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함대가 일본 수군(水軍)을 압도한 까닭
일본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조총(下)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철포(鐵砲)는 일본 열도에선 100여 년간 지속된 전국(戰國)시대를 마감시킨 촉매제가 되었다. 또한 한반도는 철포의 위력을 과신한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도발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조(朝)·명(明)·왜(倭)의 3國이 7년에 걸쳐 피투성이의 소모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 만주(滿洲)에서 흥기한 여진족(女眞族)은 중국 대륙의 정복왕조(征服王朝: 淸)로 떠올랐다.
조(朝)·명(明)·왜(倭)의 3國이 7년에 걸쳐 피투성이의 소모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 만주(滿洲)에서 흥기한 여진족(女眞族)은 중국 대륙의 정복왕조(征服王朝: 淸)로 떠올랐다.
글 | 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평양성으로 진군하는 명나라 군대. |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지혜
철포가 다네가시마에 전래될 무렵, 일본은 각지에 군웅이 할거한 전국(戰國)시대였다. 다네가시마의 도주(島主) 토키타카는 철포 제작기술이나 화약 조합법(調合法)을 독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포르투갈人에게 입수한 철포를 규슈의 최강 사쓰마의 시마즈 다카히사에게 헌납했다. 이것이 난세에서 살아남는 小영주의 지혜였다.
사쓰마의 다카히사는 바로 이 철포를 인근의 加治木城 공격 때 사용, 그 우수성을 입증했다. 雄藩(웅번) 시마즈氏의 객신(客臣)으로서의 다네가시마氏가 명치유신(明治維新) 때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토키타카의 선견력·정치력의 교묘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544년,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포르투갈 철포 2정 중 1정은 당시 승병(僧兵)의 지휘자로 이름을 떨치던 기슈 네고로사(紀州 根來寺)의 스노기노보(衫坊)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네고로도 철포의 명산지가 되었다. 1545년, 다네가시마에 체류하고 있던 사카이의 상인 다치바나야(橘屋又三郞)도 철포의 구조와 제조법 등을 습득한 후 사카이로 돌아왔다. 원래 사카이에는 주물사(鑄物師)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카이는 철포의 양산체제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오미(近江)의 구니토모(國友)촌에도 제조기술이 전해져 철포 명산지가 되었다. 이렇게 사카이, 네고로, 구니모토의 3大 철포 생산지가 형성된 것은 포르투갈 사람이 다네가시마에 표착한 지 겨우 2~3년 사이의 일이었다.
철포는 차츰 일본 전국으로 유포된다. 그러나 아직은 활의 효용성에 미치지는 못했다.
노부나가의 新전술-연속파상사격
철포의 전략전술적 가치에 눈뜬 일본 최초의 인물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다. 노부나가는 나가시노(長) 싸움에서 철포대의 운영으로 일본 최강이었던 다케다(武田)씨의 기마부대를 격파했다. 철포의 압도적 위력이 발휘된 결전이었다. 나가시노 싸움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1575년 5월21일,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연합군은 미카와(三河)의 나가시노에서 다케다 가쓰요리의 기마부대와 격돌했다. 전투가 벌어진 나가시노는 미카와 동쪽의 이마가와(今川)·다케다(武田)·오다(織田)·도쿠가와(德川)씨가 인접한 지역이었다.
나가시노城은 원래 이마가와氏 소유였는데,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戰死 후 이에야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1572년 「戰國 제1의 武將」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공격을 받고 다케다氏가 소유하게 되었다. 신겐은 계속 공격하여 이에야스를 궁지로 몰아넣었는데, 불운하게도 이에야스軍의 소총수에게 저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고 본거지 고슈(甲州)로 회군 중 사망했다.
신겐의 사망 후인 1573년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勝賴)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서쪽 영지의 확대를 위한 공세를 벌였다. 1575년, 가쓰요리는 1만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이에야스의 소유가 된 나가시노城을 공격했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청, 3만8000명의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노부나가 軍은 마방책(馬防冊)으로 진지를 굳힌 나가시노 들판으로 가쓰요리의 기마대를 유인했다. 이때 노부나가는 3000정의 조총으로 무장된 철포대를 3개조로 운용, 연속파상사격으로 가쓰요리의 기마대를 궤멸시켰다.
新무기 철포의 출현으로 이제까지의 전투방식이 일변했다. 교전 양측의 무사가 하나씩 말을 타고 나서 창과 칼로 맞겨루던 싸움은 이제 구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싸우는 일이 없어졌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서로 죽이게 되었다. 이후 전국무장(戰國武將)들은 철포의 조달에 혈안이 되었다.
일본어에서 앞뒤 생각 없이 무턱대고 저지르는 경솔함 또는 무모함을 나타내는 낱말은 無鐵砲(무데뽀)이다. 결국, 鐵砲 없이 전투하는 것은 경솔하거나 무모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다네가시마로부터 철포 제조방식을 전수해 양산체제로 들어간 지역은 사카이(堺)·쿠니토모(國友) 등 근기(近畿)지역이었다. 사카이와 쿠니토모를 장악한 노부나가가 新무기 확보에 유리했음은 물론이다.
아시카가 幕府의 마지막 쇼군(將軍)도 추방해 버린 노부나가는 전국통일의 문턱에 섰다. 그런 절정기의 노부나가도 1982년 6월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하루밤을 묵다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을 받아 토멸되었다. 이를 「혼노지의 變」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은 하극상의 시대였다.
「혼노지의 變」 발생 10여 일 후 노부나가의 副將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야마사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 軍을 격파하고 최강자로 부상했다. 히데요시는 1585년 關白, 1586년 太政大臣에 임명되고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臣)란 성을 받았다.
그는 1587년 규슈, 1590년 關東·東北지역을 평정해서 전국통일을 달성했다. 일본 전국통일을 이룩하는 오다하라(小田原) 전투 직전에 히데요시는 이미 총병력 30만 명에 鐵砲 수만 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후 논공행상(論功行賞)으로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당했거나 그 일부를 빼앗긴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또한 恩賞을 받은 다이묘(大名)와 호족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충성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히데요시의 구상이었다. 그 위에 히데요시는 朝鮮·中國·印度를 아우르는 일종의 大아시아제국 건설을 꿈꾸는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었다.
임진왜란 처전(初戰)의 승패 결정한 조총(鳥銃)
1592년 4월13일 저녁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 1만8000명이 800척의 배에 분승, 부산포에 상륙했다.
4월14일, 고니시軍은 부산진성을 공격, 3시간 만에 함락시켰다. 조선군이 쏜 화살은 맞아도 즉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일본군이 쏜 철포, 즉 鳥銃(조총)을 맞으면 그대로 즉사했다. 처음 보는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의 사기는 여지없이 떨어졌다. 4월15일, 동래성(東萊城)은 공격개시 후 2시간 남짓 만에 함락되었다.
히데요시는 히젠(肥前: 규슈 西岸)의 나고야(名護屋)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고니시의 제1군에 이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제4군 등을 차례로 출정시켰다. 마지막 부대인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제8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날은 5월3일. 8개 軍의 총병력은 15만8000명이었다.
고니시의 제1군은 이후에도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北上했다. 尙州에서 순변사 이일(李鎰)의 부대를 일축한 고니시軍은 이틀 후인 4월27일 천험의 요새 鳥嶺(조령: 새재)를 넘어 都순변사 申砬(신립)이 거느린 3000명과 충주의 탄금대(彈琴臺) 앞 벌판에서 맞붙었다. 다음은 「징비록(懲毖錄)」의 관련 기록이다.
< 신립의 군사들은 충주 서쪽 탄금대 앞, 두 강물 사이에 진을 쳤다. 강물 좌우에는 논이 있어 벼가 무성하게 자라고, 또 길길이 잡초가 우거져 사람과 말이 내달리기에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얼마 있다가 왜병이 단월역으로부터 쳐들어왔다. 길을 나누어 진격해 오는데, 그 기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적의 한 무리는 산을 넘어 동쪽으로 몰려오고, 또 한 무리는 강을 끼고 달려왔다. 먼지는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총소리는 땅을 울렸다>
신립은 탄금대 앞에서 기마부대를 거느리고 背水陣(배수진)을 쳤다. 그는 고니시의 보병부대를 기마부대로 짓밟을 작정이었다.
< 신립은 말을 몰아 적진으로 쳐들어가려고 두 번씩이나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쳐들어갈 수 없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그는 말머리를 돌려 강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충주의 패보(敗報)가 서울에 전해진 것은 4월28일 저녁. 4월30일 새벽, 宣祖 임금은 피란길에 올랐다. 5월3일, 고니시軍은 서울에 입성했다. 일본軍은 破竹之勢로 북상했고, 그것을 뒷받침한 것은 철포대(鐵砲隊)였다. 種子島에 철포가 들어온 지 50년. 이때 이미 일본은 鐵砲를 양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기병과 보병(足輕·아시가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철포대를 주력으로 한 사격과 기동의 전법(戰法)은 전국시대를 통해 이미 단련되어 있었다.
朝鮮 정부도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鐵砲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590년 3월, 대마도의 島主 소 요시토모(宗義智)가 사신으로 와서 선조(宣祖)에게 공작 두 마리와 조총 등을 진상했다. 시사(試射)를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발사음이 크고 탄환이 200m쯤 날아갔지만, 50m의 지근거리가 아니면 치명상을 가하지 못한다. 더욱이 비 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으면 화약의 조합(調合)이 어렵고, 발사까지에 시간이 너무 소요된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조선의 활은 200m 상거한 적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으며 20~30발의 화살을 계속 날릴 수 있다.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에 따르면 요시토모가 宣祖에게 진상한 철포는 그 후 군기사(軍器司) 창고에 처박혀 버렸다. 일본의 철포는 전래 50년 만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병기로 발전해 있었다. 이 철포가 「조총(鳥銃)」이라고 불린 것은 날아다니는 새도 명중시킬 수 있다고 하여 명명된 별칭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에야 조선 정부도 훈련도감을 설치, 날쌘 병졸 수천 명을 뽑아 조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이순신의 함대가 일본 수군(水軍)을 압도한 까닭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인 1592년, 朝鮮 육군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했으나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이끄는 조선 水軍은 일본 水軍에게 옥포해전(5월2일)에서부터 부산포해전(9월1일)에 이르기까지 10戰10勝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군의 개인 화기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것은 물론 조총이었다. 일본 水軍이 언제부터 조총을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578년의 이시야마(石山) 전투 때부터 해전에서도 조총 사용이 본격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2차 이시야마 전투 때 오다 노부나가 휘하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의 水軍이 사용했다는 大鐵砲(대철포: 대형 조총)는 주목되는 병기이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 水軍의 大鐵砲도 조선 水軍이 보유한 銃筒(총통: 대포)의 위력이나 사정거리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해전(海戰)에서는 육지에서와는 달리 조총의 명중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선 水軍의 승리에는 물론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전술에 힘입은 바 크지만, 병기와 군선(軍船)의 우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임란(壬亂) 시기에 조선의 판옥선에 맞선 일본의 軍船은 세키부네(關船)와 아타케(安宅船)였다. 그러나 판옥선은 강도면(强度面)에서 일본의 군선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뱃전이 높아 일본 수군이 장기(長技)로 삼아온 등선육박전(登船肉薄戰)을 어렵게 했다.
병참선 유지 못해 후퇴하는 왜군(倭軍)
조선 水軍이 임진년(1592) 해전에서 거둔 全勝은 전체 전쟁국면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이 분쇄됨으로써 西海연안 항로를 통한 병참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또한 육로(陸路)에 의한 병참선 유지도 전국 곳곳에서 봉기한 義兵의 활약으로 왜군에겐 지난(至難)한 일이 되었다.
1593년 1월7일,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明軍) 4만, 조선군 1만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의 고니시軍은 보급선이 막혀 굶주리고 있었다. 원래 히데요시는 육군이 북상하는 속도에 맞춰 보급선(補給船)도 서해를 통해 우회시켜 군량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때의 전투 모습을 「징비록」은 『明나라 군사는 대포와 불화살로 공격하는데, 대포 소리는 땅을 울리고 몇십 리 안에 있는 산악이 모두 흔들리는 듯 요란하였다』고 표현했다. 明軍의 대포가 倭軍의 조총을 압도한 전투였다.
그날 밤 고시니의 부대는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러나 후퇴의 강행으로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부르터서 제대로 걸음을 옮기는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니시軍은 황해도 방면에 포진해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대의 구원을 받아 겨우 서울로 후퇴했다.
李如松의 明軍은 평양성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서울로 남진하여 왜군의 주력부대를 격멸할 작전을 세웠다. 이후에 전개되는 벽제관 싸움은 그 후 東아시아史의 진전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전투이다.
서울에 집결한 왜장들은 숙의 끝에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을 선봉으로 삼아 총력의 반격을 시도했다. 고바야가와 軍은 여석현(礪石峴)에 진을 쳤다.
왜군의 조총 공격에 혼이 난 이여송
1월27일 오전 7시경 礪石峴에서 쌍방의 선봉대가 조우, 전단이 열렸다. 明의 선봉장 査大受는 왜군 선봉대의 조총 공격을 받고 벽제역까지 후퇴했다. 이 소식을 들은 李如松은 기마부대를 이끌고 혜음봉(惠陰嶺)을 넘어 벽제관으로 급행, 망객현(望客峴)으로 진격했다. 여기서 明·倭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왜군은 왜군의 대부대는 3隊로 나뉘어 明軍을 공격했다. 砲軍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기병만으로 싸우던 이여송 軍은 결국 왜군에 포위되어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대패했다. 뒤늦게 도착한 부총병 양원(楊元)이 거느린 火軍의 도움을 받아 이여송 軍은 사지(死地)에서 벗어나 파주-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후퇴했다.
이여송은 평양에서의 승전에 고무되어 왜군을 얕잡아 보고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 진격하다가 왜군의 조총 전술에 결정타를 얻어맞았다. 이 싸움에서 이여송은 이비어(李備禦)·마천총(馬千摠) 등 직속 맹장과 요동병을 다수 잃었다. 이후 李如松은 倭軍과의 전투를 회피, 倭軍의 주력부대를 섬멸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싸움에 동원된 明軍 병력은 4만3000명이었고, 倭軍의 병력은 7만1000명이었다.
패전 직후 李如松은 대성통곡을 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여송이 거느린 明軍은 요동병과 절강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것은 대포를 능숙하게 구사한 절강병이었다. 이여송으로서는 절강병보다 자기의 직속부대인 요동병의 전공(戰功)이 더욱 바람직했다. 그런데 백제관 싸움에서 직속부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요동병의 핵심은 李如松과 의제적(擬制的) 혈연관계를 맺은 家兵들이었다. 많은 家兵의 戰死는 요동병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여송은 1597년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吐蕃(토번: 티베트)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는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흥기하고 있었다. 李如松의 요동병은 여진족의 대두를 막는 明나라의 최전선 부대였다. 여기서 李如松의 家系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진족의 흥기(興起)
李如松의 조부는 평안도 강계(江界) 출신으로 요동으로 이주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이성량(李成梁)은 요동의 좌도독(左都督)으로 출세했던 인물이다. 만주 全域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李成梁은 나중에 淸 태조로 추존되는 建州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에 대해 견제와 협력의 관계를 유지했다.
누르하치는 李成梁에게 공물을 바치는 한편, 가만히 여진족을 결속시켜 세력을 키워 갔다. 누르하치가 견제를 받아야 할 시점에 공교롭게도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감행되어 明國으로선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한반도에서 東아시아 3國이 총력전을 벌이고 있는 정황에서 누르하치는 조선 정부에 원군을 파견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그만큼 강성해졌음을 나타낸 일이었다. 누르하치의 제안은 조선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백제관 전투 이후 李如松은 평양에 주둔하면서 심유경(沈惟敬)을 倭軍 진영에 파견, 화의를 교섭했다. 왜군은 조선 水軍의 활약으로 본국과의 병참선이 위협받고 의병들의 유격전에 시달린데다가 惡疫(악역)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했다.
그러나 明國과 倭國의 화의교섭은 히데요시의 무리한 화의조건(조선 8道 중 4道의 할양 등)에 의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1597년 1월 倭軍의 재침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이때 이순신은 왜군의 반간지계(反間之計)에 넘어간 宣祖의 미움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元均)은 동년 7월15일 왜적의 유인에 빠져 칠천양 해전에서 대패했다.
倭軍은 동년 8월16일 남원을 함락시키고 공주·직산까지 점령하였으나 9월7일 직산 북방 소사평에서 朝·明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9월15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李舜臣이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을 명량해전에서 격파했다. 倭軍은 남해안 일대로 후퇴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했다.
1598년 7월, 조·명軍은 4路軍을 나뉘어 총공격을 개시했다. 麻貴(마귀)는 울산의 가토를, 董一元(동일원)은 사천의 시마즈를, 劉綎(유정)은 순천의 고니시를, 李舜臣과 진린은 倭의 수군을 공격했다.
이 총공격에서 특히 董一元의 中路軍은 사쓰마의 藩主(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궤멸적 타격을 당했다. 시마즈 휘하에서는 種子島의 16대 島主 히시토키(久時)가 복무했다.
1598년 8월18일 침략의 원흉 히데요시가 병사(病死)했다. 倭軍은 히데요시의 사망에 따라 철군을 시작했지만, 순천의 고니시 軍만은 李舜臣에게 퇴로를 봉쇄당했다. 고니시는 사천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와 창선도에 주둔해 있던 요시토모(宗義智: 고니시의 사위)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요시토모의 왜군 함대 500척은 고니시를 구출하기 위해 西進했고, 이순신·진린의 연합함대는 이를 영격(迎擊)하기 위해 동진(東進)했다. 여기서 7년 전쟁의 최후 결전인 노량해전이 벌어졌다. 이 결전에서 이순신은 200여 척의 적선을 격침시켰으나 불행히도 敵 조총의 유탄을 맞아 전사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고니시는 탈출에 성공했다.
東아시아 3國의 운명
前後 7년간에 걸친 왜란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대변혁을 가져왔다. 조선 8道가 거의 전장화하여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중국대륙에서는 임진왜란의 휴유증으로 明國이 멸망하고 그 틈을 타 창업한 여진족(만주족)의 淸國이 새로운 정복왕조로 군림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의 死後에 도요토미 정권이 패망했다. 1600년 7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東軍 10만 명과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를 받드는 西軍 8만 명이 세키가하라에서 격돌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당초 西軍에 가담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秋秀)가 갑자기 배신하여 西軍을 공격는 바람에 東軍이 압승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왜장들도 세키가하라 전투에 의해 그 운명이 엇갈렸다. 東軍에 가담했던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다이묘(大名)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西軍을 지휘했던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전 후 도주했으나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역시 西軍에 가담했던 우키다 히데이에는 약 50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病死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히데요리의 편에 섰던 모리 테루모토는 83만5000석 大名에서 37만 석 다이묘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西軍에 참전했으나 예외적으로 감봉처분을 받지 않고 石高 60만 석 大名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것은 사쓰마에 온존되어 있는 시마즈家의 전투능력을 이에야스로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승리로 정권 장악에 성공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에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에게 염려스러웠던 일은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정권 만회를 노리는 오사카 세력이었다. 이에야스는 2차에 걸친 싸움을 벌여 1615년 마침내 오사카城을 함락시켰다. 오사카城이 불타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애첩 요도기미(淀君)와 히데요리가 자결함으로써 도요토미家는 멸망했다.
필자는 12월22일 오전 8시, 쾌속선 「토피」에 승선, 다네가시마의 관문인 니시노오모테港을 출항했다. 「토피」는 오전 10시40분 가고시마港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우연히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철포(鐵砲)는 바로 이 항로를 따라 일본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다네가시마-가고시마 항로가 철포의 북상로(北上路)였던 만큼 필자에게는 결코 그것이 단순한 바닷길이 될 수 없었다. 철포가 東아시아 3國의 명운(命運)을 바꿔 놓지 않았던가.●
등록일 : 2014-09-20 10:07 | 수정일 : 2014-09-2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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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자유기고가, 전 월간조선 편집위원
1945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 중문학과 졸업 후 입대해 1970년 육군 중위로 예편했다.1971년 <국제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1983년 월간 <마당> 편집장, 1984년 <경향신문>차장을 거쳤다.
1987년 <월간중앙>으로 옮겨 부장, 부국장 주간(主幹) 및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 <월간조선>>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부터는 프리랜서로 집필 활동 중이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에 김옥균, 최명길, 정도전, 박지원, 정조, 의상, 왕건, 정약용, 유성룡, 이순신 등 역사인물 연구를 연재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신격호의 비밀(지구촌, 1988)>, <김유신-시대와 영웅(까치, 1999)>,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김영사, 2007)>, <송의 눈물(조갑제닷컴, 2012)> 등이 있다.
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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