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도(물형도)

[스크랩] 국가에서 공인한 풍수지리 .동관왕묘 / 문화유산 속 풍수

장안봉(微山) 2015. 4. 12.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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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공인한 풍수지리

 

우리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일본인 학자의 글을 처음부터 인용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풍수에 관한 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이기에 그의 말을 글머리로 삼으련다.

 

“조선의 문화는 예부터 이 땅에 살며 생활을 영위해 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 조선 문화의 이면적, 근본적인 현상의 하나가 풍수라는 것이다. (…) 조선의 풍수는 조선 사회의 특질을 더하는 요소이다. 그 특질이 멀리 삼국시대로부터, 신라, 고려, 조선이라고 하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살아서 오늘에 이르렀으며, 그 심원한 깊이와 강한 보급력은 장래에도 변함없이 생활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1931년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이 『조선의 풍수』 서문에서 밝힌 내용인데, 그의 언술은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이병도 박사 역시 우리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 풍수를 배제하면 제대로 밝힐 수 없음을 『고려시대의 연구』(1948)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고려시대는 500년간 음양지리 사상과 도참사상이 일관하여 정치, 경제, 사회 법속에 큰 교섭을 가지고 있던 만큼 (…) 이 사상은 실로 고려의 흥망성쇠의 큰 관계를 가지고 있다. (…) 만일 이를 전연 무시하고 고려를 해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고려와 조선은 지리업(地理業)과 지리학(地理學)이란 관료선발 및 교육기관이 있어서 풍수관료 [고려의 일관(日官)과 조선의 지관(地官)]들이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도읍지·궁궐·왕릉선정과 공간배치뿐만 아니라 각종 ‘국토개발’과 관련하여 ‘기술직[잡과(雜科)]’으로 활동하였다. 고려와 조선의 풍수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풍수서적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의 ‘풍수 국정교과서’가 달랐다.

 

고려의 경우 『신집지리경(新集地理經)』, 『유씨서(劉氏書)』, 『지리결경(地理決經)』, 『경위령(經緯令)』, 『지경경(地鏡經)』, 『구시결(口示決)』, 『태장경(胎藏經)』, 『가결(訶決)』, 『소씨서소씨서(簫氏書)』를,

조선의 경우 『청오경(靑烏經)』, 『장서 금낭경(葬書 錦囊經)』, 『호순신 지리신법(胡舜申 地理新法)』, 『명산론(明山論)』, 『지리문정(地理門庭)』, 『감룡경(撼龍經)』, 『착맥부(捉脈賦)』, 『의룡경(疑龍經)』, 『동림조담(洞林照膽)』(조선 후기에 『탁옥부(琢玉斧)』가 추가되었다가 다시 제외됨)을 공부해야 했다.

 

같은 땅 위에서 같은 민족이 살았음에도 풍수관료 고시과목이 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고려와 조선의 국교가 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교로 채택한 조선은 고려의 불교식 풍수와 다른 유교식 풍수가 유행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묏자리 풍수였다.

유교는 충효사상을 실천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에 풍수 역시 충효를 구체화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 즉 돌아가신 부모를 좋은 곳에 모시자는 효의 실천 방법으로 풍수가 활용되면서 음택(묘지) 풍수가 중시된다.

반면 고려 풍수 내용은 왕건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훈요십조」에 그 특징이 드러난다. 「훈요십조」 제2조는 고려왕실이 풍수를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사원들은 모두 도선(道詵)이 산천의 좋고 나쁜 것을 추점(推占)하여 창건한 것이다. 도선은 말하기를 ‘내가 소점하여 정한 것 이외에 함부로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地德)을 훼손시켜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지금까지 전해오는 수많은 사찰이 풍수설에 근거하여 세워졌음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고려왕조의 풍수신앙은 ‘산천비보도감’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1197년 당시 무인정권 실력자 최충헌은 주요 대신들과 음양술사(풍수사)들을 모아 ‘산천비보도감’이란 임시관청을 만들어 놓고 전국에 ‘토목공사’를 일으킨다.

이유가 ‘국내 산천이 난잡하게 제멋대로 뻗어 나가고 흘러나가는 바람에 나라 안 인심이 어지러워 전국 각처에서 민란들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해 풍수적으로 결함이 있는 곳에는 조산(造山), 조탑(造塔), 식재, 제방, 연못조성, 물길 돌리기 등의 비보풍수를 행하게 함과 동시에 지맥을 손상시키는 사탑이나 둑 등을 없애서 전 국토의 지기를 안정화시키고자 하였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그 수가 많게는 3,800에서 적게는 3,000개가 넘는다고 전해진다. 이들 가운데 많은 것이 문화유산으로서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에서는 그러한 풍수 행위가 민간에까지 파급되면서 시골까지 많은 흔적이 남는다.

 

 

 

 

고려와 조선에서 국가의 공인된 술(術)로서 풍수의 적용 분야는 다양하였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기(陽基)·양택(陽宅)풍수 관련 문화유산들이다.

고려 이후 최근까지 몇 번에 걸친 천도론과 풍수는 깊은 관련을 맺는다. 도선국사의 송악(개성)명당론, 묘청과 신돈의 서경천도론, 이성계의 계룡산·한양천도론, 광해군의 교하천도론 등은 풍수를 전제로 하여 논의가 된 것이다.

 

둘째, 궁궐터는 말할 것 없고 지방의 주요 관아 소재지 역시 풍수를 따져 터를 잡았다.

그러한 풍수신앙은 사대부들의 터 잡기에도 반영되었으며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수많은 고택이나 종가가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경주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 해남의 녹우당, 순창의 남원양씨 종택 등은 지금도 많은 풍수호사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셋째, 사찰의 경우 「훈요십조」에서 명기된 바와 같이 풍수설에 따른 절터잡기가 이뤄졌기에 풍수상 길지로 소문난 곳들에 유명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

 

넷째, 음택 풍수 관련된 문화유산이다. 왕족의 무덤[능(陵)과원(園)]뿐만 아니라 전국에 ‘태실’ 혹은 ‘태봉’이란 지명으로 전해오는 곳들은 대개 왕족의 태를 안치한 곳이다.

태(胎)를 풍수상 길지에 안치하면 그 태의 주인이 좋은 기운을 받아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는 신앙에서 생겨난 문화유산이다. 명문가들 역시 풍수상 길지에 조상 묘를 안장하고자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섯째, 불완전한 땅을 완전한 땅으로 고쳐 쓰는 풍수 행위로서 비보·진압풍수이다.

그 흔적은 전국의 수많은 문화유산들로 전해진다.

돌탑(石塔), 장승(장승배기), 남근석, 마을 숲, 당산나무, 누각(선암사 강선루), 비보·진압사찰(여주 신륵사, 순천 도선암과 향림사 등), 문자풍수(興仁之門의 “之”, 崇禮門의“禮”), 사당(동대문 동묘), 연못(경회루 연못, 향원정 연못), 석상(광화문 해태상, 창원 성주사 돼지석상) 등 부지기수이다.

 

 

 

 

 

문화유산 속 풍수

서울 문화유산 풍수로 읽기 : 동관왕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관광객들의 안목도 높아졌다. 그러나 그에 맞지 않게 해당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안내표지판이나 안내책자 내용은 너무 소략하고 진부한 내용이 되어버렸다. 서울만 해도 풍수지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문화유산은 수없이 많다.

경복궁, 창덕궁 등과 같은 궁궐만이 아니다. 동관왕묘(동묘, 종로구 숭인동), 종묘(종로구 훈정동), 효창원(용산구 효창동), 월산대군태실(서초구 우면동), 선정릉(강남구 삼성동) 등의 입지 선정에는 풍수가 가장 중요하였고, 관련하여 수많은 기록과 사연이 남아있다.

동작구에 있는 국립묘지인 현충원도 원래 동작릉(銅雀陵)이 있던 자리이며, 지금도 그곳에 동작릉의 주인인 창빈 안씨(昌嬪 安氏)가 영면하고 있음을 아는 이 드물다. 창빈 안씨는 중종의 후궁으로서 1549년 죽자 원래는 양주 장흥에 묻혔으나 아들 덕흥군(훗날 그 아들 하성군이 선조 임금이 된다)이 풍수가들의 말을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장을 한 자리이다. 이처럼 많은 문화유산은 풍수적 관계가 제대로 설명되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하나의 사례로서 동관왕묘와 풍수지리와의 관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7월 초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방한하여 서울대에서 강연을 할 때 “400년 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도 양국 국민은 적개심을 품고 어깨를 나란히 해 전쟁터로 같이 향했다”는 말로 일본의 “야만침탈”에 대해 한국(조선)과 중국(명나라)이 서로 도왔음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방한 중에 우리 정부가 이곳 동관왕묘를 안내했더라면 시 주석이 느끼는 감동의 강도는 더욱더 컸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일본의 침략행위(임진왜란)에 맞서 한국(조선)과 중국(명나라)의 공동 대응 역사적 증거물로서 남아있는 문화유산이 바로 동관왕묘기 때문이다. 시 주석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중국관광객이 한국, 특히 서울을 찾는다. 그들과 인연이 깊은 이곳을 안내하면 그들의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어떤 풍수적 사연 때문에 동관왕묘가 400년 넘게 이곳에 자리하고 있을까?

 

1592년 임진왜란에서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긴 전쟁으로 인해 조선 전역이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조정 대신들은 당파를 만들어 서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또 정유재란을 끝으로 일본군은 철수했지만, 조선을 구원하러 온 명나라 군대가 도처에 주둔하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 역시 포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조정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들이 많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고, 심지어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병탄(倂呑)할 계획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왕실을 불안하게 하였다.

 

선조 임금은 나라가 왜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 없었고, 답답한 나머지 당시 명나라 군대를 따라 입국한 중국인 풍수 섭정국(葉靖國)과 다른 조선의 풍수들에게 한양 도성의 문제점을 살피게 했다.

풍수사들은 계속되는 난리와 당쟁의 이유가 한양의 지기(地氣)가 빠져나갔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였는데, 특히 조선 초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도성의 수구(水口, 현재의 동대문 ↔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 ↔ 광희문 사이)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수구가 벌어진 곳에는 가산(假山)을 만들거나 나무를 심기도 하지만, 사당(묘, 廟)이나 단(壇)을 쌓기도 한다. 이에 선조 임금은 사당을 세울 자리를 중국인 풍수 섭정국과 조선인 풍수박상의(朴尙義)에게 찾아보게 한다. 박상의는 현재 동묘가 있는 자리가 풍수지리서 『지리신법』에도 부합한다고 했고, 섭정국 역시 동의하여 현재의 자리로 사당 터가 정해졌다. 즉 동관왕묘의 입지 선정은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합작품인 셈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새로 지어질 사당에 관우 장군을 모셨을까?

중국 장수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관우인데, 당시 명나라 군대가 조선 에 파병돼 전투를 치를 때 관우가 꿈에 나타나 도움을 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한다. 따라서 당시 조정은 한양의 지기가 빠지는 곳에 관왕묘를 세워 풍수적으로 도성의 지기를 온전하게 하고, 조선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를 달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이곳을 관우 장군 사당 터로 정했다고 하자 명나라 장수들이 와서 보고 흡족해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만 아 니라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였다.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도 이를 기쁘게 여겨 소요 비용과 기술자 및 친필 현판을 보내왔다. 사당은 1599년 착공돼 1601년에 완공됐다. 터 잡기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중국이 합작한 작품이며, 동묘의 건축이 중국의 사당 모습을 띤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동관왕묘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풍수이론이 적용되었으며 지금도 그러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까? 그러한 흔적을 찾아가볼 수 있다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한국인·중국인)들로 하여금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곳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것이다.

 

당시 상지관(相地官) 박상의는 어떻게 이곳에 터를 잡았을까? 그는 당시 선조임금의 측근 대신인 해평부원군 윤근수와 함께 터를 고르다가 이 곳(현재의 동관왕묘)에 이르러 “(…)그러면 후면이 높은 산맥(현재 동망봉·東望峯이 있는 지맥)과 바로 연결되고 또 조산과 가까워 수구가 막힌 곳이 되니 매우 좋다”는 말로 이곳이 바로 비보풍수로서의 사당을 세울 적지라고 주장한다. 이 터를 본 명나라 장수들이 보고 만족하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만큼은 박상희의 풍수술을 의심했다. 윤근수가 박상의를 거듭 옹호하며 이곳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자 일들이 계속 진행됐다(당시 선조임금은 조선의 풍수사들을 멸시하는 반면, 중국 풍수사들을 높게 평가하는 문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 터가 정해지고 난 뒤 상지관 박상의가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좌향 정하기이다. 즉, 주(主)건물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이때 박상의는 풍수서적 『지리 신법』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좌향을 정했다.

 

“(…)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하여 안정굴점(安靜窟岾)을 안산으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수구(水口)는 을지(乙地)사록파(四祿破)가 되니 (…) 더욱 수구가 잘 막혀 매우 길하게 됩니다.”

 

인용문의 “해좌사향(亥坐巳向)”이란 무엇인가?  24방위 가운데 뒤쪽을 해(亥)로 하고 앞쪽을 사(巳) 방향으로 한다는 뜻으로 대략 북북서 ↔ 남남동을 가리키는 방향이다.

이어서 등장하는 ‘안정굴점’이 동관왕묘의 안산인데, 수많은 고층건물이 들어선 지금 그곳이 어디인지 확인할 깃이 없다. 다만,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표기된 안정사(安定寺, 몇 년 전 헐림)가 동묘와 해좌사향의 직선으로 마주하는 점으로 보아 바로 이 안정사가 있는 산이 아닐까 추정한다(현재 무학근린공원 일대).

 

이어서 인용되는 “수구(水口)는 을지(乙地)에 사록파(四祿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조선조 지관(상지관) 선발 고시과목인 『지리신법』의 다음 도표를 참고해야 이해가 된다.

 

 

 

 

도표 1과 도표 2는 호순신의 지리신법 좌향론을 필자가 도표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우선해좌사향(亥坐巳向) 가운데 해좌(亥坐)는 산의 내려오는 방향으로 현재 동망봉(東望峯)에서 동관왕 묘로 이어지는 지맥의 방향인데, 이를 도표 1에서 찾으면 대오행상 금(金)에 해당한다. 도표 1에 표기된 금(金)의 경우, 물이 빠져나가는 방향(수구방향)이 을(乙)방일 때 구성(九星)법 상 녹존(祿存)이 된다.

원문에서 “四祿”이라 한 것은 금국의 경우 寅, 甲, 卯, 乙 방향으로 물이 빠져나갈 때는 모두 녹존이 된다. 乙은 그 가운데 왼쪽에서부터 네 번째에 해당하기 때문에 ‘네 번째 녹존’이란 의미의 “四祿”이라 한 것이다.

 

 

 

 

왜 이와 같은 방위로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길한가?

『지리신법』에 따르면 녹존으로 물이 빠져나가면 최상의 길지라고 하였다(“大抵, 水之去在 祿存爲上”). 따라서 호순신 이론에 따르면 현재 동묘의 터는 최상의 길 지가 되는 셈이다.

 

결국 이와 같은 풍수이론에 따라 터와 좌향이 정해지자 선조임금뿐만 아 니라 도성에 머물던 중국의 장수 및 풍수사들도 동의해 현재의 동관왕묘가 전해져 온 것이다. 따라서 동관왕묘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려면 동망봉, 동관왕묘, 영도교, 안정굴점(현재의 무학근린공원으로 추정) 등 주변 일대를 모두 둘러보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선정릉, 종묘, 효창원, 현충원, 안평대군 태실의 소점에 인용되었던 풍수지리와 사연들은 논문이나 책으로 내기에 충분한 분량이다. 우리 문화유산을 좀 더 깊고 넓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처럼 자세한 터 잡기 내력(풍수지리와 관련된)이 안내표지판과 책자로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 글˚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문화재청문화재전문위원)-

 

 

/ 출처 : 한국문화재단. 월간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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