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1일 대전뿌리공원, 2014년 10월 24일 영덕 축제 전통혼례 재현)
곡자상 고찰과 재현의 의의
안유재
곡자상 이란.
곡자상(穀字床)은 우리 겨레가 혼례 시 행하던 민속이었다. 여말 대성리학자로 우리민족의 큰 스승 가정 (稼亭) 이곡 선생(李穀; 1298 ~1351)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자(字)를 붙여 부르는 데서 비롯하였다. 상(床)은 잔칫상이기에 곡자상은 이곡 선생에게 드리는 잔칫상을 뜻한다.
여말 우리 민족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숱한 압박과 시련을 겪었다. 우리 처녀를 원나라에 바치는 이른바 공녀제로 혼인 적령기에 이른 젊은이들은 혼인조차 할 수 없는 뼈아픈 민족의 수난기였다. 이 때 이곡 선생이 공녀제의 부당함을 원나라 왕 순제에게 호소하여 공녀제가 철폐되었다. 이로서 우리 젊은이들은 혼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잔칫상을 이곡 선생께 올리고 혼례식을 치렀다.
우리 민족의 뼈 아픈 과거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제 25대 충렬왕(1274~1308) 부터 제 30대 충정왕에 이르기까지 어려웠던 시련기였다. 이 시기에 고려는 자주성을 상실하였고 관제 개칭내지 격하로 국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심지어 원나라에 아첨하는 간신들과 환관(내시)의 농간에 고려는 왕까지 귀양 가기도 하였다.
류청신 같은 이들은 원의 폭압을 받느니 원에 흡수되자며 원나라에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일개 성으로 들어가자고 하였으나, 왕관, 이제현, 이곡 선생의 반대로 무산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토상의 손실은 탐라총관부(제주도), 동녕부(자비령 이북), 쌍성총관부 (철령 이북)는 아예 원의 통치권에 속하게 되었고 그 외에도 기현전 사패전 둔전 등 많은 농경지가 원나라에게 탈취 당했으며 농우 농기 종자 군대 운영비마저 고려에 부담시켰다.
원나라가 일본을 처 들어간다는 명분으로 세운 정동행성은 고려를 착취하는 총본산이 되었다. 일본 원정 때는 고려 사람으로 정벌군을 편성하고 함선 군량 병기 선원 집기 기계 등도 물론 고려에서 부담하게 하였다.
고려 여인들은 몽고와의 전쟁 중인 1231 ~ 1257년까지 26년 동안 무수히 끌려 갔고, 전쟁이 끝나고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 고려 충렬왕(1275)에서 공민왕4년(1355) 간 80년 동안, 50차례나 원나라에 2,000여 명에 이르는 처녀가 공녀로 끌려 가 노리개 감이나 노비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데려간 이들까지 합하면 수 없이 많다. 공녀로 끌려간 기자오의 딸은 원나라 황제의 황후가 되기도 하였으나, 왕실의 궁녀로 조달되기도 하고, 관인의 첩이나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한 사람이 더 많았다.
원나라는 고려로 하여금 1년에 2차례 금혼령을 내려 40 ~ 50명씩 소녀들을 붙잡아 굴비 묶듯 엮어 끌고 갔다.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회피하면, 이웃 마을까지 화가 미쳐 지위를 막론하고 끌려가야 했다.
공녀제 폐지 상소문 代言官請罷取童女書
이에 대학자이며 우리민족의 큰 스승인 이곡 선생은, 1335년(충숙왕4)에 공녀제 폐지를 요청하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상소문인 대언관 청파취동녀서를 원나라 순제에게 올렸다.
“여자들을 모아 들여 공녀를 선발하는데, 예쁜 여자도 있고 미운 여자도 있습니다.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욕심이 채워지면, 미인이라도 놓아주고 다른 데서 구합니다. 이러다 보니, 한 여자를 얻으려면 수 십 집을 뒤져야 합니다. 오직 사신의 말만 통할뿐 누구도 어기지 못합니다. 황제의 명으로 왔다고 하기 때문 입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들이 곡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끝나지 않습니다. 혹은 여식을 가두기도 하고, 이웃 마을에 숨겨 놓기도 합니다. 그럼 그 친족들을 묶어 놓고 매질하여 주리를 트는 꼴이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공녀로 뽑혀 떠나는 날이면, 옷자락을 부여 잡아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 거나,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자도 있고, 대들보에 목을 매기도 합니다.”
이런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왕은 공녀제 폐지를 약속하였다. 그 후에도 민족의 아픔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권력과 황금에 눈이 어둔 간신들이 음으로 원에 공녀와 노비를 바치고 권세와 부를 얻어내며 민족을 괴롭혔다. 그러다가 1356년 (공민왕5)에 이르러 공녀제가 완전히 사라졌다.
고려 당시, 딸이 태어나면 공녀를 피하기 위해 남장시켜 키우거나 승려가 되게 하였으며 일찍 혼인시키는 민며느리제가 성행하였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처녀보고 가시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당시 어린 딸을 남장시켜 키워 성장하여 처녀가 되면 가짜 사내 즉 가사내로 부르다가 가시내가 되었다.
가정 이곡 선생은 고려와 원나라, 성리학의 종장으로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도 그의 명성과 외교능력을 발휘하여 이렇듯 애절한 상소문이 받아들여졌고, 고려는 물론 원나라에 까지 추앙 받는 인류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이곡 선생에 의해 고려의 입지가 격상되어 원나라도 더 이상 고려에 대한 지나친 내정간섭의 명분을 잃게 되었다.
가정 이곡 선생은 충정왕 3년(1351)에 54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지만 그 위대한 뜻은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밑거름이 되었고, 그 흐름이 결국 공민왕으로 하여금 반원 개혁정치에 암시적 영향을 주었다. 공민왕은 100여 년간 빼앗긴 영토회복은 물론 권세가를 축출하고 관제를 복구하며 몽고풍을 폐지하는 등 개혁정치를 이루다가 비운 속에 서거하였다. 그러나 이제현 이곡 선생의 자주성 회복 노력은 고려말 사대부의 출현을 가져왔고 이들에게 그 뜻이 이어지게 되었다.
곡자상의 우여 곡절
가정선생이 원나라에서 임무를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이르자 부녀자를 비롯한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환영했는데 그 인파가 송도까지 이어졌다고 하며, 그 후로 민간에서는, 이곡 선생의 덕분으로 처녀들이 공녀로 끌려가지 않고, 무사히 혼인하게 된 은혜에 보답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혼인할 때 초례를 치르기 전에 초례청에 곡자상을 마련하여 보은에 보답하였다. 그럼에도 가슴 아픈 일은 공녀제도가 폐지되었는데도, 고려를 뒤 엎은 삼봉 무리들이 조선을 세우며 명나라에 환심을 사기 위해 자진하여 공녀를 받쳤다. 이로서 이곡 선생에 의한 공녀제 폐지는 빛을 잃게 되었다.
조선 전기 태조에서 세종까지, 7차례에 114명, 후기에도 2차례27명이, 공녀로 끌려 갔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실록에는 세종 때에도 명에 우리 처녀를 바치는데, 한 교자에 7명씩 태워 20리 길이 이어졌다고 기록되었다.
곡자상 풍속은 고려 말부터 조선말까지 근근이 이어져 오다가 또다시 우리민족의 뼈아픈 시련시기였던 일제 강점기에 우리 처녀를 전쟁터로 끌고가 성 노리개로 삼는 정신대 모집에 곡자상이 큰 걸림돌이 되자 일제의 간계로 이를 미신이라 일반인에게 주지시켜 곡자상에 대한 참 뜻을 모르고 우리 민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곡자상 재현의 현대적 의의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곡자상은 이곡 선생에게 올리는 보은의 잔칫상에서 시작되었다.
다시는 과거와 같은 민족의 아픔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겠지만, 과거의 시련을 잊어서도 안 되겠다. 곡자상의 재현은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선조와 선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얼을 이어가는 교훈으로 삼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혼인 이민자의 증가로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어, 과거 우리 민족이 타국에서 겪었던 아픔을 되돌아 보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다문화 가정이 안정적으로 우리사회에 정착하여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이 되도록 격려의 마음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가정 이곡선생 (1298 ~ 1351)의 약력
자 중보(中夫) 호 가정 가정, 초명 예백.
부 자성, 모 흥해이씨 춘년의 따님. 처부 김택 영해의 큰 현인.
자녀 1남 4녀, 아들 목은 색, 사위 반남인 박상충, 영해인 박보생, 나주인 라계종, 경주인 정인량.
1317년 (충숙왕 4) 고려 거자과 급제.
1320년 (충숙왕7) 수재과 (지공거 이재현) 제2명에 합격.
1326년 (충숙왕 13 가을) 정동행성향시 합격.
1327년 원나라, 회시에 낙방, 30세에 처음 원나라 수도에 감.
‘옛날 내가 낙제하고 황성을 나갈 때 생각하면, 시와 술에 흠뻑 취했던 흥은 지금도 새로워라’ 라고 술회.
1332년 (충숙왕 복1) 정동행성향시 1등합격.
133년 원나라 전시 제2감 합격.
이 때 ‘답안을 본 시험관의 추천으로 한림국사원검열관이 됨.
36세부터 원나라 수도에서 생활 시작. 고려에서 동년(과거시험 합격동기)들은 고려에서 벼슬하였으나 가정은 그 후 10여 년 꾸준히 학문 연마에 매진.
처음 고려를 찾은 것은 제과에 급제한 다음 해인 1334년 (충숙왕 복3) 고려의 학교를 면려하라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사신 신분으로 귀국.
1337년 (충숙왕 복 6) 40세에 정동행성서성좌우사원외랑에 제수되고 고려로 돌아 숭문관제주 예문관제학 지제교 (藝文館提學 知制敎)의 벼슬을 내려 고려 최고 유학자임을 인정.
1341년 (충혜왕 복2) 고려에서 4년 지내다 원나라 순제가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는 정동행성의 표문을 가지고 원나라 수도로가 6년간 체류.
1346년 (충목광 2) 49세에 황제의 책력을 받들고 고려에 돌아 와 밀직부사(密直副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진현관대제학( 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의 재상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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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년 (충목왕 3 겨울) 20살된 아들 목은 색과 함께 원나라 수도로 감.
아들 목은 18세 때, ‘남아는 제왕의 도읍에서 벼슬을 해야 하는 법. 몸을 빛 내려 한다면 노력 뿐인 거야. 명심하라!’는 전갈을 보냄.
1348년 (충목왕4) 51세에 아들을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시키고 바로 고려로 돌아 와,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光政大夫 都僉議 贊成事 右文館大提學 春秋館事 上護郡; 정2품) 벼슬에 오르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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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음.
1351년 (충정왕3) 정월 초하루 54세로 타계.
공께선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의 대종으로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선생과 함께 더불어 麗末 성리학 정착에 공헌한 바 크다. 백이정(白以正), 우탁(禹倬), 아들인 목은 이색과 함께 경학(敬學)의 대가.
가정 이곡 선생에 대한 연구 발췌
서울대 명예교수 韓永愚의 연구 <稼亭 李穀의 生涯와 思想>에서
"36세에서 시작된 李穀의 관료생활은 고려와 원을 무대로 하여 펼쳐졌는데, 開京생활보다는 燕京생활이 더 길었다. 그는 원나라 관료로서도 봉사했지만, 그보다는 在元官僚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고려의 자주성과 이익을 元朝廷에 반영시키는 調停者의 기능, 고려의 내정을 革新하려는 改革主義者로서의 역할을 더 많이 수행했다."
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高惠玲의 연구 <14世紀 高麗 士大夫의 性理學 受容과 稼亭 李穀>에서
"그는 제과에 급제한 다음해에 元 皇帝의 興學紹의 내용를 받들고 귀국하여 고려 문사들로부터 크게 환영 받았다. 李穀은 문필로 麗元關係에서의 중요한 현안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이 때 李穀의 입장은 兩國間의 사신 내지는 仲裁者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양국의 관직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실제로 元 지배하의 고려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부당한 徵發이나 압력을 극소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컨대 그는 元의 貢女 징발에 대하여 <代言官請罷取童女書>를 올려 高麗人의 혈육의 정을 끊는 아픔을 호소하였다. 이 글은 順帝에게 가납되어 곧 이를 정지시키게 하였고 또 몽고 이외의 민족에게 軍機를 금지시켰으나,고려인에게는 이를 허락해 준 것에 대한 사표를 올리기도 하였다.
征東行省 理問으로 온, 揭以忠이 元의 법제가 고려에서 제대로 통용되지 않음을 문책하자, 고려는 본래부터 중국과 풍속이나 언어가 달라서 독립된 체재가 유지되어 왔으며 世祖도 고려에 대하여서는 ‘不改土風’하라는 유시가 있었음을 인용하여 그 당연함을 주장하였다. 이글에서 보이는 李穀의 입장은 元의 官人으로서가 아닌 고려인으로서의 자주의식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전 성균대학교 李炳赫의 연구 <麗末鮮初의 官人文學과 處士文學>에서
"이곡의 글에서도 주체의식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그가 원나라에 벼슬하고 있을 때의 <代言官請罷取童女書>에 보면, 원나라에서 고려의 처녀를 구해가는 것을 파해달라고 하고 있다. 사방의 변방들은 풍속이 각각 달라 굳이 중국과 같이 하려면 情이 순조롭지 않다고 하고, 고려는 본래 해외에서 따로 한 나라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 세상에 君臣과 民社가 있는 곳은 三韓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고려의 민족적인 또는 국가적인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원나라에서 고려의 처녀를 구해가는 것을 저지시켰던 것이다. 또 揭以忠이 四海가 한집안처럼 된 이때, 어찌해서 중국의 법이 고려에서는 행해지지 않는가고 묻자 이곡은, 고려는 옛 三韓의 땅으로 풍기와 언어가 중국과 같지 않으며 衣冠 典禮가 스스로 하나의 법이 되어 있어 秦漢이래로 신하로 삼지 못했다고 하여 고려의 전통성을 내세운다. 그리고 <扶餘懷古>라는 시에서도 黃河가 맑으면 성인이 난다는 중국의 고사에 따라 우리 동방에서도 溫祚王이 東明王家에서 났다는 온조왕의 탄생실화를 시화했다. 산문에서도 부여 여행기인 <舟行歌>, 관동지방 여행기인 <東遊記> 등에서 민족사의 자취를 하나하나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載道의 문학관으로 고려의 文風이 부진한 것은 功利를 急務로 삼고 敎化를 餘事로 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여말 관인문학자들은 留元文人인 이제현이나 이곡처럼 經國의 문장으로 나라를 빛내고 주체성을 살리는 것이 기본정신이었던 것 같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가정집.
동문선.
왕조실록, 태조 정조 태종 세종 편.
고려사렬전(북한간행).
조선문화사(북한간행).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청구 논문.
서울대학교, 한국사학.
기타논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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