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史蹟) 제55호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지정일 : 1963. 1 21.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시 대 : 조선 시대 관리자 : 영주시
※(소수서원 → 영주 소수서원)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전문 설명
이 서원은 풍기(豊基) 군수(郡守)였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고려말(高麗末)의 유현(儒賢)인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緣故地)에다 조선(朝鮮) 중종(中宗)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創建)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中宗) 39년(1544)에는 안축(安軸) 선생과 안보(安輔) 선생을 배향(配享)하였고 인조(仁祖) 11년(1633)에는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그후 안향 선생의 11대손(代孫)이며 경상감사(慶尙監司)였던 안현(安鉉)에 의하여 보강(補强)되었고 명종(明宗) 5년(1550)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재임시(在任時)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어 최초(最初)의 사액서원이자 공인(公認)된 사학기관(私學機關)이 되었다.
회헌(晦軒) 안향(1243∼1306) 선생은 고려(高麗) 원종(元宗) 원년(元年)(1260) 진사과(進士科)에 급제(及第)한 후 우사의(右司義) 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文敎振興)에 진력(盡力)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이며 안축(1287∼1348), 안보(1302∼1357) 형제도 대학자(大學者)이며 문신(文臣)이었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고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경내(境內)에는 강당(講堂), 동(東)·서재(西齋),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서고(書庫),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이 있고 회헌영정(晦軒影幀) (국보(國寶)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보물(寶物) 제485호) 등 중요유물(重要遺物)과 각종(各種) 전적(典籍)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정문(正門) 밖으로는 이곳에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이래 사찰(寺刹)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
소수서원
소수서원 강당(명륜당)
소수서원 전경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이 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 전화 : 054)639-7694~5
- 사적 제 55호
[紹修書院(소수서원) 표석]
[省牲壇(성생단) 과 志道門(지도문)]
서원으로 들어서는 문 앞 왼쪽에는 省牲壇(성생단)이라는 도톰하게 올라온 잔디밭이 있는데, 이곳은 매년 음력 3월,9월(초정일) 제향때 犧牲(희생)을 看品(간품)하던 祭壇(제단)터이다.
1550년 4월에 명종이 직접 쓴 글씨로 만들게 해 하사한 '소수서원(紹修書院)' 현판 원본. 명종이 16세때 쓴 글씨다. <소수박물관 제공>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선생이 고려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 · 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회헌 안향(1243∼1306)선생은 고려 원종 원년(1260) 진사과에 급제한 후 우사의(右司議)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이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고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 ·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서고,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
창건유래
고려후기의 학자 회헌 안향(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이하 회헌이라 함)은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년간 벼슬길에서 두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한 공헌도 공헌이려니와, 그 중에도 회헌 선생 다운 바는 문교(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있음은 이를 나위도 없으리라.
당시는 불교 · 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도입하여 연구하고, 장려하는 등,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은 분이 회헌이다.
신재(愼齋)주세붕(이하 신재)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만에 회헌의 고향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신재는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경내에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
고 신재는 찬탄(贊嘆)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順興誌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남짓 땅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1544)년 9월 1일에 안축 · 안보(安軸 · 安輔:회헌의 三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받들게 했다.
함께 선비를 기르기 위해 서당을 설치하고, 토지와 곡식으로 운영기금을 세울새, 고장 선비 進士 황빈(黃彬)이 벼 70석을 내어 도왔다. 고을의 生員 몇사람과 고을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관리와 운영을 맡게 하여, 여기서 학문을 탐구할 선비를 불러 모으매, 사방에서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신재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영전되는 명종1년 乙巳(1545)에 회헌의 후손인 설강(雪江) 안현(安玹)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자, 이 서원에 와서 사당에 참배하고, 선비를 공궤함에 불편이 없도록 시중들 하인을 늘리고 경비를 크게 돕는 등 서원의 설비를 충실히 했으며, 그로부터 본도의 감사들은 이 서원에 한결같이 마음을 써,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
인물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시호는 문성)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 학자로 문교진흥과 제자육성을 통해 유풍을 진작한 인물이다. 안향은 백이정과 함께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내세워 고려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였다.
고려후기의 학자로서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년 벼슬길에서 두 차례나 왕을 수행,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하고 ,문교와 유학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에 불교신도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 재단인 섬학전을 마련했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을 수입, 연구하여 펴고 장려하는 등으로,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았다.
주세붕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경유 , 호는 신재, 시호는 문민공이다. 신재 주세붕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 선현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로 존경해 왔다.
주세붕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는 목민에 힘쓰는 동시에 도학을 강화하고 그 교육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서원 창설이었다. 그는 향교를 옮겨 지음과 동시에 양반들에게 교육기관으로서 외면 당하던 향교대신 풍기지역의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한편 그가 안향을 봉사하는 사묘와 유생의 교육을 위한 서재를 세운 것은 선현을 존숭하려는 뜻도 있었지만 동시에 교육을 통해 유교적 윤리를 가르쳐 사람들을 교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배향된 선현이 풍기출신의 안향이고 교육 교화의 대상이 풍기의 사림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풍기사림의 교화가 주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그는 인조(仁祖)11년(1633)에는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이 황(1501-1570) 호는 퇴계 시호는 문순공 성리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이다. 퇴계는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게 하였고, 이 서원에서 직접 제자를 가르칠 때 신분과 계급을 떠나 무쇠장이 배순을 제자로 삼은 일화가 전해온다. 또한 주세붕이 서원을 지워 회헌 안향을 높히자 퇴계는 안향의 수제자인 우탁과 역동을 기리고자 역동서원을 세워 안향의 인격과 학문을 진작시켰으며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이산서원에 초향되었고 도산서원에 주향되었다.
건물 배치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을 들어서면 강당이 동쪽을 향해 자리해 있어, 곧바로 그(강당) 측면에 마주하게 된다. 강당 바로 북쪽에는 一자모양의 동․서재(공부하는 선비들의 처소)가 남향으로 자리하여, 명륜당의 중심축과 양재(동서재)의 중심축이 직교되게 되어 있다.
공부하는 처소와 관계되는 전각은 강당․동-서재말고도 학구재․지락재가 있는데, 학구재․지락재는 강당과 동서재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이들의 배치는 학구재만이 그 중심축이 동서재의 중심축과 평행을 이루고있고, 지락재는 그 동쪽에치우쳐 있어, 그 중심축이 이 서원의 어느 건물과도 평행되거나 직교되지 않는다.
동서재 서쪽(사당 동쪽)에 책을 간직하는 서고와 제향때 제수를 차리는 전사청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사당은 강당의 서북쪽(동서재의 서쪽) 구석진 곳에 따로 베푼 담장안에 남향으로 자리해 있어, 한층 외지고 조용하다..
정문밖 왼쪽에 경렴정이 있고, 동서재 뒷편에는 회헌 영정이며, 공자와 그 제자의 전좌도 등 귀중한 유적을 보존하기 이해 새로 지은 유물각이 있으며, 그 북쪽 담장 너머에 주사가 있다.
서원 일곽 뒤편에는 별도로 구획된 담장내에 유물관, 관리사,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취한대
퇴계 이황 선생이 세운 뒤 오랜 세월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지은 정자다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 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비취 취와 차가울 한자에서 따온 것이다.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울창한 송림(松林)이 눈길을 끈다.
수령이 수백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들이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길 오른쪽으로는 천(川)이 흐르고 있는데 이것이 죽계천이고 그 앞으로 숙주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이 숙주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59호로 이 자리가 원래 숙주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임을 말해주고 있다.
주세붕이 이 자리에 백운동서원을 세울 때 원래 있던 숙주사를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고 서원을 세웠는데, 당시 유교와 불교의 위상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숙주사지를 지나면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 오른쪽에 경렴정(景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죽계천 건너편에 취한대(翠寒臺)라는 정자가 있다. 두 정자 모두 소수서원의 원생들이 머리를 식히거나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라 한다.
취한대 옆으로는 '경자바위'라 불리는 큰 돌이 있는데, 붉은색으로 쓰여진 '敬' 자가 아직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 글씨에는 연유가 있다.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자 단종복위운동이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처형당하면서 흘린 피가 죽계천을 붉게 물들일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후 그들의 귀신이 출몰해 주세붕이 이 바위에 붉은색으로 '敬' 자를 새기고 위혼제를 지내고부터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원으로 들어서는 문 왼쪽으로는 성생단(省牲壇)이라는 도톰하게 올라온 잔디밭이 있는데, 이곳은 제사 때 제물로 바칠 짐승을 잡던 곳이라 한다.
경렴정 옆의 서원 문으로 들어서면 강학당(講學堂)이 있다. 현판에는 백운동이라 쓰여 있다. 강학당 뒤로 원장과 선생님들의 집무실이었던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 서고를 모아놓았던 장서각(藏書閣), 문성공 안향 선생을 제를 올리던 문성공묘(文成公廟), 제기를 보관하고 제사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있고, 주세붕의 영정이 있던 영정각과 유물관이 있다.
이 부분이 본래 소수서원이고 이 뒤로는 새로 지은 사료전시관과 충효교육 관이 있다.
건물들이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수용할 수 있던 학생의 수 역시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료전시관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국보 제 111호), 주세붕 선생의 영정(보물 제717호), 대성지성 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 등이 있고, 기타 서화류, 목판류, 장서류 등이 전시되어 있고 강학 모습과 제향 모습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놓았다. 충효교육관은 160석 규모의 연수시설이다.
입구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위치해 있다.
소수서원에 딸린 정자인 ‘경렴정(景濂亭)’ 초서 현판 원본. 초서의 대가인 고산(孤山) 황기로가 퇴계 이황의 요청으로 썼다고 한다. <소수박물관 제공>
경렴정
1543년 신재 주세붕 선생이 지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자 중에 하나이다. 현판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렴계 주돈이를 경모하는 뜻에서 첫 글자 인 염자를 땄고 회헌 선생을 높이는 뜻에서 경자를 붙였다.
주세붕은 경렴정을 세우고 아래 시를 지었다.
‘산은 우뚝하여 공경하는 빛이요(山有祗祗色)/ 시내는 흘러 힘써 달리는 소리로다(溪行聲)/ 은자의 마음에 합함이 있어(幽人心有會)/ 한밤 높은 정자에 기대어 있노라(半夜倚高亭).’
[제향 영역 안내판 글 내용]
[강학 영역 안내팻말과 文成公廟(문성공묘) 전경]
文成公廟(문성공묘)는 제향기능의 祠堂(사당)으로2004년4월 6일 대한민국 보물 제 1402호로 지정되었다
회헌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서 후에 [안보]와 [안축] [주세붕]을 함께 모시고 매년 음력 3.9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담장 앞에 숙수사지 목탑이 남아있다.
이 사당의 현판 ‘문성공묘’의 글씨는 주자(주희)의 후손인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명필로 소문난 명나라 주지번이 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현판 글씨를 쓴 뒤, 소수서원에도 들러 참배하고 이 글씨를 남겼다.
이와 함께 ‘문성공’과 이 시호를 해설한 시주(諡註)인 ‘도덕박문왈문(道德博問曰文) 안민입정왈성(安民立政曰成)’도 휘호해 남겼다. ‘문성공묘’ 현판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文成公廟(문성공묘) 전경
安珦(안향) 선생을 비롯 安軸(안축), 安輔(안보), 周世鵬(주세붕) 네분의 의폐을 모신곳이라 한다. 외. 내삼문이 아닌 單問(단문)이 특이하다. 文成公廟(문성공묘) 안에는 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 보물 485) 안치되어 있다 합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매년 3월, 9월 初丁日(초정일)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笏記文書(홀기문서)가 전하고 있다.
安珦(안향) 선생을 비롯 安軸(안축), 安輔(안보), 周世鵬(주세붕) 네분의 의폐을 모신곳이라 한다.외. 내삼문이 아닌 單問(단문)이 특이하다.
文成公廟(문성공묘) 안에는 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 보물 485) 안치되어 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초익공식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매년 3월, 9월 初丁日(초정일)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笏記文書(홀기문서)가 전하고 있다.
안내판과 文成公廟(문성공묘) 전경
서원에는 학교기능의 강학당과 제사기능의 사당이 있다. 중국식은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해서 학교를 앞에 세우고 사당을 뒤에 세우는 것으로 우리나라 대부분 서원이 이 방식을 따랐지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로서 동쪽에는 학교를 세우고 서쪽에는 사당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통 위치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른 것이다.
[강학 영역 안내판 글 내용]
[문성공묘 쪽에서 담은 강학당 전경]
소수서원에서는 창 건 이후 350여년 동안 임진왜란 때 경상도우병사로 진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성일, 선조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 등 퇴계 문하생 대부분과 유생 4,000여명이 공부했다
[뒤쪽 옆에서 담은 講學堂(강학당) 전경]
소수서원은 처음에 입학정원이 10명이었으나 사액을 받은후 30명으로 늘었다.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유생들이었다. 그러나 학문 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에 한 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면 퇴원당했다고 한다.
[白雲洞(백운동) 현판이 걸린 講學堂(강학당),일명 明倫堂(명륜당)]
서원의 정문인 志道門(지도문)을 지나면 곧장 보이는 건물은白雲洞(백운동) 현판이 걸린 講學堂(강학당)으로 일명 明倫堂(명륜당)이다. 이곳은 유생들이 講學(강학) 하던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私立大學(사립대학)이다.前廳後室(전청후실)의 특이한 구조로 서원의 처음 이름인 '白雲洞(백운동)' 현판이 걸려 있다.
서원은 선현을 배향하고 교육하는 조선조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祠堂(사당),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講學堂(강학당), 학생들이 기숙하는 齋(재)가 기본 시설이다.
강당 안 쪽 紹修書院(소수서원) 현판과 편액]
講學堂(강학당) 내부에는 明宗(명종)의 親筆(친필)인 紹修書院(소수서원) 현판과 다른 글귀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사액서원)으로중종 36년(1543)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흠모하던 회헌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지에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이름은 白雲洞(백운동) 서원이었으나, 이 후 퇴계가 풍기 군수로 부임 하면서 나라의 합법적인 인정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친필로 쓴 紹修書院(소수서원)이란 편액을 하사하였다.'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란 뜻을 담고 있다.
소수서원의 뒤를 이어 곳곳에 이러한 사액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 관학이 흐트러지고 성리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한 데다 퇴계, 율곡 같은 대학자들이 앞장선데 따른것이다.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장대석 바른 층쌓기의 높은 기단위에 주추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웃몸은 창방으로 결구, 기둥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초익을 서로 결구한 초익공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으로 사면에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굴도리 초익공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으로 끊겼으나 방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앞뒷면에 놓인 평주들의 간살은 통칸으로, 20여 척 이상이 되나 대들보를 전후 평주 위에 놓고 잘 치목한 대량 위에 주두와 초각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두어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藏書閣(장서각) 전경]
도서관 기능을 담당하던 곳으로座右之先(좌우지선)의 例(예)를 따라 스승 숙소 우측에 자리한다
藏書閣(장서각) 현판
오늘날의 교내 도서관으로서 임금이 직접지어 하사하신 어사 내사본을 비롯 3000여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책은 좌우 지선의 예를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숙소 우측에 있다.
庭燎臺(정료대) 庭燎臺(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는 시설로 석재 윗부분에 관솔을 피웠으며,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는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直方齋(직방재)와 日新齋(일신재) 전경
直方齋(직방재)는 원장의 집무실겸 宿所(숙소).日新齋(일신재)는 교수들의 집무실겸 宿所(숙소)라 한다 서원의 기숙사 구실을 하는 곳이다. 동·서재가 한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온돌방 앞에는 퇴를 깔아 헌함을 세웠다.
[直方齋(직방재) 현판]
[日新齋(일신재) 현판]
일신재와 직방재
스승의 숙소로서 동재와 서재라고 한다. 동재는 일신재, 서재는 직방재로, 양재가 한 채로 되어있다.평면은 정면 6칸, 측면 1칸반, 기단은 앞면은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층쌓기]로 했고 후면은 거칠게 다듬은 네모진 돌로 [바른층쌓기] 했다. 복판에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온돌방, 방 앞엔 각각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다
주추는 막돌, 모난 기둥인데, 양쪽 온돌방 앞 두 개씩의 기둥과 뒷면 양쪽 우주만이 두리기둥이다. 기둥에는 굽면이 사면이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를 놓고, 첨차로 결구했는데, 첨차의 모양은 매우 단순하다.
특히 뒷면 우주에는 기둥 웃몸에서 헛첨차모양으로 돌출했는데, 건물쪽으로는 첨차모양을 갖추어 헛첨차모양을 이루나, 건물밖으로는 단순한 직선부재(副材)로서 보아지 형식을 이루고 있음이 주목된다는 전문가의 말이다.
가구는 오량(五梁), 대들보를 平柱위에 걸고, 그 위에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홋처마, 팔작지붕이나 지붕높이가 낮아 합각면이 적음으로써 전체적으로 웅장한 맛이 없다는 전문가의 이야기도 있다.
[典祀廳(전사청) 전경]
제사때 祭需(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다.
[典祀廳(전사청) 현판]
[日影臺(일영대) 전경]
[日影臺(일영대)]
일영대는 해시계로 맑은 날 윗 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影幀閣(영정각) 전경
안향선생을 비롯하여 여섯분의 초상을 봉안한 곳이다.
[影幀閣(영정각) 현판]
우측 漢陰(한음) 李德馨(이덕형). 좌측 愼齋(신재) 周世鵬(주세붕)] 愼齋(신재) 周世鵬(주세붕) 肖像(초상) 보물 제717호
[晦軒(회헌) 安珦(안향)]
고려 말에 그려진 安珦(안향)의 影幀(영정 : 국보 111)
[晦庵(회암) 朱子(주자)]
[좌측 眉叟(미수) 許穆(허목) 우측 梧里(오리) 李元翼(이원익)]
학구재와 지락재는 당시 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 스승의 그림자를 피해 뒷물림하여 짓고, 공부 잘하라고 건물 입면이 工자 형태로 되어있다.
學求齋(학구재)와 至樂齋(지락재) 전경
學求齋(학구재)와 至樂齋(지락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스승의 처소인 直方齋(직방재), 日新齋(일신재)의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었다. 學求齋(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童蒙齋(동몽재)라고도 하며 至樂齋(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仰高齋(앙고재)라고도 한다.
당시 儒生(유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로 스승의 숙소는 오른쪽에 짓고 제자의 숙소를 왼쪽에 지으면서 나란히 짓지 않고 스승의 그림자까지 피한다해서 두칸 물러 지었으며 방 높이도 스승의 숙소보다 한자 낮춰 지었으며, 공부 잘하라고 건물 입면이 '工(공)'자 형으로 지었다 한다.
學求齋(학구재) 전경
건물의 형태를 살펴보면 중앙의 우물마루 좌우로 각각 온돌방 1칸을 둔 학구재와 달리 지락재는 1칸의 온돌방 외에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로 처리해 외부공간과 마주하도록 개방했다.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工夫(공부)'의 '工'자 형태로 지어졌다.
學求齋(학구재) 현판
[至樂齋(지락재) 현판]
[至樂齋(지락재) 전경]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건물 배치에서부터 禮(예)를 염두에 둔 선인의 인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건물 배치라 할 수 있다.
[至樂齋(지락재) 현판과 편액]
[至樂齋(지락재) 안 편액]
[至樂齋(지락재) 안 편액]
[直方齋(직방재)와 日新齋(일신재) 옆 전경]
[소수서원 안내판 글 내용]
[서원 담너머 만개한 벚꽃]
[일각문]
[史料館(사료관) 현판]
[史料館(사료관) 전경]
[제향 모습]
[강학 모습]
[庫直舍(고직사) 전경]
[庫直舍(고직사) 안내판 글 내용]
[일각문]
[충효관과 사무실 전경]
[숙수사지 유물과 충효교육관]
[忠孝敎育觀(충효교육관)]
[소수서원 시립박물관 사무실]
[안내팻말]
[숙수사지출토유물 안내판 글 내용]
[숙수사지 유물]
[숙수사지 유물]
[영귀천 옆 일각문]
[靈龜泉(영귀천) 팻말]
[靈龜泉(영귀천) 옆 전경]
[활짝 핀 백목련]
[靈龜泉(영귀천)과 일각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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