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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생풍수의 특성
최창조
前 서울 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1. 하고자 하는말
2. 도선의 일생
3. 도선의 풍수원리와 경지
4. 도선풍수의 몇가지 사례
(1)국역비보
5. 도선 풍수의 방법론
6. 도선 풍수의 영향과 소멸
7. 균형잡힌 마을들
(1)어머님 자궁속으로의 회귀, 염원, 삼척, 대이리 골말
(2)모름지기 땅은 태백시 철암동 시루봉 모시듯해야 하는데
(3)내 사는 터가 명당인 줄 알면 된다, 공주 명당골
(4)무주구천동의 비결파들
8. 정리하는 글
1.하고자 하는 말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풍수 지리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현행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의 내용이다. 한국 풍수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임을 웅변하는 대목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 자생 풍수가 있었고 뒤에 중국 풍수가 유입되어 혼합되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자생 풍수의 원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생 풍수의 흔적과 중국 풍수의 다른 특성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음택발복(陰宅發福)을 위한 술법풍수(術法風水)는 중국 풍수의 영향이란 혐의가 짙음을 밝히고자 한다. 술법 풍수의 폐단은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하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지적하고 공박하는데도 끈질기게 지속되는 이유는 어디 있는지에 관한 문제도 관심의 대상이다.
풍수는 지기감응(地氣感應)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땅에 대한 이런 사고 방식은 우리만의 것인가, 혹은 우리와 중국 같은 동아시아만의 독특한 지리학인가. 그렇지만은 않으며 서양에도 그와 유사한 지리 인식이 있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자생 풍수, 즉 한국 풍수가 있다면 그 특징은 무엇이고 어떤 체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 풍토와 오늘의 우리 지리학에 주는 영향이나 기여는 무엇인지도 알아볼 것이다.
이를 위하여 크게 두 가지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우선 도선국사(이하 도선으로 통일함)와 관련된 실지(實地)의 구체적 사례들을 찾아 귀납적으로 실체에 접근해 보고, 이어서 도선의 생애를 재구성하여 왜 땅에 관한 그런 인식이 성립되었는지를 가늠해 보겠다.
사실 도선 풍수의 구체적 사례는 찾기가 쉽지 않다. 많은 사찰들이 도선에 의지하여 그 창건 연기설을 지니고 있지만 그 신빙성을 의심받을 만한 구석이 많으며, 도선 자체가 신비화되어서 어디까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자료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작업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례들 속에 도선이 끼여 들었다는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도선 풍수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기에 억측이 될 공산이 크지만 시도해 보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구체적 사례나 도선 유적에 대해서는 현지 조사도 실시하기로 한다.
도선 풍수의 특징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의 풍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그를 신격화하는 것과는 달리 구전 설화 속에서는 밭 가는 농부 또는 길에서 놀던 어린아이로부터 풍수 실력을 조롱받는 멍청한 도선이 등장하는 것도 사실이다. 왜 그럴까 하는 점도 관심의 대상이다. 이를 위해서는 도선 관련 설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선 풍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고 있는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의 내용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와 상징성을 갖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보설이 밀교의 법용(法用)이라는 주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만 필자 자신이 밀교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는 없어 소개만 하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살펴보면 비보사탑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특히 고려 시대에 이르러 이것이 더욱 풍미한 까닭이 중앙 집권적 왕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이용되거나 원용된 것은 아닌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후삼국 통일 당시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크게 받은 왕건과 그 후손들인 고려 왕들 처지에서는 호족과의 정치적, 경제적 연결성이 큰 사찰들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을 것이고 힘으로보다는 어떤 신앙 체계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로 그를 관철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선 풍수의 비보사탑설이 아니겠느냐는 가정이다.
도선 풍수는 그 논리 체계가 지역에 따라 사뭇 다르다. 한마디로 우리 풍수는 지방에 따라 그 체계가 서로 배타적이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를 알아내면 도선 풍수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이론 풍수와 왜 다른가 하는 차이점을 알아낼 수 있다고 본다. 중국 풍수는 이론이 체계화되어 수입된 것이기 때문에 그 논리만 잘 받아들이면 현장 적용에 별 어려움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중국 풍수는 풍토가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땅의 이치(地理)인데다가 그것마저도 음양론, 오행론, 주역적 사고 등에 꿰어 맞춰 놓은 것이라 풍토가 다양한 우리 땅에는 맞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우리 자생 풍수는 마을마다 또는 지방마다 그 풍토에 맞게 지리적 경험과 지혜를 축적하다 보니 풍토 적응성이 양호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이론화나 체계화를 할 수 없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다. 게다가 조선 시대 양반들이 주로 술법 위주의 중국 풍수를 들여와 유포시키는 바람에 자생 풍수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정 아래 얘기를 풀어 보고 싶다.
2.도선의 일생
지금까지의 연구로 추적된 그의 일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가 가능할 듯하다. 문성왕 8년(841) 15세에 月遊山(월유산)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했다는 것은, 그곳이 어디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지만, 분명한 듯하다. 그에 관한 기록은 도선에 관하여 가장 신뢰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도선본비(옥룡사비, 1150)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별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이론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도갑사비(1653)에는 월남사(月南寺)라고 되어 있으며 『도선국사실록』(1743)에는 월암사(月岩寺)로 되어 있다. 즉 후대로 내려올수록 도선의 고향 가까이로 옮겨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1]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월유산 화엄사가 현재의 구례 지리산 화엄사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옥룡사에 있던 도선본비에서 지리산에 있는 화엄사를 지칭한 점이며 다른 하나는 도선이 옥룡사에 오기 전에 지리산 구령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이를 보면 구태여 오늘의 지리산을 월유산이라고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기에 해본 소리다.
1] 성춘경, 「道詵國師와 관련한 遺物, 遺蹟―全南地方을 중심으로」, 『先覺國師 道詵의 新硏究』, 389-395쪽.
결국 월유산 화엄사란 월출산에 있는 화엄경을 종통으로 삼던 교종 계열의 어떤 사찰일 것으로 추측된다. 월출산은 순 우리말로 달내산이라고도 불렀다. 놀 유 자인 유(遊)는 나가 놀다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나 혹은 내로 발음이 가능하며 그래서 월출산 또는 월유산으로 한자화되어 기록에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도선은 이곳에서 1년도 못 되어 대의(大義)에 통달함으로써 신동이란 칭송을 듣는다. 이곳에 있던 기간은 5년에서 6년 정도인데 이때 그는 신라 불교의 교학 체계를 파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화엄종의 한계를 인식하고 혜철(慧徹)에게 가서 선종으로 개종하게 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20세 때이다.
선문(禪門)에 들어온 지 3년 후, 그러니까 도선의 나이 23세 때 <말 없는 말, 법 없는 법(무설지설 무법지법: 無說之說 無法之法)>의 선의 구경을 체달함으로써 혜철의 인정을 받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문성왕 11년(849) 도선본비의 동문선본(東文選本)에는 천도사(穿道寺)에서, 행적본(行蹟本)에는 혜철선사에게 수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천도사에서 혜철을 수계사로 하여 득도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천도사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혜철이 동리산파(桐裏山派)의 개조(開祖)로 대안사(大安寺:현재의 태안사)에 주석하고 있었으므로 대안사와 관련이 있는 절로 추정된다.
이후 37세까지 운봉산 아래서 굴을 파고 수련을 하거나 태백산 바위 앞에서 띠집을 짓고 좌선을 하는 등 두타행(頭陀行)을 하였는데 이때 각종 신기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가를 받고 방랑 수련하는 것은 당시 선승들의 통례였다고 하는데 결국 이 경험이 답산(踏山)에 이어져 도선 풍수를 완성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3세에서 37세에 이르는 이 운수행각기(運水行脚期)에 도선은 명백히 기록에 남아 있는 자생 풍수 습득의 기회를 갖는다. 도선본비(옥룡사비문)에 전하는 그에 관한 기록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처음 도선이 옥룡사에 주석하기 전 지리산 구령에서 암자를 짓고 있었는데 한 이인(異人)[기인]이 와서 뵙고 말하기를 제자(弟子)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 지가 수백 년이 됩니다. 어떤 인연으로 작은 술법(小技)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을 대사님께 바치려 하니 천한 술법이라고 더럽게 여기지 않으신다면(불이천술견비: 不以賤術見鄙) 훗날 남해의 물가에서(남해정변: 南海汀邊)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것 역시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法)입니다’ 하고는 홀연 사라져 버렸다.
도선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남해의 물가를 찾아갔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모래를 쌓아 산천 순역의 형세를 보여 주었다(취사위산천순역지세시지: 聚沙爲山川順逆之勢示之). 돌아보니 이미 그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땅은 지금 구례현(求禮縣)의 경계인데 그곳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 현재의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이라고 일컫는다. 도선이 이로부터 환하게 깨달아 음양 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비록 김단(金壇: 신선이 사는 곳)과 옥급(도교의 비서(秘書)를 감춘 상자)이라도 모두 가슴속에 새겨 두었다.>
그리하여 29세 되던 문성왕 18년(856), 이인(異人)과 만났던 지리산 구령에 미우사를 건립하는 한편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이인으로부터 술법을 전수받은 곳에 삼국사(三國寺)를 개창하였다. 이곳은 섬진강의 북쪽, 즉 지리산 쪽이며 도선은 강의 남쪽에 있는 오산(鰲山)에서 천하지리술수(天下地理術數)를 통달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기간에 도선이 선 수행을 떠났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선의 수행과 풍수 공부가 서로 대척되지 않기 때문에 그 양자는 도선에게 별 모순 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37세 되던 경문왕 4년(864) 희양현(曦陽縣: 현재의 광양군) 백계산(白鷄山)에 옥룡이라는 고사(古寺)를 중수하고 이후 35년간 그곳에 상주하며 연좌망언(宴坐忘言)하니 학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때 헌강왕의 궁중에서 현언묘도(玄言妙道)로 왕을 계발키도 하였으나 궁중 생활이 싫어 곧 옥룡사로 돌아왔다.
당시 도선은 오랜 국토 편력을 통해서 역사의 무대가 경주 중앙 중심에서 지방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중앙 귀족에서 지방 호족으로 바뀌고 있음을 충분히 실감했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도선은 장차 천명을 받아 특출한 자가 나올 것을 미리 알고 송악군(松岳郡)에 가서 놀았다고 하며 이때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龍建)의 집터를 잡아 주며 왕건의 출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하였다는 내용이 도선본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고려 태조 왕건이 17세 되던 해에는 도선이 직접 송악에 가서 출사치진(出師置陣), 지리천시(地利天時)의 법과 망질산천(望秩山川) 및 감통보우(感通保佑)하는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효공왕 원년(898) 72세로 입적하니 이것이 대강 훑어본 도선의 일생이다.
그러나 입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죽음을 상징하는 구림 백암마을 앞 들 가운데 위치한 <도선이바위>는 검은색이면 그가 죽은 것이고 흰색이면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설화가 남아 있는데 지금도 흰색을 띠고 있다고 한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리라는 민중들의 기대가 그를 영웅 혹은 신으로 떠받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선의 죽음을 설화적인 삶으로 바꾸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혼란한 시대에 좌절을 겪어 본 사람들이 바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염원과도 통한다.2]
뒤에 정리하겠지만 도선 풍수의 최대 목적인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어머니의 품안 같은 삶터로서의 명당과 그런 세상에 대한 기대가 그와 같은 설화로 변질된 것이며 그것은 결국 미륵 신앙이라든가 동학,『정감록』, 민족적 신흥 종교에서의 개벽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흐름일 것이다.
지금 가장 믿을 만하다는 옥룡사의 도선본비는 없어지고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는 도갑사비만 남아 있다. 도선본비가 정사(正史)라면 도갑사비는 야사(野史)이다. 정사는 사라지고 야사만 남은 도선, 마치 땅에 관한 옛 선인들의 건전한 지리지혜(地理智慧)는 사라지고 잡술만 남아 버린 오늘의 풍수를 대하는 듯하여 그의 행적을 한눈에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2]이준곤, 「道詵傳說의 變異와 形成」, 같은 책, 308-310쪽.
3.도선의 풍수 원리와 경지
풍수와 관련하여 도선을 평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도선본비에 나타난 <그가 전한 음양설 수편(數篇)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후세 사람으로서 지리를 말하는 자 모두 그를 조종(祖宗)으로 삼았다>는 부분일 것이다. 또한 그의 음양 지리의 경지는 깊이에 있어 불조(佛祖)와 같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우리나라 지리 풍수의 할아버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현대 지리학에서 그를 다룬 연구 논문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 까닭을 말하기 전에 필자도 명색이 지리학을 하는 사람으로 참괴(慙愧)의 마음이 앞설 뿐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도선 풍수의 긍정적인 사상성은 퇴색되거나 사라져 버리고 못된 발복(發福), 발음(發蔭)의 음택 풍수가 판을 치게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거기에 우리 것에 대한 몰이해와 무시, 서양 지리학에 대한 지나친 경도 또한 우리 지리학의 시조가 이런 대접을 받게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풍수 지리가 중국의 도참이나 음양 오행술과 다른 것이라는 점은 그가 지리산의 한 이인(異人)으로부터 그것을 배웠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도선의 사상과 그 法用에 대하여 조선시대 청허(淸虛)스님도 그것은 도참이나 음양 오행과 같은 맹랑한 학설이 아니라고 보았다.3]
3] 서윤길, 「도선국사의 생애와 사상」, 같은 책, 77-78쪽.
말하자면 그의 풍수 사상은 자생적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접근을 시작하는 것이 옳다는 얘기다. 이 점은 풍수뿐만이 아니라 그의 선 수득과 수행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도선은 임제종풍(臨濟宗風)의 선법(禪法)을 장기간 당에서 머물렀던 혜철로부터 전수받았다. 그러나 도선 자신은 국 내에만 머물렀지 당나라에 유학을 간 적은 없다. 밀전심인(密傳心印)한 다음 그 원형을 충실히 지켜 나간 입당승(入唐僧)에 비하면, 자국 내에서 상승(相承)한 승려에게는 선지(禪旨)의 각득(覺得), 즉 자기 체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입당하지 않고 자국 내에서 불교의 흐름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 사조를 조망한 도선에게는 스스로의 체험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생애에는 긴 운수기간(雲水期間)이 필요했던 것이라 여겨진다.4]
다음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도선 풍수에 경험적으로 합리적 평가가 가능한 부분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국토 전반에 대한 거시적 시각을 보유하고 있었고 수도의 중앙적 위치의 중요성에 대한 정치 지리학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5]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그가 당시 사회상에 대한 투철한 인식에서 국토재계획안적(國土再計劃案的) 성격의 풍수 지리설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최병헌의 탁견이 제시된 바 있다.6]
4]같은 책, 206쪽.
5]최창조, 「道詵國師의 風水地理思想解釋」, 같은 책, 182쪽.
6]같은 책, 123-124쪽.
도선의 풍수 원리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부분은 그가 땅을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의 몸을 대하듯 땅을 바라보았다는 평가가 더 적실한 말인 것 같다. 그러기에 그 땅에 순역(順逆)이 있고 강약이 있으며 심지어 생사까지 운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에 나타나는 천지의 혈맥이라든가 산수의 병과 같은 표현은 그런 사고 방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도선은 더 나아가 땅에 문제가 있으면 고칠 수 있다는 사고에까지 이른다.
사람의 침뜸술의 기본 원리는 기가 과한 곳은 사(瀉)해 주고 허한 곳은 보(補)해 준다는 것이다. 소위 보사(補瀉)의 원리이다. 도선은 이 원리를 그대로 땅에 적용하여 우리 풍수의 큰 특징을 하나 만들어 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비보사탑설이다. 땅은 살아 있고 거기에 문제가 있으면 고쳐서 쓴다는 이 사고는 매우 중요한 자생 풍수의 특징을 낳는다. 왜냐하면 땅이 살아 있다는 인식이 유독 우리 풍수에만 있는 것도 아니니 비보사탑설까지 포괄되어야만 우리의 자생적인 도선 풍수의 특징이 살아나는 것이기에 지적한 말이다.
중국 풍수서에도 땅이 사람과 같다는 표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가장 난숙한 표현은 송대 채원정(宋代 蔡元定)이 찬(撰)한『발미론(發微論)』의 다음과 같은 부분일 것이다.
<소강절이 말하기를 물은 지극한 부드러움이요, 불은 지극한 강함이요, 흙은 부드러움이요, 돌은 강함이라, 이를 기본으로 하여 땅이 이루어지는데 네 가지 변화의 기본 형상이라 하였다.
물은 곧 사람 몸의 혈이므로 지극한 부드러움이라 하고, 불은 곧 사람 몸의 기이므로 지극한 강함이라 한다. 흙은 곧 사람 몸의 살이므로 부드러움이라 하고, 돌은 곧 사람 몸의 뼈이므로 강함이라 한다.
물, 불, 흙, 돌을 합하면 땅이 되는데 이것은 혈, 기, 살, 뼈를 합하면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가까이는 몸에서 얻고 멀리는 사물에서 얻는다는 말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치가 아님을 보여 준다
(소씨이수위태유 화위태강 토위소유 석위소강 소위 지지사상야.
수칙인신지혈고위태유 화칙인신지기고위태강
토칙인신지육고위소유 석칙인신지골고위소강.
합수화토석이위지 유합혈기골육이위인 근취제신원취제물 무이리야:
邵氏以水爲太柔 火爲太剛 土爲少柔 石爲少剛 所謂 地之四象也.
水則人身之血故爲太柔 火則人身之氣故爲太剛
土則人身之肉故爲少柔 石則人身之骨故爲少剛.
合水火土石而爲地 猶合血氣骨肉而爲人 近取諸身遠取諸物 無二理也).>
이러한 사고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이 그러하고 고산자 김정호 역시 산척수맥(山脊水脈)을 지면의 근골혈맥(筋骨血脈)이라 표현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땅이 살아 있다는 인식이 자생 풍수만의 독창성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중요한 것은 비보관념(裨補觀念)이다.
중국 풍수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비보 관념이 우리 풍수에 자주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 풍수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화북 지방이 연평균 강수량 700밀리미터 정도의 반건조 지역이므로 그들은 땅을 고쳐서 쓴다는 생각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고 또 국토가 우리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넓기 때문에 고쳐 쓴다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다시 찾는다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그러니 비보 관념이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짐작이다.
비보사탑설은 산천 지리에는 생기가 있어서 순역, 길흉이나 성처(盛處), 쇠처(衰處)가 생기고 그것이 음양상생(陰陽相生), 상극(相剋), 상보(相補)의 원리에 의하여 변화하며 그 지상(地相)이 왕조의 흥망성쇠나 인간 장래의 길흉화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로 확장되기도 한다. 왕업과 관계되는 지덕(地德)은 쇠처나 역처(逆處)에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생기를 보하지만 맞지 않으면 지덕이 오히려 훼손된다. 따라서 도선은 쇠처, 역처 등을 보아 사원 건립지를 점정(占定)하고 그 이외에는 일체의 창건을 막았다.7] 우리는 여기서도 도선 풍수가 발복의 명당을 찾아 다닌 것이 아니라 병든 땅을 고치려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보사탑설에는 정치적 책략이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당시 사찰들은 대체로 자사보호(自寺保護)를 위한 자위적 무장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한 연구 예가 있고,8] 지방 호족들이 사원을 거점으로 하여 인근에서 활동한 것이 사실인 만큼 각종 사찰들은 고려 개국자의 입장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순리적으로 제한하고 규제할 수 있던 방안이 비보사탑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도선 풍수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포괄적이며 다른 사상의 접수가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불교와 재래의 민간 신앙을 조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산천순역(山川順逆)의 비보법(裨補法)에 음양 오행술을 더 연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9]
7]같은 책, 219쪽.
8] 추만호, 「高麗僧軍考」, 『藍史鄭在覺古稀記念 東洋學論叢』(1984), 99-102쪽.
9]서윤길, 앞의 책, 78쪽.
또 비보사탑설을 풍수, 도참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밀교의 법용으로서 국토를 하나의 만다라로 보고 택지(擇地)하여 사탑을 세움으로써 복리를 얻는다고 보았다는 연구도 있다. 하나의 사찰을 세우는 데 있어서도 그 원칙은 마찬가지며 전 국토를 대상으로 할 때 국토 지리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을 것10]이므로 도선 풍수에는 당연히 당시의 지리학도 합쳐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밀교가 지닌 모든 사상을 융합할 수 있는 장점을 이용해 밀교의 지령사상(地靈思想)을 조화시켜 신라 말기 사회 실정에 알맞는 신앙 사상으로 승화시켜 제시한 것이 도선의 비보 사상이라 보기도 한다.11]
거기에 선종과 풍수 지리는 아무 모순 없이 함께 받아들여졌으며, 또한 도교와 신선 사상도 받아들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12] 이에 대해서는 <구령의 이인(異人)은 지리산 산신(山神)>13]이라는 표현도 있고, 서거정의『필원잡기(筆苑雜記)』에 <도선이 출가하여 입산 수련하는데 어떤 天仙이 하강하여 천문, 지리, 음양의 술법을 전수하였다(도선출가 입산수련 유천선하강 수천문지리음양지술: 道詵出家 入山修練 有天仙下降 授天文地理陰陽之術)>는 대목도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도선에게 풍수를 가르친 이인을 고신도(古神道: 신선도, 풍류도)라 단정한 예까지 있는 실정이다.14]
풍수 연구로 우리나라 대학 지리학과에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몽일도 풍수는 애니미즘, 샤머니즘, 불교, 유교 등 어느 사상과도 상충하지 않았다고 확언하고 있다.15]
10]같은 책, 81쪽.
11]같은 책, 92쪽.
12]최병헌, 앞의 책, 119-121쪽.
13]이능화의 ?朝鮮佛敎通史?에 인용된 박전지의 ?龍岩寺重創記?에 나옴.
14]최원석, 「도선 풍수의 본질에 관한 몇 가지 論究」, 『應用地理』(성신여대 한국지리연구소, 1994), 69-70쪽.
15]이몽일, ?한국풍수사상사연구?(日馹社, 1991), 32쪽.
그렇다면 도선의 자생 풍수는 왜 그렇게 많은 주변 사상을 포섭하였을까? 그것은 도선 풍수의 목적이 땅의 이치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땅과 그 땅에 의지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획정짓고자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논리 체계를 만들고 거기에 땅을 투영하여 적부(適不)나 진부(眞否)를 판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땅과 인간 사이의 상생, 조화 관계, 다시 말해서 풍토 적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에 그의 풍수에 어떤 사상이 끼여들었느냐 하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1987년 3월 20일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김두진은 「나말려초 동리산문(羅末麗初 桐裏山門)의 성립과 그 사상―풍수 지리 사상에 대한 재검토」라는 글의 요지문에서 풍수 지리설은 서로 배타적이어서 고려 초 왕건이나 왕실에 의해 정리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사상적 발전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풍수 지리설이란 당연히 도선의 자생 풍수를 지칭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중국 풍수는 그 이론 체계를 확립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배타적일 까닭도 없었고 우리나라에서 그것을 정리할 수준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자생 풍수의 강한 풍토 적응성이 그런 배타적 결과를 빚은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즉 우리나라의 풍수는 <백리부동풍: 百里不同風>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풍토와 풍속이 백 리만 떨어져도 크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풍토 해석이란 면에서 풍수를 이해한다면 풍수 논리가 지방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필자가 각 지방 답사에서 보고 느낀 것, 특히 자생 풍수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서남해안 도서 지방과 산간 오지에서는 그 정의에서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선 풍수의 독창성이나 자생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점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도선이 풍수를 지리산 이인(異人)이라는 자생 풍수학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선풍(禪風)은 혜철로부터 전해 받은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도선은 혜철의 문하에 들어온 지 3년 만에 무설지설 무법지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의 선의 구경을 체달함으로써 혜철의 인정을 받고 구족계를 받았다.
혜철도 풍수를 익혔음은 그가 주석한 동리산 태안사의 지세를 살핀 혜철비문의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동리산에 대안사라는 절이 있는데 많은 봉우리가 둘러 있어 한 줄기 물만이 흘러 나갈 뿐이다. 길은 멀고 막혔으나 많은 승려가 이를 수 있고 절경이라서 승도들이 청정함에 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용과 신이 상서로움과 기이함을 드러내고 벌레와 뱀이 그 독형(毒形)을 숨기며 소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구름이 깊이 숨은 곳이며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따뜻한 곳이니 그곳이 바로 삼한(三韓)의 승지라는 것이다. 선사가 지팡이를 짚고 와서 노닐다가 상주할 뜻을 가졌다고 한다.
따라서 도선의 스승인 혜철이 당에 유학 갔을 때 당 일행(一行) 계통의 풍수법을 배웠을 개연성이 높고 당연히 도선은 혜철로부터 자생 풍수와 함께 그것을 같이 배웠을 개연성 또한 매우 높다고 하겠다. 일행의 풍수법은 동양 고대 과학의 한 특성인 신비적인 요소만을 제거하면 천문학이나 인문지리학 등 훌륭한 과학으로 볼 수 있는 만큼, 만일 이러한 학문의 계통을 습득한 사람이 도선이었다고 한다면 도선의 풍수 지리설은 당시 신라 국토의 자연 환경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했던 것이라 볼 수도 있다.16]
16]최병헌, 앞의 책, 115쪽.
4.도선 풍수의 몇 가지 사례
(1)국역비보(國域裨補)
산천이 병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강희 45년(1706)에 작성된『백운산 내원사 사적』에 이르기를 <뭇 산들은 경쟁하듯 험하고 뭇 물들은 다투듯 흘러 내리며 마치 용호상투인 듯, 금수가 달아나는 듯, 지나쳐 멀리 가 버려 붙잡기 어려운 듯, 끊어지고 희미하여 이르지 못하는 듯하니, 이러한 형상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동쪽 고을에 이로우면 서쪽 마을에 해가 되고 남쪽 고을에 길하면 북쪽 마을에 흉한 수도 있다. 준치(峻峙)하게 솟은 산은 전륜(轉輪)이 불가하고 분방(奔放)한 물길은 막기가 어려우니 이를 비유컨대 병이 많은 사람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병이 많은 산천은 어떻게 되는가? 『사적』은 말한다.
<인물(人物)의 생겨남은 산천의 기에 감통(感通)하는 것이니 인심과 산천지세는 서로 닮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인심이 부합(不合)하니 지역마다 나뉘어서 혹은 구한(九韓)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삼한(三韓)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서로가 침략하는 전쟁이 끊임이 없고 도적이 횡행하여 그것을 막지 못하게 되는 일이 스스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논리다. 즉 지역의 분열과 도적의 들끓음이 산천의 병으로부터 나온 결과라는 얘기다. 이를 고치기 위하여 절과 탑으로 비보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르되, <부처의 도(佛氏之道)를 약쑥으로 삼아 병든 산천을 치료하도록 한다. 산천에 결함이 있는 곳은 절을 지어 보하고, 산천의 기세가 지나친 곳은 불상으로 억제하며, 산천의 기운이 달아나는 곳은 탑을 세워 멈추게 하고, 배역(背逆)의 산천 기운은 당간을 세워 불러들일 것이니, 해치려 드는 것은 방지하고, 다투려는 것은 금지시키며, 좋은 것은 북돋아 키우고, 길한 것은 선양케 하니, 비로소 천지가 태평하고 법륜(法輪)이 자전(自轉)케 되는 것이다. 왕이 듣고 말하기를?과연 스님의 말씀답소. 그 무엇이 어려울 게 있겠소’ 하며 모든 주현(州縣)에 칙령을 내려 총림(叢林)과 선원(禪院)을 건설하고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니 그 수가 3,500여 개소(기록에 따라서는 3,800여 개소)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산천의 병은 모두 가라앉았고 민심은 화순하였으며 도적은 사라지고 나쁜 일은 없어져 삼한(三韓)의 내부는 통일되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고 하였다.
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도선 풍수는 국토 전체를 망진(望診)하여 그 병세를 고치는 방법을 불도에 의존하고는 있으나 그 근본이 풍수적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사람에게 병이 있을 때 의사는 망진하고 촉진(觸診)하고 문진(問診)하여 진찰하고 치료한다. 풍수가 땅을 고치는 방법 또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이 조그만 범위가 아니라 국역 전체에 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하등 차이가 없다. 도선 풍수는 국토의 치료법인 것이다.
5.도선 풍수의 방법론
도선국사로부터 비롯되는 우리 풍수는 어떤 식으로 땅을 보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알 수 없다>가 옳은 말이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옥룡자유세비록(玉龍子遊世秘錄)』이라든가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와 같이 도선의 이름을 빙자한 저술이 지금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위서(僞書)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이 작업은 전적으로 현지 답사에 의지하는 수밖에는 없다.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도선 풍수가 아니라 필자식의 풍수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게다가 도선 풍수는 완전히 순수한 자생 풍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체제나 논리 구조가 중국 풍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도 이 글을 쓰는 데 주저케 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도선 풍수의 터잡기 방법을 정리해 본다.
우선 도선 풍수는 철저히 <어머니인 땅>이라는 개념을 가장 주된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터가 있을 때 그 터가 있게 되는 소이연(所以然)은 우리나라의 경우 당연히 산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주된 산, 즉 주산이 바로 어머니이다.
이 어머니인 산, 엄뫼까지 이어지는 맥세(脈勢: 내룡(來龍))의 진가(眞假), 순역, 안부(安否), 생사 등을 살피는 일로 터잡기는 시작된다. 소위 간룡법(看龍法)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어머님의 가계를 살피는 일인데 온화유순(溫和柔順)하고 조화안정(調和安靜)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변화와 생기를 아울러 갖춘 맥세를 좋은 것으로 삼는다.
그 어머니가 품을 벌리게 된다. 어머니의 품안이 유정(有情)하고 온순하며 생기 어린 곳인지를 판단하는 일이 다음에 이루어지는데, 중국 풍수로 하자면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를 가리어 밝혀 내는 장풍법(藏風法)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어머니의 품안이라고 모두 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어머니라 하더라도 피곤하실 때도 있고 짜증이 나실 때도 있다. 그런 품안은 무정하고 곤고하기 때문에 그 모양새는 어머니의 품안처럼 생겼다 하더라도 명당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이 바르지 못한 어머니라면 그 품안에 살기가 돌 수도 있다. 당연히 그 품안은 우선 피해야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 풍수에서는 그런 무정한 어머니를 달래거나 고쳐 드리고 나서 안기는 소위 비보의 방법이 개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어머니의 품안이 그 생김새뿐 아니라 실질로도 어머니다운 유정함으로 가득 찼다면 그곳은 명당이다. 이제 그 품안에서 어머니의 젖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젖을 빨아야 직접 생기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정혈(定穴) 또는 점혈법(占穴法)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젖무덤은 혈장(血漿), 젖꼭지를 혈처(穴處)라 한다. 사실 명당을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정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젖꼭지를 찾는 일이 바로 구체적인 터잡기가 되는 셈이다.
다음은 어머니 품안에서의 물과 바람의 흐름을 살핀다. 이 부분은 우리 풍수가 크게 관심을 두는 분야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 풍수에서는 소위 득수법(得水法)과 좌향론(坐向論)이라 하여 대단히 어려운 술법(術法)으로 체계가 잡혀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건조 지역인 중국에서 물은 실질적인 소용에도 닿지만 부의 과시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술법화되는 것이고, 그들 풍토의 상대적 악조건 때문에 미세한 방위의 차이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좌향에 큰 신경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풍토는 그렇지가 않아서 심지어는 북향(北向)도 풍토에 따라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최종적으로 이 터가 무엇을 닮았는지를 판별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품안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머니를 보고 공작 같은 기품이니 순한 양과 같은 온순함이니 하고 얘기하는 것처럼 땅, 즉 품에 안긴 터에 대해서도 그 형국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터를 잡은 당사자와 그 후손들에게 환경 심리적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좋은 곳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형국론(形局論)은 그런 환경심리(環境心理)의 작용력을 응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여기서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도선의 풍수 방법론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우리 자생 풍수의 기본 자세는 땅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대하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땅을 곧 어머니로서 대한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강조한 말이다.
땅이 살아 꿈틀거리는 용으로 혹은 어머님의 인자한 품으로 보이기 시작해야 풍수를 말할 수 있다. 흔히 이것을 도안(道眼)의 단계에 이른 풍수학인이라 일컫는데 땅과 사람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이 있어야만 도안에 도달할 수 있다. 도안에 이르면 그 전까지 그저 단순한 돌과 흙무더기 정도의 물질로밖에 보이지 않던 산이 지기(地氣)를 품은 삶의 몸체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렇게만 되면 풍수의 모든 이론은 사실상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눈을 가진 그 사람 자체가 이미 풍수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설악산 한계령에서 점봉산, 가칠봉에 이르는 일대는 다양한 수종과 풍성한 식물 생육이 남한 최고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의 자연 지세는 토양 조건, 경사도, 기반암, 국지 기후 등에서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무들은 이토록 잘 자랄 수 있을까.
이곳의 식생이 땅과 상생(相生)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우리 풍수는 이해한다. 나무 대신에 사람을 대입시키면 바로 우리 풍수의 정의가 나올 수 있다. 결국 좋은 땅이란 것은 없는 셈이다.
있다면 땅과 사람, 양자 사이에 상생의 조화를 이루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좋은 땅, 나쁜 땅을 가리는 것이 풍수가 아니라 맞는 땅, 맞지 않는 땅을 가리는 우리 선조들의 땅에 관한 지혜가 바로 풍수이다.
결코 객관적 조건이 좋은 땅이라 할 수는 없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런 곳이 알맞는 땅일 수 있고, 풍수는 그런 땅을 찾아 나선다. 땅과 생명체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터를 구하고자 하는 경험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혜가 되어 풍수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발복을 바라는 이기적 음택 풍수는 후대 사람들의 욕심이 만들어 놓은 잡술일 뿐이다.
풍수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그것은 안온한 삶, 즉 근심, 걱정 없는 안정 희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터를 잘 잡는다는 것은 땅과 생명체가 서로의 기를 상통시킬 수 있는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잘 잡힌 터에 뿌리를 내린 생명들은 보기에도 조화스러운 감정과 안정을 선사한다. 그런 곳에서 느끼는 평안한 심적 상태,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마음의 지향이다.
특히 현대 도시 생활의 비인간적인 잡답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평안을 추구한다. 바로 그런 곳. 산, 나무, 개울, 옛집, 돌, 사람까지도 서로가 제자리를 잡고 제구실을 하는 곳. 풍수는 그런 곳을 찾아 나선다. 그곳은 바로 어머니의 품안과 같은 땅이다. 어머니의 품안에서 우리는 모든 근심, 걱정을 잊고 평안을 찾게 된다. 이것이 자생 풍수에서 터잡기의 기초이다.
그래서 땅을 혹은 산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어머님의 품안과 같은 명당을 찾아낼 수 있다. 구태여 풍수의 논리나 이론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의 자생 풍수 연구가 드러내 준 우리 풍수의 방법론적 본질은 본능과 직관과 사랑, 바로 이 세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순수한 인간적 본능에 의지하여 땅을 바라본다. 거기에 어머님의 품속 같은 따뜻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를 좇으면 된다. 성적 본능에 의한 터잡기도 자생 풍수는 마다하지 않는다.
본래 성적 본능이란 것 자체가 종족 보존의 본능이 발휘된 현상이 아닌가. 거기에 음탕과 지배의 욕망이 끼여 든 것은 본능이 아니라 부자연의 발로일 뿐이다. 그래서 자생 풍수의 명당 지명 중에는 좆대봉이니 자지골이니 보지골 같은 것들이 심심찮게 끼여 있을 수 있다.
직관은 순수함을 좇는 일이다. 이성과 지식과 따짐과 헤아림 따위는 직관의 순수함을 마비시키는데 지금 우리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을 따르고 있다. 직관은 그저 문학적 상상력이나 시적 이미지의 범주에서나 찾으려 한다. 하지만 풍수에서 땅을 보는 눈은 다르다. 결코 이성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본능의 부름에 따라 직관의 판단을 좇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물론 전제가 있다. 이 직관은 결코 무엇엔가 물들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는 땅뿐만이 아니라 그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 대한 것까지 포함한다. 도선국사가 찾아 나섰던 땅들이 모두 병든 터였다는 점을 상기할 일이다. 괴로운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참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땅도 좋은 것을 찾을 일이 아니다. 그저 어머니이기만 하면 된다. 특히 이제 늙어 병들고 기운 없어 자식에게는 줄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어머니 품을 찾는 풍수라는 뜻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고향 같은 포근함이 뭉게구름 일 듯 일어나는 것은 그 어머니가 무언가를 우리에게 주어서가 아니다. 그냥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절대의 내줌이다. 그래서 사랑이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병들어 힘들어 하는 어머니를 그냥 방치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풍수에서는 그런 어머니를 고쳐 드리고 달래 드리기 위한 비보책이 있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을 가나 만날 수 있는 조산 또는 조탑이라 불리는 돌무더기는 그런 비보책의 대표적인 예이다. 마치 병든 이에게 침이나 뜸을 시술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를 땅에 적용한 것이 자생 풍수의 비보책이다.
풍수가 땅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는 마치 의사와도 같다. 땅의 건강을 살피고 건강이 좋지 않으면 그 이유를 찾고 이유를 알았으면 치료를 한다. 그것을 구지법(救地法) 혹은 의지법(醫地法)이라 한다.
예컨대 전북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에 있는 노채마을의 경우, 이 마을의 엄뫼(母山)인 내룡(來龍)의 왼쪽 가지(左脇)가 엄뫼의 왼쪽 옆구리를 찌르는 식으로 달려든다. 그래서 바로 그 좌협 머리에 탑과 같은 석물을 배치하여 그를 비보하는 방책을 취하고 있다. 특히 이처럼 지나친 것을 누르는 비보책을 염승(厭勝) 또는 압승(壓勝)이라 한다.
실제로도 그 자리에는 본래 돌탑이 서 있었는데 15여 년 전 새마을 운동 때 미신이라 하여 철거하고 말았다. 그후 마을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빈발하였다는 얘기를 마을 노인들은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이때 그 탑은 구체적으로 마을에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전문적인 풍수 용어로는 비보 또는 압승(壓勝)이 되지만 합리적인 환경심리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좌협의 내룡 옆구리에 탑을 세움으로써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할 때에 일이 되어 가는 중간에 방해를 받더라도 그를 이겨 나가라는 상징 조작물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풍수가 땅에 대한 사랑의 지혜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전달한다 하더라도 현대인들의 관심은 음택, 즉 산소 자리 잡기에 일차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필자 자신도 한때 상당히 오랜 기간 술법 풍수에 깊이 빠진 적이 있었지만 그 폐해의 심각성 때문에 지금은 가급적 공식적으로는 음택을 말하지 않는 형편이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친상(親喪)을 당하는 경우, 풍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는 참고로 상을 당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풍수적 대처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소개하는 것으로 글 막음을 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강조한 바 있지만 풍수에서는 그 터를 쓸 사람을 몰라서는 터잡기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터와 그 터에 의지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펴야 하는 것이 풍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라는 대상도 없이 천하의 명당이니, 뭐가 나올 대지니 하는 말들은 정통 풍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만 한다.
따라서 상을 당한 사람은 부모님의 음택 자리를 스스로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간혹 고인과 아주 가까웠던 사람 중에 믿음직한 지관이 있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런 경우를 바라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부모님 모실 자리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먼저 부모님을 모시고자 예정하는 자리의 맨흙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오로지 돌아가신 그분만을 생각하며 한 시간만 앉아 있으라. 그것이 권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그분과 이 자리가 맞는 자리일지에 대한 판단이 반드시 선다. 그분이 이 자리에 영면(永眠)의 터를 잡아 편안하실지 아닐지에 대한 판단이 본능과 직관을 통하여 전달될 것이라는 말이다. 표현을 달리하면 땅이 그의 효성에 감응하여 돌아가신 분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사 표명을 해 올 것이라는 뜻이다.
좌향의 결정 방법도 위와 마찬가지이다. 고인이 좋아하실 방향을 골라 그것으로 좌향을 삼으면 된다. 바라보니 바로 이 방향의 경관이 고인이 가장 좋아하실 곳이라는 판단이 설 것이고 그것이 좌향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정통의 풍수가 가르치는 음택 선정의 최선의 방법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는 피해야 한다.
그 첫째가 지하 수맥 위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하수는 살아 있는 생수이기 때문에 그 물은 생물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즉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지하수는 끊임없이 지표수(地表水)의 공급을 원하게 된다. 그를 위해서는 지하수 위쪽에 균열을 내어 물을 공급받는 수밖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 수맥 위는 언제나 밑으로부터 파괴력의 영향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땅은 산 사람에게도 죽은 사람에게도 맞을 수 없는 터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하 수맥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 풍수에도 지하 수맥을 찾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익히기가 매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오히려 서양식 방법이 편리한데, 서양식에도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앵글로색슨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점(占)막대기 방법(dowsing rod method)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추를 이용하는 라디에스테지법(radiesthesie)이다. 점막대기 방법은 1960년대 중반, 진해, 마산교구의 이종창 신부에 의하여 국내에 소개된 바 있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당시의 생활 여건이 지하 수맥 같은 것에까지 신경 쓸 처지가 못 되어서라는 것도 한 이유였겠지만 방법이 좀 어렵고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이 1980년대 중반 서울 노량진 성당의 임응승 신부에 의하여 소개된 프랑스식 추를 사용하는 방법일 것인데 비교적 간단하다. 사람이 그 동물적 본능에 의지하여 지하수가 내뿜는 일종의 특이한 방사자력을 감응하는 식으로 찾는 것인데 임 신부의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키로 한다. 그 책은 샛별출판사의 『수맥과 풍수』인데 다만 그 책에서 규정하고 있는 격식에 너무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점만 추가하기로 한다.
동네에 있는 약수터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새벽 2, 3시경에 나가 약수가 나오는 바로 위쪽에 추를 드리우고 서서 오직 지하 수맥에 감응하겠다는 일념으로 있다 보면 추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한번만 경험을 하면 다른 곳에서도 그런 반응으로 지하 수맥을 찾을 수 있다.
둘째는 땅 기운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곳(지기와류지처: 地氣渦流之處)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운 현상인데 알고 보면 느끼기는 쉬운 일이다.
즉 음산한 기운이 도는 터가 그에 해당되는데 그런 땅에 대한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예컨대 남양주시 금곡동에 가면 고종과 순종의 홍릉과 유릉이 있고 그 뒤에 영왕과 그 부인 방자 여사의 단봉 합장묘인 영묘(英墓)가 있다. 바로 그 자리가 그런 예에 속한다. 또 단종이 유배 살던 영월 청령포도 그와 유사한 느낌을 경험하기에 적절한 땅이다. 그런 곳은 가서 직접 서 보기만 하면 왜 써서는 아니 될 땅인지를 스스로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런 곳도 나쁜 땅이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음택이나 양택의 터로 맞지 않다는 뜻일 뿐이다.
예컨대 그런 땅도 정신 병원 터나 기 수련장 터로는 맞을 수도 있기 때문에 땅에는 결코 좋은 땅 나쁜 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무슨 용도에 맞는 땅이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처음의 전제가 여기서도 틀리지 않는다.
셋째는 땅속에 움직임이 있는 곳, 풍수에서 말하는 시신이 없어지는 자리(도시혈: 逃屍穴)는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 지형학에서 크게는 매스 웨이스팅(mass wasting) 현상이라 하는 것이고 세분하면 그중에서 토양포행(土壤匍行, soil creep)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토양포행은 중력에 의해서 토양 또는 암설(岩屑)이 매우 천천히 사면 아래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동 속도가 너무나 느리기 때문에 직접 관찰할 수는 없으나 그 결과는 토양으로 덮인 사면에서 널리 관찰할 수 있다. 풍화층의 단면상에서 볼 때 이동의 속도는 지표면이 가장 크며 밑으로 내려갈수록 적어진다. 전주나 수목 따위가 사면 아래로 기울어져 있는 현상, 혈암층(頁岩層)이나 점판암층(粘板岩層)의 윗부분이 굽어 있는 현상, 암괴(岩塊)가 모암(母岩)의 노두(露頭)에서 아래로 옮겨져 있는 현상 등은 이러한 토양포행의 증거가 된다.
토양이 얼었다 녹을 때 그리고 물에 젖었다 마를 때에는 팽창과 수축이 반복된다. 토양이 팽창할 때에는 입자가 사면에 대해 직각 방향으로 들린다. 그러나 수축할 때에는 입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고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 즉 수직 방향으로 내려앉는다. 따라서 토양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할 때마다 사면 밑으로 약간씩 이동하게 된다.
이때 사면의 경사는 매우 중요하다. 토양포행이 효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사는 5도라고 하며 경사가 증가할수록 토양층은 불안정해진다. 식생은 토양포행률을 저하시킨다. 같은 경사의 사면에서도 토양포행은 식생 피복이 양호한 습윤 지역보다 그것이 불량한 반건조 지역에서 더 활발하다는 것이 실측을 통해서 밝혀졌다.17] 이것은 무덤 위의 잔디가 잘 자라지 않으면 무척 불안해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이 근거가 있음을 보여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토양포행이 일어나는 장소에 광중(壙中)을 파고 시신을 모시는 경우 여러 가지 해괴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예컨대 시신이 없어진다거나 혹은 시신이 엎어져 버린다거나 또는 시신이 방향을 틀어 버리는 따위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못된 지관들이 이런 현상을 악용하여 이것이 마치 귀신의 장난인 양, 집안 재앙의 원인인 양 떠드는 것은 무도(無道)한 사기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약간의 현지 훈련만 받으면 토양포행이 일어나는 장소는 피할 수 있다. 더구나 시신이 엎어지고 돌아눕고 뒤집어지는 일이 자연에서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풍수 사기꾼들의 행패는 많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17]권혁재, 『地形學原論』(法文社, 1974), 29-32쪽.
6.도선 풍수의 영향과 소멸
도선 풍수가 당나라 일행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으니 일행의 그것은 부국강병이라는 경제 지리적 목적 의식이 뚜렷한데 비하여 도선 풍수는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한다는 자비심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중부 지방인 송악의 호족 세력과 관련을 갖는다. 당시의 정치 지리적 조건이 송악에 독자 세력을 키우기에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이미 시대의 흐름이 편벽된 위치의 경주 중심으로는 이끌어질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전국적인 규모의 답사와 민심 정탐으로 국내외 정세와 국토 지식에 대하여 살아 있는 정보를 지녔던 선승 겸 풍수학인이 정리하여 이루어 낸 것이 도선 풍수라 부를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도선 풍수가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고려 시대이다. 도선 입적 후 5년 뒤 효공왕 7년(903)부터 왕건은 궁예의 해군을 거느리고 나주 지방을 공략한다. 훗날이기는 하지만 결국 나주 오씨를 장화왕후로 취하고 이 지방 사람인 최지몽, 윤다, 경보 등을 포섭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 도선의 풍수 지리설에 접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태조의 훈요(訓要)는 모두 도선의 밀기에 의한다>는 이능화(李能和)의 표현대로 도선설은 고려 왕업 경영 원리의 원천이 되었다. 게다가 고려조에 들어와서 그의 시호(諡號)가 대선사(大禪師)에서 왕사(王師)로 거기서 다시 국사(國師)가 되는 과정을 밟는 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특히 수도인 개경은 수도 입지 선정에서 도선 풍수가 축약되어 드러난 곳이라 할 만하다. 백두산의 맥을 이어 받은 오관산(五冠山)의 지기가 개경의 주산이자 진산인 송악으로 이어져 개경의 양기(陽基)를 열게 되는 것으로 그 내룡(來龍)의 맥세는 대단한 바가 있다. 또한 전형적인 장풍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음에 대해서도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다.18]
18]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민음사, 1984), 197-213쪽.
특히 곡사화기(曲射火器)가 없던 근대 이전의 전쟁에 있어서는 장풍지의 군사 지리적 유리점은 재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손자의 <지피지기 승내불태 지천지지 승내가전: 知彼知己 勝乃不殆 知天知地 勝乃可全>의 단계로 적과 아가 비슷한 병력으로 전술적 대치를 하는 상태라면 확실히 유리하지만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분지상 지세에서는 기동성의 저하는 물론 손자가 말하는 위지(圍地)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적이 소수의 병력으로 게릴라적인 소모전을 획책하든가 혹은 대규모의 월등한 병력으로 침공하는 경우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경과 같은 장풍국의 땅은 전술적 유리점과 전략적 불리점을 공유하고 있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개경은 송악산을 현무, 즉 진산으로,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내외 청룡과 백호로, 주작현(朱雀峴)과 용수산(龍岫山)을 주작으로 한 완벽한 사신사를 갖춘 도읍이지만 국란에 임해서는 개경 사수를 할 수 없는 전략적 취약성을 드러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개경은 장풍국의 일반적인 지세에 따라 주변 산세가 너무나 조밀하고 국면이 관광(寬廣)치 못하며 또 북쪽 산 제곡(諸谷)에서 흘러 나오는 계곡수는 모두 중앙에 모이기 때문에 하계 강우기에는 수세가 거칠고 분류(奔流)가 급격하여 순조롭지 못한 결점이 있다. 이 역시 도선 풍수의 특징인 명당 기피 현상의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여기에 대한 대비가 있다는 것이 또한 도선 풍수의 장점이기도 하다.
즉 위와 같은 역세의 수덕을 진압하고 지덕을 비보함에 있어서는 도선의 산수순역법(山水順逆法) 내지 비보사탑설을 응용하여, 광명사(廣明寺)와 일월사(日月寺)는 이상 제수(諸水)의 합류점에, 개국사(開國寺)는 개경의 내수구(內水口) 위치에 건설하여 이 사찰들로써 수세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판단으로 하천의 범람이 우려되는 취약 지점과 합류점에 사원을 건설함으로써 인공 건조물에 의한 하천의 측방침식(側方浸蝕)을 억제하게 하는 한편, 승려들로 하여금 평소 하천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유사시 노동력으로 대처케 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 여겨진다. 도선 풍수의 비보사탑설은 잘 살펴보면 이런 합리성을 갖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고려 풍수에 끼친 도선의 영향은 더 말할 것이 없을 정도다. 그것은 고려 풍수의 두 대가로 불리는 김위제와 묘청이 모두 도선 계통의 인물임을 자처했던 데서도 잘 드러나는 사실이다. 특히 묘청은 도선의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라는 풍수 지리 술서를 읽고 주체 의식 발휘의 촉진제로 삼았다고 피력한 바 있거니와, 고려에서 국란이 일면 도선을 추앙케 되는 한 이유도 도선의 독자적 풍수 사상과 고려의 주체 의식이 연합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즉 풍수는 절망에서의 구원을 위한 활력소였으며 끈질긴 생명력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묘청의 난이다.19]
19]이용범, 앞의 책, 56-61쪽.
남경 천도를 주장한 김위제도 도선의 풍수술을 배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도선 풍수는 어떤 혁명적 기운을 내뿜는 위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것은 자칫 비술의 냄새를 풍기는 사이비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농후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이성계를 도운 무학, 조선 후기의 홍경래, 동학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한결같이 풍수와 관련된 것을 보면 혁명적 또는 개벽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좀 다른 얘기기는 하지만 요승 신돈도 그의 반대파들도 모두가『도선밀기』등 도선 풍수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가 고려 시대에 끼친 영향력을 잘 말해 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동학의 풍수 관련성을 살피기 위하여 참고로 다음의 기행문을 삽입해 둔다.
"김개남 장군.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 삼걸 중 한 분. 그러나 의외로 그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관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동학 지도자였기에 후에 그를 사로잡은 전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그의 명성과 용력에 겁을 집어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 데 위험을 느껴 재판도 없이 임의로 처형하여 그 수급만을 바쳤던 용장. 그분의 친손자 되는 김환옥(金煥鈺) 옹(75세)은 김개남 장군이 워낙 힘이 세어 전라감사가 판자 위에 장군을 올려놓고 손발에 대못을 박아 그를 구금했다고 회고한다. 장군의 부인, 즉 노인의 할머니로부터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전봉준 장군의 후손은 흔적이 없고, 손화중 장군의 손자는 정읍단위농협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김개남 장군의 손자 김환옥 노인, 그는 지금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웃지금실마을에 살고 있다. 김개남 장군의 생가터는 현재 조씨 소유의 담배밭으로 쓰이고 있을 뿐 조그만 기념 팻말 하나 붙어 있지 않다. 지난(1993년) 2월 찾아보니 작년 가을에 심었던 옥수숫대가 아직도 을씨년스럽게 바람에 치대이고 있었다.
본디 정읍 일대는 풍수 도참과 민족 종교의 보고(寶庫)와 같은 곳이다. 두승산 시루바위 아래 증산교의 창시자 강증산 유적, 이평면 장내리 전봉준 고가, 같은 면 하송리 만석보 유적지,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지, 고부면 신중리 동학혁명 모의탑,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普天敎) 천자(天子) 차경석(車京錫)의 대궐터, 그리고 이곳 산외면 동곡리 승지 명당처들. 어떻게 이런 고유의 민족 정신 유산들이 가깝게 모여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신비감마저 드는 땅이다. 오죽하면 비결서들이 이곳은 모든 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같이 금싸라기 같은 땅(편편금: 片片金)이라고 했을까. 역시 비결파로 정량리 상용두마을에 사시는 한학자 송양(宋亮) 어른 말씀으로는 지금도 핵심 명당 마을에는 토박이들보다 찾아 들어온 외지인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산외면에 있는 명당 중 지금 기록에 남아 전하는 것만도 부지기수다. 동곡리 동북쪽에 있는 부용산(芙蓉山)에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 명당, 동곡리 북쪽 지금실마을 앞산에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명당, 상두리 개치 참시내(眞溪) 북쪽 마을 뒷산에 선구폐월형(仙狗吠月形) 명당, 오공리의 으뜸 마을인 공동 동남쪽 신배마을 뒷산에 군신봉조형(君臣奉朝形) 명당, 평사리 윗제실 남쪽에 있는 갈마봉에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명당, 평사리 비노모텡이 평사락안형(平沙落雁形) 명당 등 처처이 승경(勝景)이요, 곳곳이 길지이다. 한 가지 특징적인 현상은 일문일족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이 아닌, 모두가 잘살고, 병고, 병화(兵禍), 흉년의 삼재가 없는 개벽의 신천지를 추구한 인걸들이 하나같이 찾아나선 이 일대 풍수 형국의 땅들이 평사낙안형이란 점이다. 평사낙안의 터는 비교적 넓은 들판 가운데로 지기 융성한 조그만 산이 우뚝하고 그에 기대어 마을이 자리 잡은 위에 주위는 험준한 산세로 가려져 있는, 산간 대분지 형상을 하고 있다.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명당 터는 따라서 외부와의 단절을 고집한다. 분지 지형 특유의 주변 산세가 공간적 고립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공간의 고립은 시간으로부터의 고립도 보장해 준다. 이미 개벽에 의한 새로운 이상 세계가 건설된 만큼 그들에게는 역사란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의지해야만 존속이 가능하다. 또한 역사는 그에 따른 변화를 주목한다. 이상의 달성은 변화의 필요를 거부한다. 이미 완벽함을 갖추었는데, 여기서 더 변화를 바란다면 그것은 불비(不備)함으로의 회귀이다. 그러니 이상 세계에서는 역사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으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다.
풍수 명당은 전후의 현무, 주작사와 좌우의 청룡, 백호세에 의하여 지세적 고립감의 확보를 이룩함으로써 외부와의 단절로 인한 개인의 심리적 안정감을 확보함은 물론, 시간과의 단절을 담보받음으로써 더 이상 억압과 굴욕의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상 세계를 건설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살펴보자면 완벽 지향의 혁명가들이 제대로 된 풍수학인인지도 모른다. 이상향 건설에 어찌 믿음이 구애받겠는가. 이곳에는 비단 풍수와 도참꾼들만이 아니라 천주교 신자들도 들어와 마을을 일구고 살고 있다. 산외면 종산리 원바실마을은 천주교 공소(公所)가 있는데, 필자의 예감으로는 그들 역시 이 땅이 끄는 바에 따라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았겠느냐는 짐작이 간다. 천주교도들이 원바실 공소를 세운 것도 동학도들이 이곳을 찾은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공소가 세워진 것이 19세기 후반 병인박해 때로 추정되고 있으니 말이다.
한학자 송양 어른께서는 지금도 지금실 바로 이웃인 정량리 상용두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신다. 그분 말씀으로는 평사낙안이 어느 곳인지는 서로의 주장이 달라 확정지을 수 없다고 하신다. 문제는 평사낙안의 혈처가 구체적으로 어디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자기 집안만을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동곡리와 그 주변 분지 일대 전역이 평화로운 강가 모래밭에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 기러기로 보인다. 이제 영원의 휴식이 기다리고 있는 터, 평사낙안의 땅은 누구 한 사람의 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명당이어야 하니까.
김개남 장군의 본명은 영주(永疇)이다. 그는 철종 4년(1853) 바로 이곳 정읍군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지금곡: 知琴谷)에서 태어났다.『일지 선사 유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곳은 호남의 웅기(雄基)다. 전봉준 장군도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나 그것은 믿기 어렵고 그가 이 땅을 사모하여 이곳으로 이사하였고, 그의 딸까지 이곳으로 시집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송양 어른 말씀으로는 전봉준이 소실을 데리고 아랫지금실에서 살았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19세기 말의 상황에서 그들이 믿은 것이 동학이든 서학이든 그들은 뭉뚱그려 도(道)꾼들이라고 불렸다. 도의 전문가들이라는 얘기일텐데, 그들이 믿은 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래위 없이 모두 근심 걱정하지 않고 배곯지 않으며 정답게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봉건적 위계 질서를 떠날, 아니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사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풍수가 주장하는 바, 사람은 그 뼈다귀, 즉 가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땅의 생기를 받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과 그런 땅을 찾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선택하기에 달렸다는 점 그리고 그 선택의 성공 여부는 오로지 그의 적덕(積德)과 적선여부에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왜 동학 삼걸이 모두 풍수 사상가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봉준은 지관 일을 한 적이 있고 그 자신 평사낙안(平沙落雁)과 김계포란(金鷄抱卵)의 명당을 찾아 다닌 사람이니 말할 것도 없고, 손화중은 정읍군 과교리 출신으로 일찍이 한문을 수업하고 시국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20대의 젊은 나이로 이른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영남을 휩쓴 동학에 입문한 사람이니 역시 더 말할 것도 없으며, 김개남은 그 집안 자체가 피난보신(避難保身)의 땅을 찾아 지금실로 솔가해 들어간 경우이니 역시 더 말해 무엇하랴. 철저히 풍수학인들인 셈이다. 풍수와 동학과 개벽에의 꿈은 전쟁을 통한 혁명으로 융합되었고, 그 결과는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참담한 조락(凋落)으로 끝장을 냈다. 그 외세의 대표가 일본이었는데, 이제 우리는 풍수를 부자들의 썩은 욕심 발산처로 만든 반면, 그들은 새로운 연구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 역시 운명의 장난인가 역사의 장난인가? 1993년 2월 초 오사카시립대(大阪市立大)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노자키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조선(朝鮮) 풍수지리사상(風水地理思想)의 실지연구(實地硏究)>라는 프로젝트를 오사카시로부터 받아 방한할 예정이니 도움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20] 일제가 획책한 단발령은 명색이야 근대화요, 위생을 위한 것이라 하였지만 본심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모멸감과 좌절감을 안겨 주려던 것이 아니었던가?
명산에 쇠기둥을 박아 정기를 빼앗으려던 것도 결국은 일제 사설 단체들이 같은 목적으로 저지른 풍수 만행이었다.
망국의 왕자 의친왕(義親王)은 무슨 까닭에 이곳을 다녀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금사정팔경(錦沙亭八景)이란 것을 마련하였다. 거기에도 평사낙안(平沙落雁)이 있고 상두산 봉우리를 휘돌아드는 구름이 있으며 평사리 북쪽 춘대(春臺)에 피리 부는 초동이 있다. 동학에 나라를 내주었다면 그것은 알을 깨는 아픔을 넘는 천지 개벽이었을 것이나, 왜적에게 나라를 빼앗김은 얼굴을 갈아 대는 굴욕(屈辱)이요, 천추의 한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런 심회를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이라면 동학 삼걸의 혼령에게는 그나마 조그만 위로가 되었으련만.
인근에는 동네마다 개를 기르는 집이 많았다. 그저 집집이 한두 마리씩 키우는 검둥이, 바둑이가 아니라 우리에 갇힌 식용 개들이었다. 낯선 필자를 보고 미친 듯이 짖어 대는 개들을 바라보며 회한을 감출 길 없다. 대도시의 풍수는 이기심 가득한 욕심쟁이들의 산소 터잡기 잡술이 되어 버렸고,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동곡 지금실 동학 삼걸의 풍수 사상은 먹거리 똥개들의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인가.
물론 결코 그렇지는 않다. 전북의 뜻 있는 사람들이 지금 김개남 장군 추모 사업을 위한 일을 시작하였다. 생가 터를 사들여 석비(石碑)나 세우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손 털 사람들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의 노력이 잡술을 묻어 버리고 개새끼들을 잠재우는 힘의 원천이 될 날이 오리라고 확신한다. 나도 물론 일조하리라."
20]그의 연구 성과는 1994년 『韓國の風水師たち』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人文書院에서 출간되었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조선의 개국과 전도에 깊이 간여 한 무학대사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 역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 실증적인 평가가 어렵다. 이 점 역시 그가 맥을 이었다고 보여지는 도선과 닮은 점이다. 예컨대『실록』에 나오는 그에 관한 기록이란 것이 임금의 하문 내용이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고작 <잘 알 수 없다>는 것이거나 혹은 <중의(衆議)에 좇아서 결정하소서> 하는 따위의 하나마나한 대답이라서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법문(法文)에도 서툴렀다>는 기록까지 남겼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정말 줏대 없는 멍청이에 지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성계 배후에서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한 그의 그림자였을까?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성계와 무학이 사랑한 땅의 답사에서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제2장 양주 회암사를 다루는 부분에서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풍수는 군사 전략이나 고을 또는 마을의 입지 선정, 하다 못해 주택의 기지 선택에 관계되는 양기(陽基) 및 양택(陽宅) 풍수(風水) 위주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 오면 도참 지리설에 대한 제재와 유학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으로 인하여 풍수 지리설도 음택 풍수로 변질되고 만다. 당연히 당시는 중국의 수입 풍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을 때이다. 그러므로 도선의 합리적이고 긍정적이었던 자생 풍수는 수입된 중국의 술법 풍수에 밀려 그 자리를 음택 발복의 이기적 속신에 떠넘기지 않을 수 없었던 때였다고 보인다.
성종 16년(1485) 정월에 황해도에 퍼진 전염병을 없애기 위해서 병조참지(兵曹參知) 최호원(崔灝元)으로 하여금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최호원은 문과 출신이었으나 천문 지리, 의학, 복서 등의 잡술에 관심이 많고 풍수 지리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그는 전염병의 원인을 산천 형세에서 찾으며 철폐된 도선의 비보 사찰을 복원하여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러나 사간원, 사헌부 등의 논척을 받고 그는 마침내 파직을 당한다. 다음은 그가 파직되고 나서 올린 상소문이다.
"개국초 정승 하륜은 유학의 종장(宗匠)으로 나라의 공신이 되어 술수의 학에도 함께 통했습니다. 여러 학문을 관장하고 높고 낮은 산천을 오르내려 마침내 한양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숭례문 밖에 못을 파고 숭인문 안에 산을 만들었음은 모두 도선의 비보술을 쓴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괴이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후세에도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술수의 설을 대대로 괴이하게 생각지 않았으나 이제 와서 괴이하게 여기고 술수의 선비가 대대로 모두 배척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논박을 당하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결국 시대 착오적인 억지로 취급되고 말지만 그의 사건은 이 시기부터 도참적 성격의 풍수 또는 풍토 적응성이 뛰어난 도선식 풍수가 배척당하기 시작하는 징표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21]
그가 시대 착오적인 주장을 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때부터 자생 풍수가 궤멸 단계에 접어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풍토에 적응하여 마치 어머니의 품에서처럼 근심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는 터를 찾아보자는 자생 풍수의 사상성은 체계가 잡힌 확립된 왕권 아래서는 이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터는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대로 오면 올수록 풍수는 효 사상과 결합, 개인의 복을 비는 관념과 결부되어 조상의 묫자리를 잡기 위한 음택 풍수로 고착화되고 만다. 그러니 그 폐단은 점점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풍수로 인하여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22]
21]『성종실록』, 성종 16년 정월조 및 이준곤, 앞의 책, 323-324쪽에서 재인용.
22]이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가 다른 논문에서 정리한 바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코자 한다. 최창조,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풍수 사상」, 『韓國文化』 제11집(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90), 469-504쪽.
그런데 그런 걱정이 단지 걱정에 그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니 그것이 더욱 걱정이다. <근자에 모 야당 총재가 풍수가로부터?후손 중에 대통령이 난다’는 코치를 듣고 가족 묘를 용인으로 옮겨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전직 대통령도 그 부인의 조상 묘를 ?여왕이 나는 자리’로 이장했던 덕택에 대권을 잡았다는 등 요상한 얘기가 담긴 풍수책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던 것도 얼마 전의 일>이라는 기사를 읽었다.23]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실학자들의 걱정이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도무지 부모님 살아 생전에 받은 은혜만으로도 몸둘 바를 몰라야 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인데 이제 이승을 떠나 백골만 남은 부모님에게까지 음덕을 바란데서야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게다가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지도자를 원한다는 혹은 했다는 사람이 오늘의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매장 묘지 문제를 덮어두고 납골당이라든가 화장 같은 본보기적 장례 문화 쪽으로 솔선수범하기는커녕 그런 구태를 보였다면 정말 큰일이다. 다시 한번 그것이 와전이기를 바라면서, 그런 것은 결코 도선 풍수가 될 수 없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도선 풍수 연구자로서의 자신의 처지가 모처럼 밝게 느껴진다.
22]정순태, 「르포, 禪風과 풍수의 현장을 찾아서」, ≪시사월간 윈≫, 1996년 7월호, 281쪽.
7.균형 잡힌 마을들
(1)어머님 자궁 속으로의 회귀 염원, 삼척 대이리 골말
지금 사람들은 몹시 불안해한다. 그가 사는 곳이 시골이든 도회지든 편안한 삶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분명 경제적으로는 잘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피곤하고 고달프기 짝이 없다.
공기는 공기가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길은 막히고 사람들은 짜증을 낸다. 언제 무슨 사고가 날지 알 수가 없다. 다리를 건너며, 터널을 지나며, 고속 도로를 달리며 잠시도 안심해서는 안 된다. 안심은 방심이 되고 그것은 결국 생명을 건 도박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편 길을 달려오고 있는 운전자들의 얼굴을 살핀다.
모두들 지쳐 있고 화가 나 있으며 불안한 조급증을 표정에 드러내고 있다. 왜 삶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차창을 열면 달려드는 매연과 기분 나쁜 훈기, 좋은 공기는 바랄 수도 없고 그저 그냥 웬만한 공기만이라도 그리울 뿐이다. 시골의 개울물 역시 더럽기는 매한가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쾌한 바람과 맑은 물은 우리들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어떤 것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유엔 사무총장이 환경을 고려치 않는 개발은 자멸 행위라는 메시지를 보내 오는 지경이다. 바람과 물의 길, 그것은 풍수의 도이다. 풍수는 바로 그 당연한 것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현대적 의미가 있다. 그 좋았던 바람과 물을 되찾아 불안 없는 터전에서 살아 보자는 것이 풍수가의 꿈이다. 나는 이제 바람과 물의 길을 따라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안정 희구의 삶터를 찾아 나서고자 한다.
지금까지 나는 먼저 풍수의 이론을 앞세우고 그것이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매우 고답적인 답사에 치중해 왔다. 그런데 무척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풍수의 이론은 주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고 그 현장은 우리 풍토에 맞는 풍수가 펼쳐진 곳이기 때문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장이란 점이다. 이론을 중시하고 이루어진 조선조 중후기 양반촌의 터잡기가 썩 좋은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 바로 현장의 중요성을 웅변하는 대목이다.
풍수가 찾고자 하는 터는 어떤 곳일까. 한마디로 불안이 없는 땅이다. 그런 땅은 어디인가. 바로 어머님의 품속 같은 곳이다. 안온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근심 걱정이 없는 터. 바로 어머님 품안같이 생긴 땅에서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았다. 풍수는 그렇게 생긴 터를 좋아한다. 그래서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어머님의 양팔이 되고 주산(主山)인 현무사(玄武砂)는 어머님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가 바로 명당이니 명당은 바로 어머님의 품속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곳은 아무런 걱정 없이 태초의 평안 속에서 오직 만족만을 느끼며 살았던 품이다. 그 품을 떠나면서 근심과 불안은 시작되었다. 마치 오늘의 우리들이 고향이라는 명당을 떠나 도시의 잡답 속에서 불안을 떠안고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품안에 안긴 것만으로는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더욱 진전하여 아예 어머님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염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곳이야말로 우주 태생(胎生)의 평화가 깃든 곳이라 믿는 것이다. 삼척 신기면 대이리의 골말이 바로 그런 곳이다.
환선굴이라는 석회 동굴로 외지에 제법 알려진 곳이지만 지금 그 굴은 폐쇄되어 있다. 본래 20여 호의 화전민들이 살던 이 마을에는 지금 두어 집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필경『정감록』신봉자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처음 만난 골말의 할아버지는 그 점을 강하게 부인했다. 아마도『정감록』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가 미신과 통하기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다. 얼마 후 외지인에 대한 본능적인 반감을 지운 뒤에 보여 준『정감록』필사본 일부는 이곳이 분명 정감록촌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태백산 연맥이랄 수 있는 덕메기산(德項山)을 비롯하여 같은 줄기인 양태메기, 지각봉, 물미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그곳을 일러 어머님의 뱃속이라 표현한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지세이다. 그런데도 병자호란 이후 인조 때 경기도 포천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마을 입향조(入鄕祖) 이시두는 이곳이 어머님의 자궁 속이라는 보다 확실한 증거를 원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바로 분지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촛대배이(촛대봉 또는 촛대병바위)이다. 이 거대한 석물은 태백의 터줏대감인 사진 작가 이석필 씨 말마따나 위에 콩알을 떼어 낸 좆대봉(좆대배이)이 바른 이름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머님의 자궁 속에서 원초적 생산을 행하기 위해 삽입된 아버님의 발기한 양물(陽物)일 게 분명한 이 좆대봉으로 말미암아 골말은 한 점 의심의 여지없이 자궁 속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티끌만한 불안도 있을 수 없는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래 11대째 이곳에 살고 있다는 이종옥 할아버지(74세)의 집은 소나무 널판으로 지붕을 덮은 너와집인데 지난 겨울 이곳을 찾았을 때도 낮술에 취해 계시더니 이번 초가을에도 역시 낮술에 젖어 계신다. 극단의 평온을 갈구하는 마음이 그를 이곳에서마저 취몽의 세계로 이끌었음인가. 환선굴에서 시작되었다는 마을 곁을 흐르는 환선천은 슬프도록 푸르고 맑아 바라보기에도 가슴이 시리다. 그러나 그 슬프도록 시린 계곡 물도 멀지 않아 더럽혀지려니 싶어 마음이 개운치를 않다. 아닌게아니라 대이리 계곡 입구는 벌써 오염의 시작이랄 수 있는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너와집에는 아직도 고콜(혹은 코쿨. 일종의 벽난로 겸 조명 시설)과 까치궁기(까치 구멍으로 집안의 연기를 뽑아 내는 환기통)가 실용 상태로 쓰이고 있었는데 방을 따뜻하게 데워 줌은 물론이고 그 밝기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이 집과 마주하고 있는 밥집 변소 밑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밥을 시켜 놓고 들어간 변소에서 본 구더기들이지만 전혀 입맛을 떨구지는 않는다. 글쎄, 그것이 어릴 때 익숙했던 장면이라 서인가! 정겹기까지 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의 표현대로 <똥이 자원>이라면 이처럼 살아 있는 똥이 진짜 자원일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큰 망발은 아니지 싶다.
(2) 모름지기 땅은 태백시 철암동 시루봉 모시듯해야 하는데
한밝달, 태백산은 악의가 없다. 그래서 살기도 없다. 등성이는 온통 여자의 허리와 엉덩이 같은 선으로 둘러 있으니 태곳적 우리의 할머니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말하자면 여성적인 음산(陰山)이란 얘긴데, 그러면서도 드러내는 기운은 밝으니 음양 조화를 이루었다고 말해도 괜찮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중추요 한강, 낙동강, 오십천 등 삼수(三水)의 발원처. 따라서 기호, 관동, 영남 지방의 젖줄의 근원이다. 실제로 태백산 문수봉은 여자의 풍만한 젖가슴 모양이기 때문에 젖봉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방향을 틀어 소백, 덕유, 지리산을 지나 한라산에서 맥을 닫으니, 또한 호남, 호서, 제주의 등뼈 구실도 한다. 무릇 사람이건 산이건 그 모양이 빼어나면 장엄하기가 미치지를 못하고, 그 기세가 장쾌하면 아름다움이 떨어지는 법인데 이 산은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수려하면서도 장엄(역수역장: 亦秀亦壯)하다.
나만 잘났다고 남을 배척하는 못난 산이 아니라 모두를 아우르는 산, 품는 산, 생명의 산, 어머니인 산이다. 흔히 말하는 명산(名山)이 아닌 영산(靈山)이니, 우리 고유의 사상이 살아 남아 있는 곳으로, 이상하게도 이 산에는 큰 절이 없다. 우리나라의 어떤 고을이나 마을도 그 주민들이 의지하고 존숭하는 특정의 산이 없는 곳은 없다. 이곳 태백산도 주변 고을과 마을에서 그러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이 산이 다른 산과 판이한 특징을 갖는 까닭은 민족적 자존심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의 삼령산(三靈山)이란 백두산, 태백산, 한라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구호처럼 흔히 쓰이는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표현은 <백두에서 태백을 거쳐 한라까지>라는 구호가 정확한 표현이 되는 것이라고 태백의 터주는 말한다. 영산과 명산은 구분되어야 한다. 영산에는 외세가 개입하지 못한다.
그래서 백두산, 태백산, 한라산에는 가장 민족적 종교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사원까지도 대찰이랄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 민족에게는 삼신삼교(三神三敎)가 중요한데 백두와 한라에 태백이 만나야 삼신이 어울리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다. 특히 태백은 밝음으로 오르는 사다리, 밝은 자리(배꼽), 밝음의 우두머리로 삼신의 으뜸이니 이를 받들어 대접함은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받들어 모심에 있어서는 홀로 외로이 조화를 부릴 수는 없는 것(고양불생 고음불성: 孤陽不生 孤陰不成)이니 그를 위하여 태백산은 어머니가 되고 함백산은 아버지가 되었다. 무릇 조화는 새 생명을 창조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그러자면 샘굿(자궁)이 있어야 하는데 황지가 있으므로 태백산이 어머니가 된다는 주장이다. 도원지(桃源池)가 자궁이므로 함백산이 어머니라는 주장도 있다.
젖 먹이는 어머니를 아버지인 태백산이 기웃이 내려다보는 모습이란다. 어쨌거나 태백산에서 보면 연화봉이 연꽃 봉오리처럼 보인다. 청옥산-백병산-태백․함백산-백병산-청옥산의 이중 보호 구조요, 게다가 거느린 가족은 쌍으로 많다. 요컨대 태백, 소백산은 한몸체, 한가족이라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리라.
산 아래 태백시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폐광촌을 관광지나 오락 시설 유치로 되살려 보자는 움직임이 있는데, 많은 관광지가 돈 처들여 쓰레기장 만든 꼴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폐광촌의 문제는 <떠날 사람 떠나고, 너와집, 굴피집 따위의 옛 건물을 복원하고, 이곳을 외부로부터 차단시켜 외지에서 들어오는 관광객이 이곳에서 소비하는 물건은 모두 이곳 토종을 쓰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식 관광 단지를 조성하면 어떨지 하는 주민 의견이 있던데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인 듯하다.
풍수가 찾는 땅이 안온하고 안정되어 불안이 없는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은 현장 답사에서 무수히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유입된 이론 풍수에 의하여 상당 부분 왜곡된 외래 풍수는 풍수의 목적을 묫자리나 집터 잘 잡아 내 식구 내 가족 잘먹고 잘살자는 이기적 잡술로 만들고 말았지만,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는 우리 자생의 고유 풍수는 삶터의 바람직한 터잡기와 그 상징성 부여에 큰 가치를 두고 있더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런 터가 그저 잘 고른다고 제 차례가 오는 것은 아니다. 땅은 부모님이니 그에 합당한 대접을 올려야 불안 없는 삶터를 꾸릴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가 부모님인 땅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어 왔는지를 되돌아본다면 어찌 감히 근심 걱정 없는 명당 길지를 바랄 수 있으랴. 그저 소유하고 이용하기에만 급급해 오지 않았는가. 부모의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 내는 패덕을 수도 없이 해놓고 아직도 철없이 무엇을 더 달라고 조르는 악행을 서슴지 않는 것이 오늘의 우리가 아닌가.
이제 부모님인 땅은 한마디로 사경을 헤매는 처지에 빠졌다.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중환자인 하늘과 땅(天地), 공기와 물(風水)에게 우리는 지금 무슨 치료를 해주고 있나. 오히려 좀더 유산을 내놓으라고 조르고 있는 꼴은 아닌지. 휴일만 되면 무리 지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자식을 키워 놓고 이제 그 뒷감당에 목숨이 경각에 달하여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있는 부모님에게 찾아온 자식이 남은 유산 더 내놓으라고 패악을 떠는 패륜아를 보는 느낌이다. 도시 건설, 도로 개설, 국토 개발, 공단 유치 게다가 좀더 잘 놀아 보겠다고 골프장까지, 온갖 부모님의 유산을 제 마음대로 들쑤셔 놓고도, 쉬는 날이면 보다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를 달라고 어머니인 산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괴롭히고 있으니 어찌 그를 보고 패륜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꼭 필요하다면 우선 부모님의 병환부터 고쳐 놓고 볼 일이다.
철없는 어린애들은 의식 없이 부모님을 괴롭히는 수가 있다. 그를 보고 크게 나무라지도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젖을 더 달라고 떼를 쓰고, 밥을 먹이는데 옷을 더럽히고, 일부러 진흙탕에 들어가 옷을 버리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이것이 바로 공해이고 오염이다. 하지만 다 큰 자식이 이런 짓을 하면 누가 가만두겠는가. 응석을 받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한계를 넘으면 응징을 하여 버릇을 고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요즈음 두렵다. 아무리 하해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부모님일지라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언제 벽력같은 꾸지람이 내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태백시 철암동 상철암에서 나는 모름지기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님인 산, 풍수에서는 산이 곧 땅이므로, 즉 땅을 어떤 식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좋은 예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곧 시루봉이었다. 떡시루처럼 생겨서 시루봉이란 이름이 붙은 이 산에는 밑에 인공이 가미된 조그만 동굴이 파여져 있다. 동굴 안에는 서낭당이 들어섰는데, 이 당집은 인근 마을 주민들의 공경의 대상이다.
시루에는 불을 지펴야 떡이 쪄지는 법이고 이 동굴과 당집은 바로 이 시루봉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주민들의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동굴 당집에 촛불을 밝힘으로써 아궁이에 불을 땐다는 상징을 삼는다.
사경의 부모님에게 유산을 조르는 패륜아들로서는 별천지의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산을 대접함이 이 정도는 되어야 좋은 물과 공기(風水)를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시루봉은 풍수가 이기적 잡술 나부랭이가 아님까지 가르치고 있으니, 이 산 날망(등성이)에 다른 곳은 모두 석회암인데 유독 그곳만 황토로 되어 있는 소위 시루형국의 명당이 있다. 이곳에 묘를 쓰면 후손에게 좋다는 바람에 누군가가 산소를 썼는데 밤만 되면 인근 새터 마을의 개들이 그곳을 보고 짖는 바람에 결국 파묘하고 말았다는 소문이 있다. 풍수는 저 하나 잘되자고 묫자리 잡는 괴술(怪術)이 아니다. 이런 현상에 신비를 덧붙일 필요는 없다. 산골 개들이 갑자기 산소 꾸미기(治墓)를 한다고 산꼭대기에서 중장비들이 부르릉거리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그곳을 보고 짖어 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합리 속에 든 의도야 물론 우리가 짐작하는 바, 산 사랑이다.
산을 대접하여 근심 없는 삶터를 가꾸어 보자는 것이 우리의 자생 풍수이다. 시루봉이 바로 그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3) 내 사는 터가 명당인 줄 알면 된다, 공주 명당골
공주 사곡면 화월리에는 명당골이란 마을이 있다. 드러내 놓고 풍수를 지명에 사용한 희귀한 예이다. 본래 명당이란 임금이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정전의 앞뜰을 가리키는 말로,『禮記』에 의하면 밝고 올바른 가르침이 내려지는 집이란 뜻으로 나와 있고 『孟子』 「양혜왕 하편」에는 단순히 임금이 사는 집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즈음 쓰이는 뜻은 분명히 풍수적 좋은 터란 의미이다. 결국 명당이란 터의 핵심인 혈(穴)이 산천의 조아림을 받는 곳(수산수지조야: 受山水之朝也)이니 그 격이 높아야 당연한 것이다.
정말 명당골은 명당인가? 우리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농촌 마을치고 명당 아닌 곳이 거의 없지만 마찬가지로 명당골은 명백히 명당이다. 마을에 들어서는 느낌은 오직 맑고 밝다는 것뿐. 그러니 명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명당임을 분명히 드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명당이면 남에게 알려지지 않게 숨기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은 무슨 연유로 만천하에 명당임을 과시하고 있는 것일까.
마을 답사에서는 누구를 만나 얘기를 듣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채상민 할아버지(채상민: 蔡相敏, 1995년 당시 76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텃밭을 정리하고 계시던 그분은 명당골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맑고 밝은 기운을 가진 분이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저렇게 늙어가야 한다, 만나는 순간 내게 닥친 느낌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분에 의하면 이곳이 명당골이 되는 까닭은『정감록』이 말하는 십승지(十勝地)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란다. 다른 기회에 소개하겠지만 사곡면에 속하는 유구와 마곡 사이에 열 군데 승지 중 하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명당골을 바로 그 승지라고 여기며 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분도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듯, 사람에게 친소(親疎)가 있는 것처럼 땅에도 친소가 있는 법이라 자신은 이곳에 친근함을 느껴 찾아든 것이라고 말한다. 삼십 년 전 단양군 영춘에 살다가 그곳의 인연이 다하고 이곳에 인연이 닿아 들어온 것이라는데, 영춘 역시 승지로 꼽히는 곳이고 보면 이분은 유서 깊은『정감록』비결파에 속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순수하며 순진하다. 하기야 순진하니까『정감록』을 믿는 것이겠지만, 그의 비합리성을 공박하기 전에 이런 분들은 최소한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터를 고를 때 자신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은 높고 널따란 터를 선호하고 양순하고 소극적인 사람은 골짜기의 아늑한 양지 쪽을 좋아하는 식이다. 하지만 일단 터를 선정하여 그곳에 살다 보면 터 역시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을 닮아 간다. 마을도 양명하지만 할아버지의 집도 깨끗하다. 마당에 밥알이 떨어지면 주워먹어도 괜찮을 것처럼 깨끗하다. 말씀도 그러하여 말끝마다 <소생이 배운 게 없고 문견이 넓지 못해서>를 후렴처럼 되풀이하는데 그것이 전혀 위선적이거나 겉치레의 겸사처럼 보이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이 땅이 좋다는 점을 말해 달라는 주문에는 어김없이 <선악과 호오를 분명히 말할 수는 없는 법이며 명당이란 게 지기(地氣)를 말하는 것인즉 어찌 알 수가 있겠소> 하는 식으로 땅에게 모욕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애써 삼가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마을은 북쪽에서 진입하도록 구성이 되어 일반 농촌과는 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남쪽을 바라보는 앞에 개울이 있고 개울 건너로는 산밑까지 꽤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이 들판 이름이 싯들(屍野), 시체 모양의 논밭이다. 이어지는 산이 까마귀산, 그래서 이 산의 형국은 까마귀가 시체를 쪼아먹는 모양(飛烏啄屍 또는 金烏啄屍形)으로 표현된다. 그 왼편으로는 뱀이 개구리를 쫓아가는 모양의 뱀산이 있고 뱀산 앞에 조금 떨어져 개구리산이라는 조그만 둔덕이 있으니 이는 장사추와형(長蛇追蛙形)이다. 까마귀산 오른쪽은 누에머리산으로 잠두형(蠶頭形)인데 이곳은 마을을 외부로부터 차단해 주는 역할을 하는 수구(水口)막이에 해당된다. 풍수 용어로는 파(破)라 하는 것으로, 파가 멀거나 벌어지면 좋지 않은 법인데 불행히도 이 마을의 파는 상당히 넓게 열려 있는 편이다. 당연히 그 허점을 막기 위한 비보책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은 경지 정리 때문에 베어지고 만 버드나무숲이 그것이다.
교묘한 것은 마을 북서쪽에 철승산(鐵蠅山, 쇠파리산)이 있는데 파리는 누에에게 아주 해로운 것이므로 그놈들이 누에를 해치지 못하도록 개구리가 막아 주고 혹 개구리를 피했다 하더라도 다시 시체가 있어 유혹을 하여 결코 누에한테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그림 같은 풍수적 공간 구조이자 지세 배치이다. 다만 한 가지 버들숲을 없앤 것이 흠인 셈이다. 이런 숲을 동수(洞藪)라 하는데 대부분의 마을에서 도로 개설이나 경지 정리 등의 이유로 이를 없애 버린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뱀산과 까마귀산 사이 골짜기에 또 하나의 마을이 그림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안터라는 동네인데 이곳은 주로 명당골에서 분가한 차남 이하의 자식들이 이주하여 된 곳이라 한다. 겉모양으로만 판단한다면 안터가 더 풍수적 입지를 잘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배산임수에다가 삼면이 산으로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바로 피상적인 관찰이란 것이다. 뱀과 까마귀는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인데 그 사이에 끼여 산다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는 게 그 이유다.
풍수는 결코 상식을 벗어나지 않으며 만약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풍수를 가탁한 술법일 뿐이라는 마을 풍수의 큰 원칙은 간혹 이런 복병을 만나 어려움을 겪는 수도 있다.
공주에서 마곡사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명당골, 그 이름만큼이나 풍수 전공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명당이란 터보다는 비결파 할아버지의 순수성과 그분이 가꾸던 채소 같은 소박함에 더 마음이 끌린다.
(4) 무주 구천동의 비결파들
우리나라에서 오지의 대명사처럼 쓰이던 곳이 두 곳 있으니 남한의 무주 구천동과 북한의 삼수(三水), 갑산(甲山)이 바로 그러하다. 군 면적의 84%가 임야인 것이 오지임을 웅변하여 준다. 주변 산들도 해발 1천미터 이상의 고산준령으로 실제 무주에 들어와 보면 문자 그대로 만학천봉(萬壑千峰)임을 실감할 수 있다.
추풍령을 지난 백두대간은 민주지산(岷周之山), 석기봉(石奇峰), 삼도봉(三道峰) 등을 거쳐 부항령(釜項嶺)과 대덕치(大德峙)의 고개를 형성하며 대덕산(大德山)에 이르러 가야산맥(伽倻山脈)을 갈라 내면서 경상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대덕산에서 성초령(省草嶺) 고개를 지나면 삼봉산(三峯山), 덕유산(德裕山)에 이르러 가장 험준한 산세가 되고 이것이 경상남도 거창과의 경계 구실을 하면서 지리산으로 연결이 된다. 이 안쪽에 여러 지맥(支脈)들이 얽히고 설켜 무주, 적상(赤裳), 설천(雪川), 안성, 무풍(茂豊) 등지의 지형적으로 독립된 분지들을 형성한다. 실제로도 무주군의 각 면들은 조선 시대까지 독립된 현(縣)으로서 독자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세적 분립성을『무주군지』는 이렇게 표현해 놓고 있다.
설천면 장덕리(진들말)를 경계로 하여 그 이동(以東)은 무풍면으로 과거 신라 땅이었고 그 이서(以西)는 백제 땅이었으므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양지역에서는 언어와 풍속이 다른 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즉 전자는 경상도 사투리요, 후자는 충청,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말을 쓴다. 풍속에 있어서도 다소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자는 <투가리 된장 맛>이라 할까 좀 순박한 데가 있는가 하면, 후자는 <산뜻한 깍두기 맛>이라 할까 기질이 명쾌하고 사교적이며 붙임성이 많다.
지역민의 각종 거래와 인척간의 왕래도 부남면이나 안성면 쪽은 전라도 전주 방면과 잦은 편이고, 무풍면은 오히려 경상도 김천, 거창 쪽과 잦은 편이다. 그런 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기념물이 바로 설천면 두길리와 소천리 사이에 있는 구천동33경 중 제1경에 속하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신라가 삼국을 소위 통일한 이후 1천2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문을 경계로 동서 양지역은 동일 행정 구역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풍습이 판이하게 달라, 무주 사람과 무풍 사람을 쉽게 구별해 낸다고 한다.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무주 중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곳이 구천동이다. 오죽하면 <이 친구 아직도 무주 구천동이네> 하는 익은 말이 있었을까.?소식이 캄캄하구나'라는 뜻의 말이다. 마을 노인들은 농담 삼아 이런 얘기도 한다. <무주 구천동 투표함이 도착해야 선거는 끝나는 거여>라고. 흑산도 투표함보다 운송 시간이 더 걸린다는 우스갯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 경승(景勝)은 과거의 위엄이 아직도 여전하지만 교통편은 사정이 크게 바뀌었다. 길만 막히지 않는다면 서울서 세 시간 정도면 이곳에 닿을 수 있다. 결코 옛날의 무주 구천동이 아닌 것이다.
구천동은 설천면의 삼공리(三公里), 심곡리(深谷里), 두길리(斗吉里) 일원에 펼쳐지는 유수의 절경지로, 나제통문에서부터 덕유산 정상까지 장장 70리에 이르는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덕유산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인근에 무주 리조트라는 해괴한 유람장이 만들어져 경관을 결정적으로 버려 놓은 흠은 있다.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으나 주민 다수는 여기에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유치되고 보다 많은 관광 수입이 기대되어 좋게 보는 모양이니, 외지인인 처지에 내놓고 불평하기 껄끄러운 점은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눈에는 산룡(山龍)을 죽여 돈을 벌자는 것으로 비쳐지니 말이다.
자동차 위에 스키를 얹고 다니는 서울 차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 다닌다. 바로 그 국립 공원 입구랄 수 있는 삼공리 경로당(회장 장병희, 81세)에 노인 십여 분이 라면을 끓여 점심 요기를 하고 있었다. 사갈이나 설피를 신고 설산(雪山)을 헤매 다닌 경험이 있는 그분들 눈에는 그런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세상이 달라지니 제 돈 들여 중노동을 사서하는구나 하지 않겠는가.
구천동은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구씨(具氏)와 천씨(千氏) 집성촌이라 그리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믿기 어렵다. 중국 元나라 순제가 옥새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무주 사람 유해(劉海)가 찾아 주었다. 그래서 큰 잔치를 베푸니 여기에 <천승지국 구국제후(千乘之國 九國諸侯)>가 회동하여 축하하였기에 붙은 지명이란 설도 있으나 이 역시 믿을 수 없다.
문헌상 구천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명종 7년(1552) 『香積峰(향적봉: 덕유산 정상)기(記)』에선데 여기서는 구천둔(九千屯)이라 되어 있다. 성불공자 구천인(成佛功者 九千人)이 살았으므로 구천인의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이런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설명이다. 이것이 구천동으로 기록된 것은 현종 13년(1672)『유광로산행기(遊匡盧山行記)』에서이다. 명종에서 현종 사이에 우리나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대란을 겪은 바 있다. 게다가 당쟁 또한 끊이지 않아 이런 난세에 몸 보신을 위한 둔세사상(遁世思想)이 판을 치게 된다. 이에 문자 속 든 사람들이 자리를 깔아 준 것이 바로 풍수 도참과 비기류(秘記類) 등속이다.
남사고
남사고(南師古) 같은 사람은 무주를 일러 십승지일(十勝之一)이요 삼풍지지(三豊之地)라 칭하니 많은 사람들이 피란보신의 땅으로 여겨 이곳을 찾게 된 것이고 그로부터 둔(屯)이 동(洞)으로 바뀌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24] 실제로『무주군지』성씨편에 의하면 상당수의 집안이 사화나 전쟁을 피하여 무주로 들어와 중시조(中始祖)가 된 것으로 나와 있다. 십승지지에 관한 지세 개관은 제2권 단양군 영춘면편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이곳은 사방이 꼭꼭 막힌 곳으로 소위 생기루설(生氣漏泄)의 혐의가 없어 난을 피해 일가와 일신의 부지를 꾀하기에는 적절한 터라 할 수는 있다. 『금낭경』이 가르친 대로 <무릇 기가 내뿜어지면 바람이 되는데 이것은 능히 생기를 흩어 버릴 수 있으니 청룡과 백호는 명당 범위 안쪽을 호위함으로써 그 소용됨이 있는 것이요, 혈장을 첩첩이 감싸 안는다 하더라도 좌청룡 우백호가 비어 있거나 허약하고 혹은 앞쪽의 안산(案山) 조산(朝山)이 끊어져 있으면 생기가 회오리바람에 흩어져 버릴 것이다(부희기위풍 능산생기 용호소이위구혈 첩첩중부 좌공우결 전광후절 생기산어표풍: 夫噫氣爲風 能散生氣 龍虎所以衛區穴 疊疊中阜 左空右缺 前曠後折 生氣散於飄風)> 하였는데, 구천동은 그런 위험에서는 벗어난 터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생기가 표풍에 휘날릴 까닭은 없는 땅이다.
24] 삼풍이란 병화나 흉년, 역병 등 소위 삼재가 들지 않는 좋은 삶터를 말함인데 실제로는 충북 괴산의 연풍, 경북 영주의 풍기, 그리고 이곳 무풍을 일컫는 말이다.
이상한 인연이다. 경로당에서 만난 박상운 할아버지(79세)가 바로 비결파로, 나라가 일본에 패망하던 1910년 경상북도 구미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분의 후손이란다. 그의 조부는『정감록』이본(異本)에서 말하는 <덕유무불피난지지(德裕無不避亂之地)>라는 구절에 이끌려 이곳 설천면 삼공리에 터를 잡은 뒤 지금까지 덕유의 정기를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지적한 대로 무주 주계(朱溪)에 살고 있는 고인일사(高人逸士)들일까. 스키를 타기 위해 좋은 승용차를 타고 이곳을 휘젓고 다니는 허여멀건 젊은이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명산의 고사(高士)들. 그 간극은 현상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 깊이 박힌 오늘의 초상일런지도 모른다.
비결파들은 이곳 계곡에도 명당의 칭호를 여럿 붙여 놓았다. 삼공리 갈밭번덕에 있는 비안함로형(飛雁含蘆形)의 터나 금포정이에 있는 금계포난형(金鷄抱卵形)의 터가 그런 예일 것이다. 비안함로 명당을 마을 노인들은 노전면학(蘆田眠鶴)이라 불렀다. 전국의 지관들이 다 모일 정도의 길지였다고 하는데, 글쎄 지금 이곳은 학이 갈밭에 앉아서 졸 수 있을 만큼 한가로운 땅이 아니니 어쩔 것인가.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浮屠)라고 잘못 알려진 매월당 설흔(雪欣: 김시습의 법명은 설잠(雪岑)임)의 부도가 있는 백련사(白蓮寺)에 올라 윤증(尹拯)의『유광로산행기』를 읽는 것은 덕유산으로부터 산 기운의 느낌을 받는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노산은 덕유산의 별명이다.
"평생에 파리한 몸 티끌 세상 싫어 하여/
천석(泉石)을 사랑하니 하늘이 준 병이로다/
오래 전 고요한 산 찾아 떠나고자 한 마음(연래잠적 포리회: 年來岑寂 抱離懷)/
방외에서 가슴 펴고 놀고자 함이었네(원유방외 금기활: 源遊方外 襟期豁)……."
다시 살아가야 하는 티끌 세상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내 마음 답답하여라.
8.정리하는 글
필자가 풍수를 시작한 것이 도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또 공부한 내용이 도선 풍수인 것도 아니다. 그저 남들이 흔히 말하는 풍수를 좀 남다른 이유 때문에 시작하기는 했지만 부끄럽게도 우리 풍수의 시조가 도선이란 것도 모르고 지냈다.『청오경』,『금낭경』,『인자수지(人子須知)』따위의 책들을 풍수의 모든 것인 줄 알고 풍수학인입네 하며 지내 온 사람이다.
그러다가 도선을 알게 되었고 그를 알고부터 술법 풍수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대학을 사직하고 홀가분한 처지가 되고 나서부터는 도선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달까, 여하튼 풍수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들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풍수서에 나오는 이론들까지 단지 허망한 말장난으로 보아 무시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글보다 깨달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도선 풍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땅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대가 필요하다. 땅의 상대는 사람이다. 사람과 땅의 관계 속에서만 사랑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선 풍수에서는 땅 못지않게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을 모르고 땅을 볼 수는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훌륭한 것, 좋은 것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다.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면 나 아니라도 사랑해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지고지선한 사랑이란 다른 것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 문제가 있는 것, 좋지 않은 것을 향할 때 의미가 있다. 도선 풍수에서의 땅 사랑은 그런 근본적인 인식 속에서 출발한다. 명당이니 승지니 발복의 길지니 하는 것은 도선 풍수의 본질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개념들이다.
결함이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이 바로 도선 풍수가 가고자 하는 목표이다. 그것이 바로 비보 풍수이기도 하다. 도선 풍수는 땅을 어머니와 일치시킨다. 어머니인 땅이다. 그 어머니의 품안이 우리의 삶터가 된다. 만약 어머니의 품안이 유정하며 전혀 문제가 없는 자모의 표본 같은 경우라면 어느 자식이 효도를 마다할 것인가. 그것은 효도도 아니고 당연한 되갚음의 의미밖에는 안 될지도 모른다.
좋은 어머니는 그 자체로서 완벽 지향적이고 따라서 이상형이다. 현실에 완벽이라든가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어머니라도 얼마만큼의 문제는 지니고 있는 법이다. 피곤하실 수도 있고 병에 걸리셨을 수도 있으며 화가 나 계실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어머니의 품안도 생각해야 한다. 도선 풍수는 바로 그런 완벽하지 못한 어머니, 우리 국토를 사랑하자는 땅에 관한 지혜이다.
어머니의 피곤을 풀어 드리고 병을 고쳐 드리고 기분을 온화하게 할 수 있는 방편을 찾아야 어머니에 대한 참된 사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어머니에게야 누가 좋게 대하지 못할 일이 있으랴. 바로 그 고쳐 드리고 풀어 드리는 일이 도선 풍수의 비보책이다.
도선과 관련된 절을 답사하며 절실히 깨달은 것은 도선은 정말 어머니인 국토를 사랑했다는 것이었다. 바로 곁에 좋은 땅을 두고도 도선은 그 터를 차지하지 않았다. 문제 있는 땅을 선택하여 거기에 절을 세웠던 것이다. 그 정도의 도안(道眼)이 몰라서 그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 국토의 온갖 병통을 그의 풍수로써 고치고자 했다는 것을 현장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사찰들은 결코 명당들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도선과 연기(緣起)된 사찰들의 거의 다가 폐찰이 되었겠는가.
오늘의 이기적 풍수는 엄밀히 말하자면 풍수가 아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백골에서까지 무엇인가를 얻어내겠다는 마음가짐이 어찌 사랑일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백수십 년 전에 실학자들이 표현한 바 그대로 나라와 겨레 망칠 지점술(地占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도선 풍수의 본질은 땅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그 방법론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고침[치료(治療)]의 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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