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강공 설단 및 인재공 선조님 사적비 참배행사 참여
청주(묵방삼파)종중 총무이사 승복
한산이씨 인재공 종회에서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인재공 선조님의 다섯 아드님의 산소와 설단을 찾아 참배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동안 세 번의 행사가 있었고 2015. 9, 15일 직강공(휘 “숙복”)선조님의 설단이 설치 되어진 경북 구미시 고아읍 외예리 71번지를 끝으로 인재공 선조님의 아들 산소와 설단의 참배가 끝나는 (광목공 산소는 고양시 덕양구에 모셔져 있어 별도의 참배계획 없이 시제라든가 기타 행사시에 찾아 뵙는 걸로 대치하였음) 금번 행사에는 특히 인재공 선조님의 한 맺힌 슬픔의 현장인 거창 무촌리를 가서 참배하는 순서가 추가 되어 매우 빠듯한 시간의 행사는 인재공 회장님이하 운영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많은 종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참석하셨다.
수도권 및 용인 청주 지역은 서울 경부고속 터미널에서 전세 버스가 움직이는 길에 중간 중간 에서 종원들을 태우는 방식으로 지방의 종원들을 합류 시켰다.
필자도 경부 고속도로 청주 인터체인지에서 인제공회장님이하 청주 종원님들 10여분들과 함께 동승하였다.
버스에 탑승후 운영진에서 준비하신 떡과 음료로 간식을 챙겼다.
구미로 가는 관광버스 안은 인재공 회장님이신 봉구 회장님의 오늘 행사에 있어 우리 인재공 선조님의 아드님중 광목공과 양도공 할아버지 산소만 존재하고 다른 아드님이신 총제공, 직강공, 순절공 할아버지들의 산소는 일부 북한 땅에 있다는 설이 있지만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말씀이시고 10월15일 고려대전의 추계대제 행사가 열리는 데 영광스럽게도 종헌관으로 참가하시게 되었다는 말씀 또한 오늘 직강공 설단 참배후 이동하는 인재공 선조님의 사적비가 있는 무촌에는 선조께서 돌아가신 음 8월28일에 참배를 가려고 했으나 오늘 당겨서(음 8월2일)가게 되었다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인재공께서는 생전에 유고를 남기셔서 그것을 상복 전 대종회장께서 국역을 하여 번역본을 몇 년전에 발간하신 일이 있는 데 최근 문헌서원 장판각을 정리하다 인재유고를 발견하였다는 희소식등 여러 가지 말씀으로 인사를 시작하여 광목공 회장(경구)이하 총재공 회장(원규), 양도공 회장(태원), 직강공 부회장(상구) (직강공 회장께서는 일정이 겹쳐 불참하심)들 께서 돌아가며 인사의 말씀을 하였다. 순절공 종회장(춘구)께서는 전주에서 참석하는 관계로 버스안에서의 인사는 없었다, 종회장님들의 인사 말씀 중 직강공 후손이신 상구 부회장님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가 많았다.
“우리 직강공 후손들은 할머니가 어느 분이신지 모르는 불쌍한 집안이라고 이야기하는 중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의 기록들을 찾아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직강공의 할머니가 누구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아 이곳에서도 슬픈 우리 문중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설단의 비석에는 할머니 자리는 없고 성균관 직강공 설단이라는 글자만이 할머니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회의 운영자금이 없어 종원들끼리 십시일반 내어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래도 설단을 조성하고 가꾸어오는 직강공 후손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어느 종회는 돈이 많아 행사에 참석하는 종원들에게 교통비를 지급하는 종회도 있다는데 그런 종회와 대비되는 직강공의 종회운영은 후손들 숭조정신이 결여 되면 도저히 이끌어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다는 20만여평의 산을 잘 이용하여 직강공 종회가 잘 운영되기를 기원하여 본다.
인사 말씀들이 끝나고 나서 오래간만에 만나시는 종원간에 담화와 개인적인 안부를 묻고 그동안 종중의 돌아가는 현황에 대한 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청주종중에서 준비한 직강공 휘 “숙복” 선조님의 이야기를 옥광천 “순복” 종원의 다음 블로그에서 다운 받은 내용을 복사한 유인물을 오늘 참석하시는 참배객들께 나누어 주어 휘 “숙복” 선조님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였다.
그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한산이씨 9세 직강공 숙복 선조 (인재공의 다섯째 아들)1388~?
숙복(叔福)
1388~?(태종8~)조선초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 첨밀직사 종학의 다섯째 아들이시다.
일직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1408년*태조8)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고 곧 문한관(文翰官)을거쳐 1418에 내자시주부가 되었으나 태조의 기신제(忌晨祭)에 제물을 잘 갖추지 못했다고하여 일시 파직 되었다가 그 뒤 직강 부교리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에 병조좌랑에 이르렀는데, 이때 병조판서 빅습, 참판 강상민등이 총제 심정과 더불어 금위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왕의 허가를 얻고 상왕인 태종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일이 있었다.
군국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은 이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고 심히 노하여 병조에 소속된 관원을 모두 처형하였는데 이로서 공도 죄를 입어 직첩을 회수 당하고 평안남도(강동)로 유배 당하셨다.
세종2년 (1420년)에 자원에 따라 중도부처하도록 하였고 세종8년(1424)에는 외방에서 자의대로 살게 하였으며 세종8년(1428)5월에는 형조에 전지하여 이들을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이후 공의 행장과 졸년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어 알 수 가 없다. 단지 “한산이씨 인재공파 세보”에는 세종 즉위년에 박습의 사건에 열루 되어 돌아가시니 향년 31세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위에서 나타나듯이 공은 세종 8년까지도 생존하였음이 확인된다.
현재 경북 구미시 고아읍 예외리(연홍)에 설단이 모셔져 있다.』
어느듯 달리는 버스는 구미시 고아읍에 도착하여 직강공 설단이 있는 고아읍 외예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직강공 선조님의 설단에 가는 길은 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관계로 버스에 내려서 10여분간 걸어서 설단에 도착하였다.
설단에 도착한 종원들은 이 곳 외예리에 사시는 직강공 후손님들과 전주에서 올라오신 순절공 종원님들 그리고 충남에서 참석하신 종원님들과 함께 참배 행사를 진행 하였다.
우선 직강공 설단과 직강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휘 “문강文疆” 선조님의 설단에 참배 제례를 올렸다.
설단 참배후 오늘의 행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설단을 배경으로 참가 종원님들의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설단 앞에 조성 되어진 문강 선조님의 아드님이신 휘“전專”선조님 산소에 잔을 올리는 참배 순서를 끝으로 직강공 이하 선조님들의 참배행사는 마치고 음복의 순서로 참배 행사에 준비 된 음식과 멀리 전주에서 공수해온 막걸리로 일가분들의 환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은 후에 고아읍내에 준비 된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오늘 행사를 축복이나 하듯이 하늘은 높고 파란 가을 하늘을 보여주는 쾌청한 날씨이다.
식당에서 준비된 음식으로 식사를 마친 참배행사에 참여하신 종원들은 다음 목적지인 경남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무촌리를 향하여 달리는 고속버스에서는 인재공 현원 총무님의 사회로 오늘 참석하신 인재공 종원님들의 소개와 더불어 본인 소개와 하고 싶은 말씀을 하는 시간의 여유를 갖을 수 있었다.
청주에서 참가하신 청주종중 관구 도유사님, 청주화수회 종준 회장님, 인재공 종회 양남이사님의 종중 발전을 위하여 좋은 말씀과 앞으로의 각오 등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직강공 종회 감사이시며 휘 “숙복” 선조님의 18대손이신 학촌鶴村 일구님께서 5페이지에 걸쳐 준비된 유인물로 직강공 선조님의 조선 왕조실록 기사와 기타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기록을 살펴본 결과 직강공 선조님의 생년과 졸년卒年에 대한 내용이 파세보에는 32세 졸로 표기 되어 있으나 목은 선조님 신도비의 음기 문혜공 선(下記錄). 1433년(癸丑) 8월 下澣 현재 생존으로 기록 되어(45세) 실제 돌아가신 해를 확인하여야 된다는 말씀이시다.
그 외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시었으나 여기에 기록하기는 어려움이 있어 생략한다.
달리는 버스는 어느듯 고속도로를 나와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로 향하고 있디.
이 곳 무촌리에 인재공 사적비를 세우게 된 동기는 여러 기록에 의하면 공께서 여말 격번기에 유배지를 함창에서 장사현으로 옮기는 도중 정도전 일파가 보낸 체핵사 손훙종이라는 자에 의하여 이곳 무촌역사가 있는 무촌리에서 글로 표현하기에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모습으로 1392년 (태조1년) 음 8월28일에 32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자리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이를 추모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거창군과 협조하여 2012년 10월13일(음월28일)비운의 역사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제막식 행사를 한지 3년여가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후손들이 다시 찾아와 공의 사적비에 추모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적비가 있는 무촌리 마을회관 앞의 은행나무SMS 수령 400여년을 자랑하며 보호수로 지정 되어 이곳 무촌리를 지키고 있으며 인재공 선조께서 돌아가신 후에 누군가에 의하여 심어져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이 되는 은행나무이다.
이곳에 사적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신 분들이 모두들 함께 한 듯하다.
전 인재공회장이신 성원 회장님 당시 광목공 회장이신 봉구 인재공 회장님 그리고 실무를 담당했던 현원 총무님 함께 실무 일을 맡았던 석찬 종원님들이 모두 이차에 함께하고 있어서 당시의 어려움을 회고하는 모습이다.
마을 분들 설득과 거창군의 협조와 문화재 보호구역이라는 암초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각종 자료와 서류를 작성하던 일들 등등 그당시의 어려움을 현원 총무님이 설명하는 모습을 볼 때 그 노고에 우리 모두 두고 두고 감사의 마음을 보내야 되겠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이런 참변을 당하지 안해야 되겠다는 각오를 하고 32세의 약관의 나이에 돌아가신 인재공 선조님을 잊어서는 안 되겠디.
무촌리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참배를 위하여 준비한 제사음식들을 간소하게 사적비 앞에 차려 놓고 고유제를 올리는 후손들의 모습이 명문가의 후손 답게 진지하다.
제막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오신 종원님들의 감회가 남다른지 사적비와 함께 사진을 기록으로 남기느라 바쁜 행동들이다.
해는 어느듯 서산에 지고 갈길이 멀어 오늘의 참배행사를 마쳐야 될 시간이 오고 있다.
무촌리 사적비를 떠나는 한산이문 일가님들 이 곳을 잊지 말고 후손들과 함께 거창에 오실 기회가 있으면 남상면 무촌리 인재공 사적비를 찾아 주셔서 인재공 선조님의 무참히 돌아가신 현장을 후손들게 알려 주시는 것도 후손들로서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행사를 위하여 기획하고 준비하신 인재공 종회 회장님이하 운영진들과 대종회를 대표하여 행사를 빛내주신 석복 사무처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버스는 달려 아침에 탑승한 청주 인터체인지에 도착하여 우리 청주 일행들은 서울 방면에서 오신 일가님들과 헤어졌다.
필자는 진천에서 오늘행사에 참가하신 원규 대부님과 내수읍 초정 호명에서 오신 수복형님을 모시고 청주 외남동 퍌결다리에서 수복 형님을 내려드리고 오창 장대리를 들려 총제공 종회 회장님이신 원규대부님 모셔드리고 오후 9시경 집에 도착하여 오늘의 참배 행사를 마무리 지었다.
직강공 선조님을 참배후 기념사진
무촌리 인재공 선조님 사적비를 둘러보는 종원님들
사적비를 지키고 있는 무촌리 마을회관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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