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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숙한 죽음문화의 모색 - 소극적 안락사의 3가지 대안 -

장안봉(微山) 2016. 6. 4.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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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죽음문화의 모색

- 소극적 안락사의 3가지 대안 -



오진탁 (한림대학교 철학과 교수, 생사학연구소 소장)



Ⅰ. 죽음문화가 없다


의학과 의료 기계의 발달로 무수한 생명이 구해지고 고통이 크게 경감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죽어 가는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의사들은 많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죽어 가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가 생명유지 장치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그 장치를 제거해야 할까. 죽어 가는 사람에게 격심한 통증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의사는 그의 삶을 종결짓는 결정을 내려야 할까. 또한 길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고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생명을 이어가도록 용기를 북돋워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곁에서 도와주어야 하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젠 대다수가 병원에서 죽는다. 죽어 가는 사람을 생명유지 장치로 계속 목숨을 연명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다. 자신의 삶을 불필요하게 연장하지 않고 인간적이면서도 존귀한 죽음을 확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하는 것은 한층 복잡한 문제가 되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얼마 전부터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증가하게 되었다. 의료기계에 둘러싸인 채 여러 가지 튜브를 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대, 60대에 자연사했을 사람들이 암, 당뇨병, 뇌졸증, 치매 등의 병을 지닌 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심장마사지 등 응급조치를 취하기 위해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라 할지라도, 오직 육체적 연명만을 생각하는 의료관계자가 응급실에서 ABC 조치(Air-Way: 기도 확보, Breathing: 산소인공호흡, Circulation: 혈액순환)를 취하면 몇 년간 생명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한다.


환자가 죽어 가는 순간 병원은 극도로 흥분된 광란에 휩싸인다. 환자를 소생시키려는 마지막 수단을 취하기 위해 일단의 사람들이 침대 곁으로 달려든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환자에게 무수하게 약을 투여하고 바늘을 찔러대고 전기 충격을 가한다. 그가 죽어 가는 순간 심전도, 피 속의 산소량, 뇌파 움직임 등등이 면밀하게 기록된다. 의사가 이제 그만 이라고 선언할 때에야 비로소 이런 히스테리는 막을 내린다. 따라서 현대 의학을 ‘사람을 죽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보다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려는 환자의 가족으로서는,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죽음의 방식일까라는 의문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할지, 아니면 연명치료를 계속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붙들어 놓아야 할지 가족들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만일 회복의 희망이 조금도 없는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 난리를 피우면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도록 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최후의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 않을까.


암 말기 환자가 입원하고 있던 대학 병원 입원실은, 환자가 의식을 잃은 뒤 숨질 때까지 48시간 내내 초상집 분위기이다. 환자는 이따금씩 괴성을 질렀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몸을 벌떡벌떡 일으켜 세운다. 가족들은 이를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의 가족은 “우리에게 곧 닥칠 일이라 생각하니 너무 힘들다. 어머니가 저 소리에 놀라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고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임종실이 거의 없어 환자와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임종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당사자와 가족을 보살펴주는 임종문화, 나아가 죽음의 문화도 없다. 근본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현대사회는 냉혹하게 편의주의에 빠져 어떤 영적 가치도 부인하기 때문에,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사람은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처럼 내팽개쳐진 듯한 느낌에 몸서리치게 된다.


티베트에서는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를 영적으로 돌보는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현대사회에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대다수가 표하는 유일한 관심이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병실을 찾아오는 방문객은 갈수록 줄어들어 외로움과 두려움에 탈진한 상태에서 죽게 된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찾아오는 문상객 숫자는 다른 어느 나라 보다 많은 게 바로 우리 사회이다. 죽어 가는 사람을 돕는 일은 마치 쓰러진 사람을 향해 손을 뻗어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다. 그처럼 상처받기 쉽고 극단적인 순간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죽어 가는 당사자에게 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 가장 상처받기 쉬운 바로 그 순간, 그리고 삶으로부터 떠나는 마지막 순간, 세상 사람들은 아무런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통찰력도 제시받지 못한 채 차가운 병실 한 쪽에 내팽개쳐진다. 이는 너무나 비극적이고 치욕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을 육체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치료할 뿐이고 영적으로 보살피는 의식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결여되어 죽음문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외로움에 지치고 아무런 영적인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커다란 압박감과 미몽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 누구든지 마음의 평화를 느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세속적 성공만 지향하는 현대 사회의 허세는 공허할 뿐이다. 더구나 환자의 죽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의료관계자가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는지 궁금하다. 얼마 전 대학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간호사가 연구실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의사나 간호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임종환자를 차가운 병실 한 구석에 마지막 순간까지 방치해 놓고 있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그는 말했다.

한 생명이 죽음을 맞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자신의 삶을 맺는 마지막 순간이므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까지 관계된다. 따라서 그 순간에 연명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너무도 피상적인 접근방식이다.

 안락사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죽음,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 나아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 대해 보다 공개적인 논의와 철학적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Ⅱ. 새로운 죽음문화 형성을 위한 모색


최근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라든가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관심과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치료하기 어려운 말기환자를 단지 육체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느냐 여부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 환자를 더 이상 치료할 수단도 없고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육체적 연명만을 위해 연명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중단한 것인지 여부에만 초점이 맞춰져있을 뿐이다.

더구나 안락사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소극적 안락사의 경우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국립 암센타에서 호스피스에 대해 조사했는데,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중단’ ‘사전의사결정제도’에 대해 국민의 84%, 81%가 필요하다’ 고 응답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2004년 6월29일 보라매병원 사건에 대해 유죄확정판결을 내렸으므로, 퇴원하고자 하는 환자 가족과, 이를 저지하는 병원과 의사 사이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의미 없는 목숨연장이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 안락사 반대자들은 의료현장의 생명경시풍조를 크게 우려한다. 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 게르만민족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를 촉진시킨다는 명목으로 나치정권이 신체장애자와 정신병자를 말살시키는 형법을 제정하였고 또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 비극이 일어난 바 있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장애인이나 극빈자의 경우 ‘죽을 권리’가 ‘죽어야 하는 의무’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야 한다. 안락사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도 안락사를 법제화하는 식으로 추진하다가 얼마 전부터 이런 식의 움직임을 중단했다가, 최근에 존엄사를 법제화하기 위해 연립여당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1]


소극적 안락사 논란과 관련해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명하도록 하는 연명치료 장치가 죽음이란 위급한 국면에서 고통, 불안, 그리고 혼란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과 임사체험의 증거로 볼 때, 혼수상태에 빠질지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온전하게 의식할 수 있다.2]

 따라서 죽기 전에, 죽어갈 때, 그리고 몸과 의식이 최종적으로 분리될 때까지 환자를 평온한 분위기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필자는 이와 같이 뚜렷한 해결책 없이 논란만 거듭되고 있는 안락사 파문과 관련해 이 문제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음같이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중앙일보》2004. 1. 4.

2]달라이라마의 스승, 딜고 켄체 린포체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생명 유지 장치를 사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가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고, 그를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한층 낫다. 생명 유지 장치가 곁에 있어도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 장치를 작동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계속 생존할 방법이 없고, 또한 그 장치를 작동할지라도 단지 아무런 의미 없는 생명의 연장을 위해 그의 삶에 인위적으로 집착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걀 린포체, 『티베트의 지혜』, 오진탁 역 (민음사, 1999), 591-596쪽.



첫째,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죽음준비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널리 알리고, 죽음에 대한 인식 전환을 도모하기 위해 죽음준비교육을 활성화한다.

모두 다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죽는 것이 과연 인간다운 죽음인지, 죽음의 질(Quality of Life)을 심사숙고해야만 소극적 안락사 문제와 연명치료 논란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죽음을 평소에 대비하고, 치료가능성이 더 이상 없을 경우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편안히 수용하고자 하는 자기의사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에 서명한다.

단순히 리빙윌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삶, 죽음, 그리고 죽음의 방식에 대해 평소에 미리 심사숙소하자는 것.


셋째 호스피스의 철학은 죽음을 패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하므로, 사람마다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호스피스 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


세 가지 대안이 충분히 논의되어 시행될 수 있다면, 안락사 논란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힐 수 있을 것이고 죽음의 질과 함께 삶의 질 역시 점차적으로 향상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Ⅲ. 첫 번째 제안 : 죽음준비교육


소극적 안락사 문제를 단지 법적인 차원, 의료적인 문제에 한정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들도 대부분 이 문제를 단지 법적인 테두리, 의학적인 골칫덩어리의 해결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죽음이 겨우 법적인 혹은 의학적인 문제일 수만 있겠는가. 소극적 안락사 논란과 연명치료 여부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의학적, 법적인 문제를 포함해 논의를 해야겠지만, 그런 식의 논의에 앞서 인간의 삶과 죽음, 생명 혹은 영혼의 문제라는 보다 큰 차원에서 어떤 식으로 죽어야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늦게, 실제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므로,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죽는 사례가 많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가 많고, 자살 사망률이 최근 들어 급증하는 상황이고, 또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밝은 미소 속에서 죽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죽음에 대한 인식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바르게 영위하도록 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 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죽음준비교육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도록 하고 죽음을 한층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의 준비교육이고, 자살예방교육이기도 하다.

 따라서 죽음준비교육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 또 성인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교교육과 평생교육의 형태로 눈높이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실시해야 할 것이다. 3] 일본에서도 학교교육에 죽음준비교육이 2002년부터 포함되었으며, 죽음준비교육의 연구를 위해 올해 예산에 4백만 달러를 책정했다.


3]알폰스 데켄 교수는 죽음준비교육의 목표를 다음같이 15가지를 제시한다.

(1) 임종과정에 대한 이해, (2)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 (3) 상실과 슬픔에 대한 교육, (4) 죽음에 대한 두려움 줄이기, (5) 죽음에 대한 금기 없애기, (6) 자살예방하기, (7) 암환자에게 사실 그대로 말해주기, (8) 죽어가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윤리문제 다루기, (9) 법의학적인 문제 파악하기, (10) 장례방식 미리 생각하기, (11) 삶의 시간의 소중함 발견하기, (12)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13) 죽음에 대한 자기 철학 형성하기, (14) 죽음에 대해 종교적으로 해석하기, (15) 사후세계의 가능성 생각하기.

 레비턴 교수는 7가지를 제시한다.

(1) 죽음에 대한 타부를 없앤다. (2)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의 의미있는 교류, (3)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해소, (4) 유가족의 슬픔을 이해하고 위로한다. (5) 자살충동의 예방, (6) 사회가 생사관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배운다. (7) 다른 문화의 생사관을 이해시킨다.

 베커 교수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의 죽음준비교육, 평생교육으로서 죽음준비교육, 전문가를 위한 죽음준비교육으로 나누어 말하고 사전의사결정제도, 리빙윌에 대한 선택 문제도 죽음준비교육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 이해와 개념규정의 방향에 따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나 타부 등을 야기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까지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므로, 죽음에 대한 개념정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뇌의 기능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이후에도 호흡과 심장박동을 일정 기간 유지시켜 주는 일이 가능해짐에 따라 죽음 정의 문제는 이론적 차원에서나 실용적 차원에서나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심장의 기능 여부가 사망판단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심폐사에서 뇌사로 죽음정의가 바뀐다면, 뇌의 모든 기능이 회복 불가능하지만 생명보조 장치에 의해 심장박동을 유지하고 있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환자의 경우 이미 사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죽음정의가 심폐사에서 뇌사로의 전환은 또 장기이식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환자로부터 장기를 적출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뇌사자가 장기이식에 동의한 경우, 장기척출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또 뇌의 기능이 회복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 생명 보조장치 사용 여부 안락사에 대한 논란도 필요 없어진다.


그러나 실용적 측면에서의 이와 같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뇌사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다. 4] 죽음의 결정과정에서 뇌의 중요성은 인정되지만, 뇌사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주장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죽음을 그 자체로 정의해야지 실용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뇌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신체기관의 일부가 손상받은 것일 뿐으로 귀나 눈의 손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뇌가 신체기관을 조정하는 기능을 지녔지만, 인간존재가 뇌로 환원되거나 뇌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인간존재의 죽음이란 그 일부의 죽음이 아니라 전체적 유기체의 죽음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왜 그토록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것인지, 불행하게 죽어 가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그리고 자살사망률이 왜 최근 들어 급증하는 것인지 문제를 추적해 보니까, 다른 여러 가지 원인도 작용하지만 그 근원에는 죽음에 대한 오해, 육체 중심의 인간이해와 죽음정의가 오해의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5]

 또 다른 문제점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개념 정의하느냐 하는 죽음 정의 문제는 죽음 판정기준과 죽음 판정기준 충족 여부 검사와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 개념이 서로 혼동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 정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이지만, 죽음 판정기준 제시와 죽음 판정기준 충족 여부 검사는 기본적으로 의학적인 문제이다. 6]

죽음정의 같은 철학적인 문제는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그런 문제는 분명 아니지만, 영혼의 존재 문제라든가 사후세계 문제 등에 철학적, 종교적으로 폭넓게 접근해 바람직한 방식으로 죽음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고 죽음 정의 문제는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우므로, 실용적 차원에서 죽음판정 기준 제시라는 의학적 문제로 축소되었다. 심폐사든지 뇌사든지 이런 논의는 죽음 판정 기준과 관련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음 정의 문제인 양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7] 그래서 죽음정의 문제는 인간의 육신에 초점을 맞추어 단지 의료적인 문제, 법적인 차원에 한정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죽음은 단지 뇌사, 심폐사 같은 의학적 차원의 죽음판정 기준의 문제로 축소되니까, 사람들의 죽음 이해 역시 육체 중심으로 한정되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죽음(죽음정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은 존재하지 않는다.


4]비가역적 혼수상태에 있는 환자들에게 들어가는 엄청난 부담으로 인해 미국에서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다, 1968년 미국 하버드 대학 뇌사위원회는 비록 뇌는 죽었지만, 다른 장기는 유용한 상태인 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므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뇌사를 제시했다. 이 이후 다른 선진국에서는 뇌사를 죽음 판정기준으로 수용했지만, 일본은 뇌사를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피터 싱어 ?삶과 죽음?, 장동익 역 (철학과 현실사, 2003), 37-57쪽 참조.

5] 현직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죽음준비교육을 가르치기 전에 죽음과 자살에 대해 의식조사를 한번 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끝이므로, 자살하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답하면서 죽으면 무미, 무취, 무감각, 무통해진다는 답이 많이 나왔다. 의과대학에서 죽음정의를 심폐사 혹은 뇌사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으니까,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살피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역시 육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6]임종식, 『생명의 시작과 끝』(로뎀나무, 1999), 247, 248쪽.

7]죽음정의 문제를 다루는 생명윤리, 의료윤리 관련문헌을 조사했더니 심폐사와 뇌사 등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만 논의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 성숙한 죽음문화 부재 현상과 죽음에 대한 오해, 그리고 자살사망률 급증은 이와 같은 육체 중심의 죽음정의와 관계된다. 죽음 판정 기준 제시와 죽음판정 기준충족 검사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지말고 보다 큰 틀에서 죽음정의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차분히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죽음정의가 도출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영혼의 존재 여부같은 문제는 현실적으로 의견차이로 인해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의견 차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제시하기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의학적, 법적인 문제를 포함해 논의를 해야겠지만, 그런 식의 논의에 앞서 인간의 삶과 죽음, 생명 혹은 영혼의 문제라는 보다 큰 차원에서 죽음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은 어떤 죽음이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건강에 4가지 측면이 있다. :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인 건강.

최근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영적인 건강을 추가시킴으로써 우리의 건강에 당연히 영혼이나 영성, 영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건강에 영적인 건강을 포함해 4가지 측면이 있다면,

죽음도 당연히 4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1) 육체적 죽음, (2) 사회적 죽음, (3) 정신적 죽음, (4) 영적인 죽음. 8]

그러나 우리 사회는 육체적 죽음과 사회적 죽음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정신적 죽음과 영적인 죽음에는 무관심하다.


퀴블러 로스도 인간존재는 육체적, 감정적, 지적, 영적인 4가지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면서,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참된 정의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9]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고 의대생과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에 부딪혀 보기로 결정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죽어가고 있고, 또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가족이 죽어가는 사람을 병실 한 구석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 역시 죽음이해와 정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자기 환자와 항상 깊은 인간적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사람이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해서든지 알고 싶어 했다. 분노와 욕설, 좌절의 상태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바로 뒤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는 침착함, 평온함을 자주 목격하면서, 죽은 그들의 육신은 봄이 되어 더 이상 필요 없어 벗어 던진 겨울 외투처럼 보였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살핀 경험이 있는 그는 아주 확실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육신은 껍질에 불과하고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은 더 이상 그 껍질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10]

 죽음이 찾아오면 시체가 남는 것이지만, 시체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죽더라도 존재의 양식만 바꿀 뿐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11]


8]최근 들어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호스피스는 죽어가는 사람의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보살피는 일을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죽어가는 사람 중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성숙한 죽음문화의 형성을 위해서는 죽음정의와 그 이해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9]퀴블러 로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 박충구 역 (가치창조, 2001), 201쪽.

원래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면서 어떤 심리적 반응을 보이면서 죽는가에 관심을 지녔던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접촉하면서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증언을 접하게 되면서 임사체험과 사후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서전 앞머리에서 다음같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스위스의 한 작은 소녀로 큰 꿈을 갖고는 있었지만, 『인간의 죽음』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 삶의 마지막을 연구한 이 책은 나를 의학적,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 했다. 또한 내가 나의 남은 생 동안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설명하게 될 줄도 몰랐다” (퀴블러 로스, 같은 책, 13-14쪽).

10]같은 책, 201, 225-226쪽; 퀴블러 로스, 『사후생』, 최준식 역 (대화출판사, 1996), 54-55쪽.

11]다찌바나 다까시, 『임사체험』상 (청어람미디어, 2004), 411쪽.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뇌사나 심폐사처럼 육체적 죽음판정 기준만으로 정의될 수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육체 중심의 죽음판정 기준이 죽음정의를 대신하는 그런 사회는 결코 죽음문화가 성숙될 수 없고 자살처럼 불행한 죽음만 양산될 뿐이다. 사후의 삶에 대한 연구결과,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생존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퀴블러 로스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정의한 것과 같은 그런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그는 이르렀다. 이제 죽음 정의는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혼, 정신, 삶의 의미같이 순전히 물질적인 삶과 생존 이상의 무언가 지속되는 것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12]

 의학적, 법적인 접근은 단지 죽음의 육체적 측면만, 즉 죽음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분만 다루는 격이다. 육체의 죽음, 한 가지 죽음 판정기준에 국한시킨다면 삶과 죽음에 대한 폭넓은 가능성을 제한하는 일도 야기될 수 있으므로, 죽음을 폭넓게 또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죽음에만 국한시키기보다 다양하게 접근해야만 우리의 삶과 죽음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또한 죽음이 끝이냐 아니냐, 혹은 죽은 뒤 영혼은 유지되느냐 여부 문제 역시 죽음 정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죽음 정의 문제는 죽음 이후 문제와 아무 관련 없이 논의되어서는 곤란하다.

죽음은 우리의 삶과 죽음 이후를 13] 연결시켜주는 매듭의 역할을 하므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3가지는 함께 심사숙고되지 않으면 안된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단지 지식의 문제, 사실의 문제라고 말했다. 소아암 등으로 죽음에 직면한 어린아이들을 향해 그는 “우리 몸은 헝겊으로 만든 번데기와 마찬가지여서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간다”고 말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죽음이란 육신의 옷을 벗는 행위“ 라고 규정했다. 14]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게 끝이 아니므로, 죽음의 정의 역시 육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 결과 사람들은 육체에만 국한되는 그런 삶, 지나치게 세속적인 삶만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과정으로 본다면,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 정도 바뀔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죽음을 육체적 관점으로만 보지 말고 보다 깊이 영혼, 영성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고 죽음방식이 보다 성숙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질(Quality of Life)과 죽음의 질(Quality of Death)은 결코 올라갈 수 없다. 15] 삶과 죽음을 통한 여행으로 자기존재를 이해할 경우,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는 세속주의나 물신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2]퀴블러 로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 225, 226쪽.

13]죽음 이후 사후세계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이 글에서는 논의하지 않고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사후세계 논의와 관련해 엄밀한 과학주의와 사후세계에 대한 지나친 몰입, 모두를 비판하는 무디의 합리적인 태도는 귀 기울여 경청할 만하다.

“극단적으로 회의적이 되어 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증명되지 않은 것은 일체 믿지 않는 사람도 곤란하지만, 반대로 아무 것이나 다 믿어버리는 사람도 곤란하다. 나는 진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건전한 태도는 양쪽의 중간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현대 사회는 세계 어느 분야라도 과학주의의 기반 위에 있다. 그러나 엄밀한 과학주의는 세계를 너무 작게 축소해 버린다. 이 세계에는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할 수 없는 현상이 아직 많다. 그런 현상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무시하면 그만큼 그것 역시 잘못된 세계인식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말할 때에는, 자기가 아직은 확실하게는 무엇 하나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인식해 둘 필요가 있다”

(다찌바나 다까시, 『임사체험』 하, 50-58쪽).

14]소걀 린포체, 위의 책, 7-9쪽

15]생사학 전문가들은 죽음문제를 영혼이나 영성과 결부시켜 연구하고 있다. Kenneth J. Doka와 John D. Morgan은 Death and Spirituality (Baywood, 1993)를 펴낸 바 있고, 영성적 관심, 사별과 영성적 위기, 영성적 보살핌, 영성과 상담 등등에 관해 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죽음을 육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육체의 죽음은 분명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일 뿐이고 육체로부터 영혼이 떠나는 것이다. 죽음은 단지 육체의 죽음일 뿐 끝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퀴블러 로스가 생사학의 연구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면서까지 생사학 연구에 몰두한 것도, 또 생사학이 존재하는 이유 역시 죽음은 끝이 아니므로 죽음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 전달에 있는 것이다.16]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과 죽음의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자들은 죽음의 순간 마치 허물 벗듯이 육체의 옷을 벗어버렸다. 죽음은 흡사 나비가 고치를 벗어 던지는 것처럼 육신을 벗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은 보다 높은 의식 상태로의 변화일 뿐이다. 죽음의 순간에 유일하게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육신이란 허물이다. 죽은 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봄이 와서 겨울코트를 벗어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죽음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17]


그러므로 죽음은 두 가지 이유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첫째 죽음정의에 대한 논의를 심폐사나 뇌사같은 죽음판정 기준이 대신하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에 죽음판정 기준에 대한 논의만 있을 뿐 죽음(죽음정의,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에 불과하고, 죽음의 순간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어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므로,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존재하지만,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육체의 죽음일 뿐 끝이 아니므로,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정의 대신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만 논의하는 사회에는 육체의 죽음이 전부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런 사회에 자살사례가 급증하는 등 불행한 죽음만 양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18]


16]소걀 린포체는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증명이나 논증 여부의 문제라기보다, 지금 이 삶에서 자기 자신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Gary Doore, ed., What survives? (Tarcher Putnam Book, 1990), 203쪽 참조.

17]퀴블러 로스, 『사후생』, 39쪽.

18]우리나라가 OECD회원국 가운데 자살사망률이 1위, 자살사망률 증가는 다른 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살률 높은 일본을 몇 년 전부터 추월했다. 더구나 자살충동 비율을 여러 차례 조사한 결과 약 50%가 충동을 느끼고 있고 노인 자살충동률은 80%가 넘는다. 또한 자살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10명 중 4명이나 된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살예방을 위한 대책은 크게 부족하거나 혹은 거의 없다고 말해도 되는 상황이다.



Ⅳ. 두 번째 제안 : 존엄한 죽음


1. Living Will,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


소극적 안락사의 두 번째 대안으로 리빙윌(Living Will),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 혹은 ‘사전의료지시서’을 제시한다. 적극적 안락사뿐만 아니라 소극적 안락사 역시 논란의 소지가 많이 있지만, 리빙윌이나 사전의료지시서를 토대로 하는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와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에서 건강할 때 존엄한 죽음을 원한다는 의사표시를 해두는 리빙윌이나 사전의료지시서를 이미 법제화했다.19]

 대만도 7년간의 노력 끝에 존옴사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자연사법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통과시켰다. 일본에서도 존엄한 죽음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데 존엄한 죽음을 실천하기 위해 리빙윌에 서명해 두었다가, 의료기관에서 치료받게 되는 경우, 이 선언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다.

일본 후생성(厚生省)에서 98년 6월 말기의료를 집중 검토한 결과 리빙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고,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 자신의 의사를 중시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에 따라 품위 있는 죽음을 원하는 환자의 뜻은 대부분 수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일본은 법제화를 모색하고 있다. 또한 미국, 일본만이 아니라 호주,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캐나다, 스코틀랜드 등의 관계자들이 모여 인간의 존엄한 죽음에 관해 국제회의를 10여 차례 열고 있다.


19]알폰스 데켄,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오진탁 역 (궁리, 2002년), 106, 107쪽.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으므로,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 자기가 원하는 죽음의 방식을 미리 가족과 협의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유서형식으로 문서화 해두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유서만 써두자는 말이 아니라, 리빙윌에 서명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을 되새겨보면서 인간다운 삶과 품위 있는 죽음맞이는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성찰해보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함으로써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겠다는 결심을 하자는 뜻.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


저는 제가 병에 걸려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할 경우를 대비하여 저의 가족, 친척, 그리고 저의 치료를 맡고 있는 분들께 다음 같은 저의 희망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선언서는 저의 정신이 아직 온전한 상태에 있을 때 적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저의 정신이 온전할 때에는 이 선언서를 파기할 수도 있겠지만, 철회하겠다는 문서를 재차 작성하지 않는 한 유효합니다.


(1) 저의 병이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고 곧 죽음이 임박하리라는 진단을 받은 경우, 죽는 시간을 뒤로 미루기 위한 연명조치는 일체 거부합니다.


(2) 다만 그런 경우 저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는 최대한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죽음을 일찍 맞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3) 제가 몇 개월 이상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연명조치를 중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저의 선언서를 통해 제가 바라는 사항을 충실하게 실행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저의 요청에 따라 진행된 모든 행위의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20]


20]같은 책, 96, 97쪽.



얼마 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유료양로원에서 ‘죽음준비’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노인들은 평균 연령이 80세였으므로,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노인들을 상대로 조심스럽게 “죽음은 절망이 아니다, 죽을 때 자기 자신의 값어치가 남김없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밝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하자”는 취지로 1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소극적 안락사의 대안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전환, 호스피스 제도의 활성화와 함께 리빙윌을 제시했더니, 이구동성으로 찬성의 뜻을 표했다.

소극적 안락사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 노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사나 변호사에게 물어보는 등 고민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귀가 번쩍 뜨였던 것이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의 내용이 바로 자신들이 원하던 내용이라는 것이다.

소극적 안락사의 대안으로서 리빙윌은 바람직한 죽음의 방식이라고 본다.

평소에 건강할 때 리빙윌에 서명해두고 자기의사를 가족에게도 분명하게 알려 놓는다면,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본인이나 가족이 담당의사에게 관련서류를 제시할 경우, 당사자의 뜻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2. 소극적 안락사와 존엄사의 차이


소극적 안락사와 존엄사, 두 가지를 서로 혼동하거나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듯싶다.

두 가지는 서로 유사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은 훨씬 많다. 공통점은 억지로 생명을 죽지 못하게 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것, 단 한 가지뿐이지만, 차이점은 여섯 가지나 된다.

(1) 행위와 판단의 주체 (2) 죽음관 (3) 삶의 태도 (4) 죽음의 방식 (5) 리빙윌 (6) 작별인사의 방식


(1) 행위와 판단의 주체 :

소극적 안락사가 법으로 합법화될 경우, 소극적 안락사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판단의 주체는 당연히 의료인이다. 법으로 보장되었으므로, 의사는 소극적 안락사를 행할 권리를 지닌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당사자와 가족, 혹은 당사자와 의료인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인 또는 가족의 뜻에 따라 죽게 되는 상황도 야기될 수도 있다. 당사자의 뜻이 전적으로 무시되는 상황도 초래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와 판단의 무게 중심은 역시 당사자에게 두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존엄사의 경우, 소극적 안락사는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므로, 행위와 판단의 주체는 의료인이 아니라 당연히 죽어가는 당사자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병의 진행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자기 생명을 자기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하느냐, 아니면 의사 혹은 가족이 결정하느냐 하는 판단 주체의 차이, 또 의사가 판단의 주체가 되느냐, 혹은 병의 진행과정을 알려주는 역할만 하느냐 하는 의사가 맡는 역할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2) 죽음관 :

소극적 안락사의 경우, 당사자는 평소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죽음준비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생사관 역시 확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별탈 없이 살아가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소극적 안락사를 행해야 하느냐 여부를 고민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뿐이다. 단지 의사가 주어진 상황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소극적 안락사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리빙윌에 미리 서명하는 사람은 평소 죽음에 관심을 지녀 죽음을 자기 삶의 일부로 수용하면서 죽음을 준비했을 것이고, 어느 정도 뚜렷한 생사관을 정립했으므로, 존엄사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양자 간에 크게 벌어져 있는 생사관의 차이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3) 삶의 태도 :

리빙윌에 서명한 사람은 죽음의 수용과 준비를 통해 자기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을 되새기면서, 제한된 삶의 시간을 보다 의미있게 사는 방식을 모색한다. 그러나 갑자기 소극적 안락사를 하느냐 여부에 직면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 평소 심사숙고하지 않았듯이, 삶의 방식에 대해, 또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방식 측면에서 서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4) 죽음의 방식 :

소극적 안락사 문제에 봉착한 사람은 죽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예기치 않게,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직면해 떠밀려 가듯이 소극적 안락사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당사자의 의사는 전적으로 무시되는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리빙윌에 서명한 사람은 자기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즉 존엄사를 평소 건강할 때 자기 자신의 죽음의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결정해 놓았다가, 어느 날 죽음이 찾아와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라도 아무런 흔들림 없이 평소에 준비한 대로 밝은 모습으로 죽음에 임하게 된다. 따라서 죽음의 방식 역시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5) 리빙윌 :

소극적 안락사 문제에 직면한 사람은 평소에 리빙윌이나 사전의료지시서란 제도가 있는지, 리빙윌 혹은 존엄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에 대해, 죽음을 평소에 준비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존엄사에 뜻을 둔 사람은 리빙윌이나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해, 또 자기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역시 평소에 깊이 성찰한다.


(6) 작별인사 :

소극적 안락사 여부에 직면한 사람은 갑자기 찾아온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족 친지와 떨밀려 가듯이 작별인사를 하게 된다. 심지어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지도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죽는 사례를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리빙윌이나 사전의료지시서에 미리 서명해 둔 사람은 마치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듯이 가족을 향해 편안하게 마지막 말을 던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마지막 작별의 방식 역시 양자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벌어져 있다.


따라서 소극적 안락사와 존엄사는 이상과 같이 6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총괄적으로 보았을 때, 소극적 안락사는 소극적, 수동적, 부정적, 어두운 이미지라고 한다면, 존엄사는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 밝은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결국 죽음의 방식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나아가 죽음 이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연명치료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 보다는, 리빙윌에 서명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죽음의 방식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까지 심사숙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죽음의 질뿐만 아니라 삶의 질 역시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Ⅴ. 세 번째 대안 : 호스피스의 활성화


소극적 안락사의 세 번째 대안으로 호스피스의 활성화를 들었다. 서양 의학은 치료를 통해 환자를 단 1분이라도 더 연명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의사의 첫 번째 임무이므로, 환자의 죽음은 패배로 간주된다. 죽음을 이런 식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현대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어왔다. 의사와 간호사는 주로 치료에만 신경쓸 뿐이지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말기환자들이 겪는 정신적 불안과 고통을 어떻게 해야 덜어줄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더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환자를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은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환자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보살피는 교육을 의사나 간호사는 받아본 일이 없다. 그러나 삶의 질은 단지 살아있는 시간의 길이라는 양적인 측면으로만 측정될 수는 없다.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간주하는 호스피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과 죽음의 질을 함께 생각하면서, 말기환자가 인간답게 편안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프로그램의 총칭이다. 남은 인생을 덜 고통스럽게 보내면서 자기 인생을 정리하고 정신적으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어쩌면 가장 주요한 일인 지도 모른다. 말기환자의 극단적인 불안심리, 주위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진정시키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가치 있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호스피스의 철학이다.


시한부 말기환자에게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왜 하필이면 나인가’ ‘왜 나만 죽어야 하는가?’ 라는 분노의 감정이 밀려들게 마련이다. 이런 감정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 가족이나 호스피스 봉사자의 몫이다. 몇 개월 밖에 남지 않은 임종환자들을 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의 문턱에 홀로선 말기환자의 공포와 고독, 그리고 분노를 함께 나누는 호스피스 봉사는 ‘고통스러운 활동’이라고 어느 자원봉사자는 말한다. 호스피스는 죽음의 길에 들어선 말기환자들을 죽는 그 순간까지 질병으로 인해 생긴 육체의 통증 뿐 아니라 심리적 불안이라든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보살핀다. 임종환자가 맞는 삶의 마지막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완화해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 호스피스가 지향하는 바이다. 임종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는 최대한의 관심과 배려를 제공한다. 삶의 마지막 과정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원하는 방식으로 남은 시간을 영위하다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호스피스는 더 이상 치유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 풍요로운 마음으로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다 참되고 의미 있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 시행하는 활동 전부를 일컫는다.

차가운 의료기계에 둘러싸인 채 단지 육체적으로만 오래 연 명하는 것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주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젊은 여성 환자가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처음 입원했던 병원에서 부작용이 심한 화학요법 치료를 받았는데 좋아지기는커녕 정신적으로 크게 고통스러웠다. 마침 어느 친절한 의사가 화학요법을 계속 써도 거의 효과가 없다고 설명해주었고 호스피스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의 자유라고 말해서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죽음을 며칠 앞두고 그녀는 “나는 정말 행복해” 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녀의 밝은 미소는 주위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21]


21] 알폰스 데켄, 같은 책, 202, 203쪽.



Ⅵ. 맺는말


필자는 이상과 같이 논란만 거듭하는 소극적 안락사 문제와 관련해 바람직한 죽음문화가 형성되도록 하기 위한 토대로서 세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는 죽음준비교육을 시행해 죽음인식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일,

둘째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에 미리 서명하고 이를 계기로 평소에 죽음의 방식이라든가 삶의 방식을 심사숙고해 두는 일,

셋째 임종환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 제도의 활성화.

소극적 안락사 문제를 육체적 측면, 사회적 각도에서만 보지 말고 정신적 측면, 영적인 차원까지 함께 숙고하면서 세 가지 대안이 보다 활발하게 논의되고,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시행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죽음의 질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질이 높아져야만 우리 사회의 삶의 질 역시 한층 높아지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주제어

소극적 안락사(Passive-euthanasia), 자살(Suicide), 죽음문화(Death-culture), 임사체험(Near-death-experience), 죽음준비교육(Death-education), 호스피스(Hospice), 생전유언(Living-will), 생사학(Thanatology), 존엄사(Deathwith-dignity), 뇌사(Brain-death), 심폐사(Heart-death), 죽음정의(Definition of death)




Suggestions for Mature Death-Culture: Three Alternatives of Passive-Euthanasia


O, Jin-tak (Hallim Univ.)


Understanding death in the right way is very important. Depending on how well one understands death and in what way one defines death, the discussion on death can lead to denying it or tabooing the issue altogether. Nowadays, the definition of death relies on clinical determination of men's medical condition in such terms as brain death or heart death. Death should not be defined entirely in terms of the collapsing of the body. The founder of Thanatology (the study of death and dying), Qubler-Ross, states that the human has a soul and that defining death means going beyond the realm of the physical and the material to the realm of the soul, the mind, and life itself. In this context, death doesn't exist for two reasons. First, such medical pronouncement as brain death or heart death has functioned so far as the definition of death, thus, there has only been the discourse on the criteria for medical decisions, but not on death itself. Secondly, the death as we know only marks the physical death since the soul begins its journey, separating from the body. In a society where there is only the discourse on the medical criteria for physical death, but not the significance of death itself, people tend to think of physical death as the end of it all. As a result, one witnesses the increase of suicides and increasing number of unhappy death. Therefore for the formation of death-culture I offer three suggestions. First Death-Education, second Living Will or Advance-Directive, third Hospice.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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