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북 구미] 문대공 병암 김응기(文戴公 屛菴 金應箕) 묘-일선김씨

장안봉(微山) 2015. 6. 5. 10:33

문대공 병암 김응기(文戴公 屛菴 金應箕)

 

1455(세조 1)∼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미수()·백춘(), 호는 병암(). 양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지경()이며, 어머니는 강거레()의 딸이다. 선산 출신이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1482년에 수찬()에 오른 뒤 예조정랑·사유()·경연시강관()·집의()를 거쳐서, 1492년 직제학()이 되었다.

이어서 좌·우부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1496년(연산군 2)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곧 돌아와 동지성균관사·관상감제조(調)·공안상정사제조(調)를 역임하였다. 1498년 호조참판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천추사(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참판이 되었다.

1500년에 한성부판윤이 된 뒤 곧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지의금부사()·세자우빈객()을 지내고, 1504년 갑자사화로 문외출송()당하였다. 1506년 중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가 된 뒤 병조·공조·예조판서를 차례로 지내고, 1513년(중종 8) 우의정이 되었으며, 좌의정을 거쳐 1518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는 학식이 넓어 천문·지리·수학에까지 정통하였고, 언행이 법도에 맞아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부자()’라고 존경하였다. 성종의 신임이 두터워 10여년 동안 강연()을 맡았다. 시호는 문대()이다.

 

 

 

 

 

 

 

 

 

 

 

 

 


내격묘(來格廟) 입구에 세워져 있는 문대공신도비(우)와 경질공신도비(좌)

문대공 병암 김응기선생 신도비

 

 

 

 

문대공 김응기 묘갈명(墓碣銘)

 

공의 성은 김씨()이고 휘()는 응기()이며 자()는 백춘()이고 관향은 선산()이다. 증조 김양보()는 문경 현감()이고 할아버지 김지()는 덕산 현감()이고 아버지 김지경()은 사헌부 대사헌()이고 어머니 강씨()는 영덕 현감() 강거례()의 딸인데, 공이 경태(, 명 경제()의 연호) 을해년(, 1455년 세조 원년)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 총명이 뛰어나 당시에 동방()의 부자()로 일컬어졌고 장성하자 독서를 좋아하여 잠자는 것과 밥먹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성화(, 명 헌종()의 연호) 정유년(, 1477년 성종 8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처음에 삼관직(, 삼관은 성균관ㆍ승문원ㆍ교서관임)에 보임되었다가 이윽고 전직되어 예문관()으로 들어갔고 홍문관()으로 들어가 교리(), 전한(), 직제학()을 역임하면서 10여 년간 강관()을 전임하였다. 승정원 동부승지()로 초수()되었다가 강원 감사(), 경상 감사(), 경기 감사()와 호조 참판(), 공조 참판()과 한성 판윤(), 이조 판서(), 예조 판서(), 병조 판서(), 형조 판서(),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의 명성이 났다. 정덕(, 명 무종()의 연호) 계유년(, 1513년 중종 8년)에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병자년(, 1516년 중종 11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공이 평소 중풍을 앓은데다가 또 너무 지위가 높은 것을 경계하여 퇴직을 극력 요청하여 영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그 뒤 1년이 지나 병환을 앓다가 기묘년(, 1519년 중종 14년) 6월 임신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효도와 우애, 공순과 검소를 천성으로 타고났다.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을 갑자기 변하지 않았으며 행실이 단정하고 구차하게 웃거나 말하지 않았다. 학문은 근본을 궁구하였고 특히 성리서()에 심오하였는가 하면 성력(), 종율()까지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가산을 경영하지 않고 첩을 두지 않았으며, 벼슬할 때에는 주야로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공무를 보고 정도를 지켜 청백()으로 자신을 견지하였는가 하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늙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공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공경 사대부()로부터 여염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애석해 하면서 말하기를, “선인()이 죽었다.”고 하였다. 처음에 전생서령() 김맹치()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김세효()를 낳았는데, 갑자년(, 1504년 연산군 10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형조 정랑()이 되었다. 나중에 증() 영의정() 안돈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정랑이 4남을 낳았는데, 큰아들 김의손()은 돈령부() 참봉()이고 둘째 아들 김지손(), 셋째 아들 김신손(), 넷째 아들 김선손()은 모두 어리고 2녀는 모두 시집가지 않았다. 이해 10월 경오일()에 선산() 동면() 도개리() 선영의 곁에 묻히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시골에 집 두고 서울에서 벼슬하니 고향이 격리되어 마음이 슬펐었지. 벼슬이 높았으나 뜻 여기 안 있으니 용 따라 떠나서 선영으로 돌아갔지. 산천은 변함없어 옛날과 같으니 만년 동안 편안하고 길할 것일세

 

 

경질공 묘하에 있는 문대공의 아들 김세효(金世孝) 묘 전경

 

 

김세효는 여산군수(礪山郡守)를 지냈다

 

 

 

김세효 묘에서 바라본 충정공 농암 김주(忠貞公 農巖 金澍)묘역-상주-영천간 고속도로 공사로 산 허리가 잘렸다

김세효 묘에서 바라본 충정공 농암 김주공 묘및 그 후손 묘역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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