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시조) 金龍珠(김용주)의 孫子(손자) 貞愼公(정신공)
金晙(김준)이 高麗(고려) 文宗(문종)때 科擧(과거)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 睿宗(예종)때 女眞(여진)을 平征(평정)한 功(공)으로
兵部(병부),禮部(예부),吏部(이부)의 尙書[상서
:六部(육부)에 屬(속)한 正3品(정3품)벼슬]를 지내고
平章事(평장사)에 올랐으며,그의 맏아들 金之宣(김지선)은 寶文閣大提學(보문각대제학)을 次男(차남)金之慶(김지경)은 尙書(상서)를
지냈고,金之宣(김지선)의 맏아들 文元公(문원공)
金源(김원)은 上將軍(상장군)을
歷任(역임)하였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金源(김원)의
孫子(손자)文敏公(문민공)金南寶(김남보)가 領議政(영의정)에 贈職(증직)되었으며, 金玄德(김현덕)의 아들 金茂(김무)는 左贊成(좌찬성)을
지냈다. 金應煥(김응환)은 當代(당대)의 이름난
畵家(화가)로 尙衣院別提(상의원별제)에 이르렀고 1788年(正祖12年) 王命(왕명)으로 金剛山(금강산)을 遊歷(유력)하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忠壯公(충장공)金節(김절)은 일찍이 趙憲(조헌)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익혀 經學(경학)에 밝았고,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趙憲(조헌)을 따라 故鄕(고향)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켜 報恩(보은), 公州(공주), 淸州(청주)等地(등지)의
戰鬪(전투)에서 功(공)을 세웠으나 錦山(금산)에 陣(진)을 치고 있던
倭敵(왜적)과 奮戰(분전)하다가 壯烈(장렬)하게 殉節(순절)하여,이 消息(소식)을 傳(전)해들은 宣祖(선조)임금이 諡號(시호)와 함께
旌閭(정려)를 내려주어 그의 忠節(충절)을 기렸다. 金汝亮(김여량)은 1603年(宣祖36年)에 태어나 10歲(세)때부터
金集(김집)의 門下(문하)에서 學文(학문)을 배우고 1633年(仁祖11年)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奉常寺主簿(봉상시주부) 兼(겸)
承文院(승문원) 博士(박사)를 거쳐 1640年 陰城縣監(음성현감)을 始作(시작)으로 外職(외직)에 나가 1671年(顯綜12年)까지
32年同安(동안) 海美(해미), 麟蹄(인제),載寧(재령),昌原(창원),寧越(영월)等(등)12邑(읍)의
郡守(군수),縣監(현감),副使(부사)等(등)을 지내면서 善政(선정)을 베풀어 다섯 고을에 "淸白頌德銅碑(청백송덕동비)"가
세워졌으며,1672年에는 大司諫[대사간:司諫院(사간원)의 正3品(정3품) 으뜸 벼슬]에 오르고 1682年(肅宗8年) 承旨(승지)가 되어
3代(대)에 걸쳐 嘉善大夫[가선대부: 從2品(종2품)下(하)의 官系(관계)]의 榮譽(영예)를 追贈(추증)받아,縣監(현감)을 지낸
金舜龍(김순룡)과 함께 名聲(명성)을 떨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