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역사와 성씨

[스크랩] 江陵金氏(강릉김씨)

장안봉(微山) 2014. 12. 27. 05:13

 

 

 

 

▣ 由來

 

 

始祖 : 金周元(김주원)


始祖(시조) 金周元(김주원)은 新羅(신라) 宗(태종) 武烈王(태종 무열왕) 金春秋(김춘추)의 6世孫(세손)이다.
元來(원래) 金周元(김주원) 角干(각간)으로 侍中(시중;新羅 最高 官職)兼(겸) 兵部令(병부령;軍事 總責任者)를 지냈다.
785年(新羅 善德女王 6年) 善德女王(선덕여왕)이 後孫(후손)이 없이 죽자 君臣(군신)會議 (회의)끝에 金周元(김주원)을 王(왕)으로 推戴(추대)하기로하였으나 慶州(경주)의 閼川(알천)北(북)쪽 20里(리) 밖에살던 金周元(김주원)이 갑자기 큰비가 내려 閼川(알천)을 건널

수 없어 入闕(입궐)을 못하였다.이에 君臣(군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다"하여 上大等(상대등)金敬信(김경신;元聖王)을 王(왕)으로 推戴(추대)하였다.
비가 개인다음 그가 大闕(대궐)에 들어가자 元聖王(원성왕)은 그에게 卽位(즉위)할것을 勸誘(권유)하였으나 이를 辭讓(사양)하고 어머니의 故鄕(고향)인 江陵(강릉)에 내려간 後(후)

돌아오지 않았다. 元聖王(원성왕)은 그의 謙遜(겸손)함에 感服(감복)하여 溟州郡王(명주군왕)에 封(봉)하고 溟州(명주:江陵),翼嶺(익령:襄陽),斤乙於(근을어:平海),三陟(삼척),蔚珍(울진) 等(등)을 다스리게 하고 그 땅을 食邑(식읍)으로 下賜(하사)하였다.
金周元(김주원)은 溟州城(명주성)을 쌓고 嶺東一帶(영동일대)를 統治(통치)했으며 이에 따라 後孫(후손)들이 江陵(강릉)을 本貫(본관)으로 하였다. (參考 : 三國遺事, 三國史記)

- 墓는 江原道 溟州郡 城山面 普光里 三王陵에 있다.

 

▣ 人物

 

 

金周元(김주원)은 金宗基(김종기),金憲昌(김헌창),金身(김신)等(등) 3名(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金憲昌(김헌창)은 憲德王(헌강왕)때 公州地方(공주지방)에서 軍事(군사)를일으켜 國號(국호)를 "長安(장안)"이라 하고 全羅(전라),忠淸道(충청도) 地方(지방)을 占領(점령)했으나 失敗(실패)로 끝나 自決(자결)했다.첫째 아들 金宗基(김종기)의 孫子(손자)金陽(김양)은 838年(閔哀王1年)軍事(군사)를 일으켜 僖康王(희강왕)을 죽게하고 王位(왕위)에오른 閔哀王(민애왕)을 除去(제거)하고 金祐徵(김우징)을 神武王(신문왕)으로 推戴(추대)하고 角干侍中(각한시중) 兼(겸) 兵部令(병부령)을 지냈다.
金順式(김순식)은 高麗建國初(고려건국초)溟州(명주)將軍(장군)으로 끝까지 抗拒(항거)하다 王建(왕건)에게 說得(설득)을 받고 王建(왕건)에게 協力(협력)하여 後百濟(후백제)征伐(정벌)에 功(공)을 세웠다

그 後(후) 大匡(대광)에 오르고 王氏(왕씨) 姓(성)을 下賜(하사)받았으나 朝鮮開國後(조선개국후) 王氏(왕씨)가 彈壓(탄압)을 받자 元來9원래) 姓(성)인 金氏(김시)로 還元(환원)하였다.9世孫(세손) 金上琦(김상기)가 高麗(고려)睿宗(예종)때 平章事(평장사:內史 文下省의 正2品 벼슬)를 지냈으며,그의 아들 金仁存(김인존)은 門下平章事上柱國(문하평장사상주국)으로 高麗(고려) 仁宗(인종)때 翊聖同德功臣(익성동덕공신)에 冊祿(첵록)되고,學文(학문)과 文章(문장)에 뛰어나 重要(중요)한 國事(국사)가 있을 때마다 王(왕)이 그에게 咨問(자문)을 받았다.朝鮮時代의 人物로는 生六臣(생육신)의 한 사람인 梅月堂(매월당)金時習(김시습)이 代表的이다.1435年(世宗 17年)成均館附近에서 金日省(김일성)의 아들로 出生하여 어려서부터 神童(신동),神才(신재)로 불리워진 그는 3世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詩(시)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하처동)"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누런 구름은 조각 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그가 5歲(세)때 中庸(중용)과 大學(대학)을 通達(통달)하여 이 消息(소식)을 接(접)한世宗大王(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寵愛(총애)했다고 하며, 40餘年間(여년간) 大司成(대사성)을 지낸 金泮(김반:後孫을 江西金氏라 함)의 門下(문하)에서 글을 읽고, 師範之宗(사범지종)으로 일컬어진 尹詳(윤상)에게 禮書(예서)와 諸子百家(제자백가)를 배웠다.
21歲(세)때인 1455年(端宗 3年)三角山(삼각산) 重興寺(중흥사)에서 工夫(공부)하다가 首陽大君(수양대군)이 端宗(단종)을 내몰고 王位(왕위)를 簒奪(찬탈)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痛憤(통분)하여 읽던 冊(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雪岑(설잠)으로 고친 後(후) 放浪(방랑)의 길을 떠났다.特(특)히 그는 世祖(세조)의 悖倫(패륜)에 痛憤(통분)하고 抵抗(저항)하며 9年間(년간)을 放浪(방랑)하면서 "宕遊關西錄(탕유관서록)" "宕遊關東錄(탕유관동록)""宕遊湖南錄(탕유호남록)"等을 整理(정리)하여 그 後志(후지)를 썼으며,西紀 1463年(世祖 9年)冊(책)을 求(구)하러 漢陽(한양)에 갔다가 孝寧大君(효령대군:太宗의2男)의 勸誘(권유)로 暫時(잠시) 世祖(세조)의 佛經諺解(불경언해) 事業(사업)을 도와 內佛堂(내불당)에서 矯正(교정)일을 보았으나,1465年(世祖11年) 慶州(경주) 南山(남산)에 金鰲山室(금오산실)을짓고 다시 入山(입산)하였다그後(후) 여러 次例(차례)世祖(세조)의 召命(소명)을 받았으나 拒切(거절)하고,金鰲山室에서 우리나라 最初(최초)의 漢文小說(한문소설)인"金鰲新話(금오신화)"와 1468年(世祖 13年) "山居百詠(산거백영)"을 썼다. 西紀 1481年(成宗12年) 還俗(환속)하여 安氏(안씨)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年 뒤 다시 漢陽(한양)을 등지고 放浪(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忠淸道(충청도) 鴻山(홍산)無量寺(무량사)에서 生涯(생애)를 마쳤다.司藝(사예)金忠貞(김충정)의 아들 金添慶(김첨경)은 1549年(明宗4年

)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하여 正言(정언), 御史(어사),副修撰(부수찬), 持平(지평) 等(등)을 거쳐 1561年(明宗 16年) 書狀官(서장관)으로 明(명)나라에 다녀왔으며,僉正(첨정)을 지내고 江陵府使(강릉부사)로 나갔다가 뒤에 禮曹判書(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外 監察(감찰)金宗胤(김종윤)의 아들 金忠烈(김충렬)이 中宗(중종)때 文科(문과)에 壯元하여 漢城府 判官,京畿道使를 거쳐 春秋館編修館(춘추관 편수관:施政(시정)을 記錄하는 官廳의 正3品 벼슬)으로 中宗實錄(중종실록)과 仁宗實錄(인종실록)編纂(편찬)에 參與했으며,金國坪(김국평)의 아들 金行(김행)은 宣祖 때 茂長縣監(무장현감)이 되어 安平大君(안평대군:世宗(세종)의 셋째 아들)의 證道歌(증도가)를 刊行(간행)하고 光州牧使(광주목사)로 나갔다.禮曺判書(예조판서)金添慶(김첨경)의 玄孫(현손)인 金始赫(김시혁)은 工曹判書(공조판서)와 左參贊(좌참찬)을 歷任(역임)하고 判敦寧府事(판돈령부사)에 올랐으며,金始煥(김시환)과 金始炯(김시형)도 禮曹(예조)및 兵曹判書(병조판서)를 歷任하여,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右參贊(우참찬),大司憲(대사헌) 等을 지낸 金啓洛(김계락)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年(光海君 10年) 增廣文科(증광문과)에 壯元(장원)한 金起宗(김기종)은 金哲命(김철명)의 아들로 李适(이괄)의 亂(란)때 都元帥 張晩(장만)의 從事官(종사관)으로 武勳(무훈)을 세워 振武(진무)2等功臣(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瀛海君(영해군)에 封(봉)해졌으며, 벼슬은 戶曺判書(호조판서)를 지냈다.그밖의 人物(인물)로는 大司諫(대사간), 慶尙道觀察使(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吏曺(이조),禮曺(예조),戶曺(호조)의 判書(판서)를 歷任(역임)한 金尙星(김상성)과 英祖(영조)때 都承旨(도승지)를지내고 耆老所(기로소:朝鮮(조선)때 나이가 많은 文臣(문신)을 禮遇(예우)하기 爲(위)해 設置(설치)한 機構)에 들어가서 奉朝賀(봉조하)가 된 金尙翼(김상익),禮曹(예조) 및 刑曹參判(형조참판)을 歷任한 金尙迪(김상적)이 有名(유명)했다.金始炫(김시현)의 아들 金尙重(김상중)은 英祖(영조)때 大司憲(대사헌)과 大司諫(대사간) 을 거쳐 工曹判書(공조판서)에 이르러,右參贊(우참찬)을 지낸 金尙集(김상집)과 學者로 有名(유명)한 金鴻運(김홍운),刑曹判書(형조판서) 金華鎭(김화진) 等과 함께 名門(명문)의 傳統(전통)을 이었으며,金尙喆(김상철)은 1775年(英祖51年) 領議政(영의정)에 올라 學德(학덕)으로 王의 信任(신임)을받았고, 일찍이 右議政(우의정)때 編輯廳(편집청)을두어"東國文獻備考(동국문헌비고)"를 編纂(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便宜(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金忠烈(김충렬) (1503 癸亥生) :文科 中宗26年(1531)式年試甲科 壯元及第
金起宗(김기종) (1585 乙酉生) :文科 光海君10年(1618)增廣試甲科 壯元及第
金尙星(김상성) (1703 癸未生) : 文科 景宗3年(1723)庭試 甲科 壯元及第
金尙耉(김상구) (1704 甲申生) : 文科 英祖10年(1734) 庭試 甲科 壯元及第
金仲衡(김중형) (1704 甲申生) : 文科 世祖3年(1457) 別試 丁科
金潤身(김윤신) (1704 甲申生) : 文科 成宗7年(1476) 別試  丙科
金光軫(김광진) (1704 甲申生) : 文科 中宗21年(1526) 別試  乙科
金忠貞9김충정) (1704 甲申生) : 文科 中宗30年(1535) 別試3丙科
金八元(김팔원) (1524 甲申生) : 文科 明宗10年(1555) 式年試乙科
金順命(김순명) (1561 辛酉生) : 文科 宣祖21年(1588) 謁聖試乙科
等 모두 326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97名, 武科 19名,司馬試 205名,譯科 1名,醫科 1名,陰陽科 2名, 律科 1名)

▣ 行列字(항렬자)

 
34世
병(秉)○
35世
연(演)○
36世
○경(卿)
37世
진(振)○
38世
○기(起)
39世
남(南)○
40世
○래(來)
41世
동(東)○
42世
○유(猷)
43世
성(成)○
44世
○현(玄)
45世
만(萬)○
46世
○구(九)
47世
명(命)○
48世
○영(寧)
49世
무(茂)○
50世
○기(紀)
51世
유(庾)
52世
재(宰)
53世
성(聖)
중(重)
54世
규(揆)
55世
하(夏)
56世
원(元)
57世
두(斗)
58世
택(澤)
59世
오(吾)
60世
장(章)
61世
세(世)
62世
-
63世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35世孫은 34代孫)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江原道  江陵


江陵(강릉)은 紀元前(기원전)부터 城邑國家(성읍국가)인濊貊族(예맥족)의 濊國(예국)이 있던 地域(지역)으로 127年 以後(이후)에는 滄海(창해)와 臨屯(임둔)에 屬(속)하였다.313年
(高句麗美天王14)에 河西良(하서량) 또는 河瑟羅(하슬라)라 불리었다.550年(新羅 眞興王11) 新羅의 領土로 編入되었고,639年(善德女王8)2月에는 北小京을 두었고, 658年(武烈王5) 靺鞨族(말갈족)과 隣接(인접)해 있다는 理由(이유)로 小京(소경)을 廢止(폐지)하고 河西州(하서주)로 改編(개편)하여 都督(도독)을 두었다.757年(景德王16)溟州(명주)로 改編(개편)하여 溟州都督府(명주도독부)를 두었고 9郡(군)25縣(현)을 管轄(관할)하였다.936年(高麗 太祖19)에는 東原京(동원경)이라 稱(칭)하고 臨瀛館(임영관)을 두었다.그 後羽谿(우계)·連谷(연곡)의 두 縣(현)을 두었다가,1260年(元宗1)功臣(공신)金洪就(김홍취)의 故鄕(고향)이라하여 慶興都護府(경흥도호부)로 昇格(승격)되었다.1389年(恭讓王1)에는 江陵大都護府(강릉대도호부)가 設置(설치)되었다. 1789年(正祖12)에 江陵府(강릉부)가 되었다.1896年(高宗33) 江陵郡(강릉군)으로 改稱(개칭)하였다. 1931年 江陵面(강릉면)이 江陵邑(강릉읍)으로 昇格(승격

)되었고, 1955年江陵邑(강릉읍)·城德面(성덕면)·鏡浦面(경포면)을 統廢合(통폐합)하여 江陵市(강릉시)로 昇格(승격)하면서 溟州郡(명주군)을 分離(분리)시켰다가 1995年江陵市(강릉시)와 溟州郡(명주군)을 江陵市(강릉시)로 統合(통합)하였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江陵金氏(강릉김씨)는
1985年에는 摠 35,816家口 150,577名,
2000年에는 摠 52,050家口 165,963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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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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