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역사와 성씨

[스크랩] 金海金氏(김해김씨)[駕洛]

장안봉(微山) 2014. 12. 27. 05:04

 

 

金海金氏(김해김씨)[駕洛]

 

▣ 由來

 

 

始祖(시조)  : 金首露王(김수로왕)


始祖(시조)는 金首露王(김수로왕)이다.
駕洛國(가락국)에는 本來(본래) 我刀干(아도간), 汝刀干(여도간), 彼刀干(피도간), 五刀干(오도간), 留水干(유수간), 留天干(유천간), 神天干(신천간),五天干(오천간),神鬼干(신귀간)等 아홉 村長(촌장)이 各 地方(지방)을 다스렸는데 西紀(서기) 42年 3月에 龜旨峰(구지봉)에서 異常(이상)한소리가 났다.아홉 村長(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山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萬若(만약) 머리를 내지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하였더니,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그 끈의끝에 붉은 보자기에 金(금)으로 만든 箱子(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黃金(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我刀干(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第一(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金首露(김수로,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王(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駕洛(가락)(大伽倻)이라하고,나머지 다섯 사람도 各其(각기) 5伽倻(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以上(이상)은 "三國遺事(삼국유사)" 中에서 -
그中(중) 먼저 나온 首露(수로)는 金(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姓(성)을 金(김)으로 하였다.- 以上(이상)은 "開皇曆(개황력)" 中에서-이 首露王(수로왕)을 始祖(시조
)로하는 姓氏(성씨)가 바로 金海金氏(김해김씨)이다.金海(김해)는 駕洛國(가락국)의 古都(고도)로서 地名(지명)도 여러가지로 變(변)했으나 高麗(고려) 忠宣王(충선왕)때 金海府(김해부)가 設置(설치)됨으로써 本貫(본관)을 金海(김해)로하였으며 駕洛金氏(가락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首露王(수로왕)이 卽位(즉위)7年에 阿踰陀國(아유타국)(現在 印度 中部地方의 古代國家)의 公主(공주)인 許黃玉(허황옥,33~189.3.1)을 王妃(왕비)로 맞이하여 10男 2女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金氏(김씨)로 王統(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王妃(왕비)의 懇曲(간곡)한 要請(요청)으로 王妃(왕비)의 姓(성)인 許(허)씨(泰仁許氏)를 주었다.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佛家(불가)에 歸化(귀화)하여 河東(하동) 7佛(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許氏(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仁川李氏(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姓氏(성씨)가 다같은 血族(혈족)이라며 宗親會(종친회)도 '駕洛中央宗親會(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金海金氏(김해김씨)의 中始祖(중시조)는 首露王(수로왕)의 12世孫(12세손)인 金庾信(김유신)將軍(잔군)이다.金庾信(김유신)은 駕洛國[(가락국) 마지막 王(왕)인 仇衡王(구형왕)의 曾孫子(증손자)]이며 武烈王(무열왕)의 딸 智炤夫人(지소부인)과 婚姻(혼인)하였다.할아버지는 新羅(신라)의 將軍(장군)이자 角干(각간)인 金武力(김무력), 仇衡王(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아버지는 當代(당대)의 이름난 將軍(장군)인 金舒玄(김서현), 어머니는 眞興王(진흥왕)의 同生(

동생)인 肅訖宗(숙흘종)의 딸 萬明(만명)이다.
 

▣ 人物

 

 

京派(경파)


京派(경파)의 派祖(파조) 金牧卿(김목경)은 高麗(고려) 忠定王(충정왕) 曺頔(조적)의 亂(난)을 平征(평정)하는데 功(공)을 세워 金寧君(김녕군)에 封(봉)해졌으며, 當時(당시) 混亂(혼란)한 國政(국정)을 慨嘆(개탄)하여 政堂文學(정당문학) 李兆年(이조년)과 함께 累次(루차) 王(왕)에게 上疏(상소)했으나 듣지 않자 俗離山(속리산)으로 들어가 世上(세상)과 因緣(인연)을끊고 餘生(여생)

마쳤다.金牧卿(김목경)의 맏아들 金普(김보)는 恭愍王(공민왕)이 世子(세자)때 國家(국가)의 使節(사절)로서 중국(중국)의 北京(북경)에 갈때 侍從(시종)한 功으로 一等功臣(일등공신)의 (호)를 받았다.
金普(김보)의 6世孫(6세손)金永堅[김영견 : 同知中樞府(동지중추부사)],金永瑞[김영서 : 縣監(현감)],金永貞[김영정 : 成宗(성종)때 大司憲(대사헌)],金永純[김영순 : 漢城判官(한성판관)]4兄弟(4형제)가 빼어났으며,肅宗(숙종)때 名臣(명신)金宇杭(김우항)은 金永貞(김영정)의 後孫(후손)으로 1713年(肅宗39年)右議政(우의정)에 올랐다.


四君派(사군파)


四君派(사군파)에서는 派祖(파조) 金益卿(김익경)의 孫子(손자) 金振門(김진문)이 高麗末(고려말) 禮儀判書(예의판서)를 거쳐 大提學(대제학)에 올랐으나 朝鮮(조선)이 開國(개국)하자 官職(관직)을 버리고 李穡(이색),朴自儉(박자검)等(등)과 함게 隱遁(은둔) 生活(생활)하여 節義(절의)를 지켰으며,그의 둘째

아들 金錘(김추)는 都摠管(도총관)을,넷째 아들 金錫(김석)은 贊成事(찬성사)를

지냈다. 막내 金肇(김조)는 世宗(세종) 集賢殿修撰(집현전수찬)을 거쳐 禮曺判書(예조판서)에 올랐으며, 直提學(직제학)을 歷任(역임)할 때 蔣英實(장영실)과 함께 簡儀臺(간의대),自擊漏(자격루),渾天儀(혼천의)等(등)을 만든 것으로 傳(전)한다.特(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蒙恩祭(몽은제)를 올리는 忠臣(충신)으로도 이름이 났고,世宗(세종)이 平素(평소)의 所願(소원)을 묻자 "百年(백년) 同安(동안) 날마다 御榻[어탑 : 임금이 앉는 諸具(제구)을 모시고 金葵化(금규화) 앞에 進退(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願(원)합니다"라고 對答(대답)한 것으로 "筆苑雜記(필원잡기)"에 傳(전)한다.

한便(편) 金振門(김진문)의 6世孫(6세손) 金克禧(김극희)가 名射手(명사수) 李舜臣(이순신)將軍의 幕下(막하)에서 戰功(전공)을 세우고 閑山島(한산도)싸움에서 戰死(전사)했으며,그의 조카 金完[김완 : 鶴泉君(학천군)祧(김극조

)의 아들]은 逆戰(역전)의 名將(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壬辰倭亂(임진왜란)

南原大捷(남원대첩)에 功(공)을 세웠던 그는 1624年(仁祖2年)李适(이괄)의

亂(란)을 平征(평정)할 때 碧潼(벽동)의 (성)을 死守(사수)했던 名將(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金宇(김우)의 아들 金汝峻(김여준)은 볼모로 잡혀가는 昭顯世子(소현세자 : 仁祖의 맏아들 仁烈王后(인열왕후) 韓氏(한씨)의 所生(소생)와 璘坪大君(인평대군)을 護從(호종)한 18壯士(장사)의 한 사람으로 中國(중국) 審陽(심양)에 갔을 때 玉河關(옥하관)에서 世子(세자) 護從(호종)하고 소리내어울렸다는"月明飛雁(월명비안)"의 노래를 읊어 더욱 名聲(명성)을떨쳤으며,그의 勇力(용역)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決鬪(결투)를 申請(신청)해 온 淸(청)나라 將帥(장수

)禹巨(우거)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丙子胡亂(병자호란)의 屈辱(굴욕)과 人質(인질)로 잡혀가는 世子(세자)를 護從(호종)하는 悲哀(비애)等(등)百姓(백성)들의 怨恨(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其後(그후) 世子(세자)가 돌아와 卽位(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玉河關(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詩(시제)에"月明飛雁(월명비안)"의 노래를 자주 出題(출제)하였다 한다.

宋象賢(송상현), 劉克良(유극량)과 더불어 三忠節(삼충절)로 일컬어진 金東光(김동광) 淮陽府使(회양부사)로 在職時(재직시)壬辰倭亂(임진왜란)일어나

城(성)이 陷落(함락)되자 左右(좌우)를 避亂(피란)시키고 城(성)의 正門(정문) 앞에 朝服丹粧(조복단장)한 채 官印(관인)을 쥐고 端坐(단좌)하여 敵(적)에게 抵抗(저항)하다가 慘殺當(참살당)하여 禮曺參判(예조참판)에 追贈(추증)되었다.

三賢派(삼현파)


三賢派[(삼현파 : 判圖判書公派(판도판서공파)]의 1世祖(1세조) 金管(김관)은 高麗(고려)에서 版圖判書(판도판서)를 歷任(역임)하고 學校(학교)를 建設(건설)하여 儒學(유학)을 振興(진흥)시키는 等(등) 나라에 많은 功(공)을 세웠으며,그의 玄孫(현손) 金克一(김극일)은 孝行(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金克一(김극일)의 아들 金孟(김맹)은 世宗(세종)때 文科(문과)에 올라 執義(집의)를 지냈으며,밤에 龍馬(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金駿孫(김준손),金驥孫(김기손),金馹孫(김일손)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兄弟(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金氏三珠(김씨삼주)"로 일컬어졌다.

金馹孫(김일손)은 1486年(中宗17年)式年文科(식년문과)에 及第(급제)하고 일찍이 金宗直(김종직)의 門下(문하)에서 글을 읽고 金宏弼(김굉필),鄭汝昌(정여창)等(등)과 親交(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史官(사관)으로 있을 때 全羅監司(전라감사) 李克墩(이극돈)의 非行(비행) 史草(사초)에 썼다가 그의 怨恨(원한)을 사게 되었다. 燕山君(연산군)이 登極(등극)하여 成宗實錄(성종실록)을 編纂(편찬)할때 工巧(공교)롭게도 李克墩(이극돈)이 堂上官(당상관)으로 參與(참여)하여 史草(사초)를 살피게 되니 金馹孫(김일손)의 스승인 金宗直(김종직)이쓴 弔意帝文[(조의제문:世祖(세조)의 王位簒奪(왕위탈)을 非難(비난)한글)을 실은 것이 發見(발견)]되어, 李克墩(이극돈)이 盧思愼(노사신),尹弼商(윤필상), 韓致亨(한치형) 等(등)과 함께 燕山君(연산군)에게 알려 戊午士禍(무오사화)가 일어나 金馹孫(김일손)은 權五福(권오복),權景裕(권경유),李穆(이목)

等(등)과 함께 斬首(참수)當(당)하였고,金宗直(김종직) 剖棺斬屍[(부관참시

 :죽은 뒤에 큰 罪가 드러나 무덤을파고 棺*관)을꺼내어 屍體(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金馹孫(김일손)의 强直(강직)한 氣槪(기개)와 才能(재능)은 後日(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中宗(중종) 때의 領議政(영의정) 南袞(남곤)은 말하기를

 "世上(세상)에 다시 濯纓[탁영:金馹孫(김일손)의 號(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그의 文章(문장)을 물에다 比하면 濯纓(탁영)은 江河(강하)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金馹孫(김일손)의 짧은 生涯(생애)를 哀惜(애석)하게 여겼다.

三賢(삼현)의 한 사람인 金大有(김대유)는 金馹孫(김일손)의 조카이며 金駿孫(김준손)의 아들이다. 戊午士禍(무오사화)에 叔父 金馹孫(김일손)이 斬首當(참수당)하자 父子(부자)가 함께 湖南(호남)에 流配(유배)되었다가 中宗(중종) 때 풀려나와 平生(평샌) 慷慨(강개)한 志節(지절)로 살았으며,3個月間(3개월간) 漆原縣監(칠원현감)을 마지막 벼슬로 辭職(사직)하고 淸道(청도) 雲門山(운문산) 속 三足堂(삼족당)에서 73歲(73세)로 一生(일생)을 마쳤다.
金馹孫(김일손)의 曾孫(증손) 金彦諭(김언유)는 故鄕(고향)에 살면서 至極(지극)한 孝行(효행)으로 名望(명망)이 높았고, 詩(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特(특) 松雪體(송설체)에 能(능)하여 (비)와 屛風(병풍),簇子(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金彦諭(김언유)의 아들 金玄成(김현성)은 光海君(광해군)때 廢母論(폐모론)에 不參(불참)하여 免職(면직)되자 淸貧(청빈)하게 餘生(여생)을 마쳤으며,詩書畵(시서화)에 모두 能(능)했다.


그 밖의 人物(인물)로는 深河(심하)의 戰鬪(전투)에서 功(공)을 세운 金景瑞(김경서)와 韻書(운)를 깊이 硏究(연구)하여 中國語(중국어)에 能通(능통)했던 金德承(김덕승),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 金禮直(김예직),朝鮮(조선) 風俗畵(풍속화)의 大家(대가) 金弘道(김홍도)가 有名(유명)했고,忠孝旌閭(충효정려)를 賜額(사액)받은 金晋熙(김진희)와 "海東歌謠(해동가요)"를 남기고 "靑丘永言(청구영언)"을 編纂(편찬) 金天澤(김천택) 等(등)이 있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金克儉(김극검) : 文科 世祖12年(1466) 重試一等 壯元及第
金驥孫(김기손) : 文科成宗13年(1482) 親試 甲科 壯元及第
金庾信(김유신) : 文科中宗11年(1516) 式年試 甲科 壯元及第
金命岳(김명악) 1821 辛巳生) : 文科 哲宗5年(1854) 別試2 甲科 壯元及第
金世鎭(김세진) 1838 戊戌生) : 文科 高宗13年(1876) 庭試 甲科 壯元及第
金敬濬(김경준) 1862 壬戌生) : 文科 高宗23年(1886)咸鏡道道科甲科壯元及第
金斌(김빈) 1862 壬戌生) : 文科 太宗16年(1416) 重試 乙科
金玄成(김현성) 1542 壬寅生) : 文科 明宗19年(1564) 式年試 丙科
金德承(김덕승) 1595 乙未生) : 文科 光海君11年(1619) 別試 乙科
金商煥(김상환) 1699 己卯生) : 文科 英助11年(1735) 庭試 乙科
等 모두 1289名의 科擧 及第者가 있다.
(文科 128名, 武科 536名, 司馬試 471名, 譯科 59名, 醫科 39名, 陰陽科 15名, 律科 33名, 籌學 8名)
* 科擧 及第者는 本貫이 같고 系統이 다른 本貫과 區分이 안된 것이다.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慶尙南道 金海


金海(김해)는 慶尙南道(경상남도) 金海市(김해시) 一帶(일대)의 옛 地名(지명)으로 洛東江(낙동강) 河口(하구) 南西(서남)쪽에 位置(위치)하여 일찍부터 駕洛國(가락국)의 文化(문화) 中心地(중심지)로 發展(발전)하여 왔다.532年(新羅 法興王19) 新羅(신라)에 倂合(병합)되어 金官郡(금관군)이 되었다.680年(文武王20)에 金官小京(금관소경)이 되었다가,757年(景德王16)金海小京(김해소경)으로 바꾸어 良州(양주):(梁山)의 管轄(관할)로 두었다.940年(高麗 太祖23)金海府(김해부)로 改稱(개칭)되었고 臨海縣(임해현)으로 다시 降等(강등)되었다가 곧 臨海郡(임해군)으로 昇格(승격)되었다.995年(成宗14)에 金海安東都護府(김해안동도호부)로 改稱(개칭)하여 嶺東道(영동도)에 屬(속)하였다가 1012年(顯宗4) 金海郡防禦使(김해군방어사)로 降等(강등)되었으나 1018年부터는 義安郡(의안군:昌原)·咸安郡(함안군)·漆原縣(칠원현:漆原面)·熊神縣(웅신현:鎭海)等을 領縣(영현)으로 삼았다.1270年(元宗11) 防禦使(방어사) 金晅(김훤)이 隣接地域(인접지역)인 密城(밀성)의 亂(란)을 平征(평정)하여 金寧都護府(김녕도호부)로 昇格되었다가 1293年(忠烈王19)縣으로 降等(강등)되었다.1308年金州牧(금주목)으로 昇格하였으나 1310年(忠宣王2) 金海府(김해부)로 格下(격하)되었다.1413年(太宗13) 金海都護府(김해도호부)로 昇格(승격)되어 世祖(세조)때 鎭(진)을 두었다.

1895年(高宗32) 地方制度 改正(지방제도 개정)으로 金海郡(김해군)이 되었고, 1918年에 左部面(좌부면)과 右部面(우부면)이 金海面(김해면)으로 統合(통합)되었다.

1931年에는 金海面(김해면)이 金海邑(김해읍)으로 昇格(승격)되었고 1981年 金海郡(김해군)의 金海邑(김해읍)이 金海市(김해시)로 昇格(승격)하여 分離(분리)되었으며 1995年에는 金海郡(김해군)과 統合(통합)하여 金海市(김해시)가 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하면 金海金氏(김해김씨)는
1985年에는 摠 892,330家口 3,767,065名,
2000年에는 摠 1,295,080家口 4,124,934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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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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