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基壇)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礫石)을 깔아 능역(陵域)을 표시하였다. 널방[墓室]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天障石)이 있는 굴식[橫穴式]이며, 2개의 널받침[棺臺]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중국측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으나 고분의 유품이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2006년 8월 장군총의 모습. 일명 장수왕릉으로 불립니다. 아버지 광개토대왕릉에서 불과 몇 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장군총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앞쪽으로 광개토대왕비가 보입니다. 이곳은 돌의 보존상태와 너무나 잘 쌓아올려 무너지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도 광개토대왕릉과 마찬가지로 도난을 당해서 능의 내부를 볼수 있게 문을 개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안들이 사진을 못 찍게 합니다. 그리고 장수왕릉 뒷편에는 장수왕의 후궁 또는 말이라는 설이 있는 또 하나의 총이 있습니다. 아마도 말보다는 후궁이라는 설이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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