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충청도)

[스크랩] 가야산 자락을 찾아서

장안봉(微山) 2015. 2. 17. 04:16

가야산 자락을 찾아서 (풍수기행)

                                                                 일시 : 2014. 9. 13

                                                                 장소 : 충남 예산 가야산자락

                                                                 글 : 민 중 원

 

 

 

   

  오늘은 대한민국 풍수지리 연합회의 공동 답산을 위한 사전 답사를 하는 날이다. 쾌청한 날씨에 일행과 함께 대전을 출발하여 일차 목적지이자 서울 팀과 합류하는 장소인 가야산 자락의 남연군 묘소를 향하였다.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여러 번 온 곳인데도 새로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서울과 제천 팀과 인사를 나눈 후에 혈장(穴場)에 올라 고인에 예의를 갖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혈장의 암석이 눈에 들어 왔는데 평탄하지 못하고 위로 다소 솟은 것이 눈에 거슬렸다. 옛글에 암석은 모두 온윤(溫潤)하고 평복(平伏)하여야 좋다고 했다.(~其石總以溫潤平伏爲妙~)

   

 

  이곳은 맥진처(脉盡處)인데 혈(穴) 뒤로 내려온 용맥(龍脈)이 면세(眠勢)의 수성체(水星體)로 다소 힘이 약해 보여 암석이 있어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혈장 바닥 보다는 양 옆이나 순전(脣氈)에 박혀 요석(曜石)의 역할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곳의 암석이 탈살(脫殺)이 안 된 증거는 될 수 없다. 탈살은 이미 혈 뒤의 내룡(來龍)의 형태가 탈살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혈증(穴證)은 맥진처(脉盡處)로 더 이상 나가지 않고 멈춘 것이며, 혈장(穴場)이 둥글게 융기(隆起)되어 부풀은 점이 기운이 멈추어 융결(融結)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경을 꺼내 보니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진수구(辰水口)이다.

  혈(穴)의 진가(眞假)를 알려면 입수(入首)를 보아야 하므로 혈(穴) 뒤의 내맥(來脉)을 밟아 보고자 그 곳으로 향하였다. 혈후(穴後)의 도두일절(到頭一節) 즉 입수룡(入首龍)은 약간 굽은 형태로 혈후(穴後) 도두(到頭)로부터 첫 번째 솟은 곳(第一起峰:현재 밤나무 밭이 시작되는 곳)으로 부터 유(酉)로 발맥(發脉)하여 약간 굽어서 입혈(入穴)하였다.

  혈후(穴後)로부터 두 번째 솟은 곳(第二起峰)은 술(戌)로 내맥(來脉)하여 유(酉)로 발맥(發脉)하였고, 혈후(穴後)로부터 세 번째 솟은 곳(第三起峰)은 내맥(來脉)이 낮고 약(低弱)하여 거의 단절된 형태를 띠었다.

  이곳으로부터 혈(穴)까지 3번의 미미한 기복(起伏)으로 혈을 맺기 위하여, 기맥(氣脈)의 흐름이 속도를 줄이고자 하는 형태였다. 전체적으로 미미한 기복(起伏)과 은은한 굴곡(屈曲)으로 뚜렷한 요도지각(橈棹枝脚)없이 면세(眠勢)의 수성(水星) 형태를 이루었다.

  이러한 형태는 다른 곳에서는 힘이 부족해 보이겠지만 이곳은 후룡(後龍)이 높고 크며 가파른 지형이므로, 그 살기(殺氣)를 벗어나야 혈을 맺을 수 있으니, 탈살(脫殺)에 도움이 되는 형태를 띠었다.

 혈 뒤로부터 세 번째 솟은 곳에서 내룡(來龍)을 올려다보니 금성(金星)의 부모산(父母山)이 좌선룡(左旋龍)으로 굽어 내려 왔다.

혈장(穴場)에서 본 옥양봉(玉洋峰?)이 아니고 가야산 정상 쪽으로 옆에 솟은 석문봉(石門峰?)에서 굽어 내려왔으니 혈처(穴處)에서 곧게 뒤로 보였던 옥양봉(암석이 박힌 봉우리)은 주봉이 아닌 낙산(樂山)임이 분명했다. 즉 석문봉에서 좌선(左旋)으로 굽어 들어 왔기 때문에 허(虛)한 곳을 옥양봉이 뒤에서 막아 주는 낙산(樂山) 역할로 보완하고 있었다.

  이곳을 세인(世人)들은 흔히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 하는데, 오늘은 그 말을 풍수지리 이론을 대입하여 풀어 보고자 한다.

  옛글에 혈(穴) 뒤로 첫 마디는 망인(亡人)의 아들을 관할하고, 두 번째 마디는 손자를 관장하며, 매 마디마다 일대(一代)를 관장한다(穴後一節 管亡人之子 二節 管孫 每一節一代~)고 하였다.

  이곳의 혈(穴) 뒤로 이어진 네 마디(四節)를 생각해 본다. 하나의 절(節)은 봉우리와 봉우리사이를 말하고, 솟은 봉우리마다 옆으로 지각(枝脚)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봉우리도 미미하게 솟고 지각도 확실하지 않아, 필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도두일절(到頭一節)은 망인(亡人)의 아들에 해당하고, 도두이절(到頭二節)은 손자에 해당하며, 삼절(三節)은 증손자, 사절(四節)은 고손자에 해당하여 망자(亡者)로부터 사대(四代)까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절(一節)은 대원군, 이절(二節)은 고종, 삼절(三節)은 순종에 해당한다. 그리고 사절(四節)은 단맥(斷脉) 되었으므로 나라가 망하였다고 상상해 본다. 여기에서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말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곳 혈장에서 본 사(砂)의 형태는 좌청룡 쪽은 백호처럼 고압(高壓)하지 않고 이중으로 장풍(藏風)에 충실하였으나, 그 끝인 하수사(下手砂)가 확실하게 역수(逆水)하지 못하여, 원진수(元辰水)가 정면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거두지 못하였다.

 

   

  우백호는 혈장을 향하여 곧게 달려드니 혈장을 둥글게 환포하지 못하였다. 이 자리에서 우백호가 가장 눈에 거슬린 형태인데, 지금보다 앞으로 더 나아가 이곳을 둥글게 감싸 안았더라면 좋겠고, 높게 치고 달려드는 형태는 불만이나 그 끝이 뾰족하지 않고, 면대(面對)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당면(當面)에 가까운 안산(案山)이 없어 원진수(元辰水)를 거두지 못하였다. 순수국(順水局)에 가까운 안산이 없으면 용호(龍虎)가 교쇄(交鎖)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함이 아쉽다.

  수성(水城:물길)을 보면 혈의 정면으로 물이 흘러 나가는 거수국(去水局:順川局)으로 재물을 뜻하는 물이 달아나니 가난을 면치 못 할 상이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명당(明堂)은 둥글어야 좋은데 우백호가 침범하고 좌청룡이 물길을 가로 막지 못하여 둥근 국(局)을 형성하지 못함이 아쉽다.

  향법(向法)을 보면 혈후(穴後)의 삼절(三節)이 모두 음(陰:酉)으로 발맥(發脉)하고 손향(巽向)을 하였으니, 정음정양(淨陰淨陽) 법으로 음룡(陰龍)에 음향(陰向)이니 합법이다.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으로는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진수구(辰水口)로 자생향(自生向)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바 이곳 남연군 묘는 큰 산 기슭에는, 혈(穴)을 맺기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좋은 예로 탈살(脫殺)에 성공하였다.

  즉 거칠고 높은 큰 산과 혈장과의 거리가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그 중간에 부드럽고 어린 면세(眠勢)의 수성체(水星體)가 있어, 짧은 거리임에도 탈살(脫殺)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결혈(結穴)의 조건 중 하나인 맥진처(脉盡處)에 해당하고, 혈장(穴場)이 부풀어 융기하였으니 진혈(眞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백호의 고압(高壓)과 도두제4절(到頭第四節)의 단맥(斷脉), 그리고 가까운 안산(案山)이 없고 용호의 교쇄(交鎖)도 부족한 점은, 후손과 국가에 뼈아픈 흉(凶)함을 안겨 주었다고 생각 된다.

  한 가지 비보(裨補)책을 말한다면, 혈장에 솟은 암석을 평탄하게 깎고 흙을 덮어 잔디를 식재할 것과, 도두 제4절의 단맥처(斷脈處)를 공력(工力)으로 이어줄 것과, 정면으로 답답하지 않게 적당한 거리에 수림(樹林)을 조성하여, 풍취(風吹)와 순수국(順水局)의 단점을 보완한다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남연군 묘를 둘러보고 나서 육관 손석우옹의 묘소를 향하였다. 산 밑으로 난 길을 따라 저수지를 뒤로 하고, 혈장(穴場)에 올라 묵례를 올린 다음 살펴보니, 혈형(穴形)은 유혈(乳穴)인데 뚜렷한 양국(兩掬)과 계수(界水)의 윤곽이 모호하여 혈증(穴證)을 찾는데 실패하였다.

  뒤로 내려온 용맥을 거슬러 올라 보니, 석문봉(石門峰?)에서 흘러내린 용맥(龍脉)이 기복(起伏)없이 미끄러져 내려오고 굴곡(屈曲)도 부족하니, 혈(穴)을 맺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 이것은 혈을 맺을 수 없는 일종의 지각(枝脚)임이 분명하다.

  내려온 용맥의 왼쪽으로는 가파른 계곡으로 절벽 같았다. 기복과 굴곡 없이 내려온 맥은 혈장 가까이에서, 약간 우선(右旋)으로 돌았고 밖으로 육지(肉地)를 만들어 혈장(穴場)을 이루었다.

  따라서 용맥과 함께 내려오는 계곡의 급한 물길이 혈(穴)뒤를 충사(冲射)하여 흉(凶)하였다. 내맥(來脈)이 혈장(穴場)을 감싸지 못하고 혈(穴)의 뒤를 반궁(反弓)으로 가로 지르니 혈을 배반하여 밀어내는 형상이다.

높고 거칠며 큰 후룡(後龍)의 살기(殺氣)를 벗어나기 위한 기복(起伏)과 굴곡(屈曲)등의 박환(剝換)이 부족하고, 혈증(穴證)이 모호하니 진혈(眞穴)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국세(局勢)는 비록 높기는 하나 백호작국(白虎作局)에 수구(水口)가 관란(關攔)되고, 앞에 저수지가 있어 거수국(據水局)을 이루었으니 재물 발복에 좋으나, 가혈(假穴)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풍수지리계의 선배로서 한 때는 풍수의 붐을 일으켰던 분인데, 초라한 묘자리가 너무 안타까웠다. 후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하산(下山)하였다.

출처 : 민중원 풍수학당
글쓴이 : 야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