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 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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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휘가 상정(象靖)이고 자가 경문(景文)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한산인(韓山人)이다. 상대(上代)의 조상 중에 가정(稼亭) 문효공(文孝公) 곡(穀)과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색(穡)이 그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고려 말엽에 현달(顯達)하였으며, 5대를 내려와서 휘 윤번(允蕃)이 또한 맑은 절개와 올곧은 도(道)로 유명하였다. 그 뒤 2대를 내려와 휘 희백(希伯)이 부사를 지냈으며, 다시 3대를 내려와서 휘 홍조(弘祚)가 현감을 지내고 호를 수은(睡隱)이라고 하였는데, 광해군 때에 안동(安東)으로 피신해 내려와서 외조부인 서애(西厓) 유 선생(柳先生)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으니, 이분이 곧 선생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효제(孝濟)이고, 조부는 휘가 석관(碩觀)이며, 아버지는 휘가 태화(泰和)인데, 다들 그 두터운 덕으로 후손들에게 넉넉한 복록을 드리워 주었다. 어머니 재령 이씨(載寧李氏)는 밀암 선생(密庵先生) 휘 재(栽)의 따님인데, 가르침을 익혀 부도(婦道)를 매우 잘 닦았다.
선생은 숙종 신묘년(1711, 숙종37) 1월 29일에 안동부 남쪽의 소호리(蘇湖里)의 집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해서 5세에 글자를 배웠는데, 이 때 벌써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을 모두 알고 구별하였다. 일찍이 동생과 대막대를 놓고 다툰 일이 있었는데, 선부인(先夫人)이 이를 보고 경계하여 말하기를, “형제간에 어떻게 이처럼 다툼질을 한단 말이냐.” 하였다. 그러자 이후부터 그 잘못을 척연(惕然)히 깨달아 고쳐서, 다시는 스스로를 위하여 편의를 취한 적이 없었으니, 심지어 음식과 의복 따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6세 때 선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그 슬퍼하고 사모함이 마치 어른 같았다. 윤리에 독실하여 자제로서의 도리를 다하였으며, 혹시라도 이를 어기는 일이 없었고, 동배(同輩)들에 대해서도 안색을 바꾸거나 모진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7세에《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 3세에 벌써 사서(四書)를 다 읽었다. 그리고 14세에 밀암(密庵)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마당에 난 풀을 보고 기화(氣化)와 형생(形生), 자생(自生)과 종생(種生)의 차이에 대하여 물었으며, 기유년(1729, 영조5)에 동문(同門)의 제현(諸賢)들과《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면서 의문이 나는 것들을 서로 질정(質正)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밀암이 “군자(君子)가 학문을 함에 있어서, 공경을 위주로 하여[主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窮理] 지식을 이루어야 하니, 이것은 참으로 천고를 통하여 전해 온 진전(眞詮 참된 비결, 참된 진리)이요 묘체(妙諦)이다.”라는 말을 해 주었다.
대저 선생은 남달리 총명해서 글을 읽으면 무엇이든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율려(律呂 음악(音樂))와 기윤(朞閠 역법(曆法))과 산수(算數)를 모조리 통달하였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渾天儀))과 심의(深衣) 및 최상(衰裳 상복(喪服)) 등의 제도에 대하여 깊이 연구 검토를 하는 일도 없이 곧장 그 손길을 따라서 만들어 내어서 항상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이 때에 와서 또 이처럼 진정한 법문(法門)으로써 이끌어 주었으니, 기대하고 의탁하는 바가 더욱 무거웠던 것이다. 이 때 선생이 ‘동지오잠(冬至五箴)’을 지었는데, 그 중에 ‘궁리(窮理)’와 ‘주경(主敬)’은 곧 사문(師門)의 지취(旨趣)를 발양(發揚)한 것이며, 거기에 다시 ‘근독(謹獨)’과 ‘독지(篤志)’와 ‘일신(日新)’을 보태어서 스스로를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 뒤 밀암이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려 마음아파하였다. 그럴수록 더욱더 힘써서 스스로 노력하여 이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홀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장은 한낱 조그마한 재주일 뿐이니, 기수(器數 예기(禮器)와 예수(禮數) 등의 의문(儀文))의 말단이요 도(道)의 지극한 바가 아니다.” 하고는 ‘병명 팔첩(屛銘八帖)’을 지었는데, 독서(讀書), 독지(篤志), 신사(愼思), 사고(師古), 근독(謹獨), 성신(省身), 일신(日新), 역행(力行)의 여덟 가지였다. 그리하여 모든 잡된 글들을 치워 버리고 몸과 마음의 일상적인 생활을 반성하여 성찰하기를 도탑게 하였다.
영조 을묘년(1735, 영조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그 때 방목(榜目)을 전하는 자가 밤중에 여관(旅館)에 도착하여 급히 불을 찾았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요.” 하고는, 그대로 여전히 잠만 잤다. 그 뒤 대과에 급제하여 창명(唱名)이 끝난 다음 선영(先塋)에 전성(展省)하러 떠나고자 하였는데, 누가 말하기를, “규례로 보아 응당 기거주(起居注 사관(史官))를 섭행(攝行)하게 되어 있으니, 좀 기다려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아무리 가관(假官)이라고 한들 어떻게 미래의 일을 미리 기대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이 해 겨울에《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지고 역대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에 대하여 상고하고 연구하였는데, 더러 그 사이에 논저(論著)를 덧붙이기도 하였다.
병진년(1736, 영조12)에《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읽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주자(朱子)처럼 상지(上智)의 자질을 가진 분도 언제나 이와 같이 선생과 장자(長者)들의 문하(門下)를 찾아다녔으며, 주고받은 논변(論辨)들이 한두 분의 친구들 정도에서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같은 자들이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밖에 나가면 서로 강론하는 데서 도움을 받고 집에 들어오면 혼자서 이를 탐색하고 연구하였으니, 크게 깊이 생각하고 실질적인 체험을 통해서 궁구하였던 것이다. 대개 그 본 바가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널리 취하고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무오년(1738, 영조14)에 연원 승(連原丞)에 제수되었다. 이 때 선생은 그 녹봉(祿俸)을 쪼개어서 우역(郵驛)의 폐단을 해결해 주었다. 일찍이 일기에 쓰기를, “다만 ‘청근(淸勤)’ 두 글자만을 꼭 붙잡고 이것으로 가계(家計)를 경영해야 하며, 가벼이 변동해서는 안 된다. 변동이 잘못될 경우 그 해악(害惡)이 매우 큰 것이다. 그러므로 조만간《논어(論語)》를 가지고 나 자신을 수양해야겠다.” 하였다. 비록 봉록(俸祿)을 받아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 억지로 그 해를 넘기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선생의 본래의 뜻은 아니었다.
기미년(1739, 영조15)에 정고(呈告)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구담(龜潭), 도담(島潭), 삼선암(三仙岩) 등의 여러 명승지를 들러서 울적한 기분을 활짝 풀었다. 그런데 선생의 종모형(從母兄 이종형)이 이처럼 선생이 벼슬이 바뀌어서 돌아온 줄을 모르고 우관(郵館)을 들렀다. 그랬더니 그 후임자가 말하기를, “전임자가 이처럼 재물을 봉하여 남겨서 후임자가 쓰도록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를 혼자서 쓰겠는가.” 하고는, 후하게 노자를 주어서 보내 주었다.
이보다 앞서 문중의 부로(父老)들이 자제들을 위해서 사는 곳의 북쪽에 있는 대석산(大夕山) 아래에다 자그만 서재(書齋)를 지어 두고는 선생으로 하여금 교육을 주관하게 했다. 그러자 선생은 부모님을 위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하고 시선(視饍)하는 시간 이외에는 매일 여기에 와서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그 집의 남쪽을 ‘만완(晩玩)’, 북쪽을 ‘관선(觀善)’, 그 헌함(軒檻)을 ‘영락(詠樂)’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이를 모두 합쳐서 편액하기를 ‘대산서당(大山書堂)’이라고 하였다. 또 서당의 북쪽에 정관대(靜觀臺)를 쌓고는 시를 읊기를, “닿는 곳마다 봄날씨 같은 마음이 드니, 오묘한 이치는 응당 조용히 배워야 하리.[觸境盡成春意思 妙處須用靜工夫]” 하였다. 그리하여 관동(冠童) 두서너 명을 데리고 온통 책 속에 묻혀서 한 칸 방 안에서 우주를 부앙(俯仰)하면서 더욱 정밀하게 이치를 강구하고 체험하였다. 비록 어렵고 가난한데다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이런 것에 개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더러 틈이 나면 기분을 따라 이곳 저곳 배회하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러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고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완미(玩味)하며 즐김이 깊고 투철하였다. 이에 원근의 학자들 가운데 또한 이 소문을 듣고 책을 싸 들고 찾아오는 자들이 많았다.
그 뒤 신유년(1741, 영조17)에 휘릉(徽陵 인조 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능) 별검(別檢)에 제수되었으며, 임술년에는 다시 승문원에 배속된 다음 부정자를 거쳐서 정자에 승진하였고, 정묘년(1747, 영조23)에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예조와 병조의 낭관(郞官)으로 옮겼다.
다음 해인 무진년에는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그 슬픔을 다하였으며 근신하고 예절을 지켜 3년을 한결같이 하였다. 그 뒤 신미년(1751, 영조27)에 예조의 낭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계유년(1753, 영조29)에 연일 현감(延日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일 년이 못 되어서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을해년(1755, 영조31)에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무인년(1758, 영조34)에는 상이 특별히 명하여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임오년(1762, 영조 38)에는 다시 감찰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대령(大嶺 조령(鳥嶺)) 밑에 이르러서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고는, “갈매기는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고, 일만 리 물결 위를 자유로이 노니누나.[白鷗不關人間事 萬里波長自在遊].”라는 시를 남겼다.
선생은 일찍이 푸른 벼랑에 맑은 못물이 비치는 고산(高山)의 승경(勝景)을 사랑하였다. 그런데 정해년(1767, 영조43)에 비로소 여기에다 세 칸의 정사(精舍)를 짓고는 그 오른쪽을 ‘응암(凝庵)’, 왼쪽을 ‘낙재(樂齋)’라 하고 중간에다 헌함(軒檻)을 지어서 ‘정춘(靜春)’이라 하였다. 이 때에 선생을 찾아오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심지어 수천 리의 먼 길을 걷느라 발이 부르트면서까지 찾아왔다. 선생은 사문(斯文)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스스로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후학(後學)들을 가르쳤다.
그 뒤 신묘년(1771, 영조47)에 강령 현감(康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으며, 정조조 정유년(1777, 정조1)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경자년(1780, 정조4)에는 병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다. 이 때 상이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등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선생을 천거하였으므로 선생을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진시켜서 병조 참지에 제수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자 다시 예조 참의로 옮기었으며, 이듬해인 신축년에는 형조 참의에 전보되었다. 상은 기필코 선생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대신(大臣)의 논계(論啓)를 따라서 선생을 무겁게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그래서 할수없이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충주(忠州)에 이르러서 글을 올리고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풍기(豐基)까지 가서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역시 허락을 하지 않았다. 이에 상소하여 임금의 덕(德)에 대해서 진달하였는데, 뜻을 세우고[立志], 이치를 밝히고[明理], 공경을 생활화하고[居敬],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고[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고[納諫], 학문을 일으키고[興學], 사람을 잘 쓰고[用人],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검박을 숭상하는 것[尙儉] 등이었다. 그리고 끝에서 다시 아뢰기를,
“위의 아홉 가지는 모두 덕을 닦고 마음을 기르는 요결(要訣)이며 나라를 다스리고 정사를 행하는 근본입니다. 비록 그 내용이 평범하고 쉬운 내용들이어서 신기하고 참신한 논의는 없을지 모르겠지만, 성학(聖學)의 본통(本統)과 왕정(王政)의 강령(綱領)이 여기에 대략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디 전하께서는 이것들이 비근(卑近)해서 노력할 만한 것들이 못 된다고 여기지 마시고, 오활(迂闊)한 것들이어서 굳이 마음쓸 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지 마소서. 먼저 뜻을 세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요순(堯舜)과 삼대(三代)를 기필코 스승으로 삼겠다고 작심(作心)하시고, 이치를 밝히고 공경을 생활화하는 것을 용공(用工)의 준적(準的)으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도덕과 의리가 뚜렷이 드러나서 그 주재(主宰)하는 것이 분명하여지도록 하되, 강건(剛健)하여 그침이 없고 성실하여 간극(間隙)이 없게 한다면, 곧 의리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참으로 마치 추환(芻豢 육식(肉食))이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아서, 평상(平常)과 이근(易近)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그 곳에 진실로 고원(高遠)하고 심대(深大)하여 도저히 제어할 수가 없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스스로의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고 자신이 빠뜨린 것을 줍는 일이어서 바로 나의 덕을 향상시키는 것이 될 것이며, 그 밖에 학문을 일으키고, 사람을 잘 쓰고, 백성을 사랑하고, 검박(儉朴)을 숭상하는 것들은 모두 시행하고 조치하는 곳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다만 마음에의 조존(操存)에 관한 문제만을 논급하였을 뿐이며, 정령(政令)의 과조(科條)의 자세한 데에까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대저 그 본말(本末)이 갖추어지고 강목(綱目)이 구비된 다음이라야 비로소 다스림에 대하여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니, 이와 같이 그 근본(根本)이 확립되면 지말(枝末)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며 벼릿줄[綱]을 잡아당기면 그물눈[目]은 자연히 펼쳐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요령을 얻는다고 한다면 절목(節目)이나 조획(條劃) 같은 것들은 단지 담당관들의 소관 사항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또 끝에 가서는 자신의 나이를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가상히 받아들이면서 말하기를,“아홉 가지 조목에 대한 일만 마디의 말들이 말마다 진실하고 적절하여 이로써 좌우(座右)의 모든 글들을 모조리 바꾸어 버리고 중요한 관성(觀省)의 자료로 삼을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휴치(休致 치사(致仕))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다.그런데 10월에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다. 이 때 선생에게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로 인해서 문 밖에는 항상 신발이 그득하였으며, 공은 여전히 이들에 대한 응대를 게을리 하는 일이 없었다. 병이 심해지자 선생의 아우 소산공(小山公 이광정(李光靖))이 울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분수에 따라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리고 후학(後學)들의 향상에 노력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 학생들을 가까이 불러서 웃옷을 입히고 띠를 두르게 한 다음에 말하기를, “평소에 강의하여 논의한 것들을 부디 착실히 공부하여 연마하기 바란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들은 다만 일상적인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본래 이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요와 이불을 깨끗이 새로 깔게 하고는 붙들어 일으켜서 자리를 바꾸어 눕히게 하였다. 그런 뒤 이튿날 조용히 숨을 거두니, 12월 9일 정축일이었다. 이듬해 3월 을축일에 안동부(安東府)의 북쪽에 있는 학가산(鶴駕山)의 사향(巳向)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위(配位) 장수 황씨(長水黃氏)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후손으로 처사 황혼(黃混)의 딸이다. 점잖고 정숙(貞淑)하였는데, 선생이 항상 내조(內助)의 공이 많다고 일컬었다.
아들 완(埦)은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완의 맏아들 병운(秉運)은 현감을 지냈고, 다음은 병진(秉進)이며, 다음의 병원(秉遠)도 현감을 지냈다. 딸 맏이는 진사인 유회문(柳晦文)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유노문(柳魯文)에게 출가했다.
병운의 맏아들 수응(秀應)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다음은 수당(秀戇)과 수경(秀憼)이다. 병진의 아들은 수억(秀億)과 수무(秀懋)이고, 병원의 아들은 수덕(秀德)이다. 유회문의 아들 유치명(柳致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으며, 유노문의 아들은 유치임(柳致任), 유치검(柳致儉), 유치엄(柳致儼)이다.
수응의 맏아들 돈우(敦禹)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지냈으며 다음은 돈직(敦稷)과 돈기(敦夔)이다. 수당의 아들은 돈희(敦曦), 돈익(敦益), 돈고(敦皐)이고, 수경의 아들은 돈원(敦元)이다. 수억의 아들은 명직(明稷), 형직(馨稷), 돈희(敦羲)인데 돈희는 출계(出系)하였으며, 수무의 아들은 돈희(敦羲)이다. 수덕의 맏아들은 문직(文稷)인데 감역관을 지냈고 다음은 무직(武稷)이다. 5대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명민하고 순수하여 그 민첩하고 빼어난 재주와 영특하고 준매(俊邁)한 기상이 참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효우(孝友)의 행실과 근약(謹約)한 몸가짐은 배우기도 전에 이미 갖추어진 것이었다.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그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겼다. 그래서 매양 기일(忌日)이 되면 슬퍼함이 초상을 당하였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정원(庭院)이 숙옹(肅雍)하고 당실(堂室)이 정결하였으며, 공경하고 안온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었다. 또 백씨(伯氏)를 섬기는 것이 공손하고 근실하여 화기롭고 유순했으며, 계씨(季氏)와 서로 마주하여 언제나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종족(宗族)의 부형들에 대하여는 설사 나이가 서로 비슷한 사이라도 안부를 물을 때는 반드시 몸을 일으켰으며, 무엇을 드릴 때에는 반드시 공수(拱手)하고 바쳤는데 그 경근(敬謹)함이 법도를 이루었다. 집안에서는 은혜와 신의가 두루 흡족하였으며, 향당(鄕黨)에서는 언제나 다 같이 잘하고 함께 교화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선생이 일찍이 자상하게 대해 준 적이 없음에도 인품을 접해 본 사람이면 곧 그 남은 훈향(薰香)이 보는 이의 마음에 배어들었으며, 일찍이 어떤 긍지(矜持)와 근엄(謹嚴)을 지니지 않았는데도 그 문전(門前)에 이르는 자는 곧 마음 속의 거칠고 고약한 생각들이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선생 자신의 몸에 쌓여서 남들에게 미친 것일 뿐이며, 억지로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다그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대저 선생이 학문을 하는 방법은, 사람의 근본적인 도리를 살펴서 이를 통해 그 신통(神通)을 다하고 조화를 통달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일상적인 생활에 근본을 두어서 타고난 본성을 다하고 주어진 명운(命運)을 깨닫는 데에 이른 것이었다. 규모가 홍대(弘大)하면서도 심법(心法)이 엄밀하고, 딛고 선 바탕이 평정(平正)하면서도 도달한 이치가 매우 은미(隱微)하였다. 그리고 경을 간직하는 일[持敬]의 정밀함에 이르러서는 그 동정(動靜)과 표리(表理)에 어떠한 간극(間隙)도 없었던바, 이것이 곧 최종적인 공부의 요령이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도(道)의 본체나 작용이 은미하거나 현현한 것은 어느 것이든 지극히 정미(精微)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를 추구하는 순서로 말한다면 역시 거기에는 차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저 상달(上達)의 고원(高遠)함에 마음을 쏟는 것은 차라리 하학(下學)의 평이(平易)함에 대하여 노력하는 것만 못하며, 실로 처음부터 도리의 은미함을 추구하는 것은 도리어 분명히 드러나서 쉽게 알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터득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마땅히 규칙과 법도를 지키기에 힘쓰고 평이하고 명백한 것을 생활화하여, 조수(操守)와 긍척(兢惕)을 일상의 과정(課程)으로 삼고 인륜(人倫)과 사물(事物)에 대한 것을 실지의 공부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극히 평이(平易)한 곳에 본래 그 요묘(要妙)함이 있고 지극히 천근(淺近)한 곳에 저절로 그 심원(深遠)함이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니, 거기에는 분명코 종신토록 노력하여도 다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런 것들은 선생이 스스로 체험하고 실천하였던 것으로서, 임종(臨終)에 즈음하여 고계(告戒)했던 말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진취한 바가 모두 하나같이 낮고 평평한 곳에 발을 붙이고 서서 그 밝고 분명한 곳에다 노력을 더한 것들이었으며, 일찍이 한번도 유심(幽深)하고 현묘(玄妙)한 논리를 전개해서 세상과 풍속을 경동(驚動)시킨 일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心]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형체가 없는 것으로서 드나드는 변화가 일정하지 않다. 그러므로 응당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고 응접(應接)하는 곳에다 노력을 기울여서 털끝만큼이라도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마음이 그 안에 정착하고 제자리를 지켜서 온전하게 머물러 있을 수 있으니, 이것은 그 정성이 마치 농부가 곡식의 싹을 가꾸는 일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농부가 곡식을 가꾸는 것을 보면 뿌리는 땅 속에 묻혀 있어서 거기에다 공력을 쏟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단지 땅 위에 나와 있는 보이는 곳에 대해서만 풀을 뽑아 주고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뿌리가 더욱 튼튼해져서 그 싹이 더욱 잘 자라게 된다.” 하였으며, 경(敬)에 대해서 논한 것을 보면, “경이란 참으로 동정(動靜)을 꿰뚫고 표리(表裏)를 관철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현이 경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면 언제나, ‘행실을 돈독하고 공경히 하라[行篤敬]’든가 ‘일 처리를 공경히 하라[執事敬]’라고만 하였을 뿐, ‘경이란 본래 묵연(默然)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때를 위하여 베풀어 놓은 것’이라고 말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문득 경(敬) 자를 가지고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곳을 향해 생각하고 어떤 특별한 일로 여긴 나머지 그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마는 것이다. 대저 ‘동(動)’을 제어하는 것은 ‘정(靜)’을 간직하는 방법이니, 의거할 수 있는 곳에 힘을 쓴다면 그 무형(無形)한 것은 본디 자재(自在)하게 마련이다.” 하였다.
그리고 궁리(窮理)에 대해서 말하기를, “천지간의 만물은 어느 것이든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니, 모두 마땅히 연구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역시 그 완급(緩急)에 따른 순서는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만약 일상적인 생활의 일에 대하여 그 시비를 가리지 않거나 당부(當否)를 살피지 않고 먼저 유심(幽深)하고 한만(閒漫)한 곳에다 힘을 쓴다면, 아무리 많은 노력을 쏟아 붓는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으며, 독서(讀書)에 대하여 말하기를, “과정(課程)을 적게 잡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많이 읽어야 하니, 차분하게 읽고 외워서 그 깊고 무궁한 의미가 차츰 자신 속에 배어들어서 무젖어 익숙해지게 된다면, 어느 사이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그 글 속의 뜻이나 이치와 말없는 가운데 서로 계합(契合)을 이루게 되어서 미처 자신이 이를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훌쩍 많은 진보를 이루게 될 것이다.” 하였으니, 선생께서 공부에 착수한 방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늘과 사람의 성(性)과 명(命)에 대한 오묘함과 학업을 닦아서 향상하는 차례의 실상에 대하여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구슬을 꿰듯이 분명하게 밝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전인(前人)들의 취지(趣旨)를 발휘하여 이를 통해서 우리 후학들의 이목을 열어 준 것들로서, 그 내용이 광박(廣博)하면서도 주실(周悉)하고 친절하면서도 적당(的當)한 것들인바, 친구와 문인들 사이에 오고 간 서신이나 그 제목을 짓고 사고(思考)하여 쓴 저술에서 보이는 바들은 모두 앞으로 백 대의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여전히 아무런 의혹도 생기지 않을 만한 것들이다.
그러고도 또 혹시 성인(聖人)의 말씀들이 인멸(湮滅)되어 버려서 후인들이 이에 대하여 쉽게 미혹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운 것이 있으면, 이를 다시 발휘하고 제시해서 여기에다 차례를 매기고 논파하여 저술로 남겼는바, 이러한 일은 마치 농부에게는 보습이나 쟁기와 같으며 대장장이에게는 풀무나 대장간 같은 것으로서 단 하루라도 버려 둘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은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을 앞에다 먼저 제시한 다음에 여러 선비들의 경(敬)에 대한 설을 모아서 각 장(章)마다 서로 같은 부류들을 덧붙이면서 다시 곳곳에서 필요한 설명을 제시한 것들로서, 경(敬)에 대한 의미가 더 이상 미진한 것이 없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제양록(制養錄)》은 정자(程子)의 ‘외물(外物)을 제어하여 그 중심(中心)을 배양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고,《약중편(約中篇)》은 또 정자의 ‘그 감정을 제약(制約)하여 중도(中道)에 합치하도록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며,《이기휘편(理氣彙編)》은 선유(先儒)들이 이기(理氣)에 대해 논한 것들을 수집하여 이를 휘분(彙分)한 것으로 거기에다 각각 조목(條目)들을 두었는데, 그 본원(本原)의 심오(深奧)하고 은미(隱微)함에 대하여 모두 그 지취(旨趣)의 귀착(歸着)하는 바를 극진히 밝히면서 서로 다른 견해들에 대하여 비교 설파함으로써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면하였다. 그리고《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는《주자어류(朱子語類)》중에서 문인들에게 학문하는 큰 방법에 대해 가르친 것들을 가려서 취한 것인데, 이를 산절(刪節)해서 두 책으로 만든 것이다. 또《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는《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모방하여 퇴도 선생(退陶先生)의 문집 중에서 가려 뽑아서 다섯 책으로 만든 것으로, 학문하는 길에 관한 도리가 모두 갖추어진 것들이다.《병명발휘(屛銘發揮)》는 학봉(鶴峰) 김 선생(金先生)이 퇴도 선생으로부터 받은 글을 취해서 각 장(章)마다 그 본문을 제시하고 거기에 여러 선비들이 언급한 요지들을 붙인 것으로 곧 사도(斯道)의 전수 과정(傳授過程)을 밝힌 것인바, 만년에 자임(自任)한 바가 실로 무거운 것이었음을 여기에서 은연중 살필 수 있다.
우리 나라는 퇴도 부자(退陶夫子)께서 제유(諸儒)들의 학문을 집성(集成)하고 또한 송유(宋儒)의 학통을 이어받은 뒤로부터 뭇 현인(賢人)들이 이어 나와서 사문(斯文)을 보좌하였다. 선생이 외정(外庭 외가(外家),곧 밀암(密庵)의 가문)으로부터 얻어받은 것들이 바로 이처럼 후현(後賢)들에게 전수(傳授)된 퇴도 선생의 유서(遺緖)였으니, 선생이 그 단서를 열어서 계발한 것은 이처럼 그 적실(的實)한 연원(淵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를 음미하고 탐구해서 그 이치에 대한 이해가 날로 깊어지고 그 도리에 대한 실천이 날로 편안해져 갔던 것이다. 따라서 선생의 동정(動靜)과 주선(周旋)에 대하여 살펴보면 한결같이 이치에 맞아서 흠이 될 만한 털끝만한 사의(私意)도 없었으니, 그 조예(造詣)한 바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도(道)가 이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며 ‘덕(德)이 확립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아,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 문인들 중에서 덕을 이루고 재능이 통달하여 울연(菀然)히 사림(士林)의 종사(宗師)가 된 자들이 5, 6명이나 된다. 그 외에 세상에 나가서 나라에 벼슬하고 고향으로 물러나와 집안에서 가르친 자들로 말하면 그 수가 매우 많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이 그래도 이 학문을 따라 배워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이만큼이나마 아는 것이 모두 다 선생이 남긴 가르침 덕분이다.
순조 을해년(1815, 순조15)에 문인(門人) 예조 참판 김굉(金㙆)이 상소로 선생을 포장(褒奬)하고 이수(異數)로 기릴 것을 청함에 따라 드디어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또 응교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여 선생의 문집과《경재잠집설》을 인쇄해 올려서 비각(祕閣)에 보관하게 되었는데, 일찍이《경재잠집설》을 소대(召對)와 진강(進講)에 비용(備用)토록 한 바 있다. 그리고 금상(今上) 임오년(1882, 고종19)에 특별히 선생을 이조 판서에 추증하고 이어서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선생께서 지난날의 성현(聖賢)을 계승하고 미래의 후학들을 열어 준 공로는 참으로 도산(陶山)의 적전(嫡傳)이 되고, 이제 이미 정경(正卿)의 품질에 추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역명(易名 증시(贈諡))에 대한 하교까지 받들었으니, 그렇다면 응당 신속히 이 드물게 있는 특전을 거행토록 하여 이로써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문학(文學)을 중시하는 나라의 교화를 현창(顯彰)하는 동시에 어진자를 높이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코자 하는 많은 선비들의 정성에도 보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삼가 이와 같이 그 사실의 본말을 갖추 서술해서 봉상시(奉常寺)에 보내서 채택하여 시호를 마련하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삼가 이와 같이 시장을 쓴다.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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