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호남8대명당이라는 밀양박씨 발복지 밀산박씨(密山朴氏) 묘
호남8대명당이라는 밀양박씨 발복지 밀산박씨(密山朴氏) 묘
밀양박씨(密陽朴氏)는 크게 12파로 분파되어 파마다 중조를 두고 있는데 그 중 규정공파(糾正公派)가 가장 번성했다. 파조 박현(朴鉉)공의 증손자인 박침(朴忱)선생은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 중 한 사람이며 선생의 부인 정경부인 밀산박씨(密山朴氏)의 묘소는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에 있다. 이 자리의 후손 발복이 지대하므로 호남 8대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호남평야와 노령산맥(금남정맥)이 만나는 지점에 만경강 상류인 고산천과 소양천이 양쪽에서 감싸고 흐르는 외명당을 뒤로하고 서방산 기슭을 향하여 들어가 간중제 저수지를 옆에 끼고 계곡의 막다른 지점에 이르니 큰 제실과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 한 편에 “명당 터 밟기”란 제목으로 이곳은 조선 8대 명당으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안내판이 인상적이었다.
제실 뒤의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동안 암석이 많이 눈에 띠니 아직 탈살(脫殺)이 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겹게 올라 묘소에 이르니 주변의 국세(局勢)가 웅장하였다. 제법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전후좌우로 혈장(穴場)보다 더 높은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 높은 산지(山地)에서 가장 염려되는 장풍(藏風)에 문제가 없었다. 주차장에 진입하기 전에 건너편 도로에서 올려다 보았을 때, 후현무(後玄武)가 상하로 나란히 삼봉(三峰)으로 기복(起伏)하여 층층으로 내려 오며 완만하게 좌선(左旋)으로 굽어 있었고 후현무 정상에서 좌청룡 쪽으로 뻗어나간 능선 위에 금성체(金星體)의 봉우리가 내룡의 좌선(左旋)을 보완하기 위하여 낙산(樂山)처럼 받쳐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혈장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삼봉(三峰)도 이봉(二峰)만 보였다. 혈장이 가파르지 않고 평탄하여 안정감이 있었다. 혈장은 상하로 약간 긴 타원형 이었고 그 중심에 밀산박씨 묘가 있었다. 묵례를 올리고 뒤로 가 입수룡을 보니 바로 속기처(束氣處)가 있었고 혈장보다 약간 낮아 기복(起伏)의 형태를 띠었다. 속기처를 지나 내려온 입수룡을 따라 점점 가파르게 오르는 동안 돌이 많았으며 수삭(瘦削)하고 비윤(肥潤)하지 못하니 귀(貴)는 가능하나 부(富)를 장담하기 어려운 형태였다.
한참을 오르는 동안 이렇다 할 굴곡(屈曲)과 기복(起伏)이 없이 곧고 가늘며 가파르고 메말라 수척하고 돌이 많았다. 처음 산에 오를 때의 탈살(脫殺)이 안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현실로 다가 왔다. 다시 내려오며 생각하니 혈장 바로 뒤의 속기처가 혈장보다 낮았던 것이, 후현무가 층층으로 내려오며 삼봉(三峰)을 이루느라 2번 기복한 이후에 입수룡에서는 유일한 기복이었다. 입수룡에 필요한 속기(束氣), 굴곡屈曲), 기복(起伏)이 고르게 어우러지지 못하고 직경(直硬)하다가 도두(到頭) 직전(直前)에 속기와 단 한번의 미미한 기복이 있을 뿐 이었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혈(穴)을 맺기 어려웠을 것이다.
옛글에, 수삭(瘦削)이라는 것은 혈처(穴處)에 임하여 산의 형태가 살찌지 못하고 얇게 깎인 것이다 ~ 약하여 마르고 험준한 모양이면 진실로 용의 기운이 미약하여, 마치 사람의 기혈(氣血)이 쇠약하여 수척한 것과 같다 이런 종류의 산형(山形)은 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瘦削者當穴處山形不肥彩而弱瘦薄削也 ~ 若是瘦崚嶒誠以龍氣微弱如人氣血衰敗而形貌萎瘦耳此等山形不須尋也 ~ )고 하여 수삭(瘦削)함을 경계하였다.
입수룡은 오격(五格)중 직룡입수(直龍入首)로 간방(艮方)에서 내려왔다. 그 모습이 마치 숟가락을 엎어놓고 손잡이만 약간 들어 올린 것처럼, 입수룡은 가늘고 길며 혈장은 입수룡에 비해 다소 넓은 타원형으로 거북등과 같았다. 옛 글에 보면 직룡이라는 것은 등을 치듯이 입수하여 정대(頂對)하여 온 맥으로 혈(穴)을 맺은 것이다. 이런 종류의 등을 치듯이 입수한 용의 결혈(結穴)은 발복이 지극히 빠르다 ~ (直龍者乃撞背入首頂對來脈而結穴者也此等撞背龍結穴發福極快 ~ )고 하였으니 이곳이 속발지지(速發之地)임을 알 수 있다. 소조산(少祖山)과 부모산이 가깝고 거의 직접 출맥(出脈)하여 혈(穴)을 맺으니 용(龍)을 삼락(三落)으로 나눈다면 이곳은 초락용(初落龍)에 해당하여 탈살(脫殺)만 되면 속발(速發)할 곳이었다.
특히 웅장한 국세에 후현무(後玄武)가 개장천심(開帳穿心)하고 중출맥(中出脈)을 이루니 위세가 당당한 모습이다. 옛글에, ~ 맥이 가운데로 나오면 모두 중출맥이라 한다 만약 호위하는 산이 주밀하여 바람을 타지 않으면 융결은 참되고 역량은 크다. 부귀(富貴)가 크고 현인군자와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선비가 나오니 모두 중출맥의 잉육(孕毓)된 바이다( ~ 脈從中發皆謂之中出脈若護山周密不被風吹則其融結必眞力量必大主巨富顯貴凡賢人君子一切光明正大之士皆中出脈所孕毓也)고 하였다. 외관상 대지(大地)의 품격을 갖춘 보기 드문 곳이었다.
입수룡을 뒤로 하고 다시 혈장으로 내려왔다 높은 곳 임에도 불구하고 혈장이 평탄하고 둥글며 비록 개구(開口)개수(開水)는 안 되었으나 입수룡에 비하여 혈장의 양쪽으로 넓고 맥이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여기서 멈추었으니 부족하나마 혈을 맺을 기본은 갖춘 셈이다. 웅장한 용세(龍勢)에 양쪽으로 용호(龍虎)를 벌려 개장(開帳)환포하고 중출(中出)로 직룡입수(直龍入首)한 것은 좋으나 가파르고 곧게 내려온 입수와 좌향이 같아 직래직수(直來直受)로 기충뇌산(氣冲腦散)은 되지 않을지 염려가 되었으나 높고 가파른 지세(地勢)에 혈장이 평탄하고 도두(到頭)직전(直前)이 혈장보다 낮으므로 다소 안심이 되었다.
옛글에 보면 준급(峻急)이라는 것은 산세가 높고 가파르니 서서 걸을 수가 없다 무릇 입혈처(立穴處)의 귀(貴)함은 평탄하고 부드러운 것이며 가파르고 단단하면 꺼린다 ~ 만약 준급한 곳에 억지로 묘를 쓰면 투살(鬪煞)이라 하여 사람이 상(傷)하고 관재구설에 군대에 끌려가고 곧 병화(兵火)가 나타나 흉하게 된다 ~ 만약 준급한 가운데 홀연 평탄한 곳이 있으면 도리어 또 귀혈(貴穴)로 그것으로 논하지 않는다(峻急者山勢峻急而不能立步也凡立穴處貴其平坦柔緩忌其峻急直硬 ~ 若於峻急處勉强鑿穴謂之鬪煞法主像人及官訟軍配立見兵火至凶 ~ 若峻急中忽有平坦却又是貴穴不以此論~)고 하여 높고 가파른 곳에서는 이곳 혈장과 같이 평탄함을 귀히 여겼다.
도두(到頭)직전(直前)이 혈장보다 미미하나마 낮았다가 다시 솟은 형태이며 혈성(穴星) 머리와 혈장의 높낮이가 거의 비슷한 높이로 돌혈(突穴)로 볼 수 있겠다. 만약 높낮이의 차이가 크면 유혈(乳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혈형(穴形)은 돌혈(突穴)인데 돌면(突面)이 원평(圓平)하여 좋았다. 돌혈에 대한 옛글을 보면, 산곡(山谷)의 혈은 장풍을 요하므로 반드시 좌우로 둘러싸야하며 외롭게 노출되어 바람을 타면 꺼린다(山谷之穴要藏風故山谷之突必須左廻右抱切忌孤露受風 ~ )고 하였는데 이곳은 사세(四勢)가 높이 환포하였으니 문제가 안 된다.
혈장 아래의 가파른 곳을 피하여 압살법(壓殺法)으로 개법(蓋法)을 썼으며, 입목혈성(立木穴星)에 천혈(天穴)로서 소천랍촉(昭天蠟燭)의 신문혈(顖門穴)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가파른 지세와 암석 등으로 탈살(脫煞)이 최우선인데, 입수룡이 지금보다 더 가라앉고 굴곡의 폭이 컸더라면 완전한 탈상의 형태가 되었을 것인데 아쉬웠다. 만약 탈살을 위하여 혈성 아래에 점혈(點穴)하여 점법(粘法)을 쓴다면 사세(四勢)가 고압(高壓)하니 불가하다.
혈장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현재의 자리가 정혈처(正穴處)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묘 뒤에서 보면 약간 앞으로 나간 듯하고 묘 앞에서 보면 현재의 위치가 올바른 듯하였다. 다시 혈장 옆의 아래를 관찰하던 중 백호 쪽으로 건방(乾方)에 밑으로 내려간 줄기가 보였다. 현침사(懸針砂)처럼 혈장을 지탱해 주고 있었는데 그 위로 도로를 만들었다. 이곳 건방(乾方)에서 혈장 중심을 바라보니 혈장의 상하(上下) 축과 교차하는 지점에 현재의 봉분이 위치하였다. 따라서 혈장 점혈법상 현재의 자리가 옳다고 생각 되었다. 혈증(穴証)은 도두입수가 속기(束氣)하고 혈장보다 낮은 것 그리고 혈장의 평탄(平坦)원만(圓滿)함 및 순전(脣氈)이 있음이다. 재혈(栽穴)은 탄토부침(呑吐浮沈)중에 침법(沈法)을 써야 할 곳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내청룡(內靑龍)이 짧은 편이나 외청룡(外靑龍)이 보완하여 감싸고 뻗어 나가 안산(案山)을 겸하였다. 후현무(後玄武)는 목성체(木星體)를 이루니 목화생인(木火生人)이 해묘미(亥卯未)년에 영향을 받겠다. 오방(午方)에 우뚝 솟은 산이 혈을 비추고 있었고 비교적 낮게 외명당을 차단하고 있는 안산(案山) 너머로 정면에서 투구모양의 산 정상부근이 규봉(窺峰)처럼 곤방(坤方)에 솟아 있어 향(向)의 지표(指標) 역활을 하고 있었다. 수구(水口)는 미방(未方)이었다. 수성(水城)은 좌수도우(左水倒右)에 우백호가 역수(逆水)하여 국(局)을 이루고 광활한 외명당을 차단하여 길(吉)하였으나 더 욕심을 내자면 청룡 끝을 백호가 밖으로 나가 감싸서 물길을 한번 더 굴곡시켰더라면 최길(最吉)한 수성(水城)을 이루었을 것이다. 산이 높고 물이 보이지 않으니 부(富)보다는 귀(貴)가 응할 상이다.
이곳은 웅장한 국세로 대지(大地)의 풍모(風貌)이며, 높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장풍(藏風)이 완전하여 좋았다. 개장(開帳)과 중출(中出)로 아름다웠고 입수속기(入首束氣)와 혈장평탄(穴場平坦)이 가혈(假穴)을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탈살(脫殺)이 완전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웠다. 이 자리 후손들의 발전을 기원하며 산을 내려왔다.
'명당도(물형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국가에서 공인한 풍수지리 .동관왕묘 / 문화유산 속 풍수 (0) | 2015.04.12 |
---|---|
[스크랩] 정혈론 (0) | 2014.12.05 |
[스크랩] 사성제와 팔정도 (0) | 2014.09.29 |
[스크랩] 양택풍수에서 지형분석을 할 때 살(煞)의 구분 (0) | 2014.09.29 |
[스크랩] 풍수1 (0) | 2014.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