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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유고(土亭遺稿)
서 문
우리 조선조에서는 명현과 큰 선비들이 전후로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 인격이 아주 높고 기걸스런 분들이 있었다. 김매월당(김시습:金時習), 정북창(정렴:鄭磏) 같은 제현들은 어떤 규범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처세한 분들인데, 또한 한 둘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토정 이선생은 더욱 탁월하고 고매하여 도저히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다. 선생은 자품이 매우 높고 기상이 특이하여 학문에 있어 어느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으되, 신통력과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무릇 천문․지리․의약․점술․음악․수학․관상․비결에 이르기까지 밝게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효도․우애․충직․신의와 같은 선을 즐거워하고 의리를 좋아함이 천품에서 우러나오셨다.
조 중봉(조헌:趙憲)이 일찍이 말하기를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적고 지극한 행실로서 세상에 법이 되는 것은 율곡(이이:李珥)․우계(성혼:成渾) 두 선생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 몇가지 말만 보더라도 가히 토정선생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선생을 보는 사람들이 다만 율곡이 기화(寄花):기이하게 생긴 꽃)‧이초(異草:특이하게 생긴 풀)에 비유한 것만으로써 선생에 대하여 이르기를, 높다면 높고, 기이하다면 기이하지만 알맞게 쓸 수 있는 인재가 아니라고 의심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이른바 기화와 이초라고 평한 것은 다만 겉으로 드러난 형적만을 논했을 뿐이다. 제문에 있어서는 “충직과 신의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게도 통했으며, 밖으로 해박하고 안으로 밝으며 세속풍진을 가볍게 여겼고, 중대한 일을 만나도 거침없이 처리하여 마치 소반 위에서 구슬 굴리듯이 하였으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비록 적어도 덕을 쌓으면 반드시 발휘되는 법이다.”고 하였다. 이 어찌 실지를 묘사한 말씀이 아닐 수 있겠는가?
또 선생께서 교육하시던 박 사암(박순, 朴淳)․고 제봉(고경명, 高敬命)․율곡(이이, 李珥)․우계(성혼, 成渾)․윤 월정(윤근수, 尹根壽)과 우리 송강(정철, 鄭澈) 선조 같은 분들은 다 일대 명류들이시며, 교육의 성취에 있어서는 이 명곡(이산보, 李山甫) 그리고 조 중봉(조헌, 趙憲)․서 치무(徐致武)․박 춘무(朴春茂)․서 기(徐起․호 孤靑)와 같은 여러 사람들은 그 취미가 서로 맞고 좋아함이 아주 돈독하여 마치 지초와 난초 사이와 다름이 없었고 오직 소인배의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은 보기를 독사와 전갈 같이 여기셨고 버리기를 더러운 흙 같이 하셨다.
모든 일에 이와 같이 좋아하고 싫어함이 반듯하여 모두가 충신(忠信)과 도의(道義) 속에서 우러 나온 것이 아님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세상을 등지고 마음을 사물 밖에다 둔 삶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사람을 비교할 때 반드시 비슷한 사람에게 비유하라.”라고 했듯이 나로서 토정선생을 본다면 혹시 소 요부(邵雍, 시호 康節) 같은 분이라고나 할까?
정 명도(程顥, 시호 明道)가 소요부의 도학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뜻은 호탕하고 힘은 웅대하여 넓게 걷고 멀리 추진하여 창공을 능가하고 고지에 도달하며 곡진히 통창하고 두루 통달하였다.”고 했고, 또 말하기를 “소요부는 크고도 넓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소요부는 다만 무례하고 불공한 면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선생께서 일생동안 수용한 바는 바로 요부가 법문(法門)을 벗어나 세상을 얕보면서 해학으로 넘기는 격이니, 그 ‘요사스런 별이 상서로운 별이 된다.’는 것과 ‘게으른 종이 거짓 병타령 한다.’는 말들은 사실상 ‘생강이 나무 위에 난다’고 한 것과 ‘모든 것을 잊고 지팡이를 세운다.’는 등의 말과 같은 격식이라고 하겠다.
다만 소요부는 그 형적이 조금 드러났고 선생은 많이 드러났으니 이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만일 전후의 두 분 다 출세하여 세상에 수용된다면 비록 규모와 법도에 약간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어찌 한 세상을 경영하고 구제하는데 넉넉하지 않겠는가?
사 상채(謝上蔡, 名은 良佐)가 말하기를 “소요부는 다만 호걸지재로서 풍진시절에서는 문득 패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토정선생에 대하여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선생께서 평소에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집에 보존된 문적이 겨우 몇 편에 불과하니 이것으로는 어찌 선생에 대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몇 편중에 도잠(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차운한 것과 「과욕설」 (욕심을 적게 하라는 글과 또 「아포봉사」 (아산 군수, 포천 군수로 있을 때 올린 상소문) 등 몇 편에서 가히 그분의 존심양성(存心養性)과 시행조처의 단서를 볼 수 있으니, 고기 한첨의 맛으로 족히 한 솥의 맛을 알 수도 있는 법이니, 또한 어찌 반드시 많아야 맛이겠는가?
이제 선생의 후손인 계림대윤(鷄林大尹) 정익(禎翊)이 여러 종형제들과 부사(府使) 완(浣)형제와 상의하여 토정집을 간행하고 나에게 서문을 청하니 내 비록 감당할 수 없으나, 어찌 끝까지 사양할 수 있으랴? 다만 평소에 선배들이 논한 것을 기술하여 요청에 답하였다.
숭정후 경자(1720)년 중춘 하순에 후학 오천(烏川) 정호(鄭湖)는 삼가 서문을 짓다.
목 차
시 ․
차 송운장 익필(구봉)의 시를 차운하다
사(辭) ․
차 도정절(도연명) 귀거래사를 차운하다
설(說) ․
대인설(대인에 대하여 쓴 글)
피지음설(명성을 피하는 글)
과욕설(욕심을 적게 하는 글)
소(疏) ․
포천 현감때의 상소
아산 현감때의 상소
유사(遺事) 빠진 것을 기록함
부록
서원 건축을 알리는 통문
춘 추 제향 축문
서원 사액 받은 제문
제문
묘갈명
시장(諡狀)
시
송 운장(운장은 字, 호는 구봉) 익필 시를 차운하다.
지난번에 운장을 처음 만난 것은
실로 나의 다행한 일이요.
옛것을 물깃는데 뜻이 있어,
그대에게 긴 끈 빌리려 했지.
천지가 내 마음속에 있고
공 맹도 결코 멀지 않네.
대패와 줄은 내가 잡을 터이니
모래와 돌로써 그대가 갈게나.
혹시라도 사심을 먹으면
가까이 있던 것도 도리어 멀이지리(공의 처음 이름은 지운이다)
사(辭)
도정절(연명) 귀거래사를 차운하다.
돌아오세, 편안한 집 넓고 넓은데 어찌 돌아오지 않을고.
당초에 마음이 형체의 노예가 되지 않았으니
다시 무얼 기뻐하고 슬퍼하라!
남으로 오는 내 길 누가 막으며
북으로 가는 내 길 뉘라서 따를고.
귀로 칭찬과 헐뜯음 듣지 않고 입으로 옳고 그름 말하지 않네.
누더기 옷도 따뜻한 줄 아는데 어찌 비단옷 부러우랴?
탄탄대로를 따라가니 해가 밝게 비추어 희미하지 않구나!
저 들녘을 바라보니 새가 날고 짐승이 뛰노네.
깊은 산으로 집을 삼고 계곡으로 대문을 삼네.
한가로히 드나드니 본래의 천성이 오히려 보존되네.
배고프면 나무에서 과일 따먹고 목마르면 우물물 마시네.
사냥하여 새를 잡았어도 간여하지 않노니 1]
조수 가운데 원헌과 안회로다.2]
어찌 가장 영특하다는 사람들이
솥에 넣어 끊여짐을 편안히 어길고.
내가 내 몸을 속이지 않는데 누가 나를 귀신의 소굴로 부를고.
온 몸이 쾌적할 수 있는데 여자들이 엿볼까 부끄럽네.
천지의 넓고 먼 것을 살펴보니 흰구름 오가는 것이 우습구나!
소부는 어찌 요임금을 피했으며, 관중은 어찌 환공을 섬겼는고.
집으로 돌아올 적에 큰 길 한 가운데로 밟으며 거침없이 왔네.
가난해도 진중자(陳仲子)3] 같지 않고 부자래도 염구(冉求)4] 가지 않네.
좋은 술과 좋은 안주는 없지만 가히 즐기며 시름 잊을 수 있네.
보아도 오곡을 분간하지 못하니
밭이랑에 일하기 어렵네.
넓고 넓은 창해에 작디 작은 배 한 척 띄워 놓고.
구름 사이로 중화(中華)를 가리키고 햇볕 비춘 청구(靑口)를 바라보네.
내 마음에 좋은 것 따라 낙천적으로 내처서 팔도를 주류할 걸세.
폭풍과 파도 장차 일 것을 보고 옛동산에 돌아와 쉴 때일세.
할 수 없구나 태평세월 묻자하니 어느 땐고.
빠른 세월은 나를 위해 머물지 않는데,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을 누가 능했던고?
도연명의 거문고는 본래 줄이 없으니 누가 종자기5]가 된단 말인가?
단전(丹田:마음)에다가 피와 기장 심고 부지런히 김 매줘야겠네
글은 요사(요임금, 순임금)의 글을 공부하고 시는 자희(탕왕, 무왕)의 시를 읊어서
이런 마음으로 마음 먹으면 오래도록 병들지 않을 것이니, 귀신에 질문을 해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네.
1]주역(周易) 항괘(恒卦) 구사효(九四爻)에 ‘전무금(田无禽)’이과하여 ‘사냥하여도 새를 잡지 못한다.’고 하였는 바, 이는 ‘뛰어난 인물이라도 합당한 지위를 얻지 못한다면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공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을 비유로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본시의 ‘사냥하여 새를 잡았어도 간여하지 않노니’는 ‘공을 세우고도 이를 내세우지 않고 초연하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또 한편으로는 ‘밭에 새가 있음이여, 간여하지 않는도다.’로 풀이하여 세속일에 초탈하여 살아갔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2]원헌(原憲)과 안회(顔回)는 모두 공자의 제자이며 안빅낙도(安貧樂道)를 실천함으로써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다.
3]진중자(陳仲子) :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이며, 이름은 자종(子綜)이다. 형이 제나라의 경(卿)이 되어 집안이 부유하였으나, 의롭지 않다고 하며 집을 떠나 초나라 오능(敖陵)에 거주하며 스스로 오능중자(敖陵仲子)라 칭했다. 궁해도 구차하게 남에게 구하지 않고 의롭지 않은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초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재상을 삼고자 하였으나, 피하에 숨어 살았다.
4]염구(冉求) :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공자의 제자, 정사(政事)에 재능이 있다고 인정되어 당시 노나라의 경(卿)으로서 실전을 쥐고 있던 계씨(季氏)에게 벼슬하여 재(宰)가 되었다. 기대와 달리 오히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 계씨의 부를 더욱 늘례주는 시책을 폈으므로 공자의 질책을 받았다.
5]종자기(鐘子期) :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 친구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면, 그 음률을 듣고 곧 백아의 마음까지를 알아 맞추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세상에 다시는 내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거문고줄을 끊어버리고서 종신토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후세에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한 벗’을 ‘지음(知音)’이라고 하는 바, 곧 본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설(設)
대인설(대인에 대하여 쓴 글)
사람이 네 가지 소원이 있으니 안으로는 신령하며 강하기를 원하고, 밖으로는 부귀를 원하는데, 귀한 것은 벼슬을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부자는 욕심부리지 않는 것보다 부자가 없으며, 강한 것은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이 없고, 신령함을 지혜로운체 않는 것보다 더 신령함이 없다.
그런데 지혜롭지도 아니하며 신령하지 못한 것은 어둡고 어리석은 사람이 그럴 수 있고, 다투지 않고 강하지도 못한 것은 나약한 사람이 그럴 수 있고, 욕심도 안 부리고 부자도 안 되는 것은 빈궁한 사람이 그럴 수 있고, 벼슬도 않고 귀하지도 않은 것은 미천한 사람이 그럴 수 있으니, 지혜롭지 않는 것 같으면서 능히 신령하고, 다투지도 않으면서 능히 강하고, 욕심도 안 부리면서 능히 부자되고, 벼슬도 안하면서 능히 귀한 것은 오직 대인이라야 가능하다.
피지음설(명성을 피하는 글)
선비가 출세하려는 것은 명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인데 말세에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재앙을 불러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물은 애당초 흉물이 아니나 국가의 재앙이 재물로 인하여 많이 나오고, 권세가 당초에는 흉물이 아니라 대부(고관대작)의 재앙은 권세에서 많이 나오고, 보석을 지니는 것은 당초 흉물이 아니지만 서민의 재앙은 보석을 탐하는 데서 많이 나오게 되고,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당초에는 흉물이 아닌데 어진 선비의 재앙이 이름이 알려지는 데에서 많이 나오게 되니 선맹(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 조순(趙循)의 시호)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정영이 왜 재앙을 당했으며,6] 연단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들 형경이 왜 재앙을 당했고,7] 소하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한신이 왜 재앙을 당했으며, 8] 서서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면 제갈량이 왜 재앙을 당했을까? 9]
이름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고 재앙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러고도 곤욕을 당하지 않는 경우는 듣지 못하였다. 이러므로 사람들에게 이름나는 것을 원하는 심리가 있지만 어진 선비는 오히려 그런 것을 피하려할 뿐이니 서로 어울려도 재앙이 없는 것은 오직 산수 사이에서 알아주는 것이며, 전야사이에서 알아주는 것이로다.
6]정영은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이다. 진의 대부인 조삭(趙朔)과 절친하였으며 조삭의 아버지인 조순(趙盾, 시호 선맹 宣孟)에게서도 후대를 받았다. 진의 대부인 도안고(屠岸賈)가 조삭을 공격하여 죽이고 그 일족까지 멸즉시킬 때 마침 조삭의 처는 유복자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그후 남자를 낳았다. 이에 조삭의 빈객이었던 공손저구(公孫杵구)와 정영은 서로 약속하여 저구는 타인의 아이를 안고 산중에 숨고, 정영은 그 사실을 도안고에게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이에 도안고는 숨어 있는 곳을 공격하여 저구와 아이를 죽였고, 정영은 조씨의 유복자를 산중에 숨겨 무사히 키웠다. 뒷날에 진의 경공은 조씨의 후손(유복자)을 찾아 후사를 이어가게 하고 (이름을 조무 趙武), 조무․정영과 함께 도안고를 쳐서 멸족시켰다. 이에 정영은 자신의 역할을 다 마쳤으니 이제 후의를 베풀어 주었던 조순(선맹)과 다른 아이를 조씨의 유복자로 위장시키고서 기꺼히 함께 죽어간 공손저구를 지하에서 만나 볼 때라고 말하고 마침내 자살하였다.
7]형경(荊卿)은 전국시대 자객인 위나라의 형가(荊軻)를 말함. 그는 연(燕)의 태자 단(丹)을 위해서 진왕(秦王)을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진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8]한신은 한(漢) 회음인(淮陰人)으로서 초년에 매우 빈궁하였다. 처음에 항량과 항우를 따랐으나 인정받지 못하자.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찾아갔다. 유방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곧 승상 소하(소何)의 천거로 대장(大將)이 되어 항우의 군사를 무찔렀다. 그리하여 한(漢)이 천하를 평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으며, 이에 제왕(齊王)과 초왕(楚王)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도리어 위험시되는 인물로 인식되었으며, 결국 모반하려 한다는 죄명을 쓰고 한고조의 비 여후(呂后)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9]서서는 삼국시대 촉한(蜀漢)사람. 처음 이름은 복(福)이다. 일찍이 형주(刑州)에 갔다가 제갈량(諸葛亮)을 만나 벗으로서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그는 제갈량의 비범함을 알고 유비(昭烈帝)에게 적극 천거하여, 소열제로 하여금 삼고초려를 통해 중용토록 하였다.
소(疏)
이포천시상소(포천에 부임한 때의 상소)
엎드려 아뢰건데 신(臣)은 바닷가의 한 보잘것 없는 백성입니다. 나이가 거의 60에 가까운데 재주도 없고 덕도 없어 스스로 평생을 돌이켜 볼 때 한가지도 취할만 한 것이 없는데, 유사가 헛된 이름을 알리어 주상께서 분에 넘치는 은혜를 내리시어 포천의 경기 일부 지역을 맡겨 주시니, 신이 명을 듣고 조심스럽고 송구하여 담밑에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번연히 생각을 돌리고 스스로 말하기를 성상(임금을 지칭)의 명을 어길 수 없고 좋은 때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제가 비록 노둔하지만 신명을 다하여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과 같은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여 하였더니, 뜻밖에 습증(습으로 인한 병세)이 재발되어 수족이 무력하고 온 몸이 걸어다니려 해도 지팡이가 없으면 넘어질 지경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견마(犬馬)와 같은 정성이나마 만에 하나라도 발휘할 수 없으므로 한 고을의 폐단과 나라를 흥왕케 할 수 있는 방도를 이 상소에 담아 올리는 바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 조금 굽어 살피시옵소서. 포천 고을의 형편을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마치 어미 없어 추위에 떨며 얻어먹는 아이가 오장에 병이 들어 온 몸이 파리하고 기혈이 탈진되어 피부마저 말라붙은 상태로 아침에 죽을는지 저녁에 죽을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며, 비록 황제와 기백 10] 같은 신의(神醫)라도 온갖 생각과 지혜를 다하여 만방으로 의술을 다한 연후에야, 비로서 기사회생 시킬 수 있는 방도를 말할 수 있는 처지입니다.
하물며 지금 죄와 같이 용렬한 사람으론 비록 이를 구하려 해도 참으로 어떻게 손을 쓸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차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에 감히 상, 중, 하 세가지 계책을 말씀드립니다.
제일 먼저 말씀 드릴 것은 재물과 곡식의 부족은 당장 목전의 크나큰 걱정거리로서 뒤에서 다 말씀드리자면 도중에 어려운 고을이 한 두 곳이 아니지만 타읍은 재곡(재물과 곡식)이 비록 적다해도 백성의 수효가 또한 적으므로 그 굶주림은 오히려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유독 포천만은 장정은 겨우 수백명에 불과한데 공사천(관아와 사가의 노비) 과 남녀노약을 합하면 그 수효가 만명에 가깝습니다. 토질조차 척박하여 애써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하여, 공채와 사채를 갚고 나면 곳간이 다 비어 채식으로 연명하니, 풍년이 들어도 배가 고플 지경인데 하물며 흉년에는 어떻겠습니까?
반드시 이런 것을 구제하려면 수만석이 아니면 결코 넉넉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저장되어 있는 곡식이 몇 천석에 불과하고 잘 여물지 못한 잡곡까지 포함해도 겨우 오천석 밖에 않되는데, 백성들이 그 중에서 관가에 조세를 내고 종자도 남기고 세금도 내면, 그 나머지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천석도 채 않됩니다. 천석의 곡식으로는 만인이 일년 양식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물며 관가에 조세를 내고 난 후에 뿔뿔이 흩어져 유리포박하여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니니 곧 원래 곡식의 수효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포천현은 큰 길가라서 변방의 장수들이 지나는 경로요, 야인들이 왕래하는 길목이라, 그로 인한 경비가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며 소모되는 비용을 헤아릴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년에 비용을 삭감하는 것이 백여석에 이르고 마니 십년 후에는 장차 천석을 삭감한다해도 해가 오래 되면 될수록 곡식은 더욱 줄어서 훗날에 어떻게 포천고을을 이끌어 나아갈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창고가 부실하여 그 부족한 곡식마져 부패될 염려가 있고 군사용 기구도 모두 허술하고 낡아서 위급할 때 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포천고을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이러한 궁민을 거느리고는 정사를 닦기도 어려운데 항차 관사의 퇴락과 옥사(獄舍)의 무너져 감을 어느 겨를에 돌보겠습니까? 그렇다면 몇십년 내로 포천은 반드시 텅빈 고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의논하기를 “조정에 요청하여 서울 창고의 쌀을 풀고 풍부한 고을의 곡식을 옮기면 이것을 구제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라고 하지만 신의 뜻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번에 서울과 지방의 곡식을 포천으로 옮긴 것이 5~6천석이 넘는데도 백성들의 기한과 곤궁이 예전과 다름이 없으니, 가령 지금 또 종전의 수효대로 시행한다면 시들고 목마름을 소생시키고 해갈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창고의 곡식과 풍부한 고을의 곡식은 그 수효가 한정이 있고 8도의 궁핍한 고을의 요청은 무궁하여, 창고를 풀어 곡식을 대주는 것을 만약 자주자주하면, 아마도 가히 계속될 수 있는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바다같이 깊고 넓어도 밑빠진 잔을 채울 수 없다 하였는데 지금 국가의 저장량은 바다에 미치지 못하고, 여러 고을의 비용은 밑 빠진 잔보다 많으니 신은 실로 그런 것을 걱정하는 바입니다.
궁핍한 고을을 구하기 위하여 능률적으로 잘 조처하지 못하고 다만 곡식을 옮기는 것으로써 좋은 계책을 삼으면 필연적으로 곡식이 부족하여 종국에는 서울의 창고와 부강한 고을마저 병들고 말 것입니다. 옛 군자도 혹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휼한 경우가 있었으나 이것은 다만 불행히도 흉년이나 어떤 특수한 경우에 일시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지, 어찌 이러한 방법으로써 계속할 방도로 삼겠습니까?
만일 부득이 하여 기필코 구제할 방법을 찾는다면 제가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신은 듣건데 제왕의 창고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인심이란 창고로서 도덕을 저장하는 창고입니다. 그 크기가 한이 없어 만물이 갖추어져 있으니 능히 이것을 풀어 준다면 더할 바 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전하 한 분이 덕을 쌓아 표준을 세워 먼저 마음의 창고를 열어 서민에게 베풀어 주시면, 서민 또한 각자 그런 마음의 창고를 열어 임금께 바치고 임금은 국가와 종모사직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계절 일기가 고르고 풍년들어 태평하게 되어 우리 백성들의 재원이 남풍과 더불어 쌓이어 곡식이 많아서 지극히 풍족해질 것입니다.
대저 이와 같이 되면 어찌 한 고을 백성만 풍족하겠습니까? 온 나라 백성이 모두 배불리 먹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앞을 다투어 화봉(華封:壽福多男을 뜻함)의 축하를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전 조(이조(吏曹)의 별칭)는 인재를 저장하는 창고입니다. 인재가 모이면 모든 냇물이 바다로 모여드는 것과 같아 그 수량을 이루 셀 수 없을만큼 많은 것이니 이것을 풀어준다면 또한 어찌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임금이 명석하면 측근의 신하들도 훌륭하여 모든 일이 편안하게 이루어진다 하니, 크게는 후직11]과 같은 정책을 쓰면 모든 백성에 굶주림에 이르지 않게 될 것이고, 적게는 장감12]의 청렴함을 본 받으면 보리이삭에 두 가지가 돋아나는 상서로운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우주에 맑은 바람이 일고 탐욕의 샘이 저절로 말라 온 나라에 단비가 내려 원한이 쌓인 민초가 자연히 소생하게 될 것이니, 대저 이와 같이 하면 어찌 유독 한 고을 백성만 구제되는 것이리요! 온 나라 백성이 모두 지극한 정치에 즐거워 노래하고 춤추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중간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셋째로, 육지와 바다는 모든 용도를 갖추고 있는 보고로서 이것은 형체를 가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국가를 영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능히 이것을 계발하면 그 이익의 혜택이 사람에 미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곡식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진실로 민생이 살아가는 근본이며, 금,은도 녹여쓰고 주옥도 캐내어 쓰고 물고기도 잡고 소금도 구워 쓰는 것입니다.
사적으로 운영하며 이익을 좋아하고 탐도 내고 인색한 것은 소인(서민)이 하는 바로서 군자(지도층)가 좋게 여기지 않는 바이나, 당연히 취득할 것은 취하여 소중한 인명을 구휼하는 것이 또한 성인의 권도이니, 이것이 그래도 하책은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 가지 대책을 버리면 어떻게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아! 백대의 제왕들이 누구인들 이 세 가지 보고를 열어 백성을 여유롭게 하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도덕의 창고를 열려면 형체와 기질의 사심을 닫아야 하고, 인재 창고의 문을 열려면 사악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멀리해야 하며, 백가지 용도 창고를 열려면 시기하는 무리를 멀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학문에 잠심하시어 대체를 따르시고 천지의 덕과 같이 인자하시고 살인을 좋아하지 않으시어 즉위하신 후 단 한 사람도 형벌로 죽이지 않으시어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덕택이 민심에 흡족하니, 형기(形氣)의 사심을 다 떨쳐 버리지 못하심은 그럴 수 있거니와 도덕의 창고를 능히 여시지 못함은 어째서입니까? 이것이 신이 납득할 수 없는 것 중의 한 가지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부터 조정이 청명하여 사람들이 다 목을 길게 하고 바라보며 말하기를 직‧설‧고요13] 와 같은 현신들이 장차 각각 공적을 쌓아 태평정치를 이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사악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능히 물리치지 못함을 당연한 것 같이하여 인재의 보고를 능히 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가 안되는 것 중 두 번째의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에 백성 보기를 딱하게 여기시어, 공정한 정치를 크게 펼치시어 산림과 천택(川澤)의 혜택을 백성과 같이 누리시면서 시기하는 무리를 물리치지 못함을 당연한 것 같이하여 백가지 용도의 보고를 크게 열지 못하는 것은 무슨 영문입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의 것입니다.
도덕의 보고를 열면 자신은 비록 가난하고져하나 부자되지 않을 수 없으니 옛 사람이 이미 실행한 자취를 보면요 순이 살던 집은 초가집이요, 입던 곳은 짧고 소박한 옷이요, 먹던 국은 아욱이나 명아주요, 그릇은 토기나 대그릇입니다. 그렇다면 요순은 지극히 빈궁한 필부와 같은데도 마침내 부귀와 명예가 사해 사방에 떨쳤으며, 상하에 다다랐고 수복을 누리고 자손을 보전하여 백성들이 지금까지 존중하고 친애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요순은 가히 부귀의 극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도덕의 보고의 문이 닫히면 자신은 비록 부귀를 누리고저 하나 마침내 빈곤을 면치 못하니 고인에게서 이미 그런 행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걸(하(夏)의 폭군)․주(은(殷)의 폭군)가 거처하던 곳은 옥돌로 지은 궁궐이요, 입던 옷은 보옥으로 만든 옷이며, 먹던 음식은 산해진미를 다 갖추었으며, 담았던 그릇은 옥으로 만든 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걸․주는 마땅히 지극히 부귀한 천자가 되었어야 할 것 같은데, 끝내는 천하에 가장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전락하여, 제 한 몸 숨길 곳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필부의 가장 빈천한 자를 꾸짖을 때 “너는 걸․주 같은 놈이다”고 하면 발끈 성을 내며 비교되어짐을 수치스럽게 여기니 걸․주는 가히 빈천의 극치에 이르렀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는 도덕의 보고를 장차 열 것입니까? 닫을 것입니까? 어찌 신성명철한 임금이 위에 있으면서 도덕의 보고를 끝내 열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생각컨대, 보고의 문을 이미 활짝 열었는데 신이 멀리 있어서 미처 듣고 알지 못한 것입니까? 혹자는 의론하기를 인재의 보고를 열지 않는 것은 다만 창고에 인재가 없어진지 이미 오래되었고 지금 저장되어 있는 것은 다 쓸모없는 인재로서 비록 풀어쓴다 하더라도 족히 일대에 부를 이룰만한 인재가 없다고 하는 듯합니다. 만 신의 뜻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고에 어찌 인재가 없을 때가 있겠습니까? 일월성신이 하늘에 빛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고, 초목 산천도 예나 지금이 다름이 없는데, 인재만이 어찌 유독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있으면 반드시 성신이 있고, 땅이 있으면 반드시 초목이 있듯이,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인재가 있는 법, 충성과 신의를 지키는 사람은 조그만한 고을에서 또한 얻지 못할 이치가 없는데, 하물며 조정은 많은 철인들이 모이는 곳으로서 그 중에서 선택하면 군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많이 있는데도 들어 알 수 없는 것은 아마도 주머니 속에 송곳이 그 끝을 너무 깊이 감춰 그 끝을 볼 수 없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인재를 등용하면서도 그를 가벼히 여겨서 그 인재를 쓸모없는 인재로 만든 것입니다. 이미 등용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면 가히 그 인재를 가벼히 여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매는 꿩을 사냥하게 하고 닭은 새벽을 알리게 하고 말은 수레를 끌게 하고 고양이는 쥐를 잡게 하면 이 네 가지 동물이 다 가히 쓸 수 있는 기특한 재주를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해동청」14]이라는 매는 천하에 제일 좋은 매이지만 새벽을 알리라하면 늙은 닭만 못할 것이고, 「한혈구」15]라는 말은 천하에 제일 좋은 말이지만 쥐를 잡으라하면 늙은 고양이만도 못할 것인데 하물며 닭이 사냥을 할 것이며 고양이가 수레를 끌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와 같이 한다면 이 네 동물은 천하에서 버림받아야 할 동물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몸을 두고 말하더라도 보는 것은 눈의 역할이요, 듣는 것은 귀의 역할이니, 만일 그 역할을 가벼히 여기지 않고 활용한다면 귀도 눈도 진실로 일신의 기특한 역할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루」16]의 눈은 천하에 제일 밝지만 그런 눈으로도 듣는 역할을 맡기면 능치못할 것이고 「사광」17]의 귀는 천하에 제일 밝지만 만일 듣는 것을 맡기면 능치못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수족과 백체의 쓰임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할 수 없다” 하였으니 상․중의 두 가지 방책은 높은 벼슬하는 사람이 논할 문제여서 신이 반드시 그 문제를 끝까지 말씀드리게 되면, 제 위치에 벗어나는 죄를 범할 우려가 많기 때문에 우선 이 문제는 불언에 부치고, 최하책의 현․읍에 절실한 것부더 들어 아뢰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해당 관서에 명령하여 실행하시면 실로 포천에 크나큰 다행이 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 여염집 여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나이는 약 40세 가량 돼 보였습니다. 대문 밖에 앉아 있는데 아주 참담한 기색이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집에 척박한 밭이 조금 있는데 지난 해에 결실이 안 되어 식량이 떨어진지 오래라 차마 남편이 굶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들나물을 끓여 먹였는데, 남편이 억지로 두어 숟갈을 삼키고 구역질을 하며 먹지 않고 말하기를 도저히 더는 삼킬 수가 없다 하였고, 이와 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십여일 만에 남편이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하면서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오열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안정을 찾아 다시 말하기를, “저도 기혈이 다 마를때로 말라 붙어 세 살짜리 아이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인데도 젖이 나오지 않아 먹이지 못한지 오래입니다. 단옷날 한 밤에 아이가 수족을 떠는 모습이 한겨울 추위에 떠는 형상과 같은 내가 즉시 놀라 일어나 손으로 입에다 시험해보니 숨이 이미 끊어졌지만 방으로 달려가 항아리 밑을 쓸어 싸래기 몇 톨을 급히 씹어 물에 타서 입에 주입하니 잠시 후에 숨이 다시 통하게 되었으나 차후에 과연 몇일이나 더 버티고 살는지 알 수 없습니다.”하고 또 오열하여 그 말을 마치려해도 능히 끝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과 그 기색을 듣고 보자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쏟아지는 것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것은 한 여자의 사정일 뿐, 흉년이 드는 해는 온 고을 사람이 다 구렁텅이에 빠질 지경인데 다시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진심으로 굶주림을 구하고져 한다면 왕의 창고에 있는 제물도 오히려 아깝지 않을 터인데, 산이나 들에 묻혀 있는 은이 무엇이 아까워 채취를 금하여 주조를 할 수 없게 하며, 구릉이나 계곡에 매장되어 있는 옥이 무엇이 아까워 그것을 채취할 수 없게 금하며, 바닷속의 무궁한 물고기도 무엇이 아까워 그것을 금하여 잡지 못하게 하며, 바닷물 속의 무궁무진한 소금도 무엇이 아까워 그것을 금하여 소금을 못 굽게 하는지, 모리배가 사사로 채취하는 것도 금지하는 것이 옳지 않을 판인데, 하물며 현과 읍에서 생산하는 것은 실로 만민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니만큼 참으로 금지함이 옳지 않습니다.
모든 물질의 생산은 오직 본관만이 채취하여 사용할 수 있고 타관은 항상 금지하여 채취할 수 없으니 또한 잘못이 아닌가요? 비록 타도 타관이라 하더라도 왕의 영토가 아닌 것이 없고 더욱이 포천은 바다가 없는데 해물을 다른 곳에서 취득하는 것을 어찌 불가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듣고 본 곳이 있으니 시험삼아 은을 주조하고 옥을 채취하여 사용해 보고 만약 공력이 많이 드는데 비해 소득이 많지 않으면 접어두어 하지 말고, 만약 소득이 많아서 백성을 구하는데 쓰임이 될 수 있으면 그 일의 전말을 기록하여 상부에 알리겠습니다. 은이나 옥같은 것은 미리 그 어떠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거니와, 물고기를 잡는 것은 전라도 만경현에 갯벌이 있는데 이름은 양초뻘이라 합니다. 공․사 간에 소속된 곳이 없으니 만약 이것을 포천에 소속시키면 물고기를 잡아 곡식을 무역하여 수년내에 가히 수 천석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금은 황해도 풍천에 염전이 있는데 이름을 초도라하고 공․사간에 소속된 바 없으니, 만약 이것을 포천에 소속시키면 소금을 구어 곡식을 무역하면 수 년내에 또한 가히 수 천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포천 창고에 저장되어 백성을 구제하는데 쓰이고 관공서 비용에 쓰면서도 원곡의 회계가 영원히 한 섬도 감소되지 않으면 곡식이 점점 줄어드는 걱정은 없고, 오래도록 항상 풍족한 즐거움만 있을 것이며, 항차 잘 요령있게 조회하면 수 만석의 자산을 이루어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니, 포천이 타일에 국가의 큰 방패가 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으며, 또한 포천이 이미 소생하여 회복될 수 있으면 양초뻘의 어장과 초도의 염전을 또 다른 궁핍한 고을에 넘겨주어 모두 포천과 같이 하면 이것이 널리 베풀어 민중을 구제하는 바에 일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혹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의리를 말할 뿐 이해는 말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감히 재리의 일을 임금의 앞에서 아뢴단 말인가?”라고 하지만, 잔인하도다! 혹인의 말이여, 손님이 막 베푼 연회자리에서 의관이 삐뚤어진채 자리를 옮겨다니며 술을 마시면 무례함을 책하여도 좋지만, 어린 아이가 엉금엉금 기어 우물속에 빠져들 지경이면 마음이 절로 깜짝 놀라 갓을 바로하고 신을 신을 사이도 없이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급히 달려가 구할 판인데, 어느 겨를에 손의 용모가 불공스럽고 발의 용모가 진중하지 못함을 책하겠습니까? 하물며 의리와 이욕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만일 흉인(악인)의 경우라면 소위 예법이라는 것도 다 이욕이 될 것이니 예전에 왕망 18]이 육경을 외웠으며 왕안석이 주나라 제도를 배웠지만 무슨 의리가 있었습니까? 만약 길인(선인)의 경우라면 이른바 재리(財利)라는 것도 다 덕과 의리가 되니, 예전에 자사 19] 가 먼저 이해를 말했고, 주자 20]가 곡식의 출납을 힘썼지만 무슨 이욕의 폐단이 있었습니까? 혹인의 망언이 백성구제의 묘책을 저해하려 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그를 싫어할 것입니다.
여상 21]과 교격 22] 은 다 성인의 무리로서도 고기잡는 법과 소금 굽는 이로움을 통달하였는데 더구나 오늘날의 백성은 궁핍과 기아에서 허덕이는 것이 여상과 고격의 때보다 훨씬 심하지 않습니까? 대저 덕이 라는 것은 근본이고 재물은 끝이므로 근본과 끝 중에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고 근본으로 끝을 돕고 근본을 도운 연후에 인도가 궁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물을 생성하는 방도도 또한 본말이 있으니 농사를 짓는 것이 근본이 되고 소금 굽고 쇠를 사용함이 끝이 되니, 근본으로 끝을 다스리고 끝으로 근본을 보조한 연후에 백가지 용도가 궁핍하지 않는 것입니다. 포천의 일도 말하자면 근본이 이미 부족하니 더욱 마땅히 말리(末利)라도 취하여 그것을 보충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고기잡고 소금 굽는 부역의 인부는 자원하는 사람을 모집하여 백성들과 이익을 나누면, 국가는 단 한섬의 곡식도 소비치 않으며 한 사람의 노력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고 고을은 백 년을 보전할 수 있는데, 무엇을 꺼려하여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신은 남풍의 시 23]를 외워 요순의 덕을 사모하고, 서한의 역사를 보아 상홍양의 사심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진실로 억조의 재물을 좋아서 억조창생(백성)에게 이익을 고루 펴서 백성들이 평화로운 가운데 장수하는 나라로 만든다면 어찌 요순을 사모할 필요가 있으며, 어찌 홍양을 경계할 필요가 있으며 어찌 순박한 풍속이 회복되지 못함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신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화살같이 빠른 세월은 잡을 수 없는데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고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면 이것이 가장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약이 눈으로 보기엔 지저분한 초근목피이지만 병을 고치는 데에는 적합하고, 말이 귀에는 듣기 거슬리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때에는 적합합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옵서는 어리석은 신을 용렬하고 비루하다 하지 마시고 조금이나마 굽어 살피시옵소서
10]황제(黃帝)와 기백(技伯) : 중국 고대 임금인 황제는 신하인 기백과 더불어 의약의 비방을 창안하였으며, 서로 주고 받는 문답(問答)을 엮은 것이 유명한 황제내경(黃帝內徑) 재권이며, 이를 황제소문(黃帝素問)이라 고도 부른다.
11]후직(后稷) : 주(周)의 시조. 이름은 기(寄). 요임금 때 농사를 관장함. 15대를 이어가 주 무왕(武王) 때에 천하를 소유하였다.
12]장감(張堪)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어양태수(漁洋太守)에 임명되어 8년간 재직하며 농상(農桑)을 장려하는 등 선정을 폈다. 흉노도 감히 경계를 침범치 못하였으며 고을을 풍족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뽕나무에는 붙은 가지가 없고, 보리 이삭은 두 줄기라네.”라고 하며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관직이 교체되어 떠나는 날에는 끌채가 부러진 수레를 타고, 소지품은 무명베로 된 이불보따리뿐이었다 한다.
13]직‧설‧고요(稷․楔․皐陶) : 모두 요․순 시대의 어진 신하들로서, 직은 농사를 관장하는 후직(后稷)에, 설은 교육을 관장하는 사도(司徒)에, 고요는 사법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에 임명되어 각각 맡은 직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4]해동청(海東靑) : 사냥용 매의 하나. 일명 해청(海靑)․송골(松鶻)이라고도 함. 고려 및 조선시대에는 매 사냥을 위해 매의 사육과 사냥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응방(鷹坊)을 설치하였음
15]한혈구(汗血駒) : 중국 한(漢)시대에 서역(西域)에 위치한 나라인 대완(大宛)에서 생산되는 명마(名馬). 하루에 능히 천리를 달린다고 하여 천리마(千里馬)라고 부르며, 달릴 때에 어깨쭉지에서 피 같은 진한 땀을 흘린다고 하여 한혈마(汗血馬)라고도 부른다.
16]이루(離婁) : 중국의 고대 黃帝때의 사람으로서 눈이 맑은 자이다. 일명 이주(離朱)라고도 한다. 황제가 구슬을 잃고서 이루로 하여금 찾게 하였는데, 이루는 능히 백보 밖의 털끝만한 것도 볼 수 있었다한다.
17]사광(師曠) : 중국 춘추시대의 음악가. 사(師)는 태사(太師). 즉 악관(樂官)의 장(長)이란 뜻이다. 진(晋)나라 평공(平公)의 태사였으며 청력이 비범했다고 한다. 18]왕망(王莽) : 한(漢)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 자(字)는 거군(巨君). 책모(策謀)로써 평제(平帝)를 시해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신(新)이라 고쳤다. 내치(內治)와 외교에 실패하여 민심을 잃고, 재위 15년만에 광무제(光武帝)에게 패하여 망했다.
19]자사(子思) : 중국 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공자의 손자이며 이름은 급(伋)이다. 中庸을 저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공자의 중용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성자(誠者)는 천의 도이고 성지자(誠之者)는 사괄의 도’라고 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말하였다.
20]주자(朱子) : 남송(南宋)의 대학자. 경학에 정통하여 송학(宋學)을 대성하였는데 이를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른다. 그는 학문으로써 구세보민(救世保民)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현실 속에서도 이상적인 사회질서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아갔을 때는 교육의 진흥, 풍속의 쇄신, 인륜의 진작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민생의 안정에 역점을 두었는데, 구체적인 정책으로 경계안(經界案)을 제시하였다.
21]여상(呂商) : 중국 주대(周代)의 정치가로서 본명은 太公望이며 흔히 강태공(姜太公)으로 불리운다. 무왕(武王)을 도와 폭군 주(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소유하게 하였으며, 제(薺)나라에 봉(封)해 졌다.
22]교격(膠鬲) : 중국 고대 은(殷)대의 사람. 난세를 만나 숨어 살면서 생선과 소금을 팔았는데, 주(周) 문왕(文王)이 등용하여 신하를 삼았다.
23]남풍(南風)의 시(詩) : 고대 중국의 순임금이 지은 노래. 남풍이 만물을 성장 발육시키듯이, 부모가 자식을 길러주었음을 노래하여, 백성들에게 효심(孝心)을 가르쳤다고 함. 현재 그 노랫말(가사)은 전해지지 않음.
24]상홍양(桑弘羊) :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요직을 맡아 천하의 소금과 철을 관장하고, 평준법(平準法)을 만들어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어사대부에 올라 곽광(霍光)과 더불어 무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소제(昭帝)를 보필하였다. 뒤에 스스로의 공적을 내세워 곽광과 불해하고, 상관걸(上官桀)과 함께 모반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아산현감에 부임했을 때 폐단을 열거하여 올린 상소문
엎드려 아뢰옵건데 비록 영단의 약이 있어도 열병을 앓는 사람이 먹으면 죽게 되고, 비록 불결한 점이 있으나 열병을 앓는 사람이 먹어서 살아나듯이, 말을 들어 활용하는 방도도 또한 이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 지극히 불결하다 하지 마시고 특별히 슬기롭게 굽어 살피시어 한 때의 군사와 백성의 병폐를 구원하옵소서.
신이 듣자하니 군왕은 백성을 하늘 같이 생각하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같이 중요시한다 하였는데, 지금 여러 고을은 크게 믿을 만한 것은 바로 이 하늘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고 잔인하게 대하여 하늘같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늘 같이 여기는 먹을 것을 잃게 하였으니 이러하므로 나라를 보전하기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시험삼아 한 고을의 한가지 일을 들어서 진술하겠습니다. 일찍이 들은 바에 의하면 아산의 문서가 번거로움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어 하루에 소송의 건수가 혹은 4~5백 명에 이를 때 있다고 합니다. 신은 사람이 많아서 그렇고 풍속이 나빠서 그렇다고 생각하였는데, 신이 부임한 후에 그 상황을 보니 이것은 사람이 많고, 풍속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원한이 쌓인 백성의 많음이 다른 고을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계축년(1153, 명종8년) 군적을 개편할 때 고을을 맡은 신하가 아전들을 다그쳐, 건장한 병력을 많이 모으게 하자, 아전들이 고충을 이기지 못하여 늙고 병들어 죽을 지경인 사람으로 충당하고, 이어서 목석과 닭과 개의 이름으로까지 보충하여 병정의 많은 것이 마치 다른 고을보다 배나 많은 것 같이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남은 병정을 옮겨 다른 고을을 돕게 하였습니다.
갑술년(1574, 선조 7년) 군적을 고칠 때 옛 숫자대로 하여 감히 고치지 못했으나, 사실은 본 고을의 백성으로 본 고을을 충당하기도 오히려 부족한데 하물며 타군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독한 질병에 걸렸어도 병력을 면치 못한 자도 있고, 70세까지도 군대를 면치 못한 자가 많아 궐석하는 자가 많은데, 하물며 타군까지 복역시킬 수 있겠습니까? 여러 종류의 군대 병력과 관부의 노비가 이미 그 몸이 없어졌으면 반드시 대가를 일족에게 징수하며, 가난한 백성이 창졸간에 감당하지 못하면 잡아 가두고 독려하여 남자로 하여금 그 순번을 세우고 또 그 일족에 대한 순번까지 세웁니다. 여자는 그들의 베를 내어 충당케 하고, 그 밖에 또 일족이 바치던 베까지도 충당하게 하므로 남자는 군대에서 울부짖고, 여자는 감옥에서 울부짖으며 농상(농사와 누에치기)이 시기를 잃어서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이 뿔뿔히 풍비박산이 되어 다른 고을로 떠돌아 다니다가 종적도 모르게 되니, 참으로 측은하기 그지 없습니다.
단 한사람의 남자든 여자든간에 불우한 처지에 있으면, 그것조차도 옛 성인은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고을 백성중에는 일종의 병적부안에 병적이 실려있는 사람이 천여명에 달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사람이 날마다 뜰에 가득한데 혹은 촌수도 알지 못하고 혹은 같은 혈육도 아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라 하니, 그것을 구분하고저 하면 당번은 누가 서며 그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군사와 백성의 병폐는 끝내 구제할 수 없을 터이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한 고을의 원통한 백성이 이미 천여명이 된다면 일국의 원민이 몇 만명이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군사와 백성의 원통한 기가 천지에 꽉 차서 삼광(해․달․별)이 빛을 잃고 불길한 기가 충천하니 또한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옛 문왕이 기주를 다스릴 때, 어려서 아비가 없고, 늙어서 자식이 없고, 늙어서 아내가 없고, 늙어서 남편이 없는 이 네 부류의 백성은 천하에 의지할 데 없는 궁한 백성이라 하여 문왕이 정치적으로 인정을 베풀 때 이 네 가지에 해당한 백성에게 최우선 순위를 두었는데 지금은 궁민이 많은 것이 문왕 때보다 몇 곱이나 더 많은데도 구휼의 혜택을 입은 백성이 없으니, 신은 성상에게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본 현에 사족(士族) 김백남이 있는데, 나이 예순 한 살에 아직도 배필이 없다하여, 신이 괴이하여 그 이유를 들어보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본 고을의 인물이 부족하여 사족으로써 노예의 인원을 충당한 경우가 심히 많으며, 만일 타지역에 이사해 살면 그 일족은 공동으로 책임지는 고통을 받게 되므로 그 일족 피하기를 함정 피하듯이 하는데, 김백남의 이름이 일찍이 군사 명단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사윗감으로 삼으려 하지 않아서 장차 홀아비로 늙고 말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보고 한탄스럽고 측은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김백남은 형제중에 건실한 사람인데 그 여형 김씨는 나이 50에 시집을 못 갔고, 남형 김견은 나이 57에 장가를 못 가, 다 김백남의 집에 의탁하여 살고 있는데, 유독 이 사람들 뿐만이 아닙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박필남이라는 사족이 있는데, 나이 50이요, 정옥이라는 사람은 나이 55요, 정권이라는 사람은 나이 62요, 박유이라는 사람은 나이 71인데 다 한번도 지아비가 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들은 것만도 이와 같은데, 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습니까? 사족도 이와 같은데 서민의 홀아비와 과부는 어찌 다 셀 수 있겠습니까?
아! 애달프도다! 그 배우자를 여의고 홀아비와 과부가 된 것도 딱하지만 , 저들은 당초부터 천륜이 있는 것도 알지 못하니 실로 이 사람들은 천하에 지극히 궁핍한 백성입니다. 다만 인정의 혜택을 입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침해를 당하여 그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더 궁핍하게 만들었으니,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백성이야 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확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하였습니다. 지금은 밖으로 강적이 있고 안으로 원민이 많은데, 만약 급박한 일이라도 생기면 능히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근본이 견고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녕을 기필하기 어려운데, 만약 이런 것을 족히 생각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하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일은 소홀히 했던데서 일어나고, 화근은 염려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생기는 법, 조처하는 방도를 절대로 늦출 수 없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 빨리 8도에 명령을 내리시어 민가의 호수를 덜어주고, 군사의 헛된 인원을 감하게 하며 현재의 병력을 잘 활용하여 앞으로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무릇 백성이 흩어지는 것을 걱정한다면 모름지기 은덕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주어야 하며, 한갓 찾아내는 것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가 적은 것을 근심한다면 모름지기 의리와 용기를 가르침이 중요하고 다만 많은 것만 숭상할 것이 아닙니다. 옛날 주나라가 쇠퇴해졌을 때 열국들이 용병을 서로 앞다투어 강화했는데 위나라와 진나라가 더불어 싸울 때 누구인들 진나라가 이긴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진병은 많고 강했으며 위병은 적고도 약했기 때문입니다. 많고 적음의 수효는 어리석은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지만 강약의 형세는 지혜로운 사람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 위나라 신능군 25]은 능히 그 형세를 파악했으므로 한단에서 진병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군사들이 나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면, 다만 몇 만명만으로도 상대를 꺽을 수 있지만, 군사들이 나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비록 백만 명이라도 홀로 서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하고, 드디어 명령을 내리기를 “부자(父子)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아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독자로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하니, 돌아간 병력이 2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남은 병력만 가지고도 진나라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신능군이 많은 것만 추구하는 때를 만나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도 이와 같이 마침내 성공을 거둔 것은, 사람 숫자 많은 것이 인화 단결만 같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관리는 이와 반대로, 태평한 세상에 살면서 도적이 이르지 않았는데도 먼저 나라의 근본을 해치고, 백성을 위로하여 오게 하며 또 편안히 모여들게 하는 방도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백성들의 부모를 잡아 가두고 백성의 형을 잡아 가두는 것을 좋은 법이라 하여, 형제도 없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의 부역에 허덕일 뿐만 아니라, 또 그 일족의 부역까지 감당해야 하며, 다만 일족의 부역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또 계견목석(鷄犬木石) 일족(모자라는 사람 숫자를 채우기 위해 닭(鷄)과 개(犬)와 나무(木)와 돌덩이(石)이에도 이름을 붙여 병적부등에 올린 대상)의 부역까지도 감당하게 했을 뿐이지, 돌아가서 부모봉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함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가 시집 장가는 아예 알지도 못한 채 생홀아비와 생과부가 되어 궁지에 빠져 죽는 사람이 즐비하니 이 때에 맞추어 산적이나 해적중에 지략이 있는 놈들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를 침범하면 나라가 반드시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이 원한을 쌓은지 하루 이틀이 아니며 한 두 달이 아니어서 한 사람도 나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유사(관리)가 전하를 섬기는 것이 비록 요․순이나 탕․무왕이 되시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차마 성상을 위 공자 무기(신능군)만도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혹자는 일족의 법을 폐지하면 부역을 싫어하는 사람은 생각할 것도 없이 아무래도 기피하는 마음이 있어, 부족한 군사를 더욱 모자라게 하여 더할 수 없는 근심거리가 된다고 하는데, 신의 뜻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족을 징발하면 군사와 민간이 어지럽게 흩어져 혹은 중이 되고 혹은 도적이 되어 백성은 날마다 적어지게 되니, 이를 보면 일족을 징발함이 백성을 흩어놓는 방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군사의 숫자가 어찌 줄어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족을 징발하지 않으면 안도하고 생활하며,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들어 잃는 삶이 백명이라면 얻는 사람은 천명이 될 것이니 군사의 감소는 조금도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
또한 병정과 백성 중의 이사한 자가 다 이웃나라로 이사한 것이 아니므로 만일 그 곳의 관리로 하여금 일일이 추심하여 그 지역의 부역을 정하게 하면, 다같이 병역하게 될 것인데 어찌 본 현의 부역을 피하여 타관의 부역을 복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본토에 있어도 일족의 징수가 없고 타관으로 간다해도 편안할 보장이 없다면 비록 상을 주며 이사가라 해도 끝내 이사가지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안위의 형세를 살피시어 백성들의 궁핍함을 딱히 여기시고, 빨리 일족의 법을 없애시며 좌․우에서 다 옳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가 다 불가하다 하더라도 듣지 마옵소서. 신의 말은 국인의 공론이요, 백성의 곤궁함은 전하께서 보신 바인데 대체 또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옛적에 진(秦) 목공이 진(晉) 군에 포위되어 장차 생포당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야인 3백명이 진(晉) 군에 달려들어 목공을 탈출시켜 돌아오니, 야인 3백명이 어찌 가히 억만의 정병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전일에 자기들을 살려 준 은혜에 감격하여 그런 의리와 용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많은 것도 적이 있지만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일족의 법을 없애고 억조창생(백성)을 인(仁)으로 거느리시면 천하에 적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왕께서 의심치 말기를 청하나이다.” 하였는데 신 또한 전하께 의심치 마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신이 전하의 한 고을 군사와 백성을 책임맡고 만약 성의로써 그들을 양성하지 못한다면, 장차 불충의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일족을 징집하여 모든 백성에 병폐가 되게 하는 것을 신은 끝내 차마 할 수 없습니다.
또 옛날의 밝은 임금이 백성의 살림살이를 제정할 때에 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하는 정치를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부모를 섬김에 풍족하고 처자를 먹여 살리기에 풍족하게 하여, 풍년에는 일년 내내 배불리 먹고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죽거나 망하는 일이 없도록 한 연후에 병졸의 출동은 세금에 따라 조정하고 백성의 힘을 동원하는 것은 3일을 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정치가 번거롭고 세금이 과중하여 백성이 견디어 지탱하기 어려우므로 땅과 집을 다 팔아 사방에 흩어졌으며, 백성들이 땅이 있는 자가 몇이 없으므로 부자의 땅을 빌려 경작하고 십분의 오를 차지하여 호구지책을 삼으니, 비록 걸(桀)의 백성이라도 이와 같이 곤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또 그들로 하여금 군졸을 삼으면, 처자식 먹을 것은 계산할 것도 없이 저축된 것을 다 긁어 군량을 채워야하고 상번(上番)이라 이름이 붙으면 혹은 육개월, 혹은 백일, 혹은 한달씩을 부역하고, 하번(下番)의 이후는 산행에 진상한다는 명목으로, 혹은 군진을 경영한다, 혹은 군현에 쓴다하여 각종 부역이 그 수를 알 수 없을만큼 많습니다.
또 이름하기를 ‘구마군(驅馬軍)’이니 ‘별역군(別役軍)’이니 하는 것들이 뜻밖에 나오고, 또 군 장비를 수리하라, 군기를 지키라는 등등, 거의 틈나는 날이 없으니 그것만도 이미 너무 심한데, 그것도 부족하여 또 일족의 부역을 복역시키고, 일족에게 부과된 베(군포)까지도 상납하게 하니, 정말 너무 심하고 또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끝이 마침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오호라! 순임금은 그 백성을 함부로 부리지 않았고, 조보(造父) 26]는 그 말의 힘을 다 쓰지 않았는데, 지금은 백성의 힘을 소진하고 또 소진하니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오호라! 전하께서는 신의 말을 들어 주셔서 빨리 군사를 감하고 일족의 법령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시면 오히려 가히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비록 뉘우친다 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서이지 어찌 백성만 위하고 나라는 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견마(犬馬)와 같은 정성이 있기에 능히 잠자코 있을 수 많은 없을 뿐이옵니다.
오호라! 신의 이 상소문은 천리의(天理)의 존망여부를 가름하게 될 것입니다. 혹 전하께서 채택하시게 된다면 종묘사직에 심히 다행한 것이며 백성에게 심히 다행스런 일입니다. 오호라! 신이 전하의 한 고을의 군사와 백성을 받아 비록 정사와 형벌에 공평히 하기를 제나라의 즉묵(고을 이름)과 조나라의 진양(고을 이름)만은 못하지만, 일족을 모두 징집하여 온 백성의 병폐가 되게 하는 것은 끝내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25]신능군(信陵君) : 중국 전국시대 위(魏)의 공자(公子). 이름은 무기(無忌)이며 신능군(信陵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어질고 선비들에게 겸손하여, 식객(食客)이 3천여 명에 달하였다. 일찍이 조(趙) 나라가 진(秦)에게 포위되었을 때, 조나라 평원군(平原君)이 처남(妻男)이 되는 신능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능군은 자신의 식객을 거느리고, 강한 진나라를 두례 위하여 관망만 하고 있던 자국(自國)의 군사를 탈취하여 한달음에 달려가 진병을 물리쳐 포위를 풀고 조나라를 구원하였다.
26]조보(造父) : 말을 잘 부리고 수레를 잘 몰아서 주(周) 목왕(穆王)에게 신임을 받았으며, 이로써 뒤에 성(城)을 하사받기도 하였음
토정선생 유사(遺事)
만력(萬曆) 원년 계유 5월(선조6년, 1573년) 탁월한 품행이 있는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이조에서는 선생이 기상과 풍도가 남다르고 효우가 뛰어나다고 천거하였다.
소시에 어버이의 묘소를 해변에 뫼셔는데, 조수가 점점 가까이 들어오므로, 천백년 후에 조수가 반드시 묘소를 덮칠 것을 예측하여 제방을 쌓아 물을 방지하고저 하여 곡식을 옮겨 심고 재물을 모으는데 온갖 심력을 기울이니, 사람들이 스스로 헤아릴 줄을 모른다고 비웃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인력으로 이를 수 있거나 없는 것은 내가 마땅히 힘쓸 일이고,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인데, 사람의 자식된 자가 어찌 힘으로 미칠 수 없다고 안주하여 후환을 예방하지 않을 수 있을랴!” 하였다. 바다가 광활하여 마침내 공정이 성취를 보지 못했지만 선생의 정성은 그칠줄 몰랐다.
천품적으로 욕심이 적어서 명예와 이해에 담담하며, 때로 농담하여 장엄하지 않은 것 같으므로, 사람들이 능히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였다(석담 일기에서 발췌함. 석담은 율곡의 또 다른 호임).
지금 현재 임금 때에 인재를 발탁하여 등용하니 조목‧이지함‧성혼‧최영경‧정구‧김천일‧유몽정‧유몽학‧김면 같은 이들이 학행으로 서로 계승하여 직급을 초월하여 육품직에 발탁되었다(참판 이정형의 동각잡기에서 발췌함)
만력(萬曆) 2년(1574년, 선조 7년) 갑술 8월에 선생께서 포천현감직에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셨는데, 선생께서 포천에 곡식이 적어 백성이 살 수가 없을 것을 걱정하여, 어장을 떼어주어 고기를 잡아 곡식을 사들여서 포천에 쓸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듣지 않았다. 선생께서 당초부터 포천군수를 오래할 계획은 없었고, 다만 유람삼아 부임했다가 바로 사임하였다(석담 일기에서 발췌함).
만력 무인(1578년, 선조 11년) 3월에 선생께서 율곡을 만날 때 명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 때 선생이 좌․우를 돌아보며 크게 말하기를, “성현이 하신 바가 후일의 폐단이 되었다”하니, 율곡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무슨 기담이 그렇게 심할 수 있습니까? 원컨대 존장께서는 글 한편을 지어서 장자와 짝이 되어 보시지요!” 하였다. 선생이 웃으며 말하길, “공자가 병을 일컫고 유비를 만나지 않았고, 27] 맹자도 병을 일컫고 제나라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28] 후세의 선비들이 병이 없으면서도 병이 있다고 핑계삼는 경우가 많은데, 대저 없는 병을 핑계삼는 것은 남을 속이는 것으로서 게으른 노비들이 게으름을 부릴 적에 하는 짓이지 선비라고 하는 사람이 차마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공자와 맹자의 하신 일에 핑계대니 어찌 성현의 하신 바가 훗날의 폐단이 되지 않았는가?” 하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는데, 그 때 율곡이 병들었다는 핑계로 대사간을 사직하여 하므로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한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지난해 요괴스런 별을 나는 상서로운 별이라고 생각한다.”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무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심과 세도가 극도로 괴란하고 분열되어 장차 큰 변괴가 발생할 판인데 요성(妖星)이 출현된 후부터 상하가 모두 두려워 하고 인심이 조금 변하여 겨우 큰 변고가 나지 않을 수 있었으니 어찌 서성이 아니겠는가?”
선생께서 또 여러 명사들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형세는 마치 사람이 원기를 이미 다 잃어 손을 써서 약으로 구할 길이 없는 것과 같고, 다만 한가지 묘책만이 가히 위급존망의 형세를 구할 수 있다.” 하니 좌중이 모두 묘책을 물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세상에서 반드시 이 계책을 쓰지 않을 것인데 무엇하러 말하랴?” 하고 굳이 말하지 않으니 좌중이 묻기를 더욱 간절히 하였다. 한참 있다가 선생께서 말하기를 “지금 숙헌(율곡의 자(字))이 조정에 머물러 있으면, 비록 크게 무언가를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위망(危亡)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묘책이지 이 밖에 다시 무슨 묘책이 있겠는가? 초․한이 서로 겨룰 적에는 한신(韓信)을 얻는 것으로 묘책을 삼았고, 관중을 최음 평정했을 때는 소하에게 책임을 맡기는 것으로 묘책을 삼았으니, 어찌 소하와 한신을 얻은 후에 다시 다른 묘책을 말할 수 있으리요?” 하니, 좌중이 모두 웃었다.
선생의 말씀이 비록 우스갯소리 같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주 적중한 언론이라고 하였다. (석담 일기에서 발췌함).
27]유비(유悲)를 만나지 않았고 : 유비는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서 애공(哀公)의 신하이다. 일찍이 공자에게서 사상례(士喪禮)를 배운 바 있었다. 마침 노의 대부인 휼유(恤由)가 죽자, 애공이 유비를 공자에게 보내어 사상례(士喪禮)를 배워오도록 하므로 공자를 찾아 갔으나, 이 때 공자는 병을 일컫고 만나기를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곧 비파를 가져다 노래를 불러 그로 하여금 듣게 하였으니, 이는 병 때문이 아님을 알게 한 것이며, 이를 통해 유비에게 그가 지은 과오(내용은 알 수 없음)에 대하여 일깨워 준 것이었다.
28]제(齊)나라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 맹자가 제나라 왕을 찾아 가려고 하였는데, 왕은 이를 모르고 병(감기)이 있음을 핑계대어 맹자를 궁으로 불렀다. 이에 맹자도 병을 핑계대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는 바, 이는 비록 왕일지라도 빈사(賓士)인 맹자 자신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4월에 율곡이 향리로 돌아오니 선생이 율곡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어찌 차마 물러났는고?”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제가 과연 잘못한 것인가요?” 선생께서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친환이 위중하여 운명이 조석에 달려 있는데, 자식이 약을 다려 드리면 병든 어버이가 대노하여 혹은 약 그릇을 땅에 던지고, 때로는 얼굴에 던져 코와 눈을 다치게 한다면 자식이 물러가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정성으로 권하여 더욱 성내도 더욱 권하겠는가? 이것으로 가히 그대의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을 것이네.” 율곡이 답하기를 “비유는 심히 적절하지만 다만 군신간이란 부자간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 이토정 어르신 말씀과 같다면 신하에게 어찌 떠나갈 의리가 있겠습니까?”(석담일기에서 발췌).
선생이 베옷 입고 짚신 신고 삿갓 쓰고 솜옷을 지고 다니면서 혹은 고관들과 어울리면서도 주저하거나 거리낌이 없고, 제자백가의 잡술까지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일엽편주를 타고 네 귀퉁이에다 큰 박을 매달고 세 번이나 제주도를 갔어도 한 번도 풍파를 당한 적이 없었다.
손수 장사하여 백성에게 맨손으로도 생업을 경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수년 내로 수 만석을 모아 빈민에게 흩어주고서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갔다. 섬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 만통이 열린 것을 타서 바가지를 만들어 팔아 곡식 몇 천석을 만들었으며 서울한강 마포로 운반하여, 강촌사람들을 모집하여 진흙 속에 흙을 쌓아 몇 자리를 높인 다음 흙집을 짓고, 이름하여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밤에는 토실 바닥에서 잠자고 낮에는 옥상에서 거뢰하다가 얼마 안되서 버리고 돌아갔다. 그 부모가 돌아가 장례치를 때 산소자리를 보니 자손중에 두 정승이 나올 자리이나, 막내 아들은 불길하다 하였는데, 막내 아들은 곧 토정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억지로 우겨서 스스로 그 제액을 당했다. 후에 산해․산보(토정의 조카)는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으나, 선생의 자손은 요절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이보다 먼저 사정(思亭 : 토정의 형인 이지번의 호)이 토정에게 말하기를 “이 산이 우측이 허하여 네가 그 재앙을 받게 되니 그것이 흠이다.” 하거늘 선생이 말하기를 “저의 자손은 근대에는 비록 고단하지만, 오,륙대가 지나면 반드시 수효도 많고 또한 현달하고 영화로움이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포천현감이 되었는데, 베옷 입고, 짚신 신고 방립을 쓰고서 관청에 오르니, 관리들이 반찬을 드렸다. 자세히 보고 자시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먹을 만한 것이 없다.” 하니 아전이 뜰에 무릎을 끓고 말하기를 “이 고을에서 생산되는 별미는 없으나, 다시 지어 올리겠나이다.”하고 조금 있다가 융성한 음식을 차려 내오거늘, 또 자세히 보고 말씀하시기를 “먹을 만한 것이 없다.” 하니 아전들이 황공하여 죄를 청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우리나라의 민생이 곤궁하고 고생스러운 것은 다 음식의 무절제한데서 비롯되니, 나는 소반에다 받쳐 먹는 것도 싫다.”하고 아전에게 명하여 잡곡을 섞어 밥 한 그릇을 짓고 채소로 국 한 그릇을 끓여 갓 담는 상자에게 담아 내오게 하였다.
그 이튿날 읍내의 관리가 와 뵈올 때도 마른 나물로 죽을 쑤어 권하니 관리가 갓을 숙이고 수저를 들어 먹자마자 토하는데, 선생께서는 다 드시었다. 오래지 않아 벼슬을 내 놓고 돌아가니 읍민들이 길을 막고 만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혹인의 기사에서 발췌함)
선생께서 백성들이 헤어진 옷을 입고 걸식하는 것을 애처롭게 생각하여 큰 집을 지어 그들을 재우고, 손으로 할 수 있는 직업을 가르쳐 사농공상의 모든 것을 깨우치고 이끌어 주지 않는 것이 없어 각자 자기의 의식을 자급자족하게 하였다. 그 중 가장 무능력한 사람은 짚신을 삼게하고 친히 그 일을 독려하니, 하루에 열 켤레를 능히 만들어 시장에 팔아서 하루에 모두들 쌀 한 말씩을 사고 남은 것으로 옷을 해 입으니, 불과 몇 달 사이에 의식이 다 풍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든 수고를 참지 못하고 말도 없이 도망치는 자도 많았다. 이것으로 보면, 백성들이 대게는 게을러서 굶주리게 됨을 볼 수 있다. 비록 아무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짚신도 못삼는 사람은 없으니 선생께서 백성들에게 가까운 것에서 효력을 보게 한 것이 묘하도다(혹인의 기사에서 발췌함).
병자년(1576년, 선조9년) 겨울에 백사 이 상국(相國) 항복이 한 서평(書平) 준겸으로 더불어 사마 초시에 합력하여 강사(서재)에 나아가 글을 읽고 짓고하여 회시를 보려 하였다. 이 때 선생이 마포에 와서 겨울을 지냈는데, 내가 익지(준겸의 자(字))와 더불어 조석으로 왕래하며 강론하였다.
하루는 선생에게 묻기를 “공께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학덕이 높은 사람을 보았습니까?”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외방에 갔을 적에 많은 것을 보고 알았는데, 가장 학덕이 높은 사람이 둘이고, 그 다음이 한 사람 있었다.”하여 내가 물으니 말하기를 “그 중 한 사람은 항상 바다 위에 있으며 고기잡아 생업을 하였다.
처음에 충청도 해상에서 보았고, 십여년 후에 전라도 해상에서 두 번째 보았다. 사는 곳이 정해진 곳이 없고 배로 집을 삼아 식구는 아내와 딸 하나 뿐, 큰 배를 사용하지 않고 중간쯤되는 배를 쓰며, 고기잡고 여가가 있으면 때로는 곡식을 운반하여 운임을 받아 생계를 꾸렸다. 그 배는 삼백석을 싣을 만한데 항상 이백석 이상은 싣지 않고 짐을 가볍게 하여 운전하기 편리하게 하여 항상 짐이 무거워 걱정하는 일이 없었으며, 운임도 항사 염가로 받았다.
일찍이 멀리 고기 잡으로 갈 때 나를 맞이하기에 따라갔었는데, 조그만한 배에 돛을 달고 가니 마치 하늘 밖으로 나간 것 같아 다른 어부들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이며, 배를 조종하고 노를 젓는 것이 절대로 다른 어부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또 고기를 잡아 굽고 삶고 익히는 법이 지극히 맛이 있게하여 그것도 범인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이 사람이 외출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마침 아내도 이웃집에 가서 딸이 혼자 있었는데, 생선을 사로 온 사람이 있어 시가보다 배나 비싸게 받고, 그 아내가 돌아오니 딸이 생선값을 비싸게 받은 것을 자랑하였다. 아내가 깜짝 놀라 말하기를 ‘이 고기 시가가 얼마 얼마인데 배나 받았으니 너희 아버지가 들으시면 반드시 노할 것이다. 네가 급히 쫓아가 반값을 돌려주고 돌아오라.’ 하였다하니, 여기에서도 또한 가히 한 가지를 볼 수 있다.
내가 그 특이한 사람을 아주 잘 알므로 기다렸다가 만나보려 하였더니, 하루는 저물게 배를 타고 와서 집식구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우러러 천문을 보건대 내일이 바로 동짓날이니 팥죽을 쑤어라.’ 이르거늘, 내가 서로 대화하기를 요청했더니, 일월성신의 변역과 격물치지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훤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치국의 방도를 물으니 웃기만 하여 답하지 않고 말하기를 ‘객은 어찌 그렇게 할 일이 많소?’ 하였다.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또 말하지 않아서, 훗날 또 찾아갔던 바 벌써 이미 이사가 버렸으니, 대개 반드시 내가 다시 올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서치무라는 사람인데 은둔생활을 스스로 즐기며 겨우 글자 약간을 알 정도였다. 어느 사람이 ?청구풍아?(삼국, 고려 이래의 명시를 뽑아 비평과 주석을 단 책, 성종대 김종직이 편집하였음)라는 책을 주었는데, 치무가 그 책을 받고 나에게 와서 배우기를 청하여 내가 가르쳐 주었더니 종일토록 읽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반드시 물깃고 나무하여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므로 내가 그만 쉬라고 하였더니 치무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책을 준 것은 그것을 읽히고자 함인데, 제가 만약 읽지 않을려면 당초에 받지 않았어야 했고, 이미 받았으며 남이 준 것을 가히 헛되이 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부지런히 읽는 것입니다. 또 이미 선생님께서 수학하여 사제의 명분이 있는데 독서의 여가에 한가로히 노는 것은 좋지 않으니, 선생님댁의 일을 도와 제자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나이가 육십이 가까운데 수학한지 거의 일년이 다 되도록 시종일관 한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 다음은 서기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됨이 앞의 두 사람에 비하면 만분지 일도 못 미친다. 그러나 수월치 않게 문장에 능하고 고용히 자기 분수를 지켜 결단코 속류가 아니었다.“고 하였다.(백사 이상국의 기록에서 발췌함).
선생께서 일찍이 한라산에서 해남 이발의 집으로 가니 주인이 존대하였다. 먼 바닷길을 오느라고 수일을 굶고 피곤할 것을 염려하여, 곧 두어 말 밥을 지어 대접하였다. 공이 손을 씻고서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주먹만큼씩 덩어리를 뭉쳐 좌우 손을 사용하는데 한 손으로는 밥을 한 손으로는 반찬을 드시어 잠깐새에 드시었다. 이윽고 밤이 깊은 후에 주인이 방으로 들어가기를 권하니, 금침이 모두 채색비단이었다. 같이 뫼시고 자려하니 선생이 혼자 자는 것이 편하다 하여 굳이 거절하여 부득이 나왔는데, 선생이 소변을 싸서 금침에 낭자하게 하고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떠나갔다. 그 길로 전라도 좌수영으로 향하였는데, 문지기가 공의 행색을 살펴보니, 겨울철인데도 다만 홑옷만 입고 맨발인데도 별로 추운 기색도 없었다. 다 떨어진 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었으면서도 사색이 비굴함이 없거늘, 의괴스럽고 수상하여 절도사 이공에게 몰래 고하니 절도사가 즉시 대문 밖으로 나와 맞이하였다. 대우가 극진하여 관저에서 십여일 머물렀는데, 그 때 시종 들고 있는 통인(지방 관아에서 심부름하는 사람) 김모(아명은 순종)의 용모가 옥과 같고 자질이 영리하며, 글을 읽되 주야로 게을리하지 않으니, 공이 그를 아끼어서 관에 규정돼 있는 모든 부역의 의무를 삭감하고, 보령으로 데리고 와서 가르쳤다. 오래되지 않아 드디어 사마시험에 합격하니, 공이 즉시 상당한 문벌과 장가들이고, 결성(홍성)에 집을 지어 세 달을 생장시켰다. 그로 인하여 사부가(士夫家)가 되었으니, 공이 인물을 배양함이 이러하였다.
선생이 항상 보령으로부터 상경할 때는 아침에 쌀 한 말로 밥을 지었으며, 별도로 양식을 쌀 것도 없이 보행으로 하루 이틀이면 서울에 도착하여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선생이 항상 대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다가 도중에 졸리고 피곤하면, 두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몸을 굽혀 머리를 숙이고 두 발을 나누어 디디고 서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코고는 소리가 우레소리 같고 비록 소나 말이 들이받아도 도리어 우마가 물러나고, 공은 의연히 산과 같이 조금도 동요하거나 놀라 깨지도 않았다. 10월에 풍랑으로 나룻배가 뒤집혔는데, 공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두손으로 각각 빠진 사람을 건져내고,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가 거의 죽게 된 사람을 건져내어 약으로 처방하여 살려내니 한명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혹인의기사에서 발췌함).
중봉 조선생은 옛 것을 많이 알고 시세에 달통하여 명쾌한 결정과 옳은 판단을 내리고 천품이 소박하고 혼후하여 겉을 꾸미려 하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없다. 안다 하더라도 또한 절의로 나라에 목숨 받친 분이라고 아는데 불과할 뿐이요, 일세의 인재를 논할 적에는 중봉선생을 제외시키니 대개는 선생이 재주가 부족하여 세상의 쓰임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의심한 때문이다. 비록 여러 노선생들도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직 토정선생만이 알아주시니, 토정은 곧 중봉의 존경하는 스승이시라.
토정이 일찍이 사람과 더불어 대화할 때 사람이 토정에게 묻기를 “지금 세상에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가 있습니까?” 토정이 말하기를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사람중에 조여식(중봉, 조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가난해도 편안히 도를 즐거워하고 명예와 이해에 벗어나, 애군 우국하는 정성이 지극하다. 옛날 사람도 실로 그런 사람이 드무니, 내 생각엔 가히 쓸만한 인재라고 여겨지나, 이 밖에 다른 사람은 아는 사람이 없다.” 하니 사람이 말하기를 “이른바 인재라는 것은 큰 일을 당하여 능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조공의 충절과 의리로 순국한 것은 사람마다 다 알지만, 그 인재의 적용을 논함에 있어서는 혹 부족하지 않습니까?” 하거늘,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부터 능히 대사를 담당하는 사람은 항상 안빈락도하고 애군우국하는 사람속에서 나오니, 조군의 사람됨이 진실로 자네 같은 사람들이 알 바가 아니네. 세상 사람이 다 이 사람을 오활하고 무능하다 하여 여러사람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만일 내 말을 들으면 반드시 크게 웃을 것이다. 자네는 다만 자신만 알 뿐이지 말을 옮기지 말라. 차후에 마땅히 내 말이 망녕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안방준이 기록한데서 발췌함).
중봉 조선생이 말하기를 “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세 사람인데, 이지함․이이․성혼입니다. 이상 세 분은 학문의 성취도가 비록 각각 같지는 않지만, 마음이 청렴하여 욕심이 적고 지극한 행실로 세상에 법이 되는 것은 다 같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지함이 말하되 ‘동쪽 백성이 다행히 살라는 이치가 있어 주상께서 선을 좋아하고 서로 순박하고 청백하여 아부하는 대부의 명예를 구하는 뇌물이 감히 서울에 이르지 못하여 벼슬길이 막히니, 이것이 대개 백성이 소생할 수 있는 날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거없는 의논이 들끓고 일어나 정승자리가 흔들리게 되자, 이지함이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동국에 남은 신하가 다만 박순 뿐인데, 또한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하니 박순마저 만약 나라를 버리면, 조정이 위태로울 것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니 그 말이 대단히 징험이 되고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지함의 청백함은 천고에 짝이 없습니다.” 했고, 또 말하기를 “우리 조선조 이래로 길재를 표창하고 정몽주를 추증하고 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등에게 추후하여 시호를 내리고, 서경덕․조식․성운․박훈 등에게는 모두 치제문을 내려 표창하니, 유림을 격려한 것이 지극하나, 유독 이지함처럼 높은 행실이 있는 분에게는 미치지 않으니, 궁벽한 고을의 선비가 어떻게 표창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지함의 사람됨이 천품이 기이하고 위대하며 효우가 뛰어나 형님 이지번이 서울에서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보령에서부터 걸어와 그 수고를 꺼리지 않고 ‘선생님’이며 ‘형님’이라 하고, 형님 상사에 삼년 복을 입었으며, 선을 즐거워하고 의리를 좋아함이 천성에서 우러나와, 한 사람이라도 선생이 있는 것을 들으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보셨습니다. 안명세의 죽음을 정신적으로 교분이 돈독하였으며 성혼․이이를 가장 공경하고 존중한 바요, 정철은 강직하고 말이 전아하다 칭하였습니다. 더욱 후생을 장려하여 가르침을 좋아하셨고, 이산보의 효우충신과 박춘무의 고요히 지조를 지킴이 모두 유래가 있고, 서기와 같이 비천한 사람이 가난하여 배움에 힘쓰지 못하니 토정께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가르치고 성취시켰습니다. 만년에 부름에 응하여 두 고을 군수를 역임할 때 봉급은 줄이고 백성에게 후하게 하였으며 폐단을 없애고, 궁한 사람을 구휼하였습니다. 모두 법규를 세워 간사함을 단속하며 아전을 부리는데, 미워하지 않고 엄숙히 대하니, 온 고을이 신성하고 명철하다고 칭하였습니다.
항상 한 사람이라도 어려움에 처할까 두려워하며, 이윤의 뜻같이 뜻을 높이 가졌으며, 추후도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으니 실로 동방의 백이(伯夷)같으신 분입니다.
또 그 고을의 학교에서 문부의 재목을 겸하게 하여 나라의 동량으로 쓰임을 대비하고져 하였으니, 그 심법과 재분의 갖추어짐이 은연중에 공맹의 풍도가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환으로 돌아가시니 아산의 백성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부모상을 당한 듯이 길을 막고 통곡하며 닭과 술로 제전을 올렸습니다.
토정이 거짓으로 미친 듯이 하여 스스로 종적을 감춘 것은 화를 피하기 위한 것이며 역량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으니 완전히 세상을 버린 것도 아닙니다. 만약 조식․박훈 29] 의 준례대로 하여 증직과 시호를 내려 각박한 풍속을 돈독히 하고 나약한 사람을 확립시킨다면, 사람들이 실행을 숭상할 것을 알아서 우러러보고 감화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날마다 진전되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형님을 따르는 데에서도 반드시 보고 느낀 바가 있게 되며 또한 가히 미루어 임금을 섬김에도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중봉의 상소에서 발췌함)
29]조식(曺植)․박훈(朴薰) : 조식은 명종 때의 학자로 호는 남명(南冥)이다. 평생 학문에 전념하여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만년에는 두류산에 은거하여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여 김효원(金孝元)․김우옹등 저명한 학자들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사후에 대사헌․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덕천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박훈은 중종 때의 문신으로 호는 강수(江叟)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감찰․공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19년(중종 14년) 현량과에 급제, 장령․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10여년 유배생활 끝에 풀려 나왔다.
선생의 공부는 공경을 주로 하고 이치연구를 우선으로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성인도 가히 배워서 이를 수 있으니, 오직 자포자기 아니할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선생이 자질들을 가르칠 때 “여색을 가장 경계하라. 이것을 엄격히 하지 않으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보잘 것도 없다.” 하였다.
선생이 소시부터 욕심이 적고 물질에 인색한 것이 없으며, 기품을 보통 보다 특이하게 타고 나시어 능히 한서와 기갈을 인내하여, 혹은 겨울에도 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으며, 혹은 십여일씩 음식을 끈어도 병이 나지 않았다.
천성이 효우하여 형제간에 유무를 서로 변통하여 재물을 사유하지 않고, 재물을 가벼히 알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의 다급한 것을 구해주고, 세상의 화려하고 소문이 떠들썩 한 것은 담담히 좋아하지 않고, 성품이 배타기를 좋아하여 바다에서 위태로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다. 하루는 쪽배를 타고 표연히 제주에 들어가니 제주 목사가 그 이름을 듣고 관저에 맞아들이고, 예쁜 기생을 택하여 침소에 들게 하면서 창고의 곡식을 가리키며 기생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약 이분의 괴임을 얻을 수 있으면 마땅히 한 창고를 통째로 상으로 내리겠다.” 하였다. 기생이 선생의 사람됨이 특이하므로, 기필코 마음을 교란하고저 하여, 밤에 온갖 교태를 다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니, 제주목사가 더욱 공경하고 존중히 하였다.
소시에는 공부를 하지 않고 이미 장성함에 그 형님 지번이 공부를 권하자, 이에 분발하여 공부를 부지런히 하며 침식을 잊을 정도로 열심하여 오래되지 않아 문의에 능통하였다.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 마음과 뜻대로 하기를 좋아하고 율곡과 서로 익숙히 알아서 율곡이 성리학을 권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나는 욕심이 많아서 성리학을 할 수 없다.”고 하니 율곡께서 말하기를 “명리와 호화로운 것을 우리 어르신이 다 좋아하지 않으시는데 무슨 다른 욕심이 있기에 학문에 해롭다는 것입니까?” 선생께서 말씀하길 “어찌 명성과 이해뿐이리요, 마음의 취향이 천리가 아니면 다 욕심인데, 내가 내 마음대로 방탕하기를 좋아하고 학문궤범을 지키지 못하니 어찌 물욕이 아니리요?” 하였다.
그 형님 지번이 돌아가니 선생께서 부모상을 당한 것과 같이 애통하고 일년복을 마친 후에 또 심상 일년을 더하니, 혹인이 지나친 예가 아닌가 의심하거늘, 선생께서 말하기를 “형님은 나의 스승이시고, 나는 스승을 위하여 심상삼년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만력(萬曆) 6년 무인(1578년, 선조 11년)에 아산현감에 임명되자 친한 사람이 부임을 권하였다. 선생께서 홀연히 부임하여 백성의 고통을 물으니 양어장에서 고기잡는 고통이 있다고 했다. 대개 아산에 양어지가 있어 백성에게 번갈아 가며 물고기를 잡아 바치게 함으로 백성이 심히 고통스러워 한 것인데 선생께서 그 양어장을 메워 영원히 후환을 없앴다. 모든 법령은 다 백성사랑을 위주로 적용하고, 간악한 폐단을 철저히 가려내었다. 비록 늙은 아전이 죄가 있어도 그를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나이는 늙어서도 마음은 아이이니 갓을 벗으라.” 명하고 백발에 댕기를 메어 아동의 모습을 하고, 벼루를 가지고 안전으로 오게 하니 늙은 아전이 부끄러워 심히 괴로워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서 갑자기 이질에 걸려 돌아가니 나이 62세였다. 읍인들이 슬퍼하기를 친적같이 했다.
김계휘가 율곡에게 물어 말하기를 “형중(토정의 자(字))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이 제갈량에게 비유하는데 어떻습니까?” 율곡이 말하기를 “토정은 적용의 재목이 아닌데, 어찌 제갈량에 비유하랴? 물건에다 비유하면, 기이한 꽃이며 특이한 풀이고, 보배스런 새와 괴이한 돌이요, 무명이나 비단 또는 콩이나 벼같은 유가 아니다.” 하였다. 선생께서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콩이나 벼는 아니나, 또한 상수리나 밤 같은 종류이니 어찌 전혀 쓸모가 없으랴?” 하였다. 대개 선생의 성품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일은 또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상도를 따라 일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므로, 율곡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석담일기에서 발췌함).
선생께서 총명과 슬기가 근래나 예전의 누구보다도 뛰어나 제자박가를 널리 섭렵하여 천문‧지리‧의약‧복서‧음악‧수학‧지음‧관형‧찰색‧신방‧비결 등의 모든 종류까지 통달하여 깨닫지 못한 것이 없는데, 위로 누구한테 수학한 바도 없고 아래로 전수한 바도 없다. 선생의 신장은 보통보다 크고 골격은 건장하며 얼굴은 검으나 둥글고 풍만하다. 발 크기는 한자쯤 되며 눈의 광채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음성은 크고 명랑하되 말은 드물게 하고, 기품은 당당하고 위풍은 늠름하며 항상 평양자(패랭이)를 쓰고 짚신을 신었다. 일생을 거의 도보로 사방을 주류하며 명산대천을 찾고, 겸하여 풍속의 여하와 인물의 다과를 살피니, 그간의 기괴 특이한 일이 전파 된 것이지, 감히 억지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혹인의 기사에서 발췌함).
선생께서 평양자(패랭이)를 쓰고 거친 삼베 옷을 입고 도보로 조남명을 찾아갔다. 시자가 들어가 고하니 남명이 즉시 뜰 아래, 내려와서 맞아들여 대하기를 심히 공경히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야인이나 초부(나뭇꾼) 아님을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영접을 하시오?” 남명이 말하기를 “그대의 풍채와 기골을 내 어찌 모르리오?” 선생께서 스스로 말하기를 “성품이 능히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고, 혹은 바위틈에서 자면서 수일 동안 먹지 않아도 별탈이 없소이다.”
남명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기품이 이와 같은데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소?” 선생께서 용모를 여미면서 말하기를 “선생은 어찌 이와 같이 사람을 가볍게 보시오?” 하자 남명이 웃으며 사과하였다. 관상을 잘 보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새벽에 선생(토정)의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요사이 소미성 별빛이 점점 엷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지난 밤에 그 별이 갑자기 없어져 그대에게 재앙이 있겠으므로 특별히 와서 묻는 것이요.” 선생이 말씀하기를 “아! 내 어찌 감히 이러한 징후를 감당하리오.! 그러나 반드시 남명 조뢰사에게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얼마되지 않아서 남명 또한 졸하였다.(남명 사우록에서 발췌함).
중봉이 선생께서 바닷가에 은거하여 노닐면서 벼슬하지 않으심을 듣고 예를 갖추어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니, 선생께서 그 학문을 떠보고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자네의 덕기는 내가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닐세. 우리 동지 중에 이숙헌(율곡), 성호원(우계), 송운장(국봉) 세 사람이 있는데 다 학문이 고명하고 지극한 학행이 세상에 법이 될 만하며, 우리 조카 이산보(명곡)와 나의 제자 서기(고청)는 다 충성과 신의가 본받을 만하고 성의가 금석도 뚫을 만하니, 만일 이 다섯 사람과 더불어 오래토록 스승으로 또는 친구로 하면, 성현의 지위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였다. 중봉이 이 때부터 우계와 율곡은 스승으로 섬기고, 구봉과 고청은 반드시 절하여 뵙고, 명곡과는 우정이 심히 두터웠다.
중봉이 상소하여 파직한 후에 선생과 더불어 부여 장가 절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같이 두류산에 있는 고청을 찾아가서 조용히 강론하고 돌아올 때, 연산을 지났다. 선생께서 말을 채찍하여 빨리 달리므로 중봉이 그 이유를 물으니, 선생께서 동네 가운데 한 집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집이 바로 김 개 30] 의 집인데 정인(바른사람)을 해친 상황을 생각하여 나도 모르게 달려 지나간 것이다.” 하였다. 이 때 선생의 문하에 유복흥이 동행하였는데 선생께서 유에게 일러 말하기를 “자네들, 나로 인하여 금세의 일등 인물을 만나볼 수 있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중봉이 통진현감이 되었을 때 선생께서 배를 타고 찾아와 민심의 험악함을 말씀하며 조용히 몇 일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중봉이 부평으로 유배시 판서공 상을 당하여 선생께서 조문을 왔었는데, 그 때 하늘에 길게 뻗친 유성이 있었다. 중봉이 길흉의 징조를 물으니 선생께서 대답하기를 “긴 것은 느리고 짧은 것은 빠르니, 이 별은 마땅히 십오년 후에 닥칠 유혈이 천리에 뻗칠 징후이다. 십오년 전에 공이 만약에 옛 사람의 글을 많이 읽어 임금에게 재앙을 없애는 덕을 권하면, 거의 흉조가 길조로 변하여 백성이 그 혜택을 받을 것이다.” 또 말하기를 “근래에 윤자앙(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이 지은 포은의 유상을 보면 우리 친구와 흡사하니, 남의 신하와 자식이 되어 충성과 효도함이 만약 포은과 같으면 유감이 없는데, 다만 우리 친구는 빈궁하여 봉양할 자료가 없으니 이것이 염려된다.”고 하였다. (중봉의 아들 완도가 기록한데서 발췌함).
30]김개(金鎧) :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호는 독송정((獨松亭)이다. 1540년(중종 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와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1569년(선조2년) 앞서 기대승(奇大升)등이 기묘사화에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組)일파를 현자로 추대할 때, 조광조 일파를 비방한 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을 빼앗기고 시흥에 내려가 있다가 분사(憤死) 하였다.
선생이 소시에 서화담이 현철함을 듣고 책보를 싸 짊어지고 송도에 가서 낮에는 화담에게 수업하고 밤에는 객사에서 쉬었는데, 객사 주인의 처는 나이도 젊고 미색이 있었으며 그 남편은 행상으로 생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 처가 그 남편에게 장사하러 나가기를 권하여 그 남편이 물건을 챙겨 나갔다가 얼마되지 않아서 갑자기 의아스러운 마음이 생겨서, 밤에 몰래 돌아와 몸을 숨기고 엿보니, 그 처가 과연 선생의 침소에 들어가 갖은 교태를 부리고 음탕한 용모로써 유혹함이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선생께서 기침하여 일어나 앉아 의관을 갖추고 엄숙한 안색으로 인륜의 중요함과 남녀 간의 분별을 다 말하고 반복하여 가르치고 타이르니, 그 여자가 처음에는 비웃다가 다음에는 부끄러워 하더니, 끝내는 눈물을 흘리었다. 그 남편이 급히 서화담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집에 이런 일이 있어 지극히 기이하여 혼자 보기 아까우므로 감히 와서 고하는 것입니다.” 서화담이 나와서 엿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므로, 서화담이 즉시 들어가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자네의 학업은 내가 가르칠 바가 아니니 돌아가기를 원한다.” 하였다 한다.(박현석 사우록에서 발췌함).
이 선생은 한산이씨이며 가정(이곡), 목은(이색) 후예로 호는 토정이시다. 상품(上品)의 천성을 부여받아 청고명철하여 비록 궤범과 법도에 얽매이지 않으나, 스스로 능히 심수 오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사람들의 음성이나 얼굴만 보아도 바로 길흉을 알았다. 일에 임하고 위태함에 처하여 형체로 나타나기 전에 보며, 학문이 깊고 넓으나 또한 강론은 하지 않으며, 과거를 보지 않고 영리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형님 이판사 지번의 부인이 일찍이 태기가 있는 경사가 있었는데, 한 관상가가 토정에게 물어 말하기를 “공의 백씨부인이 산기가 가까워졌는데 혹시 조카를 얻는 기쁨이 있겠습니까?” 공이 말하기를 “어제 과연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일국의 정승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아느냐 물으니 말하기를 “그 우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다.” 하니 그 사내아이가 바로 아계(鵝溪) 이산해 정승이다.
또 윤 상사(上舍: 생원,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호칭) 준이 한 때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윤이 시를 보내어 판사에게 질의하였다. 판사가 극구 칭찬하니 공이 말하기를 “흉하게 끝날 사람의 시를 형은 어찌 지나치게 칭찬하시오?” 판사공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나이도 젊고 전정이 만리 같은 사람을 두고 너는 어찌 발언을 함부로 하느냐?”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훗날 마땅히 저의 말을 징험할 것입니다.” 하더니 기유년의 화 31]에 과연 저자에서 참형당하였다. 갑술년(1574년, 선조7년)에 서울 남소문동 인가에 와서 살적에 내가 가서 뵈었더니 마침 아침술을 마시고 얼굴이 붉으레하여 손으로 구렛나루를 만지며 말하기를 “이 병이 생긴 이유를 아는데 다만 심히 고통스럽구먼.” 또 말하기를 “사람들이 중용시를 말하여 이르되, ‘저 하늘의 명이여! 아! 심원하여 그침이 없다.!’ 하니 대저 하늘이 하늘 된 바를 말한 것이요, ‘아! 나타나지 않는가! 문왕의 덕의 순수함이여!’ 하니 대저 말하자면 문왕이 문(文)이 되는 바로서 순수함 또는 마지않음이라는 것이다. 집주(集註)에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끊임이 없는데 문왕은 천도에 순수해서 끊임도 섞임도 없는 것이고 끊임이 없다는 것은 중단함도 선후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조금 미진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대개 자사(子思)가 두번 시를 인용하여 천(天)과 문(文)이 천이 되고 문이 된 까닭을 물어 통합하여 단정지으며 말하기를 ‘이른바 순(純)은 곧 끊임이 없음을 이른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비록 다른 사람의 말을 인증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실은 스스로 자득하여 한 말이다.
31]기유년(己酉年)의 화 : 선조 말엽부터 조정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에 심한 암투가 있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이이첨 등의 대북파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의 우두머리이며 영의정인 유영경(柳永慶)에게 사약을 내리고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내었는 바, 이 때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었다.
보령에서 서울을 올라올 때 식량을 싸 가지고 오지 않고 깊은 겨울에 눈 위에 누워 있어도 추위를 타지 않았다. 그 막내아들 산휘도 또 소리를 듣고 아는 예지가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사람이 와서 공에게 먹을 빌리려 하였는데, 그저 말없이 공이 거문고를 타니 산휘는 먹을 가지고 나갔다. 하루는 또 거문고를 타는데 뜻이 노중연에 있었다. 산휘가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노중연을 생각하십니까?” 하였다.
공이 아산에 계실 때 역질에 걸려 항상 구통하며, 손으로 놋술잔을 두드려 산휘에게 듣게 하니, 산휘가 거짓말로 말하기를 “소리가 심히 좋으니 아버지께서 반드시 편안히 나으실 것입니다.” 하고 대문밖에 나아가서 발을 구르고 가슴을 치며 속으로 흐느끼더니, 공이 과연 일어나지 못하였다.
오호라! 이분들 부자간은 가히 보기 드문 기이한 선비로다.(태천의 기록에서 발췌함).
정 북창과 이 토정은 다 특이한 사람으로 칭하여졌으나, 그 평생의 행적을 보면 실로 인륜에 독실한 사람들이다.
맑은 강 백구의 주변에 맑은데
백구는 맑은 강 가에서 희구나.
맑은 강은 백구의 흰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백구는 길이길이 맑은 강가에 있구나!
선생께서 소를 타고 낙동강을 지나는데, 그 때 경상도백이 마침 부하들과 뱃놀이를 하다가 소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초대하였다. 용모를 보고는 마음으로 심히 이상히 여겨 묻기를 “그대는 시를 잘 짓는가?” 대답하기를 “문자를 대강 압니다.” 도백이 세 변(邊)으로 운을 부르니, 선생이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 이것이 그 시로서 이 이야기는 상주의 윤씨라는 선비의 잡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실인지 아닌지 자세하지 않으므로 끝에다 기록하는 바이다.
만력 육년 무인(1578년, 선조 11년)에 승정원과 경연관인 홍적이 증직을 청하니, 3공들이 아뢰기를 “이지함은 세상의 호걸스런 사람이니 김범32]의 관례 대로 시행하라.” 하였는데 이 때 국가에 일이 많으므로 겨를이 없었다. (정원일기에서 발췌함).
선생이 정덕(명나라 武字의 연호) 12년 (1517년, 중종 12년) 정축 9월 20일에 나시어 만력(명나라 神字의 연호) 6년(1578년 선조 11년) 무인 7월 17일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보령현 서고만 산기슭 선영 우변에 있다. 토정터는 지금 서울 마포에 있고, 서원은 보령현 동쪽 청라동에 있다.
지금 상감(숙종) 의 11년(1685년)을 축에 호서의 선비들과 진사 최문해 등이 글을 올려 병인년(1686년, 숙종 12년) 3월에 「화암서원」 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32] 김범(金範) : 명종 때의 학자. 호는 후계(后溪), 본관은 상주이다. 10세때 시를 잘 지어 이름이 알려졌으며 진사시에 장원,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으나 사퇴했으며 그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옥과현감이 되었다. 이 해조식(曹植)과 함께 조정에 들어가 학문․정치에 관해 진언한 바 있다.
부 록
서원건축을 알리는 통문
선생이 지어 보인 「과욕설」과 또 「계주」(술을 경계함)를 보고, 한 말로 감히 내 뜻을 서술하노라.
혼연히 밝은 천명을 받아 본래 사심이 없는데
형체와 기운은 사람에게 질곡될 수 있네.
욕심이 적은 데에 도달했을 때가 비로서 공부에 득력한 것이요
마음은 조금이라도 방탕하면 후에 문득 위태로움 이루네.
광란과 지수(잔잔한 물)가 서로 다른 물건이 아니요.
사나운 말과 날카로운 칼날은 지니기 쉽지 않으니
성품이 편벽하여 가장 이기기 어려운 곳에,
말 한마디도 끝까지 엄격한 규범 저버리지 않았네.
고 제 봉
병자년(1576년, 선조9년) 겨울에 선생이 보령으로부터 배를 끌고 순천에 도착하여, 배를 놔두고 도보로 정송강의 서하루(棲霞樓)를 찾았으며 드디어 서석산에 올라 증심사에서 엿새를 머물렀다. 증심사로부터 나의 설죽와(雪竹窩)를 지나다가 밤을 새우며 담화하고, 이튿날 내가 재호(집이름)를 청하니, 선생이 「불이재」(不已齋)라 지어 주었는데, 대개 ‘천명불이’의 뜻에서 취한 것으로 내 이름에 명(命)자가 있기 때문이다. 선생에게 「불이재」 명사(銘辭)를 청하려던 참인데 선생께서 떠나셨다. 또 단율 한 편을 지어 선생께 드렸다.
영걸스런 노인네 세상 바로 잡을 수 있고 고결한 인품 진나라 송섬 33]과는 다르다네.
다만 바다로 들어갔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소금밭에서 천거됨을 보지 못했네.
이미 벼슬길의 구속을 벗어 버렸으니
어찌 물색(초상화)으로 찾는 이 있을까 보냐?
남녘 하늘 운무 속에
부질없이 소미성34] 점만 치누나
고 제 봉
안면도를 지나다가 토정선생을 생각하다.
안면도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겹겹이 산이 막혔는데
문득 선생이 생각나 두 줄기 눈물이 흐르네
이제부터라도 분명히 역사를 바르게 써야 하는데
어찌하여 천고에 원수로 삼는지?
고 제 봉
33]진나라 송섬(宋纖) : 진(晋)나라 돈황 사람. 시호는 현허선생(玄虛先生)이다. 주천(酒泉) 남산에 숨어 살았다.
34]소미성(少微星) : 소미성은 처사(處士)의 자리에 있다하여 일명 처사성이라고 부른다.
보령 도중에서 토정선생을 생각하다 석인(碩人)과 천리길을 옛날엔 같이 노닐었는데,
나에게 종신토록 과오가 적기를 바라시었네
오늘날 다시 와 선생님 생각뿐 뵈올 수 없으니
가련하도다. 누가 백성 구제할 계책 세울고
조 중 봉
서원영건통문(명곡선생도(李山甫) 같이 배향)
토정선생이 있었는데 실로 한 세상의 위인이었다. 식견이 고매하여 천도와 인도를 관철했고 깊이 멈추고 멀리 떠나 마치 규범에 벗어난 것 같으나, 그 분의 행실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정말로 철저히 규범을 지킨 분이다. 그 조카 명곡(鳴谷)선생이 토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경적(經籍)에 전력하여 덕행을 갖추었고 포리가 순수하여, 평생동안 마음 가짐과 사람을 대할 때 한결같이 성실무위하니, 친소와 노소와 현우와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다같이 깊은 인술과 큰 도량속에서 얻어져서 이해에 임하여 대의를 잃지 않고 엄연히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만약 성인(공자)의 문하에 계시어 사친(事親)에 힘을 다하고 사군(事君)에 몸을 다 받쳤다면 자하(子夏)가 반드시 ‘불학(不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른바 백리의 다스림을 맡기고 미숙한 임금을 부탁할 만하다는 것에 또한 부족하거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아! 이 두 현인들이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그 유풍과 여택이 사람에게 미친 것이 깊어서 가히 잊어서 없어지지 못할 것이 있으니 고을의 선생님이 돌아가시어 가히 제사를 받을만한 분이 실로 이러한 분이 아니겠는가?
이 두 현인들이 돌아가신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그 유품과 여택이 사람에게 미친 것이 길어서 가희 있어서 없어지지 못할 것이 있으니, 고을의 선생님이 돌아가시어 가히 제사를 받들만한 분이 실로 이러한 분이 아니겠는가? 실로 이러한 분이 아니겠는가? 우리 몇몇 제자들이 사우 건립을 도모하여 뜻이 있는 사람이 덕을 닦고 학문을 익히는 곳으로 하고져하나 힘이 부족하여 장차 성사시킬 수 없을까 이것이 두렵도다.
옛 사람은 혹 백대 후와 천리가 떨어졌어도 서로 교감을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호중의 제우들은 이 두 어른과 지역도 서로 가깝고 삶도 또한 같은 때였으니 혹은 반드시 보아서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듣고 사모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백대가 지나고 천리가 먼데 비하면 느낌의 깊고 얕음이 마땅히 어떻할 것인가? 재력을 판출하여 이 일을 도울 것을 생각하니 약속하지 않아도 모두 동참하리라 여겨진다.
정 수 몽
춘추제향 축사
지극한 행실 고매한 지식은
삼대(夏假周)의 인물이시며
덕을 보면 마음까지 취하고
풍도를 들어도 또한 뜻이 선다네
정 수 몽
서원 사액 제문
현재 임금의 12년(1686년, 숙종 12년) 병인 3월 을묘삭 18일 임신에 국왕이 신하 예조좌랑 이적을 보내어 옛 현감 이지함과 충간공 이산보의 영령에게 사액제문을 내리노라.
명종 선조때 아름다운 기상이 충만하여 하늘의 상서로움 헛되지 않아
사람에게 모아져 국가의 빛이 되고
휼륭한 명현들 아래에서 세상을 돕네
덕을 쌓아 드높이니 평범치도 쏠리지도 않네
기이하고 탁월함은 삼대(夏假周)의 인물일세.
뜻과 기상 신과 같고 어름처럼 달처럼 깨끗하네
어찌 천품만 아름다우랴? 도학을 탐구했기 때문이지
주경공부로 근본삼고 내 몸을 돌이켜 보는 것을 실천했네
지혜는 만변을 대처하고 행실은 신명을 꿰뚫었네
큰 선비와 절차탁마하니 소강절과 정명로 사이 같도다.
이미 도학의 오묘함 연구하고 아울러 모든 예능도 통달했네
때로는 그 실머리 드러냈으니 경제에도 밝았네
맑은 바탕에 다듬지 않은 글 그 자취 넓고도 기이하여라
혹은 상도에 어긋난듯하나 족히 진의를 징험할 수 있네
신속하게 누차 천거되어 파격적으로 군수직 받았네
백리고을 다스리니 백성들 말하기를 부모같다 하였네
세상이 밝고 융성하면 많은 선비들 조정으로 모이련만
때를 만나지 못했으니 홀로 깊은 정절 지녔네
천연스레 굴레를 벗어 참다움 찾았으니 건곡은 좁았고 만물은 가벼웠네
바람처럼 거닐고 구름처럼 자취 거두니 무어라 이름지어 부를 수 없고
용과 같이 놀고 봉황처럼 날으니
뉘라서 능히 새장을 씌울 수 있으랴
또한 저 탁월한 충간공은 훌륭한 그 가문에서 출생하였네
어릴 때 마음 잃지 않아 화목하며 후하고도 깊었네
일찍 가르침 이어서 몸소 독실히 학문에 매진했네
오직 선할 뿐 악의가 없는데 좋은 때 만나지 못했네
비록 공자의 문도와 견줘도 충직과 신의는 부끄러움 없으리
조정에 나아가면 앞길이 크게 열릴 수 있었으리
정색과 넓은 도량으로 화평하면서도 굳센 의지 갖추었네
선에 감동받은 자 흥기하고 덕화를 본 사람 감복하네
비록 시기하는 사람도 혹시라도 흠잡고 흉보지 못했네
때마침 문성공(율곡 이이) 이 터무니없는 모함을 당하자
임금 앞에 나아가 항변하여 거짓임을 통렬하게 아뢰었네
임금께서 깊이 받아들여 사림을 붙들었고
임진란을 만나 임금이 서울을 떠나자 더욱 도움이 많았으니
재상에 발탁되어 은혜와 배려함이 날로 깊었다네
충성과 의리로 분발하여, 오직 나라만 있을 뿐 자신은 돌봄이 없었네
강개하여 눈물을 닦으니, 중화인(명나라)을 감동시켰도다.
나라를 중흥시킨 업적에는, 공의 공적이 들어 있다네
여러모로 분주하여 피로가 쌓여 끝내 충성으로 임종하였도다.
한 가문내에 같은 시기에 큰 철인들 많기로 하여라.
나는 매범 바라보면서, 그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였네
저 호서의 고을을 바라보니, 바로 그의 고향일세
유림과 사대부들 흥기하고 존모하여, 사우 지어 영령 뫼시네
두 분 (토정, 맹곡) 함께 배향하니, 세상에 빛이 있고 위대하도다.
엄연한 업적과 향기, 지금 수십년이 지났네
이 간곡한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을 내리네
멀리 제주(祭酒)를 하사하여, 나의 깊은 마음을 펴는 바이오
지제모 서종태는 지어 바치다.
제 토정선생문
쓸모없는 나무 빽빽한 사이에 큰 춘양목 빼어났고
잡초 더부룩하게 난데서 영지와도 같으시네
토정 선생의 탄강하심은 실로 빼어난 기가 뭉친 것이네
맑은 물 밝은 달 같은 마음이요
대갱(大羹:양념 안한 국물) 같은 정신이었네
충직과 신의는 사람 감동케하고, 효도 우애는 신명에 통했네
밖으로 해학하고 속으로 밝아 풍진 세상을 희롱하며
몸차림에 구애치 않고 벼슬도 하찮게 여겼네
업무처리에는 시원스럽게 하고 막힘이 없었네
얻음과 잃음, 영예로움과 욕됨, 모두 끓는 물에 눈 녹이듯 하고
듣고 보는 것 등 취미와 모든 욕구에 담담하기만 하였네
다섯 수레의 많은 글 어디에 쓰랴?
촌철(寸鐵) 같은 굳은 마음 간직하였네
나를 알아주는 사람 비록 드무나 더 쌓으면 반드시 발복되리
왕께서 너에게 맡긴다고 말하여, 나아가 백리고을 맡았네
어린 백성과 노복과 관리들까지 다 같이 추대하고 즐거워 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룻 밤에 달빛이 소미성(少微星 : 어진 선비) 침범하여,
춘양목 꺽이고 지초 말라 떨어져, 밝은 해도 빛을 잃었도다.
아아! 선생께서 여기에 그칠 것인가?
성대하고 충만한 기상 유유히 흩어져 어디로 갔는고
내 비록 후에 태어났지만 일찍이 버림 받지 않았네
속마음 서로 통하여 학연하여 막힘이 없었네
선생께서 나에게 경계하기를 사람들 여망을 이지러 트리지 말게나
나도 선생께 권고하기를 조금 거친 행동 자제하여 주십시오.
서로 선으로써 권하여 만년에 공 세우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으니 내 슬픈 마음만 북받치네
빈소에도 가지 못하고 장례에도 회장도 못했네
남녘 하늘 까마득한데 비바람 쓸쓸하기도 하여라.
글로 슬픔 적어 멀리에서 작은 정성 드리니
영혼이라도 감응하여 혹시 강림하시려는지?
이 율 곡
제 토정 선생문
만력 8년(1580년, 선조 13년) 경진 윤4월 기해삭 13일 신해에 후학 은천 조헌은 감히 토정 이선생의 영전에 고하나이다.
오호라! 선생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나라가 의지할 곳이 있고 백성이 의지할 곳이 있으며 도가 의탁할 곳이 있고 선비가 귀속할 곳이 있더니, 이제 선생께서 돌아가시었으니 나라에 삼강의 기둥이 없고 백성이 사유(四乳)의 소망 35]을 잃었으며, 도학이 따라서 적막하고 후학이 지향할 곳이 없습니다. 나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의문이 있으나 누구를 우러러 질정하며 과오가 있으나 누가 경계해 주리요? 그렇다면 선생께서 서거하심에 어찌 제가 목을 놓아 통곡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리요
오호라! 선생께서 태어나신 것은 참으로 하늘이 명한 것이라네. 자품이 이에 특이하여 미리부터 완전히 배양되었고, 경학을 연구하여 통달하지 못하면 놓지 않으며, 총명이 뛰어나 공이 배나 있었네. 조예가 아주 깊어 도리가 내 몸으로 말미암아 나오며, 성현의 격언이 다 가슴속에 있네. 일찍이 서울에 올라가 형님과 사이 좋았더니 “어려운 때를 만나 우리 벗이 돌아갔네” 하시네. 기미를 보고 벼슬길 떠나 강해에 은둔하여, 밭 갈고 토담 쌓으며 양식이 떨어져도 뉘우치지 않고, 오직 효도와 우애에 정성과 마음을 다하였네.
어버이 묘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몸소 토석을 져나른 것은, 천추만세에 오직 조수로 파괴될까 두려워 함이요, 제방을 쌓은 것은 재물을 불리기 위함이 아니었네.
비록 남들의 말썽이 있으나 인자의 허물인가?
형님의 병환을 듣고 천리를 멀다 하지 않으니, 요컨대 편안히 살피기 위하여 누차 옮기고 누차 곤경을 겪었다네. 쇠잔한 포천을 소생시킨 것은 나의 영달 위함이 아니었고, 형님 상사를 스승같이 하여 삼년동안 거친 밥을 드셨네. 중형님 일찍 서거함에 시체 안고 통곡하고, 아버지 여인 조카 다독거리고 자손들 고양했네. 형수님 상사에 서러움 절절한데 조카마저 병이 위독하자 병을 무릅쓰고 부지런히 구휼하니,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깨어났네.
남에게 착한 일이 있는 것을 들으면 목마른 듯이 달려가 보고, 남이 궁핍한 것을 보면 나누어 구휼해주고 사욕을 버리고 의리를 좋아하니 나라에 있으면 반드시 통달할 것인데 왕의 부름을 누차 사양하니 고상한체하기 위함이 아니었네. 조정이 혹시라도 어긋나면 근심이 얼굴에 나타나고 왕에게 덕이 되는 말이 있으면 기쁨이 얼굴에 나타났네. 만년에 아산현감에 부임한 것은 백성의 어려움 구제하기 위함이었네. 홀로 수레타고 수행원도 마다하고, 아무리 먼데도 못 가는 곳 없으며, 병폐를 강구하여, 정사는 의지할데 없는 사람 우선했고, 강물고기도 살리는데 하물며 백성이야 말할 것이 뭐 있나? 교활한 아전과 관속들 손 못쓰게 하여 간계를 영원히 끊으니, 몇 달 되지 않아 원근이 모두 심복하고, 구김살이 퍼져서 백성들 모두 복 받은 것 같았는데, 어찌하여 한가지 병환이 뜻을 거두고 돌아가시게 했는고! 동네마다 곡소리 들리고 사람들 하늘이 빨리 빼앗아간 것 원망하였네. 얻어먹는 여자로 제물 올리고, 상여메는 인부들 멀리서도 끌어당기네. 하늘같이 길고 땅같이 오래도록 받은 사랑 잊기 어렵도다.
오호라! 선생께서 여기에서 그치시나이까? 제가 우매한 사람으로서 느즈막히 호중에서 배알할 때 끔찍이도 장려해주시어 누차 왕림을 꺼리지 않으셨네. 안면도 명승도 찾으셨고, 두류산까지 멀리 심방하시어 뫼시고 함께 동행하였네. 모든 일에 이치가 밝아 모든 동정과 행위가 교훈이 아닌 것이 없었네. 내가 둔한 것을 개탄하여 십년을 최음같이 하셨네. 통진에 목민관 되어 생각도 짧고 재주도 없었네. 일엽 편주로 오시어 천가지를 가르쳐 주셨네. 강가의 집으로 찾아가 뵈 올 때 백성의 우악스러움 한탄하고, 만일 벼슬 버리지 않으면 큰 재앙 반드시 이를 것이라 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과연 그러하니, 선견지명은 신과 같으시네. 유배중에 상사를 당하여 공산에 비통할 때 필마로 먼길 오실 적에 눈물이 앞을 가리었네. 보신의 방법과 효도하는 도리를 예를 근거하여 부지런히도 깨우쳐주셨네. 나로 하여금 몸을 다치지 않게 하셨는데 어찌 이날이 영결이 될 것을 알았으리요? 후덕한 용모를 생각하니 남쪽을 바라보며 통탄하네. 경세의 뜻은 오호라! 그만인가? 육영의 계획은 영원히 바랄 수 없나? 인자(仁者)는 반드시 오래사는 법인데, 어찌 여기에 그치셨는고? 벼슬도 덕에 못 미치니, 하늘도 믿을 수 없구나. 인자는 뒤끝이 있는 것인데, 아드님 상사가 웬말인가? 길러 준 호랑이가 효자를 헤친다더니 36] 하늘도 믿을 수 없도다.! 아! 슬프도다.! 시국인가? 운명인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누가 다시 나를 사랑하리요? 찾아와 뵈워도 지극한 말씀을 듣기 어려워 묘하에 배회하니, 숙초만 무성하구나. 영원히 모습을 뵈올 수 없으니 통탄하고 사모하여 견디기 어렵네. 통탄사모한틀 어찌할 길이 없어. 서투른 제문지어 하직하고, 닭가 술로 저의 작은 정성을 드리오니, 오호라! 선생께서는 저의 충정을 받아주시옵소서.
조 중 봉
35]사유(四乳)의 소망 : 고대 중국의 주(周) 文王은 4개의 젖이 있었다고 하는 바, 이는 크게 어진 사람에게 있는 특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크게 어진 사람에게 거는 기대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36]길러 준 호랑이 효자를 헤친다더니 : 잘 길러 준 호랑이가 착한 효자를 몰라보고 헤치는 경우가 있듯이 험악한 운수가 어진 사람을 헤쳐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음
묘갈명(병서)
숙부의 휘는 거함이요, 자는 형중이다. 사시던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하고 정자를 짓고서 스스로 호를 토정이라 하니, 곧 우리 선친의 아우이시다. 소시에 부친을 여의시고 우리 선친에게 배우셨다. 장성함에 모산(毛山) 수령 정랑(呈琅)의 사위가 되어, 혼례 지낸 이튿날 나갔다가 저물게 돌아왔는데, 집안 식구들이 알고 보니 새로 지은 도포가 없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홍제교를 지나다가 얻어먹는 아이가 꽁꽁 얼은 것을 보고 도포를 베어 나누어서 세 아이를 입혔다하니, 듣는 사람이 특이하게 여겼다.
평소에 독서는 드물게 했으나 책을 펴면 반드시 낮부터 밤까지 하더니 광릉 시골집에 나아가 종을 보내어 등불 켤 기름을 구하였다. 모산(毛山)이 제지하여 말하기를 , “사위가 독서를 즐김이 지나쳐 몸을 상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도끼를 가지고 산중에 들어가 솔공이를 베어 온돌에 때니, 연기가 자욱하고 방이 뜨거워 사람들은 모두 피하는데, 공은 홀로 단정히 앉아 게을리 않기를 일년 남짓하여, 경전과 제자 백가의 서적을 관통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윽고 붓을 들어 글을 쓰니 문장이 물이 솟구치듯 산이 솟아나듯하여 장차 과거를 보려하였는데, 이웃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천하게 여겨 도리어 그만두었다. 후에 비록 과장에 들어갔으나 글을 쓰지 않고 썼어도 내지 않으니 사람이 그 까닭을 힐난하자 말씀하시기를 “사람마다 각각 좋아하는 것이 있는 법, 나는 스스로 이것을 즐거워하여 그만두려해도 그만둘 수 없다”하니 대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은 것이다.
하루는 우리 선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제가 처가의 운세를 보니 길한 기수가 없어 떠나지 않으면 화가 장차 저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셨는데, 익년에 과연 화가 생겼다. 이미 돌아오시어서는 선산이 바닷가에 있으므로 먼 훗날 조숫물이 덮칠까 두려워하여 장차 제방을 쌓으려하니 수천석 곡식의 비용이 아니면 불가능 하므로 어염의 장사로 이윤을 취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소득이 있는 것을 혹은 불태우기도 하고 혹은 산같이 쌓아놓았으면서도 처자가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배를 만들어 바다를 평지와 같이 향해하여 모든 국내 산천을 아무리 먼 곳도 가지 않은데가 없고, 아무리 험한 곳도 가지 않은데가 없어 혹은 몇 해를 가신 곳을 알 수 없는 때도 있었다.
평생동안 우애에 돈독하여 스스로 멀리 떠나지 않아 일찍이 하루도 따로 거처하지 않았다. 제사에 정성을 극진히 하고 주문공의 가례대로 다 따르지 않고 선친 섬기기를 살아계신 부모 섬기듯 하였고, 사람을 접할 때는 봄볕같이 따스하고 스스로의 최신은 천 길 절벽 위에 서 있는 듯이 하였다. 평소 아들, 조카들을 가르칠 때 여색을 가장 경계하여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엄격히 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 하였다.
더욱 ‘극기공부’에 힘써 굶주림을 참을 때는 열흘 동안 화식을 하지 않고, 목마름을 참을 때는 한 여름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으며 노고를 참을 때는 도보로 발이 부르트셨다. 속세에 섞여 종적을 감추고 자취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가끔가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떨어진 평양자(패랭이)를 쓰고 거친 갈옷을 입고, 나막신 신고 나무 안장을 한 채 관공서와 시내에 들어가니 사람마다 손가락질을 하며 웃지 않는 사람이 없어도 오히려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학문은 항상 주경(主敬) 궁리(窮理)로써 독실히 실천함을 우선시하여 항상 말씀하시기를, “성인도 가히 배워서 가능하다. 오직 근심거리가 있다면 자포자기하여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고, 그 의리를 논의 하고 시비를 분변함에는 광명 준엄하고 통창하게 발휘하며, 다른 물건을 인용하고 예를 들어서 호리도 어긋남 없이 분석하여 사람마다 경청하고 흠복하게 하였다. 혼탁한 사람은 밝아지고 의혹된 사람은 이해하고 취해있는 사람은 깨어나게 하니, 그 후학에 미친 혜택이 또한 많았다.
재주는 족히 한 때를 바로 잡을 수 있는데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고, 행실은 족히 세속에 모범이 될 만한데 세상이 표본으로 하지 않고, 지혜는 족히 미미한 것까지 밝힐만한데 세상이 알지 못하고, 도량은 족히 무리를 포용할 수 있는데 세상이 헤아리지 못하고, 덕은 족히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는데 세상이 준중하지 않고, 다만 그 밖으로 나타난 것만 보고, 혹은 고인일사(高人逸士) : 재주가 뛰어난 숨은 선비)라 하고, 혹은 높고 높아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하니, 이것이 어찌 우리 숙부를 알았다 할 수 있으며, 우리 숙부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백리고을을 맡아 다스리면 빈곤은 가히 부유하게 하고 각박한 인심을 가히 돈후하게 하며, 혼란은 가히 다스려져서 족히 보장할 수 있다.” 하시더니 말년에 한번 나아가신 것은 뜻이 대개 여기에 있었던 것인데, 불행하여 병환으로 관직에서 돌아가시니 하늘인가? 운수인가? 수는 62세이며 선조부 묘소 우측에 장례뫼셨다.
아들이 넷인데 다 요절하고 손자는 이름이 거인인데 아들 둘을 낳았다.
내가 일찍이 스승을 찾아가지 못하고 가정에서 배워서 비록 많이 배워 성취하지 못했으나, 그 문호를 유지하고 죄악에 빠지는 데에는 이르지 않은 바가 다 숙부께서 가르쳐주신 덕택이다. 울면서 명사를 지으니 명사에 가로되,
아! 하늘의 낳으심이 우연이 아닌가? 우연인가?
우연이면 어쩔 수 없지만 우연이 아니면
어찌 여기에 그칠 수 있으랴?
현달함은 진실로 원하는 바가 아니요
궁해도 스스로 즐거워하였네
성인도 가히 배울 수 있으며 극기도 능히 하였네.
거만한 듯하면서 공손하고, 화통한 것 같으면서 반듯하셨네.
황홀 좌우하여 사람들이 능히 헤아리지 못하네
만년에 한 번 일어나 조금 베풀려 하였는데
또한 마무리짓지 못하니 하늘이여 가히 슬프도다.!
조카 산해
을유년(1705년, 숙종31년) 6월에 판윤 민진후가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옛 이지함은 곧 선조조에 명성이 높았던 사람입니다. 선대의 바른 신하 조헌의 상소에서 이이와 성혼과 더불어 함께 거론하여 진술하기를 세 사람의 학문은 성취한 바가 비록 같지는 않으나 그 마음이 맑으며 욕심이 적고 지극한 행실이 세상에 모범이 되는 것은 같다 하고, 또한 여러 선현들을 포양하는 준례를 들어 벼슬을 종직하고 시호를 내려 각박한 풍속을 도탑게하고 나약한 사람을 뜻이 서게 해야 한다고 청한 바 있습니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년, 선조11년)에 승정원과 경연관 홍적(1549~1591, 선조 때의 문신)이 또한 증직을 청했고, 삼공(三公)이 장계로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때 국가에 일이 많아 경황이 없었다는 것은 선배들의 저술과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아직도 포양과 종직을 내리지 않은 것은 실로 성상의 조정에 흠이 될 것이니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의 뜻은 어떠하오?” 우상 이유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은 건의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포양 종직의 은전이 빠져서 거행되지 않았던 것이니, 지금 만약 허락하는 명령을 내려 시행한다면, 어찌 성상의 조정에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판윤 민진후가 말하기를 “이지함은 벼슬이 현감에 그쳤으나 실로 차원이 높은 사람이니, 그 기절특이한 행적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 많이 있고, 또 조헌같은 헌인으로서 평생에 허여한 사람이 적은데, 그 칭송함이 이와 같으니 또한 가히 명현이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포양과 종직의 거행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해당관서에 분부하여 거행함이 옳다.”고 하였다.
계사(1713년, 숙종 39년) 5월 23일에 임금이 불러 접견할 때 예조판서 김우항의 장계에 “옛 현감 이지함은 선조조 명신입니다. 선정신 조헌의 상조 중에 선정신 이이와 성혼과 함께 칭하기를, 세 사람의 학문은 성취한 바가 비록 같지는 않으나, 그 마음이 맑고 욕심이 적으며 지극한 행실이 세상에 법이 됨은 같다 했고, 또 제현을 서원에 배향하여 포양하는 예를 들어 증직과 시호를 내려서 각박한 풍속을 도탑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뜻이 서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조헌같은 현인으로서 평생에 허여한 사람이 적었는데 그가 칭송한 말이 이와 같으면 가히 명현이 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을유년에는 판윤 민진후가 진정하여, 포양하여 증직할 것을 경연에서 청하자 이에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대신 또한 시행하기를 청하여 해당관서에 분부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지함은 세간에 드문 선비라, 가히 증직으로 그칠 것이 아니다. 특별히 역명지전(易名之典 : 시호를 내림)을 시행함이 당연할 것 같사오니, 다시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어떠하오?” 하니 영상 이유가 말하기를 “예판이 아뢴 바가 옳습니다. 이지함은 실로 세간에 드문 인재이며 선배들이 추허하여 범범히 하지 않았던 바인데, 이와같은 사람을 아직까지 포양하고 증직하는 절차에 빠트렸다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니 특별히 증직과 함께 내리심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좌상이 말하기를 “이지함은 명종 선조때 명인이며, 다만 조헌의 말 뿐만이 아닐, 선정들이 추허하지 않은 이가 없어, 사림이 지금까지 존중하고, 전번에 증직의 하교가 있었는데, 해당관서에서 아직도 거행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와 같은 사람은 증직으로 그치는 것을 불가하니, 특별히 시호를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시호를 내림이 옳다.” 라고 하였다.
시장(諡狀 : 시호를 받기 위한 글)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성균관 좨주 세자 시강원 찬선 행 선무랑 아산현감 이공의 시장(諡狀)
선생의 휘는 지함이요 자는 형중이며 자호를 토정이라 하니, 살던 집에 흙으로 쌓아 정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산 이씨에 대대로 명망이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가정 시호는 문효공 휘는 곡과, 목은 시호는 문정공 휘는 색이다. 이들 부자가 고려조에 벼슬하여 크게 이름이 나니, 가정은 바로 선생의 7대조이다.
문정이 휘 종선을 낳으니 본조에서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양경인데, 성품이 지극히 효도했고 집터에 정포비가 있다. 찬성이 휘 계전을 낳으니 부원군으로 증직이 영의정이요 시호는 문열이다. 문열이 휘 우를 낳으니 대사성으로 종직은 참판이며, 참판이 휘 장윤을 낳으니 현감으로 증직은 판서이다. 판서가 휘 치를 낳으니 현령으로 증직은 좌찬성이니 곧 선생의 선고이다.
정덕(正德:명 무종의 연호) 12년 정축(1517년, 중종 12년) 9월 20일에 선생이 태어나니, 나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기상이 맑으며 성음이 크므로 보는 사람이 기이하게 여겼다.
소시에 선친이 돌아가시어 그 형님 성암공에게 배우더니 장성하여 모산고을의 군수 정랑의 문중으로 장가 갔다. 초례를 지낸 이튿날 밖에 나아갔다가 저물게 돌아왔는데 집안식구들이 새로 지은 도포가 없어진 것을 보고 캐물으니, 얻어먹는 아이가 추워하는 것을 보고 잘라서 세 아이를 입혀주니 도포가 다 없어졌다고 하였다.
평소에 독서할 때 낮부터 시작하여 밤을 새우더니, 광릉 시골집에 나아가 종을 보내어 들불 켤 기름을 가져오라 하니 모산이 만류하여 말하기를 “사위가 글을 즐김이 지나치니 몸이 상할까 두렵다.” 하므로 이에 도끼를 가지고 산중으로 들어가 솔공이를 잘라 방에 때었다.
연기가 자욱하고 불이 뜨거워 다른 사람은 모두 피하는데, 선생께서 단정히 앉아 게을리 하지 않은 지 일년 여에 여러 성인의 책과 백가들의 글을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글을 쓰니 문장이 물같이 솟구치고 산 같이 솟아 나왔다. 장차 과거를 보려하였다가 이웃에 과거 합격을 기뻐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천하게 여기었다. 훗날 비록 과장에 들어가서도 글을 짓지 않고, 지었어도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면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즐긴다.”고 하였다.
하루는 성암공에게 말하기를 “제가 처갓집을 보니 길한 기색이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입니다.”하고 처자를 이끌고 보령에 가서 살았는데, 그 이듬해 처가가 과연 화를 만났다.
부모님을 장례뫼실 때 묘자리를 보고 마땅히 두 정승이 나올 자리이나 막내 아들에게 불리하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바로 막내로서 강행하여 스스로 그 재앙을 감당했다. 후에 조카 아계 산해와 충간공 산보가 벼슬이 일품에 이르렀는데, 선생의 아들은 요절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선생이 항상 말하기를 “내 자손이 지금은 비록 시원치 않지만 훗날 반드시 많아지고 현달한 자손도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친산 묘소가 바닷가에 있어 먼 훗날 조수가 휩쓸까 두려워하여 제방을 쌓으려하니 천만금이 아니면 불가능함으로 인하여 장사로 소금과 생선을 판매하여 하지 않은 것이 없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해이하지 않으니 효성에 돈독함이 이러하였다. 그 후 어느 해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개연히 만인을 구제하기 위해 각 지역마다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하여 수익된 곡식이 산 같이 쌓였는데 다 빈민에게 흩어주면서도 처자들은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일찍이 넓은 집을 지어놓고 추워하고 얻어먹는 사람을 모아놓고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쳐 각자 자기의 의식을 조달하게 하고, 가장 무능력한 사람에게 볏짚을 주어 짚신을 삼게 하니, 하루 일을 하며 모두 다 쌀을 한 말씩을 팔 수가 있었다.
백씨와 중씨와 우애가 돈독하여 멀리 떠나 있을 때가 아니면 하루도 서로 다른 곳에 있는 적이 없었고, 제사는 반드시 주문공(주자)의 가례대로 정성을 다하고, 선친 섬기기를 살아계실 때 섬기듯이 하고 자손들을 가르칠 때 여색을 가장 경계하라 이르며 말씀하시길 “이런 것을 엄격히 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도 없다.” 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가셨는데, 제주 목사가 그 이름을 듣고 관사로 영접하여 예쁜 기생을 택하여 수청을 들게 하면서, 창고의 곡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만일 이 분을 잘 뫼실 수 있다면 이것으로 상을 주겠다.”하여 기생이 기필코 마음을 혼란시키려고 밤이 새도록 갖은 아양을 떨어도 끝내 범하지 못하니, 제주 목사가 더욱 공경하였다 한다.
성암공이 서울에 계시어 병환이 났는데 보령으로부터 걸어가 뵙고 성암공이 돌아감에 스승의 도리가 있다 하여 심상 삼년 하였다. 선생께서 자신에게는 엄격하기가 천리 벼랑 끝에 선 것 같이 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화기애애하며, 남의 한 가지라도 착한 것을 들으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가 보았다.
안명세라는 사람이 죽은 것은 그 죄가 아니라 하여 추도해 마지 않았으며 박춘무는 고요히 자기 분수를 지키고, 서치무는 은거하여 도리를 즐기니, 선생이 항시 권면하여 성취하게 하였다.
선생이 남다른 기품을 타고 나시어 극기공부에 힘을 쓰시어 한서와 기갈도 능히 침입하지 못하였다. 혹은 추운 겨울에도 맨 몸으로 눈 쌓인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며, 혹은 한 여름에도 물을 마시지 않고 혹은 한 열흘씩 화식을 하지 않으며, 혹은 수백리를 걸어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일찍이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다가 졸음이 올 때는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굽혀 머리를 숙인 채 두 다디를 벌려 딛고 서서 자는데 코고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고, 우마가 들이받다가 스스로 물러나도 선생은 산과 같이 꿈쩍도 않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
조남명이 일찍이 선생께서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견디는 것을 보고 농담하기를 “기품을 그렇게 타고 났는데 어찌 신선을 배우지 않소?” 하니 선생께서 용모를 다 잡으며 말하기를 “어찌 그렇게 사람을 가벼이 봅니까?” 하니 남명이 웃으며 사과하였다. 선생께서 굳이 세상을 잊고 떠나려 해서가 아니라. 마침 허자(許磁)와 이기(李芑)가 사림을 침해한 사건37] 이 있었으므로, 선생께서는 이에 덕을 아끼고 난을 피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하고져 하여 혼돈한 세상에 이름을 감추고 국가의 부름을 누차 사양했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백리고을을 맡아 다스리면 가난함을 부자되게 하며 각박함을 풍후하게 하고 혼란함을 다스려지게 하여 족히 나라를 보호하는 곳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만년에 부름에 응하여 포천현감이 되어서 상소하기를 도덕과 인재와 백용(百用: 모든 용도의 재물)의 말로 세 가지 계책을 가설하여, 임금이 임금다워야 복을 주는 도리의 뜻과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반복하고, 끝에 다시 생재(生財)와 구민의 일로 부연하여 말하기를 “포천의 백성은 마치 어미도 없이 추위에 얻어먹는 아이가 오장에 병이 들고 온 몸이 지쳐있는 것 같은데, 어찌 그대로 그 죽음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바다 속에 있는 무궁한 고기를 잡고 무진장한 소금을 구으면, 수년 내에 수천 석의 곡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어찌 널리 베풀어 민중을 구제하는데 일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혹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의리를 말하고 이해는 말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감히 재리(財利)의 일로 군부(君父)의 앞에 아뢴단 말인가?” 하니 “잔인하도다. 그 말이여! 손님이 연회자리에 의관이 삐뚤어진 채 자리를 옮겨다니며 술을 마시면 무례함을 책하여도 좋지만, 어린 아이가 엉금엉금 기어 우물 속에 빠져들 지경이면 갓을 바로 잡을 겨를도 없이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구해야 할 판인데, 어느 겨를에 수족의 용모가 불공함을 책할 수 있으리요? 옛날에 자사(子思)도 먼저 이익을 말했고 주자도 곡식을 사고 파는데 힘썼으며, 예상(강태공)은 성인의 무리인데도 어염의 이익에 통달했는데, 혹인의 망언으로 구민의 계책을 저지시켰으니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는 등 누누히 상소한 말은 애군 우민하는 지성 측달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그의 지모가 은연중 문왕이 기주를 다스린 것이나 맹자가 백성의 산림을 제정한 것과 부합되니 참으로 이른바 어진 사람의 말이며 그 이로움이 넓도다. 어찌 빈 말만 떠벌리는 쓸모가 없는 사람에게 바할 수 있으리요. 그런데 조정에서 능히 수용하지 못하므로 조금 있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후에 아산현감이 되어 또 상소를 올려 군대의 비용을 걷어 들이는 것을 감하는 것과 일족법(一族法)을 없애는 것을 청하였는데 말이 또한 명백 저당하였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아산읍에 양어하는 저수지가 있어 백성들로 하여금 해마다 고기를 잡아 관가에 바치게 하여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러워 하였는데, 선생께서 그 저수지를 메워 후환을 없앴으며, 향교의 선비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문․무의 재목이 되도록 강승시켜서 나라의 쓰임에 대비하고져 하였는데, 얼마되지 않아 병환으로 관직에서 돌아가니 만력(명 신종의 연호) 6년(1578년, 선조11년) 7월이었다. 수는 62세인데, 한 고을 백성이 이를 뛰고 저리 뛰면서 울부짖어 마치 친척을 잃은 듯 슬퍼하였다.
선생은 준결스럽고 고상하며 청심과욕하고 식견이 고매하여 천리와 인도를 관통하였으나, 자기 처지와 신분을 깊이 감추어 규범 밖으로 벗어난 것 같으나, 그의 행실을 상고해 보면 전부 규구(規矩)에 맞으며, 그의 학문은 주경(主敬)과 궁리(窮理)를 공부하여 독실히 실천함을 우선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성인도 가히 배워서 능히 할 수 있지만, 오직 근심거리는 자포자기하여 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의리를 논하고 시비를 분변함은 정대 광명하고 통창발휘하여 사물을 인용하고 비유하며 호리도 분석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기꺼이 승복하여 혼탁한 사람은 밝아지고 의혹된 사람은 이해되게 하였다.
천문지리와 의약, 복서, 음악, 산수, 관상 등 학술까지 두루 통달했으나, 이것은 다만 그의 여사일 뿐이었다.
재주는 족히 한 때를 바로 잡을 만하고 행실은 족히 세상에 법이 될 만하여, 지혜는 족히 은미한 것도 밝힐 만하고 도량은 족히 대중을 용납할 만하며 덕은 족히 만물을 진정시킬 만한데도 포부를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야 조그만 고을이라도 시험해보려 하다가 또한 십분의 하나 둘도 시행해 보지 못한 채 뜻을 거두고 돌아가니 어찌 천운이 아니겠는가?
선생이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집에 전한 것이 별로 없다. 그 ‘대인설’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네가지 소원이 있으니 안으로는 영특함과 강함을 원하고, 밖으로는 부귀를 원하니 귀한 것은 벼슬을 않는 것보다 귀한 것이 없고, 부자는 욕심부리지 않는 것보다 부자가 없으며, 강한 것은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이 없고, 영특함은 아는 채 않는 것보다 영특한 것이 없다. 그런데 아는 채 않으면 영특하지 못한 것은 혼우한 사람이 그럴 수 있고, 다투지 않으면 강할 수 없는 것은 나약한 사람이 그럴 수 있으며, 욕심 부리지 않으면 부자되지 못하는 것은 빈궁한 사람이 그럴 수 있고, 벼슬하지 않으면 귀하지 못한 것은 미천한 사람이 그럴 수 있다. 아는 채 않아도 능히 영특하며, 다투지 않아도 능히 강하며, 욕심 부리지 않아도 능히 부자되고, 벼슬하지 않아도 능히 귀한 것은 오직 대인이라야 가능하다.” 하였다. 그 ‘과욕설’에 말하기를 “맹자가 말하되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적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의 시작이다. 적고 또 적게 하여 적게 할 것도 없으면 마음이 비어 영특해지고 영특함이 비추어 밝음이 된다. 밝음의 실체가 정성이 되므로, 정성의 도리가 중도가 되고, 중도가 발휘되어 조화롭게 되니, 중과 화는 공평함의 아버지이며 생성의 어머니이고 더 작을 수 없이 치밀하며 더 클 수 없이 광대한 것이니 이 밖에 큰 것이 있다면 작아지는 것의 시작이다. 작고 또 작아져서 형체와 기질에 가두어지면,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은 알더라도 도리를 알지 못하면 물욕이 앞을 가려 해치는 것이 많아 욕심을 적게 할 수도 없을텐데 항차 없기를 바랄 수 있으랴?”라고 하였으니, 이런 것에서 선생의 한 글자 한 마디가 욕심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뜻이 아닌 것이 없음을 가히 볼 수 있고, 마음속에 보존한 바를 가히 알겠도다.
오하라! 명종과 선조조 때 하늘이 사문을 도왔으니, 이 때 율곡 우계 양선생 같은 도덕이 있고 조중봉 같은 절의가 있어 함께 한 세상에 빛이 났다. 선생께서 도의를 사귀어 서로 도우며, 권면하고 경계한 의의와 장려하는 말이 다같이 지성에서 우러나왔다. 중봉은 천품이 소박하고 후하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세상에서 아는 사람이 없으므로 비록 여러 선생들 마저도 재주가 짧아 적용할 만한 인물이 못 되는 것으로 의심하고 다만 절의로만 하여 하였는데, 선생께서 유독 말씀하시기를 “자고로 큰 일을 담당하는 사람은 항상 안빈락도와 애군우국하는 사람 중에서 나오는 것인데, 조군의 사람됨은 범인들이 알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하루는 중봉의 집에 가셨는데 때마침 긴 별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별의 징조가 마땅히 십수년 후에 천리에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니 자네는 옛 사람의 글을 많이 읽어 임금에게 재앙을 없애는 도리를 권하면 거의 흉이 길로 변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더니 그 후 16년만에 과연 임진왜란이 있었다.
율곡이 장차 시골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선생께서 책망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차마 돌아가려 하는가? 비유하자면 어버이가 중병이 있어 약을 드리면 어버이가 노하여 혹 약그릇을 집어던진다 하더라도 자식이 되어서 물러가 약을 드리지 않는다면 옳겠는가?” 하였다.
중봉이 상소에 말하기를 “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분이 세 사람인데 이지함과 이이와 성혼입니다. 세 사람은 학문의 성취가 비록 각각 같지는 않지만, 그 청심과욕과 지극한 행실이 세상에 법이 되는 것은 같습니다.”했고 또 말하기를 “이 모의선을 즐거워 하고 의리를 좋아함은 천성에서 우러나와 성혼과 이이가 가장 존중한 바입니다. 두 고을을 맡아 폐단을 없애고 궁한 사람을 구해주며, 원대한 규약을 세워 간사함을 막고 아전을 거느림에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엄히 하여 한 지역이 신성하고 명철하다고 일컬어졌습니다.
항상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니 이윤 같은 뜻이요, 터럭만큼도 스스로 더럽히지 않으니 동방의 백이 같은 입니다.”하였다. 율곡이 일찍이 일컫기를 “선생은 천품이 과욕하여 명예와 이해에 담당하여 때로 농담하고 장엄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능히 그 길은 포부를 헤아리지 못한다.” 했으며, 또 말하기를 “형중(馨仲)을 식물에 비하면 기이한 꽃이며 특이한 풀이요, 진기한 새이며 기괴한 수석이다.” 했으며, 또 말하기를 “선생은 물에 비췬 달 같은 회포요, 양념 않은 고깃국 같이 잡맛이 없는 마음의 소유자로 충신(忠信)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효우(孝友)는 신명도 통했으며, 득실과 영욕은 끓는 물에 눈 녹듯 했다.” 하니 선생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세 분 선생같은 이가 없는데, 그 칭송하여 말한 것이 이와 같으니, 천년 후까지도 이것으로 가히 선생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유풍과 여운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높은 산같이 우러러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 우재 선생이 선생의 문집에 쓰기를 “선생은 재주가 높고 기상이 맑아 항상 사물에 초연했으며 평생의 저술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이 약간 있으니, 봉황의 한 깃털을 보아서 극히 오색의 문채를 알 수 있듯이 그 근본을 소급하면 다 청심과 과욕한데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하니 아! 이것은 가히 잘 보고 학문을 잘 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서 다만 그 밖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혹은 고인(高人)이니 일사(逸士)니 하고, 혹은 높고 높아 틀에 박히지 않았으니 하는데 또한 가히 선생을 얕게 알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선생께서 4남을 두었다. 큰 아들은 산두인데 일찍 작고하고, 다음은 산휘이며 나머지는 장성하기 전에 요절하였다. 선생이 항상 칭찬하기를 산두는 덕이 가히 나와 벗할 만 하고, 산휘는 덕이 가히 스승이 될 만하다 하였다. 선생이 병환이 길자 장고를 두들기며 산휘로 하여금 장고소리를 듣게하여 길흉을 시험하니, 산휘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소리가 심히 좋아서 병환은 근심이 안됩니다.”하고 대문 밖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병환이 가히 어찌할 수가 없다.” 하더니 얼마 안되어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장손 거인은 별제이니 2남 2녀를 낳았는데, 남은 술과 체이며, 여는 참봉 조석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랑 이대술에게 시집갔다. 술이 1남 1녀를 두어 경의는 증 승지요 여는 이시창에게 시잡갔다. 체는 6남3녀를 두어 큰 아들 필천은 생원 첨추 오위장이요, 다음 필명과 필진은 진사요, 다음 필형은 무과요, 다음 필유는 첨추 오위장이요, 다음은 필상이며, 여는 최우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덕항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규에게 시집갔다.
조석이 1남 세환을 낳으니 문과 감사요, 이대숙이 1남 이형을 낳으니 찰방이요, 경의가 3남1녀를 낳으니 큰 아들은 정오요, 다음 정래는 문과 정랑이요, 다음은 정지이며, 여는 심필영에게 시집갔다. 필천이 2남을 낳으니 큰 아들 정석은 생원이요, 다음 정익은 문과 헌납이며, 필명이 2남 3녀를 낳으니, 큰 아들은 정인이요, 다음은 정봉이며, 여는 한홍기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김하정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구효민에게 시집갔다. 필진이 3녀를 낳으니 큰 딸은 군수 박기조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임행원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조정에게 시집갔다.
필형이 1남2녀를 낳으니, 남은 정윤이요, 여는 권수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김익서에게 시집갔다. 필유가 4남1녀를 낳으니 큰 아들은 정식이요, 다음 정억은 문과 정언이요, 다음은 정만이요, 다음은 정규이며 여는 유언필에게 시집갔다. 필상이 2녀를 낳으니 큰 딸은 조이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박태수에게 시집갔다.
최우성이 4남 4녀를 낳으니 문해는 진사요, 다음 응해는 무과요, 나머지는 다 어리다. 정오는 2남2녀를 두었으니 큰 아들 즉은 문과 첨지요, 다음은 집이다. 정래는 5남 3녀를 두었으니 큰 아들 만은 문과 도사요, 다음 심은 문과 장령이요, 다음 완은 문과 지평이요, 다음은 해요, 다음 자는 문과 좌랑이다. 정석은 1남1녀인데 아들 한은 진사요, 여는 심정혁에게 시집갔다.
정익은 3남1녀인데 큰 아들은 도요, 다음은 언이며, 다음은 현이고, 여는 진사 김철조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윤득화에게 시집갔다. 정린은 2남2녀인데, 큰 아들 준은 진사요, 다음 융도 진시며, 여는 소상기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한창흠에게 시집갔다.
정식은 1남1녀인데, 아들은 홍이며 여는 조상정에게 시집갔고, 정억은 3남1녀인데, 큰 아들은 진이요, 다음은 수요, 다음은 혼이며, 여는 어리다. 정만은 2남1녀인데, 큰 아들은 박이요, 다음은 대이고 여는 어리며, 정원의 3남2녀는 다 어리다. 박기조의 4남은 큰 아들 성집은 좌랑이요, 다음 성낙은 문과 집의요, 다음은 성재요, 다음은 성보이며, 즉의 3남은 큰 아들은 명석이요, 다음 경석은 문과 전적이요, 다음은 응석이며, 집의 4남은 큰 아들은 붕석이요, 다음은 봉석이요, 다음은 학석이요, 다음은 곡석이다. 만의 1남은 익등이며, 심의 3남은 큰 아들은 성등이요, 다음은 선등이요, 다음은 시등이며, 완의 1남은 수동이다.
해의 1남 형등은 문과요, 한의 5남은 큰 아들은 대춘이요, 다음은 대수요, 다음은 대제이며, 나머지는 어리고, 언의 2남은 큰 아들은 대유이며, 다음은 어리다.
선생의 자손이 처음은 요절하여 실같이 겨우 끊어지지 않더니, 이제 백년 후에 이르러 넘어진 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나듯이 손자와 증손이 날로 더욱 번성하여 모두 백여 명으로 능히 다 기록 할 수 없으며, 세상에서 부러워하며 일컬으니, 어찌 선생의 음덕의 보답이 아니리요? 이에서 선생의 말을 또 징험할 수 있도다.
아산은 일찍이 부임했던 곳이며, 보령은 바로 고향으로 유림이 추모하여 사우를 지어 뫼시려하니, 금상의 12년 병인(숙종12년, 1686년)에 「화암」이라 사액을 내렸으며, 중봉이 선조 때 상소하여 선생의 시호를 청했고, 만력(명, 신종의 연호) 무인(선조11년, 1578년)에 경연관 홍적이 증직을 청했는데, 삼공(三公)이 국가에 일이 많아 끝내 시행하지 않았었다. 금상의 31년 을유(숙종31년, 1705년)에 판윤 민진후가 우대하여 증직내리기를 청하자 계사년(숙종39년, 1713년)에 이조판서를 증직했고, 판부사 김우항이 또 시호 내리기를 청하여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니 영광스러운 은전에 다시 유감이 없게 되었다.
부족한 나는 일찍이 외람되게 선생의 높은 언론과 기이한 자취가 전배문자 중에 섞여 나온 것을 취하여 보고서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으며, 망녕되이 평론하여 말하기를, “안으로 성인을 배우고 밖으로 왕도를 포방하는 학문을 지니고서도 초연하게 한가로히 세월을 보내며 즐긴 것이다.”고 하면 가히 선생의 뜻을 먼저 헤아렸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 있어서 화담은 조예가 고명하고 조남명은 입지가 확고하였으니 그 분들과 비등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삼가 선생의 현손인 헌납 정익이 기특한 가승을 이용하여 위와 같이 지어서 시호 내리기를 청하나이다.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이관명은 삼가 시장을 짓다.
태상(太常:시호내는 부서)에서 시호를 문강, 문청, 청헌, 세 가지를 올렸는데, 임금이 ‘문강’으로 비답하였으니 도덕박문(도덕이 높고 문견이 많음)의 문(文)과 연원유통(연원이 깊어 서로 통함)의 강(康)을 취한 것이다.
37] 허자와 이기가 사람을 침해한 사건 : 왕실의 외척인 윤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간의 권력다툼으로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명종 원년)는 명종의 즉위와 더불어 소원인 윤원형일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윤임 등 대윤 일파는 혹독한 화를 당하였다. 이 때(許磁)와 이기(李芑)는 소윤 일파가 되어 많은 문사들을 대윤일파로 몰아 갖가지 죄명을 씌워 유배 보내거나 죽였다.
토정집 발문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 토정선생 문하에서 청소는 할 수 없었으나, 그러나 선배와 장자들로부터 그분의 풍성과 사행을 듣고 흠앙하고 숭모하지 않은 적이 없다. 가장 징험할 수 있는 것은 중봉 조선생이 일찍이 선조대왕에게 고하여 말한 것으로서 “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 셋인데, 이지함․이이․성혼입니다. 세 사람의 덕이 비록 같지는 않으나 그 청심과욕과 지극한 행실과 세상에 모범이 되는 것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 것이다. 아아! 옛날 성현으로부터 정자 주자와 여러 대유들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가르치거나 자기 공부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들 청심과욕을 지극히 중요시 하지 않으리요? 대게 마음이 맑지 못하면 본원에 병이 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물욕에 빠지게 되니, 사람이 비록 조신하려고 밖으로 힘써서 스스로 현인인체 하나, 티끌과 더러운 것이 날로 속에 쌓여 마침내 천리가 멸하고 사욕이 팽창할 것이니, 그렇다면 세 선생의 도학은 가히 지극히 긴요하다 말할 수 있고, 조선생 또한 가히 잘 보고 잘 배웠다고 말할 수 있도다.
대저 네 선생이 사람은 같지 않으나 도학은 같아서 함께 세상에 서로 빛나 국가에 크게 이름을 울렸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세상에서 선생을 일컫는 사람이 혹은 조롱하기도 하는데, 선생이 재주가 높고 기품이 청렴하여 항상 사물에 초연하여, 혹 법도와 규범에 초탈하므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은을 무쇠인 줄 아는 것인가?
오직 율곡 선생은 선생을 기화이초(奇花異草)에 비유하셨는데 어찌 맞지 않는 말씀을 하셨겠는가? 선생이 평생 저술을 좋아하지 않으시어, 지금까지 보존된 약간편은 대게 부득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현손 필진과 정래와 외현손 조세환이 협동하여 모아서 겨우 한 책을 이루었다. 그러나 봉황의 한 깃털을 보아 족히 오채의 무늬를 알 수 있으니, 그 근본을 소급하면 모두 청심과욕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아아! 세상이 쇠퇴하고 도학이 미약해져서 이욕에 어지럽게 끌리는데, 오직이 네 글자(청심과욕:淸心寡慾)가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밝혀져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탁연히 세속에 누가 되지 않게 하면 가히 격물 치지와 조존 함양에서 실천하고 확충하여 날마다 고명하고 광대한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며,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도 또한 가히 청렴함을 기르고 부끄러움을 멀리하여, 인(仁)에 뜻을 두고 의(義)를 행하여 한결같이 일을 부지런히 하며 백성을 보살피고, 애군우국으로 도리를 삼아 감히 사욕을 채울 뜻을 품지 못한다면, 그 세교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바라는 뜻이지만, 감히 속인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학 은진 송시열은 삼가 발을 쓰다.
토정유고 발
해동에 뛰어난 선비가 있으니 토정선생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선생의 소문과 명성을 들은 이래 높이 추앙하여 흠모하였으나 선생의 언론에 대해서는 전혀 들을 수 없어 항상 안타깝게 여기던 중 선생이 포천과 아산고을의 수령으로 재임할 시에 올린 봉사를 읽어 보니 모두 참으로 인의(仁義)의 내용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모두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의 삶을 걱정하는 것으로서 지극한 정성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었으므로, 그 계책들은 한결같이 옛적 문왕(文王)의 규모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일에 선생이 밝힌 것들을 당세에 적용하여 실행했더라면 옛 성세의 다스림과 같이 안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에 율곡 선생은 토정선생을 가리켜 ‘신기한 꽃이나 기이한 풀’(奇花異草)이라고 비유하여 선생의 자품은 비록 고상하지만 실용에는 조금 적합지 않는 것으로 파악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살펴보면 반드시 그런것만은 아닌듯하다. 어쩌면 선생께서 스스로를 깊이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일부러 해학과 기행을 일삼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체를 헤아리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그 당시를 고찰해 보면 대개 허자(許磁)와 이기(李忌) 등이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명종 즉위년)에서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뒤 끝에 해당되는데, 그런만큼 어쩌면 선생은 스스로의 덕을 감추어 난을 피하려는 뜻에서 그러한 행적을 보인 것은 아닐는지. 송의 요부(堯夫, 邵雍의 字, 시호는 康節)와 같은 당세의 으뜸가는 인재였으나, 평생동안 초야에서 묻혀 지내고 말았으니 어찌 천고의 한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선생의 저술은 집안에 남겨진 것이 없고 전해오는 것들에서 얻은 것이 겨우 수련에 지나지 않으나, 글자마다 후학들의 지침이 되지 않음이 없다. 슬프도다.! 선생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이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 않음이여! 장령 이공 정익과 정언 이공 정억과 감사 조공 세환은 선생의 내외손이다. 이미 우암선생에게서 발문을 받았고 다시 서문까지 지어주시기를 허락하였었는데, 불행하게도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만나 이루지 못하게 되자, 이제 두 이공이 다시 나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건데 나의 졸력한 문장으로서는 마치 부처의 머리에 인분을 덮어 씌우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마는 그러나 우러러 흠모한지 이미 오래이므로 여기에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고도 생각되므로 드디어 감개의 뜻을 위와 같이 권말에 붙여 쓰게 되었다.
숭정후 임진년 정월 초엿새날에 후학 안동 권상하는 삼가 쓴다.
토정유고 지
우리 선조 토정선생께서는 평생에 저술을 즐겨하지 아니 하였고, 혹 글을 지었을 때도 집안에 그 원고를 남기지 아니한 까닭으로, 세상에서는 선생이 문장에 능할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선조께서는 세상에 은거하여 번거로움을 멀리하는 큰 덕을 지니셨으니, 실제로 문장의 유무에 상관될 것이 없는데도, 어떤 이는 ‘길이 잊혀지지 않는 성대한 업적(문장)’에 아쉬움이 없지 않다고도 하였다.
예전에 이선(李選:1632~1692, 호는 芝潮) 시중이 옥당에 재임할 때에 전현(前賢)들의 유집(遺集)과 기술(記述)들을 살펴 보면서 마침 우리 선조의 실적에 대한 저술들을 모아 한 책을 만들어서 ‘토정유고(土亭遺稿)’라고 이름 붙여서 교서관에 비치하였었다.
내가 이것을 취하여 보면서 집안에 보관된 옛글과 서로 고증하여 보니, 그 가운데 기록된 문자들이 어떤 것은 여기에는 있으나 저기에는 없고, 저기에는 없으나 여기에는 있는 등의 경우가 있었다. 이에 이것들을 가감하여 한 편으로 만들어서 당대의 선생과 어른들께 질정을 부탁드렸다.
우암 송선생이 발문을 짓고, 수암 권선생이 또한 책의 끝머리 글을 지었으며, 장암 정호 상서가 그 서문을 지었다. 이에 새겨서 오래도록 전하고자 계획하였는데, 때마침 내가 경주부윤으로 제수되었기에 녹봉의 일부를 출연하고 공사를 감독하에 일년만에 완성하였다.
선생의 가언선행(嘉言善行)들이 마침내 민멸되어 전해지지 못하는 불행한 처지를 벗어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때가 맞아서 그렇게 된 것일까? 선생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전현(前賢)들의 칭송 가운데 이미 드러나 있으니, 또한 어찌 못난 우리들이 무엇을 더 보태어 지껄일 것이 있으랴!
경자년 봄 삼월 상술 현손 통정대부
수경주부을 정익은 재배하며 삼가 쓴다.
토정유고 및 온양․아산 향토 자료
온 양 문 화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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