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홍릉 - 고려 제 23대 고종의 능

장안봉(微山) 2016. 2. 26. 05:40

사적 제 224호

 

고종(高宗, 1192 ~ 1259년)은 고려 제23대 국왕(재위: 1213 ~ 1259년)이다. 휘는 철(皞), 자는 천우(天祐), 시호는 고종충헌안효대왕(高宗忠憲安孝大王). 강종과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의 맏아들이다. 비(妃)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이다. 몽골에서 내린 시호는 충헌왕(忠憲王)이다.

최충헌의 적(嫡)매형이자 사돈간이기도 하다. 최충헌은 부왕 강종의 서녀와 재혼하였는데, 아들 원종의 장인 김약선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사위였다.

1212년(강종 1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213년부터 1259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실권을 갖지 못하였으며 1213년부터 1219년까지 최충헌(崔忠獻)이 실권을 맡았고 1219년부터 1249년까지 최이(崔怡)가 실권을 맡았으며 1249년부터 1258년까지 최의(崔竩)가 실권을 맡았고 1258년부터 1259년까지 김준(金俊)이 실권을 맡았다.

재위 기간에 몽골족 등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다.

1218년 거란의 침공을 받고 이를 격퇴하면서 몽골의 침입에 대하여는 협약을 맺었다(→강동성전투). 1255년 몽골 사신 제구유(著古與)가 귀국 도중 도적에게 피살된 것을 구실로 하여 재침하자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각지에 몽골의 다루가치(達魯花赤 : 행정 감독관) 72인을 두게 하고, 또 약간의 수비군을 주둔케 했다.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고 1232년 강화도(江華)에 천도하여(→강화천도), 28년간 몽골에 항쟁하였다. 왕의 친조(親朝)와 태자왕전(王倎)의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까지 굴욕을 겪었다.

1235년 제3차 침입을 받고, 1238년 경주 황룡사(皇龍寺) 9층목탑을 소각당한 외에도 귀중한 문화재를 많이 잃었다. 1252년 제6차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남녀 무려 약 2십만 6천 8백 명의 포로를 내고, 태자(太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사실상 몽골에 굴복했다. 1258년 동북 지방에 쳐들어 온 몽고군에게 조휘와 탁청이 투항하면서 철령 이북 지역이 몽고의 쌍성총관부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문화 발전에 힘써, 팔만대장경을 간행케 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간행하였다. 능은 강화의 홍릉(洪陵)이다.

 

 

 

 

 

 

 

 

 

 

 

 

 

 

이 곳은 고려 제 23대 고종(1192~1259)의 능이다. 왕은 강종의 아들이며, 어머니응 원덕태후 유씨이고, 비는 제 21대 희종의 딸인 안혜태후이다. 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최충헌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고종 6년(1219)에 죽자 그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으면서 왕은 제 구실을 못하다가 고종 45년(1258)에 유경, 김준 등아 의(우의 손자)를 죽이자 왕에게 대권이 돌아왔다.

왕이 재위시에 북방의 민족들이 침입하여 그 어려움이 컸었는데, 고종 3년(1216)에는 거란족이 쳐들어와 김취려, 조충 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 후 고종 18년(1231) 몽고족이 쳐들어오자 다음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후 이곳을 강도라하고 몽고족에 대항하였다. 몽고병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불타 버리자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 사이에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조판하니, 이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8만대장경으로 민족문화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고종은 몽고군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내면서 강화를 이룩하려고 고종 46년(1259) 태자 전(뒤에 즉위하여 원종이 됨)을 몽고에 보낸 후 그 해에 승하하면서, 개성으로 옮기지 못하고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이다.

 

고려 왕릉은 대부분 북한에 있어 갈수는 없지만, 지금 현재 남한에만 5기가 있을뿐입니다. 그 중에 4기가 강화도에 몰려있기도 합니다. 강화도에 있는 4기의 왕릉을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모습을 유추할수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조선왕릉과 다른 점이 보이기도 합니다. 왕릉의 위치와 석물의 모습등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출처 : 찐기의 묘지 & 문화재 기행
글쓴이 : 찐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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