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역사와 성씨

[스크랩] 開城金氏(개성김씨)

장안봉(微山) 2014. 12. 27. 05:12

 

 

 

開城金氏(개성김씨)

 

▣ 由來

 

 

始祖 : 金龍珠(김용주)


始祖(시조) 金龍珠(김용주),諡號(시호)는 忠義(충의), 義城金氏(의성김씨) 始祖(시조) 金錫(김석)의 8世孫(세손) 金公瑀(김공우)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1035年(高麗 正宗1年)에 出生(출생)하여 1054年(文宗8年)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한 後(후) 4代王(4대왕)에 걸쳐 여러차려 女眞征伐(여진정벌)에 功(공)을세워 推忠功臣(추충공신)으로 開城君(개성군)에 封(봉)해지고 開城府使(개성부사)와

平章事[평장사:內史(내사)門下省(문하성)의 正2品(정2품) 벼슬]에 올라 그의 後孫(후손)들이 義城金氏(의성김씨)에서 分貫(분관)하여 本貫(본관)을 開城(개성)으로 하였다.

- 墓所(묘소)는 開城(개성) 龍鍾山(용종산) 中峰(중봉)에 있다.
 

▣ 人物

 

 

始祖(시조) 金龍珠(김용주)의 孫子(손자) 貞愼公(정신공) 金晙(김준)이 高麗(고려) 文宗(문종)때 科擧(과거)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 睿宗(예종)때 女眞(여진)을 平征(평정)한 功(공)으로 兵部(병부),禮部(예부),吏部(이부)의 尙書[상서

:六部(육부)에 屬(속)한 正3品(정3품)벼슬]를 지내고 平章事(평장사)에 올랐으며,그의 맏아들 金之宣(김지선)은 寶文閣大提學(보문각대제학)을 次男(차남)金之慶(김지경)은 尙書(상서)를 지냈고,金之宣(김지선)의 맏아들 文元公(문원공)

金源(김원)은 上將軍(상장군)을 歷任(역임)하였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金源(김원)의 孫子(손자)文敏公(문민공)金南寶(김남보)가 領議政(영의정)에 贈職(증직)되었으며, 金玄德(김현덕)의 아들 金茂(김무)는 左贊成(좌찬성)을 지냈다. 金應煥(김응환)은 當代(당대)의 이름난 畵家(화가)로 尙衣院別提(상의원별제)에 이르렀고 1788年(正祖12年) 王命(왕명)으로 金剛山(금강산)을 遊歷(유력)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忠壯公(충장공)金節(김절)은 일찍이 趙憲(조헌)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익혀 經學(경학)에 밝았고,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趙憲(조헌)을 따라 故鄕(고향)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켜 報恩(보은), 公州(공주), 淸州(청주)等地(등지)의 戰
鬪(전투)에서 功(공)을 세웠으나 錦山(금산)에 陣(진)을 치고 있던 倭敵(왜적)과 奮戰(분전)하다가 壯烈(장렬)하게 殉節(순절)하여,이 消息(소식)을 傳(전)해들은 宣祖(선조)임금이 諡號(시호)와 함께 旌閭(정려)를 내려주어 그의 忠節(충절)을 기렸다. 金汝亮(김여량)은 1603年(宣祖36年)에 태어나 10歲(세)때부터 金集(김집)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배우고 1633年(仁祖11年)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奉常寺主簿(봉상시주부) 兼(겸) 承文院(승문원) 博士(박사)를 거쳐 1640年 陰城縣監(음성현감)을 始作(시작)으로 外職(외직)에 나가 1671年(顯綜12年)까지 32年同安(동안) 海美(해미), 麟蹄(인제),載寧(재령),昌原(창원),寧越(영월)等(등)12邑(읍)의 郡守(군수),縣監(현감),副使(부사)等(등)을 지내면서 善政(선정)을 베풀어 다섯 고을에 "淸白頌德銅碑(청백송덕동비)"가 세워졌으며,1672年에는 大司諫[대사간:司諫院(사간원)의 正3品(정3품) 으뜸 벼슬]에 오르고 1682年(肅宗8年) 承旨(승지)가 되어 3代(대)에 걸쳐 嘉善大夫[가선대부: 從2品(종2품)下(하)의 官系(관계)]의 榮譽(영예)를 追贈(추증)받아,縣監(현감)을 지낸 金舜龍(김순룡)과 함께 名聲(명성)을 떨쳤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金自陽(김자양) : 文科 中宗30年(1535) 別試3 乙科
金漬(김지) : 文科 宣祖2年(1569) 別試 乙科
金漬(김지) : 文科 宣祖9年(1576) 重試 乙科
金承勳(김승훈) (1834 甲午生) : 文科 高宗6年(1869) 別試 乙科
金汝亮(김여량) (1603 癸卯生) : 文科 仁祖11年(1633) 式年試 丙科
金明彦(김명언) (1603 癸卯生) : 文科 中宗32年(1537) 式年試 丙科
金冕洙(김면수) (1874 甲戌生) : 文科 高宗25年(1888) 式年試 丙科
金漢傑(김한걸) (1874 甲戌生) : 文科 明宗1年(1546) 式年試 丙科
金善柱(김선주) (1833 癸巳生) : 文科 高宗1年(1864) 增廣試 丙科
金慶深(김경심) (1531 辛卯生) : 文科 宣祖3年(1570) 式年試 乙科
等 모두 98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14名, 武科 13名,司馬試 30名,譯科 21名,醫科 5名,陰陽科12名,律科 3名)

▣ 行列字(항렬자)
 
24世
○환(煥)
25世
○기(基)
26世
○호(鎬)
27世
태(泰)○
28世
○주(柱)
29世
충(忠)○
30世
○규(圭)
31世
종(鐘)
32世
○순(淳)
33世
동(東)○
34世
○헌(憲)
35世
주(周)○
36世
○진(鎭)
37世
영(永)○
38世
○표(杓)
39世
병(炳)○
40世
○균(均)
41世
○석(錫)
42世
-
43世
-
  ※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5世孫은 24代孫)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開城特級市


開城(개성)은 京畿道(경기도)北西部(북서부)에 位置(의치)한 地名(지명)으로 現在(현재) 開城直轄市(개성직할시)가 되었다. 本來(본래)는 高麗(고려)의 首都(수도)였으며, 그 以前(이전)까지 松嶽郡(송악군松都(송도開京(개경扶蘇岬(부소갑冬比忽(동비홀蜀莫郡(촉막군) 等(등)으로 불리었다.高句麗(고구려)때에는 扶蘇岬(부소갑)이라 했으며, 465年(百濟蓋鹵王11)에는 100年 同安(동안) 百濟(백제)의 領土(영토)였다. 555年(新羅 眞興王16)에 新羅(신라)가 占領(점령)한 以後(이후)松嶽郡(송악군)으로 改稱(개칭)되었고,898年(孝恭王2)에 弓裔(궁예)가 暫時(잠시) 泰封(태봉)의 都邑(도읍)으로 삼기도 하였다. 919年(高麗太祖2) 1月 首都(수도)를 鐵原(철원)에서 松嶽山(송악산) 南(남)쪽으로 옮긴 後(후) 開豊郡(개풍군)과 松嶽(송악)을 합쳐 開州(개주)라 불렀고 5府(부)를 設置(설치)하였다. 960年(光宗11)에는 開京(개경)으로,995年(成宗14)에는 開城府(개성부)로 改稱(개칭)하였다.朝鮮(조선)이 開國(개국)하여 漢陽(한양)으로 都邑(도읍)을

옮긴 以後(이후) 1467年(世祖13)에 開城府(개성부)로 京畿道(경기도)에 編入(편입)되어 開城府尹(개성부윤)이 赴臨(부임)해 오다가 1906年 開城郡(개성군)으로

改編(개편)되었다. 1949年市制(시제) 實施(실시)에 따라 開城市(개성시)가 되었고, 1954年 10月 開豊郡(개풍군)과 板門郡(판문군)이 黃海北道(황해북도)에 編入(편입)되었다.1955年 開城市(개성시)와 黃海北道(황해북도)開豊郡(개풍군)·板門郡(판문군)이 統合(통합)되어 開城直轄市(개성직할시)로 昇格(승격)되었으며,

1961年 3月 黃海北道(황해북도) 長豊郡(장풍군)에 江原道(강원도) 鐵原郡(철원군) 一部(일부)를 編入(편입)시키면서 開城直轄市(개성직할시)의 管轄(관할)이 되었다. 2004年 1月 開城直轄市(개성직할시)를 黃海北道(황해북도) 開城特級市(개성특급시)로 바꿨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開城金氏(개성김씨)
1985年에는 摠 4,568家口 18,777名,
2000年에는 摠 6,434家口 20,341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자료 더보기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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