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

[스크랩] [경북 구미]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 생가 유허비

장안봉(微山) 2015. 6. 5. 10:19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년(공민왕 2)∼1419년(세종 1).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학자.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 호는 야은()·금오산인(). 아버지는 지금주사()원진()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에 추증된 김희적()의 딸이다.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으로 불린다.

 

1363년(공민왕 12) 냉산() 도리사()에서 처음 글을 배웠고, 1370년상산사록()박분()에게서 『논어』와 『맹자』 등을 배우며 비로소 성리학을 접하였다. 아버지를 뵈려고 개경에 이르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 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서 지내며 비로소 학문의 지극한 이론을 듣게 되었다.

1374년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우왕 9)사마감시()에 합격하였다. 1386년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하여 그 해 가을청주목사록()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과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오가며 함께 학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1387년성균학정()이 되고, 이듬해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로 승진되었다. 당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양반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 1)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해 봄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 계림부()와 안변() 등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와 혜장() 따위를 먹지 않고 3년상을 행하였다. 1400년(정종 2) 가을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봉상박사()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두 왕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03년(태종 3) 군사 이양()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하였으며, 오직 도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김굉필()·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저서로는 『야은집』과 『야은속집()』이 있으며, 그밖에 그의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이 전해지고 있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의 오산서원(吳山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절()이다.

 

 

생가 유허 가는길에 있는 사찰 죽림사--죽림사 주차장에 주차하고 300M정도 걸어 간다

죽림사에서 조금 올라오면 갈림길이 있는데 오른쪽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야은 길재선생 생가 유허지 전경

 

 

 

술지(述志)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시내 임한 초가집에 홀로 한가로이 살아가도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취 남음이 있네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속세사람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귈 때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대숲으로 평상 옮겨 누워서 책을 본다

 

-야은선생 16세때 지은 시라고 한다

 

 

 

 

 

출처 : 癡叔堂
글쓴이 : cheesookd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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