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릉 : 사적 제 87호
무왕
이름은 장(璋)이며 어릴 때는 서동이라 불리었다. 법왕(法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가잠성(椵岑城) ·모산성(母山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 그리고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견제하기 위해 수(隋)나라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여러 번 그의 도움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唐)나라가 일어난 후에는 친당책(親唐策)을 써서 624년(무왕 25)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나라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다 당나라가 백제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무왕은 또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게 하였다.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수리하다가 가뭄 때문에 중지하였으며, 634년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서 이를 왕의 유흥지(遊興地)로 삼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하여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안으로는 토목공사 등 낭비가 심하고, 밖으로는 신라 공격에 대비하여 자주 군대를 동원하였으므로 국력(國力)이 많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그의 뒤를 이은 의자왕(義慈王)에게도 인계되어 백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선화공주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이를 연모(戀慕)한 서동(薯童), 즉 후일의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641)이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에 퍼뜨렸다. 마을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자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귀양을 보냈다. 귀양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타나 그녀를 구출해주고 두사람은 백제로 건너가 결혼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서동은 법왕의 아들로서 후에 무왕이 되었고, 따라서 선화공주는 그의 왕비가 되었다. 선화공주는 무왕에게 청하여 전라북도 익산에 미륵사(彌勒寺:왕흥사라고도 함.)를 창건하였고 무왕과 사이에서 아들 의자(義慈)를 낳아 태자로 삼았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화공주에 대한 것이지만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이었다는 설과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신라의 왕족인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이라는 설이있다. 또한 익산미륵사에 근거하여 선화공주는 익산지역을 지배하였던 지방 토호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백제는 지방호족이 강력하여 무왕이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이에 부여를 떠나 익산으로 천도하고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무덤이 선화공주의 묘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여러차례 도굴되어 확인할 수는 없다.
익산 쌍릉으로 불리우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입니다. 첫번째 것이 백제 제30대 무왕의 대왕릉과 두번째 것이 무왕의 왕비 선화공주의 소왕릉입니다. 잠시 문화재 안내문을 인용하자면 '익산쌍릉 사적 제87호로 동서로 약 200M 사이를 두고 있는 두 개의 능. 가운데 동쪽의 것은 대왕능, 서쪽의 것은 소왕능이라 부른다. 부여 능산리고분과 같은 형식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대왕능이 약간 큰 편이다. 발굴조사 이전에 도굴되어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으나, 대왕능에서 부식된 목관과 관장식, 토기편등이 수습되었다. 쌍능은 기록과 석실구조, 호화로운 목관형식으로 보아 백제 말 무왕(600~641)과 왕비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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