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피경정(槐山君 皮慶廷)
옛 문헌에 의하면 피씨의 본관은 32본(本)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괴산, 홍천, 단양, 경주, 충주, 안산, 공주, 당진, 광주 등 10여 본이 현존하고 있다. 32개 본관이 10개 본관으로 통폐합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10개 피씨 중 대종회가 잘 조직되고 본관과 세계에 대한 기록이 잘 알려진 것은 괴산피씨, 단양피씨, 홍천피씨, 안산피씨 등이며, 인구수로는 괴산피씨가 가장 많다.
피씨의 기원은 중국 주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 경사(卿士)인 번중피(樊仲皮)의 피자를 따서 성(姓)으로 삼았으니 실로 역사가 오랜 성씨라 할만하다.
한국의 피씨 시조도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것이 성씨관련 문헌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괴산피씨의 경우, 시조 피경정(皮慶庭)은 중국 원나라 사람으로 초휘는 기광(起光)이고 호는 청파라고 알려져 있다. 원나라 순제 때 금자광록대부 신경위 대장으로 남월을 정벌하다 실패하자 가족을 이끌고 우리나라로 망명한 사람이다.
망명한 피경정이 공민왕의 고려 조정에서 괴산군에 봉해지는 등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 계기가 돼 이후 괴산피씨 본관이 생겨났다. 괴산피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전라감사 등을 지낸 피득창(皮得昌)이다. 그는 이부상서 피성무(皮成茂)의 아들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 과정에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된 인물이다. 그래서 괴산피씨의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성씨 총감’에 따르면 “원래 홍천피씨(洪川皮氏)였는데, 괴산에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괴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하는데, 이 역시 피득창과 관련이 있는 얘기다.
괴산은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괴산이라는 지명을 쓰게 된 것은 조선 태종 13년(1413) 때였다. 고구려시대에 잉근내군(仍斤內郡)이라 하였으며, 신라시대에는 괴양군, 고려시대에는 괴주군으로 불렸다가 조선 태종조에서 괴산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충주에 예속시켜 감무관(監務官)을 두어 다스리게 한 적이 있고, 1895년(고종32)에 충주부에 속했다가 1914년 부·군 통폐합시 연풍군을 병합하였다.
괴산피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세만(皮世萬)을 들 수 있다. 그는 숙종때 적상별장을 거쳐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영조조 정희량의 난이 일어나자 병방군 류만원 등과 더불어 적을 토평,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병절교위 훈련원 첨정·부사과에 추증되고, 성산(성주)에 기공비(紀功碑)가 세워졌으며, 그 사적이 ‘충의효열록’(忠義孝烈錄)에 실려 있다.
그 외 중시조 득창의 아들 강지(康芝)가 장령을 지냈으며, 손자 정(釘)이 진사를, 증손 소(燒)는 목사를 역임하여 판서에 오른 후손 홍군, 통덕랑 경송, 방어사 동현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 외 통정대부 종남과 판관 세만, 통사랑 세담이 유명했으며,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은 운손, 통덕랑 경우, 참봉 봉준 등이 가문을 빛낸 후손들이다.
괴산피씨는 시조로부터 약 65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후손이 번창하여 29세에 이르고 있고 충청도의 충주와 진천, 경북의 상주와 성주, 안동, 경주 등 괴산지역으로부터 외곽으로 세거지를 넓혀가며 오늘에 이르렀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괴산피씨는 전국에 총 693가구 220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홍천피씨는 원나라에서 금오위상장군을 지낸 원나라 피위종을 시조로 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때 동국안렴사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하게 되었는데, 충렬왕이 병부시랑을 제수하였고 뒤에 좌사의대부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인선이 정당문학, 좌복야 등을 지낸 후 홍천군에 봉해졌으므로 홍천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홍천은 고구려의 벌력천현인데, 신라 때는 녹효로 고쳐 삭주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에 홍천이라 개칭하고 삭주에 예속시켰으며 1143년에 감무를 두었다. 1413년 홍천현, 1895년 춘천부 홍천군, 1896년 13도제 실시로 홍천군이 되었다.
안산피씨의 중시조는 정당문학 좌복야를 지낸 피인선이다. ‘성씨 총감’에 의하면 피인선이 안산군에 봉해짐으로써 안산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피인선의 시호는 문평. 그 후손 중에서 피우세가 충무위부사과를 지내고 일산 거구동에 세거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괴산피씨 시조 단소와 재실 자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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