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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實學과 經濟論理 005
第2章 中國古典에 나타난 經濟倫理
Ⅱ. 論語
33. 다음에는『論語』에 타나타고 있는 經濟倫理에 관해서 보기로 한다. 學而篇에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
「子曰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敏於事而愼於言.就有道而正言焉.可謂好學也己」
(子曰, 君子는 自己가 먹는 飮食을 배불리 잔뜩 먹으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自己가 사는 住居가 快感을 주어서는 안된다. 일을 處理할 때에는 敏速하게 해야 되고, 말을 할 때에는 조심해서 해야 되고, 有道의 師에게 自己의 過午를 指摘 받을 때에는, 그 사람은 好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孔子는 經濟原則에 따라서 食主를 充分히 充足시켜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孔子의 이 말을 통해서 孔子에 있어서도, 老子에 있어서와 같이 「效用極大化」에 의한 「經濟剩餘極大化」를 追求하는 經濟原則이 順調롭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反經濟原則」이 「經濟倫理上의 善」이 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學而篇에 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貢曰.貧而無도 .富而無驕.何如.子曰.可也.末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
(子貢이 孔子에게 물었다. 貧困하면서도 남에게 아첨해서 利得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富者이면서도 自己가 富者인 것을 誇示하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 子曰. 좋다. 그러나 貧困하면서도 남에게 아첨을 해서 利得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貧困狀態에 서 自己滿足하는 것이 더 좋고, 富者이면서도 積極的으로 禮를 차리는 것이 더 좋다).
여기서 孔子는 財貨所有의 不足즉「效用極大化」「貧」이라고 하고, 그「貧」을「勞動極大化」「效用極大化」에 의한「經濟剩餘極大化」에 의해서 却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反對로 「貧」狀態를 그냥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特히 孔子의 이 主張에서 우리가 注目해야 할 것은「效用極大化」를 통해서「貧」狀態를 하려고 하는 것 즉 「經濟原則」은 「經濟倫理上의 惡」이며, 「經濟倫理上의 善」은 「效用極大化」를 해버리고, 「貧」의 狀態에서 安住하는 것 즉「反經濟原則」이라고 主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孔子가 「必然」으로서 財貨所有를 完全히 排擊했다고는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고 한다. 그리하여 孔子에 있어서의 「經濟倫理上의 善」은 「合必然」의 를 圖謀하면서도 「反經濟原則」이 되는 것이며.「必然」을 넘어선 「效用極大化」(「合經濟原則」)는 「經濟倫理上의 惡」이라고 되고 있다는 것이다.
34. 里仁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富與貴.是人之所欲也.不以其道得之不處也.貧與賤.是人之所惡也.不以其道得之下去也.君子去人.惡乎成名.君子無終食之間違仁.浩次必於是.顚沛 必於是」
(富者가 되고 높은 벼슬을 갖는 것은 누군가 다 願한다. 그러나 自己가 努力해서 그것을 얻지 못한 富나 貴는 取해서는 안된다. 貧者가 되고 賤자가 되는 것은 누구나 다 싫어한다. 그러나 自己가 努力을 안해서 貧者가 되고 또 賤자가 되었다면 그냥 貧者로 賤자로 있어야 한다. 君子는 仁者가 되는 것이 唯一의 목표이므로, 仁의 行動을 해야되며, 不仁의 行動은 해서는 안된다. 君子는 食事를 하는 동안에도 仁을 떠나서는 안되며, 些少한 일에도 仁을 떠나서는 안되며, 極히 바쁜 중에도 仁을 떠나서는 안된다).
여기서 孔子는 勞動과 「經濟剩餘極大化」의 所産으로서의 「富」「貴를 그대로 認定하고 있으며 , 즉 經濟原則을 認定하고 있으며, 勞動을 支拂하지 않고 「富」와「貴」를 獲得하는 것 즉 「合經濟原則」을 「經濟倫理上의 惡」이라고 하고 있다, 즉 孔子도 不勞所得獲得 즉 「合經濟原則」「經濟倫理上 의 惡」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Max Weber의 「資本主義의 情神」은 老子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 孔子의 경우에 있어서도 充分히 適用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里人篇』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子曰.士志於道.而恥惡衣惡食者.未足與議也」
(政道를 志向하는 士君子가 惡衣惡食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더불어 相對할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惡衣惡食者」는 두가지 種類로 區分될 수가 있을줄 한다. 하나는 勞動을 해도「惡衣惡食」하는 사람이고, 또하나는 勞動을 하지 않아서,「惡衣惡食」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正道를 志向하는 士君子라면, 勞動을 하는 것을 當然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므로, 여기서 孔子는 두 번째를 생각하지 않고, 첫 번째 즉 勞動을 하는 사람이 「惡衣惡食」하는 경우를 想定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勞動을 하는 士君子가 「惡衣惡食」즉 「效用極小化」즉 「半經濟原則」일 경우 어떠한 경우인가. 勞動을 해도 所得이 적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될 것이다. 孔子는 勞動을 해도 所得이 적어서「惡衣惡食」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사람이 自嘲하는 態度는 옳지 않다고 말하고있는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그사람이 士君子라면, 理由는 어떠 하든간에 勞動을 해도 所得이 적어 할 수 없이 「惡衣惡食」을 할때에도 그것을 自嘲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孔子의 말은 옳다. 여기에다가 Max Weber의 「資本主義의 情神」을 介入시켜 말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士君子는 「資本主義의 情神」을 十二分으로 發揮하여 勞動을 하고 또 勞動을 하라. 그리고 거시서 獲得하는 所得의 多寡에는 神經을 쓰지 말아라라고. 여기서 우리는 또 Marshall의 「經濟騎士道」도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Marx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10時間 勞動을 해서 所得이 5時間分밖에 안나왔으면, 그것은 5時間分의 勞動의 所得을 他人에 의해서 搾取당했기 때문이다라고,
그리고 역시 里人篇에 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君子懷德小人懷士」
(子曰, 君子는 德을 생각하지만, 小人은 土地를 생각한다).
여기서「懷士」라는 말은 「必然」을 생각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즉 맨 먼저 생각하는 것은「生存」이라는 것이다.「土地」는「生存」을 위해서「不可缺」인「必然」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君子」는「土地」즉「生存」을 위한「不可缺」인「必然」보다 「德」을 먼저 생각해야된다고 孔子는 말하고 있다.
孔子의 이「反必然」의 말은「君子」의「小人」즉 보통사람과 判異한 것을 擴大表現하기 위해서 한말인줄 아는데, 아무리 「德」이 偉大하다고 해도 「法則上」그것이「必然」인 「生存」의 土臺위에 立脚하고 있다는 것을 孔子는 忘却하고 있다고 우리는 敢히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
만약 여기「德」을 위해서는「生存」을 기꺼이 抛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에게 5人의 家族이 있어, 그 5인의 家族이 「土地」의 不足으로 飢餓狀態에 있다고 하고, 救出하기 위해서 옆집의「土地」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의 집에가서 求乞해서 食糧을 받아와서 家族에게 供給해서 家族을 飢餓狀態에서 벗어나게 하는 대신,『論語』에 「君子懷德」이라는 孔子말씀이 있어, 나는 君子이니까 小人이 하는「懷士」는 못하겠다고, 5人의 家族을 그냥 全部 餓死시켰다고 하면, 孔子는 기뻐서「과연 君子다」라고 말했을 것인가. 道德 즉「當爲」가 아무리 偉大하다고 해도「必然」과 軋轢을 일으켜서는 안되고, 「必然」과 調和關係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Max Weber의 「資本主義의 情神」이다. 왜냐하면, MaxWeber의「資本主義의 精神」에 의하면 「必然」인 勞動은 萬人이 반드시 다해야 하고,「反必然」「反經濟原則」「不勞所得 獲得」은 「經濟倫理의 惡」이 되고 「地獄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孔子의 이 말은Marshall의 「經濟騎士道」의 立場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君子즉 「經濟騎士」가 되기 때문이다.
35. 또 「里人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君子喩於義.小人唯於利」
(君子는 道德에 立脚해서 行動하지만, 小人, 즉 보통사람은 自己에게 利가 되는냐 또는 不利가 되느냐에 따라서 行動한다).
여기에서도 孔子는 君子는 「必然」의 입장에 입각해서가 아니라,「當爲」의 立場에 立脚해서 行動해야 하는데 反해서 보통사람은「當爲」의 立場에 立脚해서가 아니라, 「必然」의 立場에 立脚해서 行動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孔子는 「當爲」「必然」즉 「生存」또는「利」를 調和關係에 있는 것이라고 보지않고, 對立關係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말은 이렇게도 解釋할 수 있을 것이다.
君子는 Marshall의 「經濟騎士道」에 따라서 行動한다고, 雍也篇에는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賢哉回也.一簞食.一瓢飮.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
(賢明하도다 顔回는.小食小飮하면서 그리고 조그마한 住宅에 살고 있다. 보통사람은 그 苦痛을 견디지 못하는데, 顔回는 少食少飮하고 조그마한 住宅에 살고 있는 樂을 버리지 않는다. 賢明하도다 顔回는)
顔回는 孔子의 弟子가운데서도 가장 賢明한 弟子로서꼽히는 있는 사람이다. 『論語』에서 孔子에 의해서 가장 頻繁하게 稱讚받는 弟子가 다름아닌 顔回이다.
이런 말이 『論語』에 실려 있다.
「哀公問.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有顔回者.好學.不遷怒.不貳過.不幸短命死矣.今也則亡.未聞好學子也」
(雍也篇)(哀公이 孔子에게 묻기를, 弟子가운데에서 누가 학문을 가장 좋아합니까 했더니, 孔子는 다음과 같이 對答했다. 顔回라는 弟子가 있었는데 그가 가장 學問을 좋아했고. 그는 怒할 때에도, 그 한가지로써 怒하는 것을 그쳤고, 過誤를 범해도 두 번다시 꼭같은 過誤을 범하는일이 없었다. 그런데 不幸하게도 短命으로 죽어버렸다. 지금은 그弟子가 없다. 顔回외에 學問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의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다.)
이 文章속에 孔子가 얼마나 顔回를 높이 評價했고, 또 극진히 사랑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不幸하게도 短命으로 죽어버렸다」고 말하면 되는데, 거기에다가 孔子는 「지금은 그 弟子가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래도 孔子의 顔回에 대한 愛情은 계속 타올라, 「顔回외에 學問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의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推測하건대, 秀才型의 顔回는 스승 孔子의 期特에 어긋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死力을 다해서 學問에 心力을 다 傾注했고, 또 修養에도 全力을 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顔回를 볼 때마다 孔子의 顔回에 대한 評價는 더욱더 높아져갔을 것이고, 또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顔回를 죽인 사람은 다른 사람아닌 바로 孔子이다라고, 孔子는 自己의 사랑하는 弟子의 健康狀態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만약 顔回가 「一簞食,一瓢飮」즉 少食少飮하는 것을 孔子가 보았다고 한다면, 공자는 이렇게 말했어야 되었을 것이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얕은 地位에 있는 사람이나, 이 地上에 태어난 以上 다 우선 첫째로 「生存」을 위한「必然」의 充足부터 해야 한다. 그런데 그 「生存」을 위한 「必然」의 充足을 위해서는「適當한」「食糧」을 確保하고, 健康을 維持할 수 있는만큼의 食生活을 해야한다. 듣건대 자네가 小食小飮하고 있다는데, 그것은 자네의 健康을 害치게 될 것이고, 자네의 壽命마져 短縮하는 結果도 가져오게 할 것을 자네는 모르는가.
자네는 少食少飮하는 것을 무슨 道德인줄 생각하고 있는 模樣인데 그것은 道德이 아니고 「反必然」일 다름이다. 道德은 「反經濟原則」이지만 「反必然」이어서는 안되고,「合必然」이어야 된다고. 그럴 때 萬若 顔回가 「反必然」은 무엇이고,「合必然」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는 孔子는 또 다음과 같이 答을 해주었어야 되었을 것이 아닌가.
노동은 「必然」이므로 「生存」하기 위해서는 苦痛스럽기는 하지만, 스스로 「必然」인 勞動을 해야 하는 것이 「合必然」이고, 따라서 모든 道德律도「合必然」이어야 하고, 苦痛스럽다고 또는 賤한 일이라고「必然」인 勞動을 忌避하고, 他人의 勞動生産物에 依持해서 生存하는 것은「合經濟原則」이며, 이「合經濟原則」이 人間對人間의 關係에서 不等價交換 또는 勞動의 搾取의 形態로 나타날 때에는 그것은 「經濟倫理上의惡」이 되고, 人間對人間의 關係에서 發生하는 不等價交換 또는 勞動의 搾取를 除去하려는 努力이야말로 「經濟倫理上의 善」이 된다고, 그런데 Marshall의「經濟騎士道」에 立脚해서 顔回를 評價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顔回이야말로 低俗한 欲望을 「自己犧牲」으로 克服한「戰士의 프라이드」를 充分히 가진 사람이었다고.
36. 迹而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富而可求也.雖執鞭之士.吾亦爲之.如不可求. 從吾所好」
(富者가 되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한다면, 어떠한 賤한 일이라도 해서 나는 富를 追求할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해서 富를 追求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므로, 나는 내가 좋아하는 方法을 擇해서 살고 있다).
여기서 孔子는「必然」과 富즉「合經濟原則」을 區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孔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富의 蓄積이 나의 唯一의 目標라고 말한다면, 모든 手段을 다해서 富의 蓄積에 全力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富의 蓄積 즉「合經濟原則」을 나의 인생의 目標로 할 수 없고, 學問을 좋아하므로 學問을 하는것을 나의 인생의 目標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편에「生存」을 위한「勞動」을 해서「必然」을 充足시켜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學問을 하겠다고, 여기서 우리는 孔子도「必然」의 充足을 十二分으로 認定하고 있으면서도, 全人生을「必然」의 充足에만 바치는 것은 賢明하지 못하며, 한편으로「必然」을 充足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自己가「理想」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實現해 나가는 생활이 더 좋다고 말하고 있다고 그렇게 解釋하고자 한다. 그러나 孔子의 이말은 Marshall 의 「經濟騎士道」에 立脚해서 解釋하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된다. 孔子가 모든 手段을 動員해서 富의 追求만 했더라면 孔子는 하나의 平凡한 賤人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合必然」을 하면서도 富의 極小化에 安住하면서도「學」과「道」의 二大目標를 追求함으로써「經濟騎士」를 훨씬 凌駕한 聖人이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또 迹二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飯疏食.飮水.曲肱而枕之.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於俄如好雲」
(粗食을 먹고, 물을 마시고, 배개없이 팔을 베게로 삼아 자더라도 藥은 그속에 있다. 不義해서 富하고 貴한 것은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
여기서 孔子는 「勞動極小化·效用極大化→經濟剩餘의 極大化」즉 「經濟原則」을 다해도 所得이 적어, 粗食밖에 하지 못하고, 찬물밖에 마시지 못하고, 베개하나 없이 자는 限이 있더라도, 「必然」인 勞動을 스스로 했다고 그 사람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사람은 自己滿足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不義」를 해서 즉 「必然」인 勞動을 스스로 하지 않고, 남의 勞動生産物을 搾取해서 즉 「合經濟原則」을 통해서「富」하게 되고「貴」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무엇이냐고 말하고 있다. Marshall이 만약 이 孔子의 文章을 直接 읽을 수 있었다면, 「經濟騎士道」의 根源을 孔子의 이 말속에서 찾았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7. 그리고 泰伯篇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子曰.好勇疾貧亂也.人而不仁.疾之己甚亂也.
(勇氣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勇氣있는 사람이 貧困한 것은 싫다고 할 때에는, 暴動을 일으키기 쉽다. 勇氣가 없으면, 貧困한 狀態에 있어서도 참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勇氣가 있으면, 貧困을 참지 못하고 暴動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孔子는 貧困한 사람이 叛亂을 일으키게 되는 可能性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貧困한 사람이 勇氣가 없으면(또는 착하면) 叛亂을 일으킬 可能性이 작지만, 反對로 貧困한 사람이 勇氣가 있으면(또는 착하지 않다고 하면), 叛亂을 일으킬 可能性이 크다는 것이다. 이 孔子의 말도 결코 疏忽히 넘겨서는 안될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孔子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의 階級革命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必然」인 「生存」이 威脅받을때에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叛亂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特히 한편에 「必然」인 「生存」을 위한 最小量의 財貨가, 다른 한편에 「必然」의 最少量의 範圍를 훨씬 超過한「富」의 奢侈와 對立하게 될 때에는 叛亂이 發生할 可能性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叛亂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支配階級의 富가 貧困階級의 所有財貨量과 너무 差異가 커서는 안된다는 結論이 나오게 될줄 안다. 그러면 또 支配階級의 所有富는 어떻게해서 統制할 것인가.
바로 이 核心問題에 모든 中國古典은 關心의 重點을 두었고, 또 倫理도 이 問題의 解決에 最大의 重點을 두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結論은 統治者가 스스로 財貨所有量을 限定시켜야만 된다는 것이다. 즉「反經濟原則」을 實踐하는 것이다.
統治者가 自己所有의 財貨量을 限定하면, 거기에 따라서 支配階級도 財貨所由量을 스스로 限定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勞動極小化·效用極大化→經濟剩餘極大化」의「合經濟原則」에 反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經濟倫理上의 善」은「反經濟原則」이 되었고,「經濟倫理上의 惡」은「合經濟原則」이되었다. 그러나 前記한 바와 같이「經濟倫理上의 善」은「合必然」이 되고,「經濟倫理上의 惡」은「反必然」인 同時에「合經濟原則」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暫時 이것을 說明하고 넘어가기로하자.
勞動은 「必然」이 되고 있으므로 勞動을 하는 勞動者는「合必然」的 存在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勞動者가 어떤 事情에 의해서 1日에 11時間의 「勞動極大化」를 强要當해도, 조금도 躊躇없이, 11時間의 「勞動極大化」를 遂行했을 때에는 그것은「反經濟原則」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經濟倫理上의 善」이 된다. 反對로 資本家에게는 勞動이「必然」이 아니므로「必然」인 勞動을 안하는 資本家는「反必然」的 存在가 된다 (經營은「必然」勞動의 ―種類가 되므로 經營者는「合必然」的 存在가 된다). 그런데 그 資本家는 하루에 會社에 나와서 1時間 동안 茶를 마시다가 退社한다. 그리하여 이것은「合經濟原則」이면서도「經濟倫理上의 惡」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勞動極小化」를 통해서 多額의 所得을 獲得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Marshall의「經濟騎士道」가 表現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8. 그리고 泰伯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天下有道則見.無道則隱.邦有道.貧且賤焉恥也.邦無道.富且貴焉恥也」
(天下에 道德이 行해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타나서 公公然한 行動을 하게 된다. 天下에 道德이 行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나타나지 않고, 公公然한 行動을 하지 않는다. 天下에 道德이 있다고 할 때, 貧困하고 社會的으로 賤한 地位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羞恥가되고, 天下에 道德이 없다고 할 때, 富裕하고 社會的으로 높은 地位에 있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그 사람에게 羞恥가 된다.)
天下에 道德 즉「合必然」과 「反經濟原則」이 適用될 때, 그 사람이 만약 貧困하고, 社會的 地位도 卑賤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사람에게 羞恥가 된다. 왜냐하면 「合必然」이 通用하는 社會 즉 「必然」인 勞動을 할 수 있는 機會가 充分히 주어져 있고, 勞動만 한다면 거기에 副應하는 充分한 所得도 獲得할 수 있는 社會, 그리고「效用極大化」는 通用되더라도,「勞動極小化」가 人間對人間의 關係에서 他人의 勞動生産物을 搾取하는 現象으로 나타나지 않는 「反經濟原則」社會에서, 어떤 사람이 貧困하고 社會的 地位도 얕다고 할때에는 그 사람이 「必然」인 勞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發生되었으므로 그 사람은 「經濟倫理上의 惡」을 범한 셈이 되고, 反對로「反必然」이 通用하는 社會 즉「必然」인 勞動을 할 수 있는 機會가 充分히 주어져 있지 않고, 勞動을 해도 거기에 副應하는 充分한 所得을 獲得할 수 없는 社會에서, 그리고 「效用極大化」는 通用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勞動極小化」가 人間對人間의 關係에서 極度로 作用하여, 他人의 勞動生産性을 고도로 搾取하는 現象이벌어지고 있는 「合經濟原則」社會에서 어떤 사람이 富하고 貴하다고 할 때에도 그 사람은 「經濟倫理上의 惡」을 범했는 셈이 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Marshall의 「經濟騎士道」가 잘 表現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顔淵篇에 이런 文章이 있다.
「子貢問政.子曰.足食.足兵.民信之矣.子貢曰.必不得己而去.於斯三者.何先.曰.去兵.子貢曰.必不得己而去.於斯二者.何先.曰.去食.自古皆有死.民無信不立.」
(子貢이 孔子에게 政治의 要綱을 물었다. 그랬더니, 孔子는 첫째는 國民에게 食糧을 供給해서 國民으로하여금 굶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軍備를 튼튼히해서 外國으로부터의 侵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國民으로하여금 統治者를 믿게 하는 것이다. 子貢이 다시 물었다. 이 세가지 가운데에서, 할 수 없이 빼버릴 것이 있다면 무엇이 첫째이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孔子는 軍備이다라고 대답했다. 子貢이 다시 묻기를 나머지 두가지 가운데에서 또 꼭 빼버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孔子가 이에 답하기를 食이다. 옛날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이니까, 衣食·軍備는 빼버릴 수도 있지만, 統治者에 대한 國民의 信賴感은 절대로 있어야 하고, 이것이 없으면 統治가 成立될 수 없으므로, 이것만은 빼버릴 수 없다고).
여기서 孔子는 國民이 必要로 하는 것은 첫째로 「生存」을 위한「必然」인 衣食이라고 했다. 이 孔子의 말은 絶對的으로 옳다. 다음에 國民의 「生存」을 위한「必然」의 둘째로서 軍備를 들었다.이 孔子말도 絶對的으로 옳다. 다음에 第三의 必要條件으로서 國民의 統治者에 대한 信賴感을 들었다. 孔子는 이 세가지 가운데에서 빼버릴 수 있는 것의 첫째로 國民의 統治者에 대한 信賴가 아니라 軍備를 들었고, 다음에 나머지 두가지 가운데에서, 빼버릴수 있는 것으로서 國民에 대한 食糧의 供給이라고 했고, 절대로 빼버릴 수 없는 것으로 國民의 統治者에 대한 信賴感이라고 하고있다. 이 孔子의 말을 檢討해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먼저孔子가 「必然」의 첫째는 國民의 「生存」을 위한 食糧의 供給이고,「必然」의 둘째는 國民의 外敵으로부터의 安全保障이고, 「必然」의 셋째는 國民의 統治者에 대한 信賴感이라고 옳은 見解를 表現하고 있다. 그렇다면 省略의 順序도 첫째 國民의 統治者에 대한 信賴感, 둘째 國民의 外敵으로부터의 安全保障, 셋째 國民生存을 위한 食糧供給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省略의 順序가, 첫째 國民의 外敵으로부터의 安全保障, 둘째 國民生存을 위한 食糧供給, 셋째 國民의 統治者에 대한 信賴感으로 되고 있다.
만약 孔子가말한대로의 것이 實際로 施行되었다고 하자. 安全保障 裝置가 잘 안된 탓으로 隣國으로부터의 攻擊을 받아, 國內에까지 敵이 侵入되었는데, 거기다가 또 國民에 대한 食糧供給이 잘 안되고 있어 國民의 5分의 4는 敵의 칼에 맞아 죽거나 飢死하거나 했는데도,統治者는 나머지 國民 5分의 1의 信賴를 받을 수 있다고 孔子는 말하고 있는데, 果然 現實的으로 그것이 可能하다고 할 수 있는가. 統治者가 賢明하지 못한 탓으로 隣國으로부터 侵攻을 받았다고 하자. 그래도 軍備가 잘되어 있고, 軍의 指揮者가 賢明하다고하면, 敵의 侵攻을 充分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國民에대한 食糧供給이 잘되고 있다고 한다면, 統治者가 賢明하지 못하고, 또 敵의 侵攻을 받아도 그 國家는 그렇게 크게 打擊을 받지않을 것이 아닌가. 이 例가 孔子가 말한 것보다 現實的으로 보다 더 可能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孔子가 이 文章에서 말하고자 하는 趣旨는 充分히 理解할 수 있으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道德·理想 즉 「當爲」는 「必然」과 軋轢關係에 있어서는 안되고 「當爲」와「必然」은 調和關係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39. 顔淵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哀公問於有若曰.年饑用不足.如之何.有若對曰.蓋徹乎.曰二吾猶不足.如之何其徹也.對曰.百姓足.君執與不足.百姓不足.群執與足.
(魯의 哀公이 賢者 有若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今年은 饑饉인데 國家의 費用이 不足한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그러자 有若은 다음과 같이 哀公에 答했다. 그러면 1割의 租稅를 받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러자 哀公이 말하기를 나는 2割의 租稅를 받아도 國家의 費用이 不足한데 어찌 1割의 租稅를 받을 수 있겠는가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有若은 다음과 같이 哀公에게 말했다. 百姓이 모두 充足하게 되면, 殿下는 自然的으로 充足하게 되고, 百姓이 모두 不足하게 되면, 殿下도 自然的으로 不足하게 된다고).
여기서는 國民이 잘 살면 統治者도 잘 살게 되고, 國民이 잘못 살면 統治者도 잘못 살게 된다는 것이 主張되고 있다. 統治者가 있고 나서 國民이 있는 것이 아니라, 國民이 있고 나서 統治者가 있다는 것이, 즉 民主主義의 要諦가『論語』에서 이와 같이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Marshall의 「經濟騎士道」가 鼓吹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0. 子路篇에 이런 말이 나온다.
「仲弓爲李宰. 文政.子曰. 先有司.赦小過. 擧賢才. 曰. 焉知 賢才而擧之. 曰. 擧爾所知. 爾所不知. 人其舍諸」(仲弓이라는 孔子의 弟子가 魯의 李氏의 宰가 되어, 孔子에게 政治의 要領을 묻자. 孔子는 다음과 같이 答하였다. 먼저 모든 官僚들에게 自己自身을 端正하게 해서 模範을 보이고, 다음에 自己의 部下들이 잘못한 것이 있어도 조그마한 過誤는 용서해주고, 그리고 有能하고 賢明한 人材를 登庸한다. 그러자 仲弓은 賢明한 人材를 登庸하려고 할 때에는 어떻게 賢明한 人材를 알고 이것을 登庸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여기에 대해서 孔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아는 賢人을 推薦하라. 네가 모르는 賢人은 다른 사람들이 推薦해서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民主主義라는 것은 보통「人民의, 人民을 위한 人民에 의한 정치」라고 되어 있는데, 英國의 W. Bagheot라는 사람은 民主主義는 「人民의 政治(government of the people)가 아니고, 「最優良子의 政治」(government of the Best)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일이 있다.
『論語』에서도 이말이「擧賢」이라는 用語로써 表現되고 있다. 그런데 孔子는「賢材」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推薦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甲이라는 사람이 모르는「賢材」도 乙이라는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므로「擧賢」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듯이 孔子는 말하고 있다. 나중에 다시 보겠지만, 우리나라의 栗谷도 「用賢」을 强調한 바 있다.
그리고 子路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謂衛公子荊. 善居室.始有.曰.苟合矣.少有.曰.苟完矣.富有.曰.苟美矣」
(衛의 公子荊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孔子가 稱讚하고 있는 사람인데 孔子는 그를 또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稱讚했다. 家庭經濟를 잘 運用한다. 처음에 조그마한 財産이 생겼을때에는 조금 생겼구나 하고 말하고, 다음에 財産이 더 커지면, 조금더 좋아졌구나고 말하고, 財産이 많아졌을 때에는 좋아졌구나고 말하고, 富의 蓄積에 그렇게 많이 熱中하는 氣色이 없고, 도 奢侈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孔子는「必然」인「生存」을 營爲하는 것은 當然하다는 前提위에서 거기다가 「效用極大化→經濟剩餘의 極大化」의 經濟原則이 作用하고 있는 것을 是認하고있다. 是認하고 있으면서도「效用極大化→經濟剩餘의 極大化」를 풀로 稼動해서 經濟原則의 百퍼센트의 成果를 거두지 못한 公子荊을 孔子가 은근히 稱讚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까. 우리는 여기서 經濟原則의 하나의 側面인 「效用極大化→經濟剩餘의 極大化」즉 富의 蓄積이 만약 人間對人間의 關係에서 他人에게 害毒을 미칠 때에는 孔子는 이것을 「經濟倫理上의 惡」이라고 보고 있다고 생각해 두기로 한다.
41. 憲問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 愛之能勿勞乎」
(사랑하는 者에게는 힘든 勞動을 시켜라).
여기서 孔子는 「必然」인 勞動은 또 敎育의 基本도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수 있다. 그러면 敎育의 基本으로서의 勞動은 무엇을 意味하고 있는 것일까. 勞動은 「生存」에게 「不可缺」인 財貨를 生産하는 것을 意味하므로 勞動을 한다는 것은「生存」할 수 있다는 權利를 얻는것을 意味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勞動하는 것을 敎育시킨다는 것은 勞動하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必然」인「生存」을 維持할 수 있는 方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을 意味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孔子는「必然」「不可缺」인 勞動을 平生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고, 「合必然」을「經濟倫理上의 善」이라고 보았다고 해두기로 하자. 여기서 우리는,『論語』에 있어 歷歷히 나타나고 있는 Max Weber의「資本主義의 精神」(不勞所得排擊精神)을 볼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憲問篇에 또 다음과 같은 文章이있다.
「子曰.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貧者가 自己가 貧困한 것을 원망하지 않고 참고 견디어 나가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대해서, 富者가 되면 누구나가 다 자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럼에도 不拘하고, 富者가 가장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貧者가 되는 것은 自己의 勞動生産力이 적기 때문인가 아니면 勞動生産力은 커도, 人間對人間의 關係에서 他人에 의해서 搾取되기 때문인가의 두가지 가운데에 그 原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特히 後者일 경우에는 그 貧困한 사람의 怨望은 대단히 클 것이다.
前者의 경우에도 만약 生産한 財貨의 量이 적어 生存에 威脅을 받을 때에는 그 貧困한 사람의 苦悶은 클 것이다. 그런데 한편 富者는 그가 갖고 있는 富를 걸핏하면 他人에게 자랑하려고 한다. 그런데 富者가 그의 富를 자랑하는 마음과 貧者가 그의 貧困을 怨望하는 마음을 比較해 보면 다음과 같은 判異한 差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富者는 「必然」이 완전히 充足되고 있는데 대해서, 貧者는「必然」이 威脅을 받고 있으므로, 後者의 心理狀態는 항상 戰鬪態勢에 있는데 대해서 前者의 心理狀態는 戰鬪를 嫌惡하는 心理狀態라는 것이다. 道德上의 스승으로서의 孔子는 이 이상은 말하지 않고 있지만, 貧富의 激烈하게 對立하게 될 때, 特히 貧困階層이 「生存」의 威脅을 받고 있을 때에는 統治者는 富裕階級의 富의 一部를 貧困階級으로 移轉시켜주는 再分配政策을 實施해야 될 것이다. 孔子가 이 再分配政策의 必要性을 力說하지 않았던 것은 孔子가 항상 富裕階級과 密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두기로 하자.
42. 衛靈公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子曰. 君子謀道. 不謀食. 耕也뇌在其中矣.學也在其中矣.君子憂道不憂貧」
(君子는, 올바른 君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며, 自己가 하고 있는 食生活을걱정해서는 안된다. 自己가 먹는 食糧의 耕作을 해서 求하는데 耕作을 하더라도 어쩌다가 飢饉이 發生되어서 食糧의 量이 減少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君子는 여기에 拘碍를 받아서는 안된다. 學問을 해서 出世하면 俸給을 받게 될 것이다. 어쩌다가 俸給을 받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君子는 여기에 拘碍되어서는 안된다. 君子는 오로지 正義만을 생각해야 되며, 貧困을걱정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있어서도 孔子는 君子와 보통사람을 對立시켜 놓고, 君子는 正義의 實現을 위해 보통사람은 單純한「生存」을 위해 各各 努力해야 된다는 主張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은「必然」의 範圍를 넘어서 富의 蓄積을 해도 괜찮지만, 正義의 實現을 目標로하고 있는 君子는 그저「必然」즉「生存」만 維持해야되지 富의 蓄積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經濟倫理로서의 誘導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君子의 「經濟倫理上의善」은 ,「合必然」에 그쳐야 하고「勞動極小化·效用極大化→經濟剩餘의 極大化」를 위한 行動, 즉「合經濟原則」의 貫徹은, 君子에게는「經濟倫理上의 惡」이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43.그리고 季氏篇에 다음과 같은 文章이 있다.
「丘也聞. 有國有家者. 不患寡. 而患不均. 不患貧. 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國家를 갖고 家族을 갖는 統治者는, 國民이 貧困한 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國民사이에 財産不平等 現象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國民이 貧困한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國民사이에 安定이 없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한다. 왜 貧困보다 均等의 有無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가 하면, 國民사이에 財産平等現象이 있을 때에는 國民사이에 貧困階層은 自然的으로 없어지게 되고 또 國民사이에 和合하는 精神이 있다면, 貧困階層도 自然的으로 없어지게 되고, 또 國民사이에 安定이 있으면 屈曲現象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孔子는 政治에 있어 貧困問題解決이 먼저냐, 財産平等問題解決이 먼저냐 하는 極히 重要한 問題를 取扱하고 있다. 孔子는 여기서 財産平等問題解決이 貧困問題解決보다 앞서야 된다는 答을 주고 있다. 그 理由는, 財産平等이 이루어지면, 貧困問題는 自然的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孔子는「財産平等→貧困解消」를 主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經濟學的으로 說明해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財産平等問題가 解決되었다는 것은 人間對人間의 關係에서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生産手段의 所有者階級과 生産手段의 非所有者階級사이를 支配하던垂直的 關係가 어떤 契機를 통해서 水平的 關係로 變革되었다는말이 될 것이다. 만약 生産手段의 所有者階級과 生産手段의 非所有者階級사이를 支配하던 垂直的 支配的 關係가 水平的 平等的關係로 變革된다면, 富의 不平等現象도 자연히 是正되어 富의 平等이 이루어지게 되는 同時에 貧困現象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孔子이야말로 人類歷史上 社會變革 乃至는 社會革命에 관한 思想을 明示的으로 表現한 最初의 사람이라고 해두기로 하자.
이것을, 近代에 있어, 極端한 形態로 表明한 사람은,두말할 것도 없이, K. Marx였었다. Marx는 生産手段의 非所有者인 勞動者階級은 生産手段의 所有者인 資本家階級을 暴力에 의해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主張했다. 이런 意味에서 筆者는 Marx의社會主義의 根源을 이루고 있는 것이 孔子이라고 생각한다.
其他改革主義 또는 社會民主主義는 生産手段의 非所有者인 勞動者階級은 生産手段의 所有者인 資本家階級과, 平和的 交涉에 의해서 兩階級의 關係를 平等關係로 바꾸어 놓고, 그것을 통해서 貧困問題를 解決하려고 했다. 그러면 이 文章에 나타나고 있는 孔子의 經濟倫理는 어떠한 것이라고 우리는 規定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이미 定說이 나와 있다.
日本의 山本七平은, 그의 著書 『論語の讀み方』에서, 論語의 이 句節을 引用해서, 日本人은『論語』의 이 句節로부터 「儒敎資本主義」를 만들어내어, 이 平等思想에 立脚해서 日本國民의 90%가 中流意識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論語』가운데 있는 이 文章에서 Max Weber의 「資本主義의 精神」속에는 包含되고 있지 않는 均等主義思想이, 즉 Marshall의 「經濟騎士道」가 Marshall이 表現한 以上의 優雅한 形態로서 잘 表現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44. F.Gibney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儒敎資本主義(Confucian capitalism), 共同體資本主義(communal capitalism),人間中心經濟(people-centered business)等 呼稱은 어떠하든, 日本經濟社會를 그 全體에 있어(in its totality),把握하지 않으면 안된다. 日本은 新資本主義(new capitalism)를 發生시켜 놓았다」.1)
「近代日本人의 勞動倫理觀을 한마디로 表現하면, 澤榮一의 다음말이 適當할 것이다. 〈生産은 道德의 實踐이다〉(productivity is away of practicing virtue)」2) 그리고 Gibney는 또 다음과 같은 말도 하고 있다.「〈儒敎資本主義의 集團主義的 性格〉(collectivist character of Confucian capitalism)이라는 論文에서 삼조통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儒敎는 個人主義를 反對한다. 儒敎는理知的·合理的 特色을 갖고 있으며, 他宗敎에 共通된 神秘主義라든가 呪術性을 排除하고 있다. 日本人이 明治維新後 西洋의 技術과 科學을 놀랄만한 速度로써 吸收할 수 있었던 能力은 儒敎敎育에 의한 것이다. 西洋의 合理主義的 思考方式도 決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3) 그리고 獨逸人 Vahlefeld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日本에 있어서는 「孔子가 Marx를 이겼다」(Konfuziusbesiegte Karl Marx)고(『續第二資本論』, pp.855∼856).4) 그리고 또 日本經濟에 있어서의 一大偉材 澁澤榮一이 쓴 『論語と算盤』이라는 책이 있다. 이책의 序頭에서 澁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珠盤은 論語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고, 論語는 또 珠盤에 의해서 眞實한 富를 創造한다고 생각하고 있다」(p. 1).
「富를 이루는 根源은 무엇인가하면, 仁義道德이며, 올바른 道理의 富가 아니면 그 富는 完全히 永續할 수가 없다.」(p.2).
그리고 그는 『論語』述而論에 나오는 「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知不可求. 從吾所好」(36)을 引用하고, 이 文章을 그는 다음과 같이 解釋하고 있다.
「이것은 富貴를 賤視한 것 같이 解釋되고 있지만, 句中富貴를 賤視했는 文句는 한 字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富를 求할 수만 있다면, 賤人이 되어서라도 定道仁義를 行함으로써 富를 獲得하는 것이 좋다. 만약 正當한 方法에 의해서 富를 獲得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富를 탐낼 것은 없다. 奸惡한 手段에 의해서 富를 蓄積하는 것 보다는, 貧賤을 달게 받고, 道를 行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p.92)
여기서 우리 『論語』에 나타나고 있는 經濟論理에 관한 孔子의 論說을 다음과 같이 要約함으로써 끝마치려고 한다.
『論語』에는 ①「不勞所得排擊」精神,즉「合必然」「反經濟原則」과 ②「勞動의 結果로서의 富의 追求」의 精神이, 즉 「合經濟原則」은「經濟論理上의 善」이라는 思想이 있는데, 이것은 20世紀에 나타난 Max Weber의「資本主義의 精神」과 內容上 完全히 一致되고 있다고. ③거기다가『論語』에는 Max Weber의「資本主義의 精神」에는 없는 Marshall의 「經濟的 騎士道」, 즉 均等主義 思想이 있다고.
주석 1) F.Gibney, Miracle by Design, 1985,p.4.
주석 2) Ibid.,p.31.
주석 3) Ibid.,p.85.
주석 4) H.W. Vahlefeld Japan,1992,S.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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