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역사와 성씨

[스크랩] 金寧金氏(김녕김씨)

장안봉(微山) 2014. 12. 27. 05:05

 

 

金寧金氏(김녕김씨)

 

▣ 由來

 

 

始祖(시조)  :  金時興(김시흥)


始祖(시조)金時興(김시흥)은 敬順王(경순왕)의 넷째 아들 金殷說(김은열)의 9世孫(9세손)으로 義城(의성)에서 出生(출생)하여 高麗(고려)仁宗(인종)때 妙淸의 亂(란)을 平征(평정)하여 金州君(금주군)에 封(봉)해졌으며, 明宗(명종)때에는 趙位寵(조위총)의 亂(란)을 討平(토평)하는데 功(공)을 세워 食邑(식읍)을 下賜(하사)받고 上洛君(상락군)에 封(봉)해졌다.그리하여 後孫(후손)들이 本貫(본관)을 金寧(금령)으로 하여 오다가 高麗末(고려말)에 地名(지명) 金海(김해)로 改稱(개칭)되자 金海(김해)로 本貫(본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首露王(수로왕)系統(계통)의 金海金氏(김해김씨)와 混沌(혼돈)되므로 金海金氏(김해김시) 先金(선김)으로,金寧金氏(금련김씨) 後金(후김)으로 부르다가 後孫(후손)들이 區分(구분)을 確實(확실)히 하지 못하자 1865年(高宗2年)에 金寧(김령)으로 確定(확정)하였다.
 

▣ 人物

 

 

金時興(김시흥)의 曾孫子(증손자)金重源(김중원)이 高麗時代(고려시대)에 按廉使(안렴사)를 거쳐 形部侍郞(형부시랑)을 지내고, 吏部尙書(이부상서)에 贈職(증직)되었다. 特(특)히 그는 高麗(고려)가 亡(망)하자 慨嘆(개탄)하여 斷食(단식)을 하다가 殉節(순절)하였다.恭讓王(공양왕)때 版圖判書(판도판서)를 지낸 金光儲[김광저:金重源(김중원)의 孫子(손자)]는 武鹿山(무록산)에 들어가 不事二君(불사이군)의 忠節(충절)로 節義(절의)를 지켰는데,太宗(태종)이 吏曹判書(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려 그를 懷柔(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拒絶(거절)하였다.한便(편)金光儲(김광저)의 아들 金順(김순)도 高麗(고려)때 戶曹判書(호조판서)를 歷任(역임)하였으나 朝鮮(조선)이 開國(개국)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號(호)를 退休堂(퇴휴당)이라 하고 忠北(충북)沃川(옥천)의 白池里(백지리)에 亭子(정자)를 짓고 亡國(망국)의 恨(한)을 달랬으며,盆城君(분성군) 金挺甲(김정갑)의 아들 金秩(김질)은 太祖(태조)가 登極前(등극전)의 情義(정의)로 開國原從功臣(개국원종공신)에 冊祿(책녹)하고 禮曹判書(예조판서)에 任命(임명)되었으나應(응)하지 않고 牙山(아산)道高山(도고산)에 隱遁(은둔)한 後(후)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自號(자호)를 松菴(송암)이라 하였다.吏曺判書(이조판서)金觀(김관)의 아들 金文起(김문기)는 1399年(定宗1年)2月16日 忠北(충북)沃川郡(옥천군)伊院面(이원면)白池里(백지리)에서 出生(출생)하여 世宗(세종)때 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하고 藝文館檢閱(예문관검열)에 任命(임명)되어"太宗實錄(태종실록)"을 編纂(편찬)했으며,癸酉靖難(계유정난)때 吏曺判書(이조판서)로 內外從間(내외종간)인 朴彭年(박팽년)等(등)과 더불어 端宗(단종)의 復位(복위)를 圖謀(도모)했다가 1456年(世祖2年)6月 8日 死六臣(사육신)과 함께 殉節(순절)했다.居昌(거창)과 陽知縣監(양지현감)을 거쳐 寧越郡守(영월군수)를 歷任(역임)한 金玄錫(김현석)도 아버지인 金文起(김문기)를 따라 殉節(순절)하였고,金文起(김문기)의 孫子(손자)金忠柱(김충주)와 曾孫(증손)金玄南(김현남), 5世孫(5세손) 金約前(김약전)等(등)이 모두 忠孝(충효)로 家門(가문)을 빛내어"五世忠孝(오세충효)"의 旌門(정문)이 세워졌다.한便(편) 金遵(김준)은 天文(천문),地理(지리)와 實學(실학)에 能通(능통)한 人物(인물)로 端宗(단종)이 죽임을 當(당)하자 3年間(3년간) 服喪(복상)을 한 後(후) 벼슬을 버리고 全南(전남)高興(고흥)으로 내려가 學文(학문)에만 專念(전념)했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判書(판서)金福龍(김복룡)의 아들 金應壽(김응수)가 兄弟(형제)들과 더불어 壬辰倭亂(임진왜란)때 義兵(의병)을 일으켜 戰功(전공)을 세우고 扈聖功臣(호성공신)에 올랐으며,潭陽府使(담양부사)金彦恭(김언공)은 權慄(권율)의 永川(영천)戰鬪(전투)와 李舜臣(이순신)將軍(장군)의 露粱大捷(
노량대첩)에서 中樞的(중추적)인 役割(역할)을 하여 名聲(명성)을 떨쳤다.老母(노모)를 등에 업고 八公山(팔공산)戰鬪(전투)에서 功(공)을 세운 金有富(김유부)와 그의 아들 金起南(김기남),金蘭生(김난생)兄弟(형제)는 丙子胡亂(병자호란)때 殉節(순절)하여 金俊傑[김준걸:宣祖(선조)때의 功臣(공신)],金得誠(김득성),金永吉[김영길:宣傳官(선전관)으로 壬辰倭亂(임진왜란)때 殉節(순절)]父子(부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金鎭行(김진행)은 孝行(효행)으로 旌表(정표)를 받아 忠()과 孝(효)의 傳統(전통)을 이어왔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金鎭永(김진영) (1852 壬子生) : 文科 高宗30年(1893) 別試2 丙科
金溶悳(김용덕) (1863 癸亥生) : 文科 高宗30年(1893) 別試 丙科
金萬源(김만원) (1872 壬申生) : 司馬試 高宗25年(1888) 式年試 三等
金仁浩(김인호) (1851 辛亥生) : 司馬試 高宗22年(1885) 式年試 三等
金止源(김지원) (1808 戊辰生) : 司馬試 高宗17年(1880) 增廣試 三等
金昇龍(김승룡) (1850 庚戌生) : 司馬試 高宗4年(1867) 式年試 三等
金溶直(김용직) (1842 壬寅生) : 司馬試 高宗28年(1891) 增廣試 三等
金宇聲(김우성) (1832 壬辰生) : 司馬試 高宗25年(1888) 式年試 三等
金性模(김성모) (1870 庚午生) : 司馬試 高宗31年(1894) 式年試 三等
金書範(김서범) (1812 壬申生) : 司馬試 憲宗12年(1846) 式年試 二等
等 모두 14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2名, 司馬試 12名)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南道 金海

 

金寧(김녕)은 慶尙南道(경상남도)金海市(김해시)의 옛 地名(지명)으로 洛東江河口(낙동강하구) 南西(서남)쪽에 位置(위치)하여 일찍부터 駕洛國(가락국)의

文化(문화)中心地(중심지)로 發展(발전)하여 왔다. 532年(新羅法興王19)新羅

(신라)에 倂合(병합)되어 金官郡(금관군)이 되었다.680年(文武王20)에 金官小京(금관소경)이 되었다가,757年(景德王16)金海小京(김해소경)으로 바꾸어

良州(양주):(梁山)의 管轄(관할)로 두었다. 940年(高麗太祖23)金海府(김해부

)로 改稱(개칭)되었고 臨海縣(임해현)으로 다시 降等(강등)되었다가 곧 臨海郡(임해군)으로 昇格(승격)되었다. 995年(成宗14)에 金海安東都護府(김해안동도호부)로 改稱(개칭)하여 嶺東道(영동도)에 屬(속)하였다가 1012年(顯宗4)金海郡防禦使(김해군방어사)로 降等(강등)되었으나 1018年부터는 義安郡(의안군:昌原)·咸安郡(함안군)·漆原縣(칠원현:漆原面)·熊神縣(웅신현:鎭海)等(등)을 領縣(영현)으로 삼았다. 1270年(元宗11)防禦使(방어사)金晅(김훤)이 隣接地域(인접지역)인 密城(밀성)의 亂(란)을 平征(평정)하여 金寧都護府(김녕도호부)로 昇格(승격)되었다가 1293年(忠烈王19)縣(현)으로 降等되었다.

1308年 金州牧(금주목)으로 昇格(승격)하였으나 1310年(忠宣王2)金海府(김해부)로 格下(격하)되었다. 1413年(太宗13)金海都護府(김해도호부)로 昇格(

승격)되어 世祖(세조)때 鎭(진)을 두었다.1895年(高宗32)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으로 金海郡(김해군)이 되었고,1918年에 左部面(좌부면)과 右部面(우부면)이 金海面(김해면)으로 統合(통합)되었다.1931年에는 金海面(김해면)이 金海邑(김해읍)으로 昇格(승격)되었고, 1981年金海郡(김해군)의 金海邑(김해읍)이 金海市(김해시)로 昇格(승격)하여 分離(분리)되었으며,1995年에는 金海郡(김해군)과 統合(통합)하여 金海市(김해시)가 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金寧金氏(금녕김씨)
1985年에는 摠 102,901家口 424,336名,
2000年에는 摠 162,204家口 513,015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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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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