하시중이 된다.
목은기념관 모습
공양왕 3년(1392) 4월 4일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가 죽고, 다음 7월 17일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왕조 조선을 개국한다. 쿠데타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그 일파의 무자비한 숙청이 한창이었던 고려 왕조 말년과 새왕조 조선 초년기를 거쳐 목은께서 두 아들을 잃고 관직 박탈, 연속되는 유배와 투옥의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후 태조 5년(1396) 목은께서 69세이시던 병자 5월 7일 생을 마감하게 된다.
목은 이색기념관 외부 모습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여말 삼은(三隱)의 한 분이신 목은,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유·불·선에 조예가 깊어 유교의 입장에서 삼교를 융합하였고, 훗날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권근.이숭인.길재.하륜.정도전.김종직.변계량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그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문장의 조종' 이란 칭송을 받을 만큼 시인이자 대문호였던 그는 고려 말기의 학문과 정치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한산의 문헌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장단의 임강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서산서원 등 전국 각지에서 배향되고 있으십니다. 저서로는 ‘목은문고’와 ‘목은시고’ 등이 있다.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 - 고려 말의 가정 이곡(李穀)선생과 목은 이색(李穡)선생의 유적을 추모하는 비각. 이 유허비는 1796년에 영해 괴시마을에 세워졌으나, 비바람에 돌이 깎이고 떨어져나가 글자를 분간하기 어려워져서 1971년 비를 다시 세웠다.
목은 문화재 매년 10월 영해면 괴시리 일원에서는 목은 이색선생을 추모하는 전국적 행사로 목은 문화재가 열리고 있다. 한시백일장, 학생백일장, 국악 공연이 주행사로 고가탐방 및 민속놀이 등의 체험행사도 같이 진행하고 있어 우리의 전통 문화를 알아 가는데 좋은 장을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